CCTV에서, 지환이 이서를 불러내면서 마침 박예솔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았다. 정상 속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느린 속도에서는 모든 동작이 확대되어 보였다.그리고 이서가 박예솔을 스쳐 지나갈 때, 신속하게 박예솔의 가방에 손을 넣어 물건을 슬쩍 한 게 보였다.이서가 정신 집중하여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이제야 이서는 박예솔이 왜 이렇게 침착한지 알게 되었다.그녀는 일찌감치 CCTV에 손을 댔다.이 여자는 계략적인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까다로운 연적이다.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예솔 씨, 아직 더 볼게 남았나요?”박예솔은 입술을 깨물고 이미연을 한 번 보았다. 이미연도 실눈을 뜨고 CCTV를 보고 있었지만, 아직 이 CCTV 속에 숨겨진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더 느린 속도로 CCTV를 재생했다.“아직요, 다시 한번 볼게요.”이서가 빙그레 웃었다.이때 이미연이 마침내 CCTV의 ‘비밀’을 발견하고 CCTV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잠깐만……. 솔아, 잠깐 멈춰봐, 맞아, 다시 뒤로 돌려 감아…….”박예솔은 무덤덤한 표정 아래, 심장은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그래스서 바를 당겨 이서가 손을 가방에 넣는 순간에 정확하게 정지했다.이번에는 지환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머금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살짝 웃으며,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한가로이 박예솔의 연기를 보고 있었다.이미연은 화면을 가리키며 난리를 쳤다.“여기 봐봐! 정말 훔쳤어! 이번에는 증거가 확실하네, 경수 씨, 지환아, 뭔 얘기라도 해봐, 솔이 인생, 모두 쟤 때문에 망했어.”하경수도 보고 믿기지 않았다. 그는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부드러운 허릿살을 매만지며 말했다.“자기야, 하고 싶은 말 있어?”이서는 가볍게 웃었다.“마침 저도 CCTV 영상
이서의 말에, 하경수는 아니나 다를까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지었다.박예솔은 상황을 보고 허벅지의 살을 꽉 꼬집으며, 대범한 척 연기하는 이서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이 일은 일단락된 셈이다.CCTV 영상이 계속 재생되자, 곧 이서와 박예솔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다.이천은 동영상을 늦추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봤다.화면에는 이서가 박예솔의 가방에 손을 넣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았다.이미연은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CCTV에 손댔지?”이서는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렸다.“아주머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이 영상은 제가 식사하던 그날 저녁에 받은 거예요. 조작 같은 거 아니에요. 믿지 못하겠으면 전문기관에 의뢰해 보세요.”지환은 나른하게 이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어조에 약간의 장난기가 띠었다.“일이 이미 충분히 명확해졌다고 보는데…… 암튼 이서가 한 건 아니에요.”박예솔은 곧 무너질 것 같았다.그녀의 원래 계획대로 라면, CCTV를 재생하는 동시에 이서에게 도둑, 악랄한 의부증 환자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녕 지환이 이서를 용서한다고 해도 하경수가 나서서 절대 이 혼사를 결사반대하는 것, 이게 그녀의 전반적인 계획이었다.그러나 이서가 CCTV 영상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신속하게 평정심을 찾았다.“그래요, 보아하니 이 일은 정말 이서 씨가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도 아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고의로 사건을 일으켜 우리 두 집안의 갈라놓으려고 한 것 같아요.”말하면서 그녀는 이서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이서 씨, 미안해요.”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눈 깜짝 안 하고 박예솔을 바라보고 있었다.박예솔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일이 갑작스레 180도 반전이 일어나자, 이미연은 멋쩍게 혼자서 중얼거렸다.“네가 아니면 누구야?”“엄마.” 박예솔은 다급하게 이미연
이서가 다가와 한 손으로 박예솔의 팔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기려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만족하지…….”고개를 든 박예솔은 마침 보기 좋게 올라간 이서의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눈빛에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서의 목이라도 꺾어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일부러 그랬던 거였다!지환 앞에서 사리에 밝은 여자로 보이려면, 엄마 대신 사과해야 했다!이서는 박예솔의 눈동자 속에 비친 살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예솔 씨, 뭐 이렇게까지 그래요? 그냥 해본 말인데…….”정신이 번쩍 든 이미연은 이서를 밀치고는 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아이구, 고지식한 녀석아, 쟤한테 무슨 무릎을 꿇어……. 경수 씨…….”박예솔은 이서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봐 이미연을 끌고 황급히 떠났다.하경수는 두 사람이 허둥지둥 떠나는 뒷모습만 보고, 왜 예솔이가 무릎까지 꿇었는지에 대해 묻기도 귀찮았다.“이서야, 방금 억울했지?”이서는 고개를 돌려 시원시원하게 말했다.“아버님, 그런 말씀 마세요. 오해 풀렸으면 됐죠.”하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서를 높이 평가했다.“지환이가 이서 같은 아내를 만난 것도 저 녀석 복이다. 난 올라가서 좀 쉬겠다. 너희들도 숨 좀 돌리거라.”예솔 모녀가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난리 친 통에, 지금까지도 머리가 윙윙거리는 것이 좀 쉬어야 했다.하경수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지환의 품에 안겼다.“왜 이럴까! 뭐하는 거야?”지환은 이서의 귓불을 깨물며 따뜻한 호흡을 뽀얀 볼에 내뿜었다. 그러고는 얇은 입술로 이서의 귀에 대고 얘기했다. 이서의 볼은 빠르게 물들며,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튼튼한 가슴을 받쳤다.“아버님 위에서 쉬고 계세요!”“이 큰 집에서 뭔 걱정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다.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어루만졌다.“나 피곤해요.
컨셉 시안 유출 사건 이후, 박예솔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 이서는 지환과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귀국 날짜가 가까워지자, 이서는 선물 준비에 나섰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야, 나 곧 귀국할 거야. 너 무슨 선물 갖고 싶어?”오랜 절친인 이들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주었다.[최근 해외에서 ‘드래곤’이라는 핸드폰이 새로 개발했다고 들었는데, 게이머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폰이래. M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고 시장 동향 살핀 후 국내에서 출시 예정이라는데, 혹시 나 그거 구해줄 수 있어?]평소에 게임을 좋아하는 임하나는 게이머들을 위해 개발한 휴대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알았어. 잠깐만, 확인해 볼게.”검색해 보니, 해당 핸드폰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YS그룹에서 출시하는 핸드폰임을 확인한 이서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YS는 세계 최대 그룹으로, 하은철 삼촌이 설립한 상업제국이다.‘이 핸드폰, YS 작품이네!’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당겼다.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맥박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19일 저녁 8시 YS 산하 핸드폰 개발 부서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소규모로 진행한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이서는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렇게 중요한 발표회에, 삼촌이 꼭 참석하시겠지?’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냐, 별일 없어.” 이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구해 볼게!”이서는 전화를 끊고, 바로 YS 공식 홈페이지에서 핸드폰 개발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이서는 한숨을 쉬고 나서야 말했다.“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 볼 게요. 혹시 19일에 핸드폰 발표회 진행하나요?”[네, 맞습니다, 고객님.]“그때 회장님도 참석하실까요?”[네. 그렇습니다, 고객님.]“실례지만, 협력사
‘정말 순수하고 귀여운 녀석이군.’박예솔도 같은 컨셉으로 등장한 걸 감안하여 이서는 박예담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방에 들어온 박예담은 좀 어색해했다.“괜찮아요, 편하게 앉아요.”“집을 정말 아늑하고 예쁘게 꾸몄네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지환 형이 정말 결혼할 줄은…….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동생이잖아요.”이서는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그럴까……? 그럼 편하게 얘기할게. 지환 씨 독신주의자였어?”“아니요, 지환형은 학교 다닐 때부터 워커 홀릭이었어요. 일 말고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학교 다닐 때부터 일했다고?”박예담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어…… 그게 지환이 형…… 학교 다닐 때 조그맣게 사업을 했어요.”이른바 작은 사업이라는 게, 12살 때부터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해 1년내에 그 지역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회사로 성장시킨 것이었다. YS가 세계 최대의 그룹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환이 10대 시절부터 회사 발전을 위해 이미 포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이서는 지환의 일에 흥미를 느꼈다.“정말? 그럼 대학 전공이 마케팅이었어?”지환 얘기를 꺼내자, 박예담도 신이 났는지 서서히 긴장도 풀렸다.“아니요, 형은 의학 전공이에요.”이서는 깜짝 놀랐다. 지환이 의학 공부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그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죠. 친구한테 끌려 갔는데…… 아마 그때 처음으로 지환이 형이 공부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지환 형이 의학 공부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고, 친구가 ‘사기캐’였어요. 매번 시험에서 지환형과 0.1점 차이로 이겼거든요. 그것도 총점 격차가요.”“그래서?”“그래서 나중에, 형 친구가 참다 못해 지환형에게 퇴학을 권유했어요.”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왜? 0.1점 차이라며?”“네, 그런데 지환형
박예담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두 사람은 19일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박예담을 떠나보내고 이서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절친에게 줄 핸드폰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은철 삼촌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지환은 요 며칠 바쁜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이서는 지환의 행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를 100% 믿었다.문이 열리고, 지환의 늘씬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서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다가가 뒤에서 이서를 껴안았다.깜짝 놀란 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며 투정을 부렸다.“소리도 없어…… 깜짝 놀랐잖아요.”“뭐 맛있는 거 하는 거야?” 손을 뻗어 냄비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어묵 볶음이요.” 이서는 지환을 밀어냈다.“나가 계세요, 곧 다 됩니다.”지환은 문 앞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키스해 주면 나갈게.”이서는 어이없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오늘 예담이 왔었어요.”지환은 양복을 벗으며 물었다.“어, 무슨 일로 왔대?”“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말하는 사이에 이서는 이미 완성된 어묵 볶음을 내놓았다.“뭐라던데?” 지환이가 밥을 푸는 것을 도왔습니다.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천재 의사 친구 얘기했어요……. 어, 그나저나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그녀는 이제야 왜 지환이 짧은 기간에 이상언과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두 사람 모두 의학을 전공했으니, 틀림없이 공통된 관심사와 대화거리가 있을 것이다.눈동자가 굳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손가락으로 이서의 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또 뭐 얘기했어?”“암튼 당신이 학교 다닐 때의 일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아, 맞다…….”흥분한 이서는 자세를 바꾸어 앉아서 말을 이었다. 지환의 이상 반응을
발표회가 시작되면서, 회의장 내에서 핸드폰 사용 및 촬영 금지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핸드폰을 전원 끄고 나서야 박예담이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괜찮아?” 이서는 가방에서 진통제 한 알을 꺼냈다. “진통제라도 좀 먹을래?”박예담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요.”이때 ‘드래곤’ 출시를 전담한 총책임자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이서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제야 박예담은 비로소 숨돌릴 기회를 얻었다.‘예솔 누나가 지환 형한테 얘기했는지 모르겠네.’그는 불안해서 자기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기조 연설까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같은 시각, 백그라운드.이천이 들어왔다.“회장님이 곧 도착하신다. 비밀 유지 작업에 특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나?”무대 뒤에서 모두 직원들이 일동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천의 오랜 부하들로, 그들의 업무능력에 대해 이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려 두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 맞다, 오늘 행사 참석자 명단 보여줘.”참석자 등록을 맡은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며 이천에게 명단을 건넸다.이천은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왜 글씨체가 똑같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직원은 창백한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방금 제가 실수로 명단에 물을 쏟아서…… 다시 한 부 베껴 썼습니다.”이천은 힐끗 훑어보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주의만 주며 참석자 명단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지환에게 갔다.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천이 뒷문을 나섰다. 뒷문 밖에 검은색 차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전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차 안을 향해 말했다.“회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15분 후에 나가시면 됩니다.”차창이 내려가며 지환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
이서가 문을 두드리자, 무대 뒤에서 바삐 움직이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에게 떨어졌다.그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실례지만, YS그룹 회장님은 어디 계실까요? 잠깐 만나 뵙고 싶은데……?”사람들이 서로 쳐다보았다.한참 후에야 직원 한 명이 걸어왔다.“실례지만,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 제가 윤이서 맞긴 한데……, 혹시 저 알아요?”그러나 그녀는 눈앞의 사람에 대해 조금도 인상이 없다.“이것은 회장님께서 윤이서 씨에게 주는 선물입니다.”직원이 정교하게 포장된 핸드폰 박스 세 개를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또…… 즐겁고 행복한 신혼생활 보내라는 말씀도 전했습니다.”“회장님이 날 알아요?” 이서는 약간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놀랐다.직원들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이서는 선물 박스를 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차 안에서 CCTV 영상을 보고 있던 지환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물들었다.앞줄의 이천조차도 차 안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당장 가서 조사해, 왜 참석자 명단에 이서의 이름이 없는지.”지환은 CCTV를 끄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발표회가 끝나고 박예담은 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 차례 생사를 드나들었던 그는 지금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집에 들어가 잠이라도 한잠 푹 자고 싶었다.그가 핸들을 막 꺾자마자 박예솔의 전화를 받았다.[어땠어?] 박예솔은 의기양양하게 방금 바른 빨간 매니큐어를 후후 불며 물었다.오늘 간만에 기분 좋은 박예솔은 네일 아트 하러 나왔다.“누나, 괜찮았어. 다행이야.”예담이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지환 형한테 연락해줘서 고마워.”박예솔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채 마르지 않은 매니큐어가 손에 묻어버렸다.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뭐라고?!]“누나, 왜 그래?”박예솔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수상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속이 뒤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