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시안 유출 사건 이후, 박예솔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 이서는 지환과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귀국 날짜가 가까워지자, 이서는 선물 준비에 나섰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야, 나 곧 귀국할 거야. 너 무슨 선물 갖고 싶어?”오랜 절친인 이들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주었다.[최근 해외에서 ‘드래곤’이라는 핸드폰이 새로 개발했다고 들었는데, 게이머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폰이래. M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고 시장 동향 살핀 후 국내에서 출시 예정이라는데, 혹시 나 그거 구해줄 수 있어?]평소에 게임을 좋아하는 임하나는 게이머들을 위해 개발한 휴대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알았어. 잠깐만, 확인해 볼게.”검색해 보니, 해당 핸드폰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YS그룹에서 출시하는 핸드폰임을 확인한 이서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YS는 세계 최대 그룹으로, 하은철 삼촌이 설립한 상업제국이다.‘이 핸드폰, YS 작품이네!’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당겼다.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맥박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19일 저녁 8시 YS 산하 핸드폰 개발 부서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소규모로 진행한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이서는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렇게 중요한 발표회에, 삼촌이 꼭 참석하시겠지?’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냐, 별일 없어.” 이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구해 볼게!”이서는 전화를 끊고, 바로 YS 공식 홈페이지에서 핸드폰 개발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이서는 한숨을 쉬고 나서야 말했다.“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 볼 게요. 혹시 19일에 핸드폰 발표회 진행하나요?”[네, 맞습니다, 고객님.]“그때 회장님도 참석하실까요?”[네. 그렇습니다, 고객님.]“실례지만, 협력사
‘정말 순수하고 귀여운 녀석이군.’박예솔도 같은 컨셉으로 등장한 걸 감안하여 이서는 박예담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방에 들어온 박예담은 좀 어색해했다.“괜찮아요, 편하게 앉아요.”“집을 정말 아늑하고 예쁘게 꾸몄네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지환 형이 정말 결혼할 줄은…….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동생이잖아요.”이서는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그럴까……? 그럼 편하게 얘기할게. 지환 씨 독신주의자였어?”“아니요, 지환형은 학교 다닐 때부터 워커 홀릭이었어요. 일 말고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학교 다닐 때부터 일했다고?”박예담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어…… 그게 지환이 형…… 학교 다닐 때 조그맣게 사업을 했어요.”이른바 작은 사업이라는 게, 12살 때부터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해 1년내에 그 지역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회사로 성장시킨 것이었다. YS가 세계 최대의 그룹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환이 10대 시절부터 회사 발전을 위해 이미 포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이서는 지환의 일에 흥미를 느꼈다.“정말? 그럼 대학 전공이 마케팅이었어?”지환 얘기를 꺼내자, 박예담도 신이 났는지 서서히 긴장도 풀렸다.“아니요, 형은 의학 전공이에요.”이서는 깜짝 놀랐다. 지환이 의학 공부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그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죠. 친구한테 끌려 갔는데…… 아마 그때 처음으로 지환이 형이 공부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지환 형이 의학 공부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고, 친구가 ‘사기캐’였어요. 매번 시험에서 지환형과 0.1점 차이로 이겼거든요. 그것도 총점 격차가요.”“그래서?”“그래서 나중에, 형 친구가 참다 못해 지환형에게 퇴학을 권유했어요.”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왜? 0.1점 차이라며?”“네, 그런데 지환형
박예담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두 사람은 19일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박예담을 떠나보내고 이서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절친에게 줄 핸드폰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은철 삼촌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지환은 요 며칠 바쁜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이서는 지환의 행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를 100% 믿었다.문이 열리고, 지환의 늘씬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서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다가가 뒤에서 이서를 껴안았다.깜짝 놀란 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며 투정을 부렸다.“소리도 없어…… 깜짝 놀랐잖아요.”“뭐 맛있는 거 하는 거야?” 손을 뻗어 냄비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어묵 볶음이요.” 이서는 지환을 밀어냈다.“나가 계세요, 곧 다 됩니다.”지환은 문 앞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키스해 주면 나갈게.”이서는 어이없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오늘 예담이 왔었어요.”지환은 양복을 벗으며 물었다.“어, 무슨 일로 왔대?”“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말하는 사이에 이서는 이미 완성된 어묵 볶음을 내놓았다.“뭐라던데?” 지환이가 밥을 푸는 것을 도왔습니다.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천재 의사 친구 얘기했어요……. 어, 그나저나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그녀는 이제야 왜 지환이 짧은 기간에 이상언과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두 사람 모두 의학을 전공했으니, 틀림없이 공통된 관심사와 대화거리가 있을 것이다.눈동자가 굳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손가락으로 이서의 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또 뭐 얘기했어?”“암튼 당신이 학교 다닐 때의 일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아, 맞다…….”흥분한 이서는 자세를 바꾸어 앉아서 말을 이었다. 지환의 이상 반응을
발표회가 시작되면서, 회의장 내에서 핸드폰 사용 및 촬영 금지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핸드폰을 전원 끄고 나서야 박예담이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괜찮아?” 이서는 가방에서 진통제 한 알을 꺼냈다. “진통제라도 좀 먹을래?”박예담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요.”이때 ‘드래곤’ 출시를 전담한 총책임자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이서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제야 박예담은 비로소 숨돌릴 기회를 얻었다.‘예솔 누나가 지환 형한테 얘기했는지 모르겠네.’그는 불안해서 자기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기조 연설까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같은 시각, 백그라운드.이천이 들어왔다.“회장님이 곧 도착하신다. 비밀 유지 작업에 특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나?”무대 뒤에서 모두 직원들이 일동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천의 오랜 부하들로, 그들의 업무능력에 대해 이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려 두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 맞다, 오늘 행사 참석자 명단 보여줘.”참석자 등록을 맡은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며 이천에게 명단을 건넸다.이천은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왜 글씨체가 똑같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직원은 창백한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방금 제가 실수로 명단에 물을 쏟아서…… 다시 한 부 베껴 썼습니다.”이천은 힐끗 훑어보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주의만 주며 참석자 명단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지환에게 갔다.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천이 뒷문을 나섰다. 뒷문 밖에 검은색 차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전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차 안을 향해 말했다.“회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15분 후에 나가시면 됩니다.”차창이 내려가며 지환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
이서가 문을 두드리자, 무대 뒤에서 바삐 움직이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에게 떨어졌다.그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실례지만, YS그룹 회장님은 어디 계실까요? 잠깐 만나 뵙고 싶은데……?”사람들이 서로 쳐다보았다.한참 후에야 직원 한 명이 걸어왔다.“실례지만,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 제가 윤이서 맞긴 한데……, 혹시 저 알아요?”그러나 그녀는 눈앞의 사람에 대해 조금도 인상이 없다.“이것은 회장님께서 윤이서 씨에게 주는 선물입니다.”직원이 정교하게 포장된 핸드폰 박스 세 개를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또…… 즐겁고 행복한 신혼생활 보내라는 말씀도 전했습니다.”“회장님이 날 알아요?” 이서는 약간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놀랐다.직원들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이서는 선물 박스를 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차 안에서 CCTV 영상을 보고 있던 지환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물들었다.앞줄의 이천조차도 차 안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당장 가서 조사해, 왜 참석자 명단에 이서의 이름이 없는지.”지환은 CCTV를 끄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발표회가 끝나고 박예담은 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 차례 생사를 드나들었던 그는 지금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집에 들어가 잠이라도 한잠 푹 자고 싶었다.그가 핸들을 막 꺾자마자 박예솔의 전화를 받았다.[어땠어?] 박예솔은 의기양양하게 방금 바른 빨간 매니큐어를 후후 불며 물었다.오늘 간만에 기분 좋은 박예솔은 네일 아트 하러 나왔다.“누나, 괜찮았어. 다행이야.”예담이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지환 형한테 연락해줘서 고마워.”박예솔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채 마르지 않은 매니큐어가 손에 묻어버렸다.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뭐라고?!]“누나, 왜 그래?”박예솔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수상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속이 뒤
문자 보내는 게 귀찮았는지 임하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흑흑흑, 자기야 사랑해! 너 언제 들어와? 내가 크게 한 턱 쏠게.]“곧 돌아갈 거야.”[그럼 나 곧 핸드폰을 받을 수 있겠네. 와우, 대박! 그럼 내가 국내에서 세 번째로 ‘드래곤’을 쓰는 사람이 되는 거야?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핸드폰을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부러워 죽겠지?]이서는 웃으며 핸드폰을 박스에 잘 담아두었다.[새 동료들에게 줄 선물은 다 준비했어?]이서가 막 답장하려고 할 때 지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이서와 지환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속 임하나와 얘기를 주고받았다.“아직 뭐 살지 모르겠어. 어제 물어봤더니 디자인 팀은 대부분 여직원이래. 그래서 화장품을 살까 생각 중이야.”지환은 임하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서를 보면서 질투 아닌 질투를 느꼈다.그는 소파 테이블 옆으로 가서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남자 직원한테는 게임기 선물하려고.”[사실 가능하다면 직원들에게 ‘드래곤’ 한 대씩 돌리면, 완전 개간지지.]“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도 지난 번에 말했잖아. ‘드래곤’이 한정판 출시라, 외국에서도 사기 힘들다고……. 디자인 팀에 직원이 적어도 수십 명이 될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핸드폰을 구하니?”임하나는 뺨을 받치고 고민했다.[그래, 그럼 화장품이랑 게임기 선물해.]“응응.”이서와 임하나는 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오늘 YS 회장을 만난 걸 지환에게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지환의 눈동자가 침울한 것이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게다가 눈빛에는 서러움 같은 것도 서려 있었다.“무슨 일이에요?” 이서가 다가와 지환의 팔에 찰싹 붙었다.지환은 몸을 안쪽으로 물러 앉으며 이서와 거리를 두었다.“오늘 나갔었어?”“응.” 이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 오늘 YS 회장도 봤어요!”지환은 발가락으로 티테이블을 찼지만 얼굴빛은 바꾸지 않았다.“
이서는 침실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지환이 어떤 해명도 없자,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오므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환한테 한바탕 화풀이하고 싶었다.바로 이때 문자 한 통을 받았다.[안녕하세요, 윤이서 님, 여기는 YS 핸드폰 사업 개발부입니다. 우선, 저희 드래곤 신제품 출시 발표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께서는 우리 회사에서 진행하는 고객 감사 특별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우리 회사는 그동안 고객님들의 성원에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50대의 ‘드래곤’을 증정할 예정입니다. 본 이벤트에 당첨되신걸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저희 제품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디자인 팀 소속 직원이 총 42명이다.YS로부터 한꺼번에 50개의 핸드폰을 당첨 선물로 받았으니, 새 동료들에게 핸드폰 선물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서는 하은철 삼촌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몰랐다.그러나 방금 지환이 한 얘기를 생각하고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됐어.’‘기회가 되면, 식사대접이나 하지 뭐.’‘그 때 지환 씨도 함께 가는 거야. 그래야 내가 하은철 삼촌한테 딴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그리고!’‘하씨 집안사람들과는 다시 얽히고 싶지 않다고 얘기도 했었는데!’이때 문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이서는 침대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잠시 인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낯선 번호였다.머뭇거리며 받자, 저쪽에서 이천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이서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보고 열어달라고 해요.”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집에 안 계십니다.]이서는 그제야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지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가슴이 텅 빈 것 같이, 마음이 꼬인 거 같이, 너무 괴로웠다.입구에 이르러 문을 열자, 손에 음식 배달 가방을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사모님, 남편 분께서 부탁하신 저녁입니다
말을 마친 지환은 2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박예솔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이미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가 서렸다. 그녀는 박기태에게 말했다.“여보, 내가 뭐랬어? 지환이 솔이에게 마음 있다니까? 다만 본인도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르는 거 일 뿐이야.”박기태가 펼쳐 보던 신문을 다시 접었다.“아쉽지만 지환은 이미 결혼했잖는가? 이렇게 좋은 사위를 누가 눈독 안 들이겠어?”이미연은 입을 삐죽거렸다.“결혼했으면 뭐 어때? 지금 이혼율이 얼마나 높은데, 이혼한 사람들도 비일비재야. 그리고 그 여자, 지환에게 어울리기나 해? 집안도 형편없지, 학력도 그럭저럭, 얼굴 하나 반반한 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잖아. 얼굴이 밥 먹여 주나, 보다 보면 질려버리지.”남자로서 박기태도 이미연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그렇다면 우리 솔이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거네.”그러나 지금 2층에서 지환과 박예솔은 박씨 부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돌았다.“내 뒷조사했어?” 박예솔을 악이 받칠 대로 받쳤다.지환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꼬꼬 박예솔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인정하는 건가?”“인정하긴 뭘 인정해, 박예담이 현장에 데려간 걸 왜 나한테 난리야?”“네가 전화하기로 했다고 예담이가 얘기하던데?”전화는 했지……. 통화 중이어서 연결이 안 됐을 뿐이야…….”박예솔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환은 늘씬한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일어섰다.“박예솔, 내가 오늘 여긴 온 건 따지러 온 게 아니라 마지막 경고하러 온 거야!”박예솔의 온몸이 휘청거렸다.“오늘 이후로, 너 H국에 발 들이지 말고, 다시는 이서 앞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 약속 위반 시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 지 잘 알지?”말이 마치고, 지환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지환이 문 손잡이를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박예솔이 갑자기 몸을 돌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이서가 있는 곳이라면, 가면 안된다는 거지?”지환은 침묵하며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