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가 문을 두드리자, 무대 뒤에서 바삐 움직이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서에게 떨어졌다.그녀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실례지만, YS그룹 회장님은 어디 계실까요? 잠깐 만나 뵙고 싶은데……?”사람들이 서로 쳐다보았다.한참 후에야 직원 한 명이 걸어왔다.“실례지만,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 제가 윤이서 맞긴 한데……, 혹시 저 알아요?”그러나 그녀는 눈앞의 사람에 대해 조금도 인상이 없다.“이것은 회장님께서 윤이서 씨에게 주는 선물입니다.”직원이 정교하게 포장된 핸드폰 박스 세 개를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또…… 즐겁고 행복한 신혼생활 보내라는 말씀도 전했습니다.”“회장님이 날 알아요?” 이서는 약간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아 놀랐다.직원들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이서는 선물 박스를 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차 안에서 CCTV 영상을 보고 있던 지환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물들었다.앞줄의 이천조차도 차 안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당장 가서 조사해, 왜 참석자 명단에 이서의 이름이 없는지.”지환은 CCTV를 끄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발표회가 끝나고 박예담은 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 차례 생사를 드나들었던 그는 지금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집에 들어가 잠이라도 한잠 푹 자고 싶었다.그가 핸들을 막 꺾자마자 박예솔의 전화를 받았다.[어땠어?] 박예솔은 의기양양하게 방금 바른 빨간 매니큐어를 후후 불며 물었다.오늘 간만에 기분 좋은 박예솔은 네일 아트 하러 나왔다.“누나, 괜찮았어. 다행이야.”예담이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지환 형한테 연락해줘서 고마워.”박예솔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채 마르지 않은 매니큐어가 손에 묻어버렸다.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뭐라고?!]“누나, 왜 그래?”박예솔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수상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속이 뒤
문자 보내는 게 귀찮았는지 임하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흑흑흑, 자기야 사랑해! 너 언제 들어와? 내가 크게 한 턱 쏠게.]“곧 돌아갈 거야.”[그럼 나 곧 핸드폰을 받을 수 있겠네. 와우, 대박! 그럼 내가 국내에서 세 번째로 ‘드래곤’을 쓰는 사람이 되는 거야?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핸드폰을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부러워 죽겠지?]이서는 웃으며 핸드폰을 박스에 잘 담아두었다.[새 동료들에게 줄 선물은 다 준비했어?]이서가 막 답장하려고 할 때 지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이서와 지환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속 임하나와 얘기를 주고받았다.“아직 뭐 살지 모르겠어. 어제 물어봤더니 디자인 팀은 대부분 여직원이래. 그래서 화장품을 살까 생각 중이야.”지환은 임하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서를 보면서 질투 아닌 질투를 느꼈다.그는 소파 테이블 옆으로 가서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남자 직원한테는 게임기 선물하려고.”[사실 가능하다면 직원들에게 ‘드래곤’ 한 대씩 돌리면, 완전 개간지지.]“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도 지난 번에 말했잖아. ‘드래곤’이 한정판 출시라, 외국에서도 사기 힘들다고……. 디자인 팀에 직원이 적어도 수십 명이 될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핸드폰을 구하니?”임하나는 뺨을 받치고 고민했다.[그래, 그럼 화장품이랑 게임기 선물해.]“응응.”이서와 임하나는 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오늘 YS 회장을 만난 걸 지환에게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글쎄 지환의 눈동자가 침울한 것이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게다가 눈빛에는 서러움 같은 것도 서려 있었다.“무슨 일이에요?” 이서가 다가와 지환의 팔에 찰싹 붙었다.지환은 몸을 안쪽으로 물러 앉으며 이서와 거리를 두었다.“오늘 나갔었어?”“응.” 이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나…… 오늘 YS 회장도 봤어요!”지환은 발가락으로 티테이블을 찼지만 얼굴빛은 바꾸지 않았다.“
이서는 침실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지환이 어떤 해명도 없자,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오므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환한테 한바탕 화풀이하고 싶었다.바로 이때 문자 한 통을 받았다.[안녕하세요, 윤이서 님, 여기는 YS 핸드폰 사업 개발부입니다. 우선, 저희 드래곤 신제품 출시 발표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께서는 우리 회사에서 진행하는 고객 감사 특별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우리 회사는 그동안 고객님들의 성원에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50대의 ‘드래곤’을 증정할 예정입니다. 본 이벤트에 당첨되신걸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저희 제품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디자인 팀 소속 직원이 총 42명이다.YS로부터 한꺼번에 50개의 핸드폰을 당첨 선물로 받았으니, 새 동료들에게 핸드폰 선물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서는 하은철 삼촌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몰랐다.그러나 방금 지환이 한 얘기를 생각하고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됐어.’‘기회가 되면, 식사대접이나 하지 뭐.’‘그 때 지환 씨도 함께 가는 거야. 그래야 내가 하은철 삼촌한테 딴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그리고!’‘하씨 집안사람들과는 다시 얽히고 싶지 않다고 얘기도 했었는데!’이때 문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이서는 침대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잠시 인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낯선 번호였다.머뭇거리며 받자, 저쪽에서 이천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이서는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보고 열어달라고 해요.”이천은 쓴웃음을 지었다.[집에 안 계십니다.]이서는 그제야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지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가슴이 텅 빈 것 같이, 마음이 꼬인 거 같이, 너무 괴로웠다.입구에 이르러 문을 열자, 손에 음식 배달 가방을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사모님, 남편 분께서 부탁하신 저녁입니다
말을 마친 지환은 2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박예솔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이미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가 서렸다. 그녀는 박기태에게 말했다.“여보, 내가 뭐랬어? 지환이 솔이에게 마음 있다니까? 다만 본인도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르는 거 일 뿐이야.”박기태가 펼쳐 보던 신문을 다시 접었다.“아쉽지만 지환은 이미 결혼했잖는가? 이렇게 좋은 사위를 누가 눈독 안 들이겠어?”이미연은 입을 삐죽거렸다.“결혼했으면 뭐 어때? 지금 이혼율이 얼마나 높은데, 이혼한 사람들도 비일비재야. 그리고 그 여자, 지환에게 어울리기나 해? 집안도 형편없지, 학력도 그럭저럭, 얼굴 하나 반반한 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잖아. 얼굴이 밥 먹여 주나, 보다 보면 질려버리지.”남자로서 박기태도 이미연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그렇다면 우리 솔이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거네.”그러나 지금 2층에서 지환과 박예솔은 박씨 부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돌았다.“내 뒷조사했어?” 박예솔을 악이 받칠 대로 받쳤다.지환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꼬꼬 박예솔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인정하는 건가?”“인정하긴 뭘 인정해, 박예담이 현장에 데려간 걸 왜 나한테 난리야?”“네가 전화하기로 했다고 예담이가 얘기하던데?”전화는 했지……. 통화 중이어서 연결이 안 됐을 뿐이야…….”박예솔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환은 늘씬한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일어섰다.“박예솔, 내가 오늘 여긴 온 건 따지러 온 게 아니라 마지막 경고하러 온 거야!”박예솔의 온몸이 휘청거렸다.“오늘 이후로, 너 H국에 발 들이지 말고, 다시는 이서 앞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 약속 위반 시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 지 잘 알지?”말이 마치고, 지환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지환이 문 손잡이를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박예솔이 갑자기 몸을 돌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앞으로 이서가 있는 곳이라면, 가면 안된다는 거지?”지환은 침묵하며 고
이틀 뒤 귀국일정이 잡혔다.하경수와 박씨 일가족이 배웅하러 왔다.박예담과 하경수는 이서와 지환이 떠나는 걸 진심으로 아쉬워했다.박기태와 이미연은 체면 때문에 온 것이었다.“이서 누나.”박예담은 이서를 다른 쪽으로 끌고 갔다.“우리 누나가 누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하면서, 나더러 전해달라고 했어요. 지환 형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이서도 박예솔이 나타나지 않은 걸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굳이 묻어보기도 그랬다. 마침 박예담이 언급하자 이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왜 네 누나는 직접 오지 않고?”박예담은 머리를 긁적였다.“나도 물어봤는데, 이서 누나 앞에 나타나면 안 된대요. 저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그는 포장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물세트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누나,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이서가 받아보니, 묵직한 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분명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이서 누나…….” 박예담이 귀를 붉히며 물었다.“언제 또 올 거예요?”“잘 모르겠어. 하지만 기회 봐서 또 올게. 너도 시간 나면 H국에 놀러 와.”“정말요? 네, 꼭 갈게요. 그 때 저 반겨주실 거죠?”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지난 번 카톡 이후로 그는 줄곧 이서와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이천을 한 번 흘겨보았다.이심전심, 이천은 바로 이서 곁으로 걸어갔다.“사모님,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 됐습니다.”이서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아직 한 시간 남짓 남았어요.”이천은 헛웃음을 지었다.“비싼 돈 주고 비즈니스석 샀는데 일찍 탑승하셔서 제대로 즐겨야 돈이 안 아깝죠.” 그 말에 드디어 이서의 맘이 움직였다. 박예담과 또 몇 마디 더하고는 하경수와 작별 인사를 하고 탑승 통로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 지환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지환은 이서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곧 이서의 뒤를 따라 출국장으로 걸어갔다.기내에서
지환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안방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미간을 찡그렸다.보아하니, 이번에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다음날.임하나는 점심 시간에 잠깐 별장에 들렸다.“네가 주소를 알려주었을 때, 난 또 네가 본가로 들어간 줄 알았잖아.”임하나는 눈앞의 별장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이 집, 정말 지환 씨가 산 거야?”“내가 왜 거짓말하겠어?” 이서는 임하나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난 네가 지환 씨의 몸매와 얼굴에 홀랑 넘어가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퍼주고, 소녀가장이 될까 봐 걱정했는데……”임하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지환 씨의 능력으로 봤을 때 회사 그만 두고 사업하면, 한 달 만에 중산층에서 고소득층으로 도약할 수 있을 거 같은데…….”이서의 머릿속에는 지환의 완벽한 몸매가 떠올랐고 곧 얼굴이 붉어졌다.“너 요즘 하는 일 없이 좀 한가한가 보구나. 말도 안 돼는 소리를…….”이서는 그녀를 게스트 룸으로 데려갔다.“잠깐만 기다려. 핸드폰을 갖고 올게.”임하나는 침대에 베개가 하나인 걸 보았다. 게다가 새로 베개……. 그녀는 의아해하며 이서에게 물었다.“너, 지금 지환 씨랑 각방 써?”이서는 핸드폰을 꺼냈다.“핸드폰 할 거야? 말거야?”임하나는 헤헤 웃으며“해해해, 빨리 줘봐. 기다리다가 눈 빠지는 줄.”이서는 휴대폰을 임하나에게 건넸다.임하나는 받자마자 박스를 개봉하여 핸드폰 설치하면서 싱글벙글 신났다.“자기, 설마 아직 지환 씨랑 손만 잡고 자는 거 아니지?”이서의 얼굴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빨개졌다.“하나야, 너 파파라치 됐어야 하는데, 그 재능 썩히는 게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말해봐.”임하나의 오지랖이 또 발동되었다. 그녀는 오히려 당당했다.“난 내 친구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이서는 손에 쿠션을 들어 임하나의 어깨를 살짝 쳤다.“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 미워 죽겠어.”“왜, 너희들 싸웠어?”이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몹시 불쾌하게 ‘응’ 소리
아침 햇살이 소리 없이 대지를 스치며 창문 틈새를 투과해 그들의 몸에 떨어지며 아름다운 유화 한 폭을 만들어 냈다.한참이 지나서야 걸음을 멈춘 지환은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머리가 잠시 다운됐다가 드디어 이성을 되찾은 이서가 두다리로 발버둥 쳤다.“지환 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나는 오늘 출근해야 된다 말이야…….”지환은 이서를 욕실로 안고 들어갔다.“알지, 하지만 너도 이렇게 출근하고 싶지는 않을 거 같은데…….”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마침 욕실 거울 앞에 와 있었다.발그스름한 얼굴, 흐리멍덩한 눈빛……, 이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욕조에 넣었다.“먼저 목욕이나 하자.”이서는 지환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순순히 며칠간 쌓였던 정욕을 깨끗이 비워냈다.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다른 검정색 정장으로 갈아입었다.지환은 실눈을 떴다.이서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말했다.“저 출근할 거예요.”말을 마치고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서가 나오자 운전기사는 즉시 차에서 내렸다.“윤이서 님…….”이서는 멍해졌다.“누구시죠?”“회사에서 보내서 왔습니다. 앞으로 제가 총괄 디렉터님의 출퇴근을 책임지게 됩니다. 임현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회사에 이런 복지도 있어요?”‘왜 지금까지 몰랐지?’기사는 웃으며 차문을 열었다.이서는 시간을 보고는 곧 늦을 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차안으로 들어갔다.차가 떠나는 것을 본 지환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전화를 받았다.[회장님…….]이천이 말을 이었다.[민씨 집안에서 줄곧 회장님의 개인정보를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를 주어야 할까요?]지환은 창턱에 놓인, 이서가 심은 화초를 만지작거렸다. 목소리에 유쾌함이 묻어났다.“그럴 필요 없어.”[예.]이천은 오늘 지환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단번에
장지완은 손톱을 세게 쥐고, 한참이 지나서야 허리를 비틀며 사무실로 돌아왔다.강수지도 얼른 졸졸 뒤꽁무니 따라갔다.그들이 떠나자, 심소희는 눈을 반짝이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총괄님, 정말 대단하네요! 짱 멋져요.”그녀는 이틀 전에 채용되었다. 신입이라 강수지 등 일행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 어제, 그녀는 다른 직원들이 수군거리를 걸 들었다. 새로 부임할 윤이서는 업무 경험도 없고, 하씨 집안 백으로 총괄 디렉터 자리에 앉은 허수아비라며, 틀림없이 장지완에게 눌려서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자신의 직속 상사도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심소희는 자신의 앞날이 암울함을 느꼈다. 그래서 오늘 출근하고, 며칠 뒤 적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사직하려고 했다.그런데, 윤이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리고 그들이 말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전혀 경험이 없는 초짜 같지도 않았다.이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빨리 장미 좀 치워줘요.”“네.” 심소희는 바로 청소 담당부서를 찾아가 장미를 치워달라고 했다.곧 직원들이 와서 방을 깨끗이 치웠다.이서는 들어가서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 역시 하은철이 보낸 선물이었다. 케이스 위에 카드도 한 장 있었다. [이서야,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이제야 깨달았어. 돌아와줘, 나에게로!]카드에 적힌 메모를 읽으면서, 이서는 하은철의 콧대 높은 자태를 상상했다.그녀는 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목걸이를 가방에 넣었다. 저녁에 하경철을 만나러 가서 직접 하은철에게 돌려주고자 했다.눈에 거슬리는 물건들을 처리한 후 이서는 심소희를 불러 ‘드래곤’을 주고는, 나머지는 심소희가 알아서 나눠 주라고 했다.“여기 총 41개인데, 디자인팀 동료들에게 한 개씩…….”“디자인팀 소속 직원이 총 44명인데요…….”심소희는 뒤늦게 깨달았다.“아, 부총괄님과 강수지 언니를 빼면…….”이서는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직원들에게 이 핸드폰은 내가 해외 다녀오면서 준비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