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인즉 이서 면상에 대고 가정교육이 없는 여자니, 지환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이서는 성격 좋게 웃었다. 말투는 조곤조곤 부드럽지만, 등골이 서늘할 저압감을 내포하고 있었다.“저기, 아주머니, 아직 조사가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중에 자기 발등 찍을 수도 있어요.”이미연은 지환과 하경수에게는 거리낌 느껴 너무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다.그러나 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지금 이서가 또박또박 말대꾸하자, 갑자기 얼굴빛이 바뀌더니, 윗사람이고 뭐고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아직 제대로 조사 안 됐다는 거야? 솔이의 컨셉 시안이 네 USB 안에 있었잖아! 입만 살아가지고, 너처럼 뻔뻔하고 염치없는 애는 내가 살아생전 처음 본다.”바로 이때, 줄곧 흐느끼던 박예솔이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그 USB는 확실히 이서 씨 거 아니야.”“솔아, 지금 이 지경에도 쟤 도와 얘기하고 싶니……?”“엄마, 그거 내 USB야.”예솔은 입을 오므리고 또 울려고 했다.“나도 회사에서 컨셉 시안이 누설된 걸 알고, USB 찾아봤더니, 사라졌더라고…….”“너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이서가 너의 USB를 훔쳐서 컨셉 시안을 경쟁 회사에 보낸 거네. 그럼 이제 모든 게 납득이 되네.”이미연을 바라보는 이서의 말투가 물처럼 덤덤했다.“나는 예솔 씨와 거의 만나지도 않았어요. 처음은 여기서, 두 번째는 식당에서, 그게 다예요. 지금 계속 내가 USB를 훔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물어보고 싶어요. 내가 언제 훔쳤을까요?”이미연은 말문이 막혔다.하경수도 이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거실은 괴상한 조용함에 빠졌다.유독 지환만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자기 집 아내를 바라보았다.지금 그녀는 마치 비바람에 맞고 자란 절벽 위의 난초처럼 강인하고 꿋꿋했다.별다른 매력이 느껴졌다.“엄마, 아저씨,” 박예솔은 울음을 참으며 일어나서 말했다.
CCTV에서, 지환이 이서를 불러내면서 마침 박예솔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았다. 정상 속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느린 속도에서는 모든 동작이 확대되어 보였다.그리고 이서가 박예솔을 스쳐 지나갈 때, 신속하게 박예솔의 가방에 손을 넣어 물건을 슬쩍 한 게 보였다.이서가 정신 집중하여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이제야 이서는 박예솔이 왜 이렇게 침착한지 알게 되었다.그녀는 일찌감치 CCTV에 손을 댔다.이 여자는 계략적인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까다로운 연적이다.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예솔 씨, 아직 더 볼게 남았나요?”박예솔은 입술을 깨물고 이미연을 한 번 보았다. 이미연도 실눈을 뜨고 CCTV를 보고 있었지만, 아직 이 CCTV 속에 숨겨진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더 느린 속도로 CCTV를 재생했다.“아직요, 다시 한번 볼게요.”이서가 빙그레 웃었다.이때 이미연이 마침내 CCTV의 ‘비밀’을 발견하고 CCTV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잠깐만……. 솔아, 잠깐 멈춰봐, 맞아, 다시 뒤로 돌려 감아…….”박예솔은 무덤덤한 표정 아래, 심장은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그래스서 바를 당겨 이서가 손을 가방에 넣는 순간에 정확하게 정지했다.이번에는 지환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머금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는 살짝 웃으며,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한가로이 박예솔의 연기를 보고 있었다.이미연은 화면을 가리키며 난리를 쳤다.“여기 봐봐! 정말 훔쳤어! 이번에는 증거가 확실하네, 경수 씨, 지환아, 뭔 얘기라도 해봐, 솔이 인생, 모두 쟤 때문에 망했어.”하경수도 보고 믿기지 않았다. 그는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부드러운 허릿살을 매만지며 말했다.“자기야, 하고 싶은 말 있어?”이서는 가볍게 웃었다.“마침 저도 CCTV 영상
이서의 말에, 하경수는 아니나 다를까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지었다.박예솔은 상황을 보고 허벅지의 살을 꽉 꼬집으며, 대범한 척 연기하는 이서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이 일은 일단락된 셈이다.CCTV 영상이 계속 재생되자, 곧 이서와 박예솔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다.이천은 동영상을 늦추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이며 봤다.화면에는 이서가 박예솔의 가방에 손을 넣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았다.이미연은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CCTV에 손댔지?”이서는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렸다.“아주머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이 영상은 제가 식사하던 그날 저녁에 받은 거예요. 조작 같은 거 아니에요. 믿지 못하겠으면 전문기관에 의뢰해 보세요.”지환은 나른하게 이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어조에 약간의 장난기가 띠었다.“일이 이미 충분히 명확해졌다고 보는데…… 암튼 이서가 한 건 아니에요.”박예솔은 곧 무너질 것 같았다.그녀의 원래 계획대로 라면, CCTV를 재생하는 동시에 이서에게 도둑, 악랄한 의부증 환자 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녕 지환이 이서를 용서한다고 해도 하경수가 나서서 절대 이 혼사를 결사반대하는 것, 이게 그녀의 전반적인 계획이었다.그러나 이서가 CCTV 영상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신속하게 평정심을 찾았다.“그래요, 보아하니 이 일은 정말 이서 씨가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도 아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가 고의로 사건을 일으켜 우리 두 집안의 갈라놓으려고 한 것 같아요.”말하면서 그녀는 이서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이서 씨, 미안해요.”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눈 깜짝 안 하고 박예솔을 바라보고 있었다.박예솔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일이 갑작스레 180도 반전이 일어나자, 이미연은 멋쩍게 혼자서 중얼거렸다.“네가 아니면 누구야?”“엄마.” 박예솔은 다급하게 이미연
이서가 다가와 한 손으로 박예솔의 팔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기려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만족하지…….”고개를 든 박예솔은 마침 보기 좋게 올라간 이서의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눈빛에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서의 목이라도 꺾어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일부러 그랬던 거였다!지환 앞에서 사리에 밝은 여자로 보이려면, 엄마 대신 사과해야 했다!이서는 박예솔의 눈동자 속에 비친 살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예솔 씨, 뭐 이렇게까지 그래요? 그냥 해본 말인데…….”정신이 번쩍 든 이미연은 이서를 밀치고는 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아이구, 고지식한 녀석아, 쟤한테 무슨 무릎을 꿇어……. 경수 씨…….”박예솔은 이서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봐 이미연을 끌고 황급히 떠났다.하경수는 두 사람이 허둥지둥 떠나는 뒷모습만 보고, 왜 예솔이가 무릎까지 꿇었는지에 대해 묻기도 귀찮았다.“이서야, 방금 억울했지?”이서는 고개를 돌려 시원시원하게 말했다.“아버님, 그런 말씀 마세요. 오해 풀렸으면 됐죠.”하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서를 높이 평가했다.“지환이가 이서 같은 아내를 만난 것도 저 녀석 복이다. 난 올라가서 좀 쉬겠다. 너희들도 숨 좀 돌리거라.”예솔 모녀가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난리 친 통에, 지금까지도 머리가 윙윙거리는 것이 좀 쉬어야 했다.하경수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지환의 품에 안겼다.“왜 이럴까! 뭐하는 거야?”지환은 이서의 귓불을 깨물며 따뜻한 호흡을 뽀얀 볼에 내뿜었다. 그러고는 얇은 입술로 이서의 귀에 대고 얘기했다. 이서의 볼은 빠르게 물들며,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튼튼한 가슴을 받쳤다.“아버님 위에서 쉬고 계세요!”“이 큰 집에서 뭔 걱정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다.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어루만졌다.“나 피곤해요.
컨셉 시안 유출 사건 이후, 박예솔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 이서는 지환과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귀국 날짜가 가까워지자, 이서는 선물 준비에 나섰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야, 나 곧 귀국할 거야. 너 무슨 선물 갖고 싶어?”오랜 절친인 이들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해주었다.[최근 해외에서 ‘드래곤’이라는 핸드폰이 새로 개발했다고 들었는데, 게이머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폰이래. M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하고 시장 동향 살핀 후 국내에서 출시 예정이라는데, 혹시 나 그거 구해줄 수 있어?]평소에 게임을 좋아하는 임하나는 게이머들을 위해 개발한 휴대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알았어. 잠깐만, 확인해 볼게.”검색해 보니, 해당 핸드폰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YS그룹에서 출시하는 핸드폰임을 확인한 이서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YS는 세계 최대 그룹으로, 하은철 삼촌이 설립한 상업제국이다.‘이 핸드폰, YS 작품이네!’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당겼다. 피부 속에 숨겨져 있던 맥박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19일 저녁 8시 YS 산하 핸드폰 개발 부서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소규모로 진행한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이서는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이렇게 중요한 발표회에, 삼촌이 꼭 참석하시겠지?’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이서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냐, 별일 없어.” 이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구해 볼게!”이서는 전화를 끊고, 바로 YS 공식 홈페이지에서 핸드폰 개발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이서는 한숨을 쉬고 나서야 말했다.“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 볼 게요. 혹시 19일에 핸드폰 발표회 진행하나요?”[네, 맞습니다, 고객님.]“그때 회장님도 참석하실까요?”[네. 그렇습니다, 고객님.]“실례지만, 협력사
‘정말 순수하고 귀여운 녀석이군.’박예솔도 같은 컨셉으로 등장한 걸 감안하여 이서는 박예담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그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방에 들어온 박예담은 좀 어색해했다.“괜찮아요, 편하게 앉아요.”“집을 정말 아늑하고 예쁘게 꾸몄네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지환 형이 정말 결혼할 줄은…….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동생이잖아요.”이서는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그럴까……? 그럼 편하게 얘기할게. 지환 씨 독신주의자였어?”“아니요, 지환형은 학교 다닐 때부터 워커 홀릭이었어요. 일 말고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학교 다닐 때부터 일했다고?”박예담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어…… 그게 지환이 형…… 학교 다닐 때 조그맣게 사업을 했어요.”이른바 작은 사업이라는 게, 12살 때부터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해 1년내에 그 지역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회사로 성장시킨 것이었다. YS가 세계 최대의 그룹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환이 10대 시절부터 회사 발전을 위해 이미 포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이서는 지환의 일에 흥미를 느꼈다.“정말? 그럼 대학 전공이 마케팅이었어?”지환 얘기를 꺼내자, 박예담도 신이 났는지 서서히 긴장도 풀렸다.“아니요, 형은 의학 전공이에요.”이서는 깜짝 놀랐다. 지환이 의학 공부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그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죠. 친구한테 끌려 갔는데…… 아마 그때 처음으로 지환이 형이 공부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지환 형이 의학 공부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고, 친구가 ‘사기캐’였어요. 매번 시험에서 지환형과 0.1점 차이로 이겼거든요. 그것도 총점 격차가요.”“그래서?”“그래서 나중에, 형 친구가 참다 못해 지환형에게 퇴학을 권유했어요.”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왜? 0.1점 차이라며?”“네, 그런데 지환형
박예담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두 사람은 19일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박예담을 떠나보내고 이서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절친에게 줄 핸드폰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은철 삼촌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으니.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지환은 요 며칠 바쁜지, 오후에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이서는 지환의 행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를 100% 믿었다.문이 열리고, 지환의 늘씬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서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다가가 뒤에서 이서를 껴안았다.깜짝 놀란 이서가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며 투정을 부렸다.“소리도 없어…… 깜짝 놀랐잖아요.”“뭐 맛있는 거 하는 거야?” 손을 뻗어 냄비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어묵 볶음이요.” 이서는 지환을 밀어냈다.“나가 계세요, 곧 다 됩니다.”지환은 문 앞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키스해 주면 나갈게.”이서는 어이없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오늘 예담이 왔었어요.”지환은 양복을 벗으며 물었다.“어, 무슨 일로 왔대?”“당신에 대해 이야기했어요.”말하는 사이에 이서는 이미 완성된 어묵 볶음을 내놓았다.“뭐라던데?” 지환이가 밥을 푸는 것을 도왔습니다.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천재 의사 친구 얘기했어요……. 어, 그나저나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그녀는 이제야 왜 지환이 짧은 기간에 이상언과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두 사람 모두 의학을 전공했으니, 틀림없이 공통된 관심사와 대화거리가 있을 것이다.눈동자가 굳어진 지환은 이서를 품에 안고 손가락으로 이서의 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또 뭐 얘기했어?”“암튼 당신이 학교 다닐 때의 일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아, 맞다…….”흥분한 이서는 자세를 바꾸어 앉아서 말을 이었다. 지환의 이상 반응을
발표회가 시작되면서, 회의장 내에서 핸드폰 사용 및 촬영 금지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핸드폰을 전원 끄고 나서야 박예담이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괜찮아?” 이서는 가방에서 진통제 한 알을 꺼냈다. “진통제라도 좀 먹을래?”박예담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괜찮아요.”이때 ‘드래곤’ 출시를 전담한 총책임자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이서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제야 박예담은 비로소 숨돌릴 기회를 얻었다.‘예솔 누나가 지환 형한테 얘기했는지 모르겠네.’그는 불안해서 자기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기조 연설까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같은 시각, 백그라운드.이천이 들어왔다.“회장님이 곧 도착하신다. 비밀 유지 작업에 특별히 신경 쓰도록……. 알겠나?”무대 뒤에서 모두 직원들이 일동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천의 오랜 부하들로, 그들의 업무능력에 대해 이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려 두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 맞다, 오늘 행사 참석자 명단 보여줘.”참석자 등록을 맡은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며 이천에게 명단을 건넸다.이천은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왜 글씨체가 똑같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직원은 창백한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방금 제가 실수로 명단에 물을 쏟아서…… 다시 한 부 베껴 썼습니다.”이천은 힐끗 훑어보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주의만 주며 참석자 명단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지환에게 갔다.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직원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천이 뒷문을 나섰다. 뒷문 밖에 검은색 차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전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차 안을 향해 말했다.“회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15분 후에 나가시면 됩니다.”차창이 내려가며 지환의 조각 같은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