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의 말에, 하경수는 아니나 다를까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지었다.박예솔은 상황을 보고 허벅지의 살을 꽉 꼬집으며, 대범한 척 연기하는 이서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이 일은 일단락된 셈이다.CCTV 영상이 계속 재생되자, 곧 이서와 박예솔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다.이천은 동영상을 늦추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봤다.화면에는 이서가 박예솔의 가방에 손을 넣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았다.이미연은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CCTV에 손댔지?”이서는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렸다.“아주머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이 영상은 제가 식사하던 그날 저녁에 받은 거예요. 조작 같은 거 아니에요. 믿지 못하겠으면 전문기관에 의뢰해 보세요.”지환은 나른하게 이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어조에 약간의 장난기가 띠었다.“일이 이미 충분히 명확해졌다고 보는데…… 암튼 이서가 한 건 아니에요.”박예솔은 곧 무너질 것 같았다.그녀의 원래 계획대로 라면, CCTV를 재생하는 동시에 이서에게 도둑, 악랄한 의부증 환자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녕 지환이 이서를 용서한다고 해도 하경수가 나서서 절대 이 혼사를 결사반대하는 것, 이게 그녀의 전반적인 계획이었다.그러나 이서가 CCTV 영상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신속하게 평정심을 찾았다.“그래요, 보아하니 이 일은 정말 이서 씨가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도 아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고의로 사건을 일으켜 우리 두 집안의 갈라놓으려고 한 것 같아요.”말하면서 그녀는 이서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이서 씨, 미안해요.”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눈 깜짝 안 하고 박예솔을 바라보고 있었다.박예솔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일이 갑작스레 180도 반전이 일어나자, 이미연은 멋쩍게 혼자서 중얼거렸다.“네가 아니면 누구야?”“엄마.” 박예솔은 다급하게 이미연
이서가 다가와 한 손으로 박예솔의 팔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기려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만족하지…….”고개를 든 박예솔은 마침 보기 좋게 올라간 이서의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눈빛에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서의 목이라도 꺾어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일부러 그랬던 거였다!지환 앞에서 사리에 밝은 여자로 보이려면, 엄마 대신 사과해야 했다!이서는 박예솔의 눈동자 속에 비친 살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예솔 씨, 뭐 이렇게까지 그래요? 그냥 해본 말인데…….”정신이 번쩍 든 이미연은 이서를 밀치고는 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아이구, 고지식한 녀석아, 쟤한테 무슨 무릎을 꿇어……. 경수 씨…….”박예솔은 이서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봐 이미연을 끌고 황급히 떠났다.하경수는 두 사람이 허둥지둥 떠나는 뒷모습만 보고, 왜 예솔이가 무릎까지 꿇었는지에 대해 묻기도 귀찮았다.“이서야, 방금 억울했지?”이서는 고개를 돌려 시원시원하게 말했다.“아버님, 그런 말씀 마세요. 오해 풀렸으면 됐죠.”하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서를 높이 평가했다.“지환이가 이서 같은 아내를 만난 것도 저 녀석 복이다. 난 올라가서 좀 쉬겠다. 너희들도 숨 좀 돌리거라.”예솔 모녀가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난리 친 통에, 지금까지도 머리가 윙윙거리는 것이 좀 쉬어야 했다.하경수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지환의 품에 안겼다.“왜 이럴까! 뭐하는 거야?”지환은 이서의 귓불을 깨물며 따뜻한 호흡을 뽀얀 볼에 내뿜었다. 그러고는 얇은 입술로 이서의 귀에 대고 얘기했다. 이서의 볼은 빠르게 물들며,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튼튼한 가슴을 받쳤다.“아버님 위에서 쉬고 계세요!”“이 큰 집에서 뭔 걱정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다.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어루만졌다.“나 피곤해요.
컨셉 시안 유출 사건 이후, 박예솔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 이서는 지환과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귀국 날짜가 가까워지자, 이서는 선물 준비에 나섰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야, 나 곧 귀국할 거야. 너 무슨 선물 갖고 싶어?”오랜 절친인 이들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주었다.[최근 해외에서 ‘드래곤’이라는 핸드폰이 새로 개발했다고 들었는데, 게이머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폰이래. M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고 시장 동향 살핀 후 국내에서 출시 예정이라는데, 혹시 나 그거 구해줄 수 있어?]평소에 게임을 좋아하는 임하나는 게이머들을 위해 개발한 휴대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알았어. 잠깐만, 확인해 볼게.”검색해 보니, 해당 핸드폰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YS그룹에서 출시하는 핸드폰임을 확인한 이서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YS는 세계 최대 그룹으로, 하은철 삼촌이 설립한 상업제국이다.‘이 핸드폰, YS 작품이네!’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당겼다.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맥박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19일 저녁 8시 YS 산하 핸드폰 개발 부서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소규모로 진행한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이서는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렇게 중요한 발표회에, 삼촌이 꼭 참석하시겠지?’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냐, 별일 없어.” 이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구해 볼게!”이서는 전화를 끊고, 바로 YS 공식 홈페이지에서 핸드폰 개발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이서는 한숨을 쉬고 나서야 말했다.“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 볼 게요. 혹시 19일에 핸드폰 발표회 진행하나요?”[네, 맞습니다, 고객님.]“그때 회장님도 참석하실까요?”[네. 그렇습니다, 고객님.]“실례지만, 협력사
‘정말 순수하고 귀여운 녀석이군.’박예솔도 같은 컨셉으로 등장한 걸 감안하여 이서는 박예담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방에 들어온 박예담은 좀 어색해했다.“괜찮아요, 편하게 앉아요.”“집을 정말 아늑하고 예쁘게 꾸몄네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지환 형이 정말 결혼할 줄은…….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동생이잖아요.”이서는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그럴까……? 그럼 편하게 얘기할게. 지환 씨 독신주의자였어?”“아니요, 지환형은 학교 다닐 때부터 워커 홀릭이었어요. 일 말고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학교 다닐 때부터 일했다고?”박예담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어…… 그게 지환이 형…… 학교 다닐 때 조그맣게 사업을 했어요.”이른바 작은 사업이라는 게, 12살 때부터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해 1년내에 그 지역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회사로 성장시킨 것이었다. YS가 세계 최대의 그룹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환이 10대 시절부터 회사 발전을 위해 이미 포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이서는 지환의 일에 흥미를 느꼈다.“정말? 그럼 대학 전공이 마케팅이었어?”지환 얘기를 꺼내자, 박예담도 신이 났는지 서서히 긴장도 풀렸다.“아니요, 형은 의학 전공이에요.”이서는 깜짝 놀랐다. 지환이 의학 공부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그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죠. 친구한테 끌려 갔는데…… 아마 그때 처음으로 지환이 형이 공부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지환 형이 의학 공부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고, 친구가 ‘사기캐’였어요. 매번 시험에서 지환형과 0.1점 차이로 이겼거든요. 그것도 총점 격차가요.”“그래서?”“그래서 나중에, 형 친구가 참다 못해 지환형에게 퇴학을 권유했어요.”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왜? 0.1점 차이라며?”“네, 그런데 지환형
박예담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두 사람은 19일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박예담을 떠나보내고 이서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절친에게 줄 핸드폰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은철 삼촌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지환은 요 며칠 바쁜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이서는 지환의 행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를 100% 믿었다.문이 열리고, 지환의 늘씬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서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다가가 뒤에서 이서를 껴안았다.깜짝 놀란 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며 투정을 부렸다.“소리도 없어…… 깜짝 놀랐잖아요.”“뭐 맛있는 거 하는 거야?” 손을 뻗어 냄비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어묵 볶음이요.” 이서는 지환을 밀어냈다.“나가 계세요, 곧 다 됩니다.”지환은 문 앞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키스해 주면 나갈게.”이서는 어이없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오늘 예담이 왔었어요.”지환은 양복을 벗으며 물었다.“어, 무슨 일로 왔대?”“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말하는 사이에 이서는 이미 완성된 어묵 볶음을 내놓았다.“뭐라던데?” 지환이가 밥을 푸는 것을 도왔습니다.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천재 의사 친구 얘기했어요……. 어, 그나저나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그녀는 이제야 왜 지환이 짧은 기간에 이상언과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두 사람 모두 의학을 전공했으니, 틀림없이 공통된 관심사와 대화거리가 있을 것이다.눈동자가 굳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손가락으로 이서의 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또 뭐 얘기했어?”“암튼 당신이 학교 다닐 때의 일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아, 맞다…….”흥분한 이서는 자세를 바꾸어 앉아서 말을 이었다. 지환의 이상 반응을
발표회가 시작되면서, 회의장 내에서 핸드폰 사용 및 촬영 금지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핸드폰을 전원 끄고 나서야 박예담이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괜찮아?” 이서는 가방에서 진통제 한 알을 꺼냈다. “진통제라도 좀 먹을래?”박예담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요.”이때 ‘드래곤’ 출시를 전담한 총책임자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이서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제야 박예담은 비로소 숨돌릴 기회를 얻었다.‘예솔 누나가 지환 형한테 얘기했는지 모르겠네.’그는 불안해서 자기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기조 연설까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같은 시각, 백그라운드.이천이 들어왔다.“회장님이 곧 도착하신다. 비밀 유지 작업에 특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나?”무대 뒤에서 모두 직원들이 일동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천의 오랜 부하들로, 그들의 업무능력에 대해 이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려 두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 맞다, 오늘 행사 참석자 명단 보여줘.”참석자 등록을 맡은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며 이천에게 명단을 건넸다.이천은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왜 글씨체가 똑같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직원은 창백한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방금 제가 실수로 명단에 물을 쏟아서…… 다시 한 부 베껴 썼습니다.”이천은 힐끗 훑어보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주의만 주며 참석자 명단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지환에게 갔다.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천이 뒷문을 나섰다. 뒷문 밖에 검은색 차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전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차 안을 향해 말했다.“회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15분 후에 나가시면 됩니다.”차창이 내려가며 지환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
이서가 문을 두드리자, 무대 뒤에서 바삐 움직이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에게 떨어졌다.그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실례지만, YS그룹 회장님은 어디 계실까요? 잠깐 만나 뵙고 싶은데……?”사람들이 서로 쳐다보았다.한참 후에야 직원 한 명이 걸어왔다.“실례지만,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 제가 윤이서 맞긴 한데……, 혹시 저 알아요?”그러나 그녀는 눈앞의 사람에 대해 조금도 인상이 없다.“이것은 회장님께서 윤이서 씨에게 주는 선물입니다.”직원이 정교하게 포장된 핸드폰 박스 세 개를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또…… 즐겁고 행복한 신혼생활 보내라는 말씀도 전했습니다.”“회장님이 날 알아요?” 이서는 약간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놀랐다.직원들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이서는 선물 박스를 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차 안에서 CCTV 영상을 보고 있던 지환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물들었다.앞줄의 이천조차도 차 안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당장 가서 조사해, 왜 참석자 명단에 이서의 이름이 없는지.”지환은 CCTV를 끄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발표회가 끝나고 박예담은 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 차례 생사를 드나들었던 그는 지금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집에 들어가 잠이라도 한잠 푹 자고 싶었다.그가 핸들을 막 꺾자마자 박예솔의 전화를 받았다.[어땠어?] 박예솔은 의기양양하게 방금 바른 빨간 매니큐어를 후후 불며 물었다.오늘 간만에 기분 좋은 박예솔은 네일 아트 하러 나왔다.“누나, 괜찮았어. 다행이야.”예담이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지환 형한테 연락해줘서 고마워.”박예솔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채 마르지 않은 매니큐어가 손에 묻어버렸다.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뭐라고?!]“누나, 왜 그래?”박예솔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수상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속이 뒤
문자 보내는 게 귀찮았는지 임하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흑흑흑, 자기야 사랑해! 너 언제 들어와? 내가 크게 한 턱 쏠게.]“곧 돌아갈 거야.”[그럼 나 곧 핸드폰을 받을 수 있겠네. 와우, 대박! 그럼 내가 국내에서 세 번째로 ‘드래곤’을 쓰는 사람이 되는 거야?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핸드폰을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부러워 죽겠지?]이서는 웃으며 핸드폰을 박스에 잘 담아두었다.[새 동료들에게 줄 선물은 다 준비했어?]이서가 막 답장하려고 할 때 지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이서와 지환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속 임하나와 얘기를 주고받았다.“아직 뭐 살지 모르겠어. 어제 물어봤더니 디자인 팀은 대부분 여직원이래. 그래서 화장품을 살까 생각 중이야.”지환은 임하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서를 보면서 질투 아닌 질투를 느꼈다.그는 소파 테이블 옆으로 가서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남자 직원한테는 게임기 선물하려고.”[사실 가능하다면 직원들에게 ‘드래곤’ 한 대씩 돌리면, 완전 개간지지.]“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도 지난 번에 말했잖아. ‘드래곤’이 한정판 출시라, 외국에서도 사기 힘들다고……. 디자인 팀에 직원이 적어도 수십 명이 될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핸드폰을 구하니?”임하나는 뺨을 받치고 고민했다.[그래, 그럼 화장품이랑 게임기 선물해.]“응응.”이서와 임하나는 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오늘 YS 회장을 만난 걸 지환에게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지환의 눈동자가 침울한 것이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게다가 눈빛에는 서러움 같은 것도 서려 있었다.“무슨 일이에요?” 이서가 다가와 지환의 팔에 찰싹 붙었다.지환은 몸을 안쪽으로 물러 앉으며 이서와 거리를 두었다.“오늘 나갔었어?”“응.” 이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 오늘 YS 회장도 봤어요!”지환은 발가락으로 티테이블을 찼지만 얼굴빛은 바꾸지 않았다.“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