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새파랗게 질렸다. 서한기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럼 뻔한 거 아냐? 여시화가 거짓말하고 있다잖아?] [자기 직업으로 농담을 할 사람은 없을 거야.]서한기가 다시 물었다.“너,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 받을 용기는 있기나 하니?”여시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만약 정말 간다면, 그녀가 거짓말을 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겠는가?그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만약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송성연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을 뿐인데, 사태가 이 지경까지 발전하게 될 줄이야. 여시화는 일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결국 일개 여고생에 불과한 여시화는 그리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말 세말 하더니 곧 본 모습을 드러냈다.모두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여시화의 이런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제 발 저린 모습이 아니가. 설마 진짜 송성연을 모함한 거란 말인가?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시화를 바라보며 그녀의 해명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이때 한 여자아이가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아이는 평소 겁이 많고 말을 좀 더듬었다.그래서 학교에서 자주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드물게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온 여학생이 성연을 위해 증언했다.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긴장하고 불편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또박또박 증언했다.“방금, 여시화가 못되게 굴었어. 먼저, 먼저 송성연을 공으로 쳤어. 그리고…… 사과하는 태도 때문……. 성연이가 그래서 여시화에게 그런 거야.”갑자기 밝혀진 진실에 여시화는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했다.이제 와 다시 여시화를 보니 한 떨기 수련화를 연출한 것에 불과했는데, 그동안 모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군중 속에서 여시화에 대한 비난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평소 내가 보기에 여시화 괜찮은 아이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조금
성연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좀 늦은 시간에 동아리 방에 가서 연습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진우진과 거리를 두었다.진우진은 몇 번이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성연의 태도에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성연은 대본을 들고 동아리 회장을 찾았다.“회장, 이 대본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성연이 부르자, 회장이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왔다.“왜요? 대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성연이 바로 말했다.“필요 없는 애매한 부분은 삭제해도 되잖아요? 손만 잡는 걸로 해요. 다른 스킨십은 안 할 거니까.”무진의 어두운 표정을 떠올린 성연은 모모 씨가 잔뜩 흐린 얼굴로 다가와서 자신을 붙잡지 않도록 규칙을 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원래 제기하려고 했던 의견이긴 했으나 여시화의 일이 추진 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여시화는 진우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진우진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욕심 부리다 밑천도 못 건지고 도리어 자신이 손해를 본 셈이니.비록 성연이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진우진과 너무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엔 아무것도 없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연의 말을 들은 회장이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것들을 삭제하면 볼 만한 게 뭐 있다고?”요즘 고등학생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들먹이며 회장이 끝까지 설득하려 했다.요즘 애들은 이런 몽롱하고 애매한 느낌을 좋아한다.자신의 사심이기도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포텐 지점이었다.그녀는 이미 수없이 상상했었다. 진우진과 송성연을 대상으로 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화면인가.성연이 없애라고 해서 없애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극 전체가 별로야. 전부 이 장면에 기대고 있는데 말이지.성연은 회장이 이 극본을 위해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준비를 하고 왔다.회장에게 말했다.“극본이 완성되면 관중들의 감정을 더 끌어올릴 수 있어. 봐, 여기를 좀 더 늘리면
성연은 그렇게 말을 한 후에도 심리적 부담감은 전혀 가지지 않았다.진우진 스스로 고민하라지. 자신이 그를 대신해서 의혹을 풀어줄 책임은 없으니까.모처럼 시간이 나자 성연은 자연스럽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했다.책상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게임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한쪽에서 성연이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진은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진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대본은 안 외워도 돼?”성연은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정신을 분산시키며 대답했다.“안 외워도 돼요. 어차피 대본 수정하고 있으니까요.”“왜?” 무진이 되물었다.성연은 연극 동아리의 극 줄거리 문제를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무진은 물어본 후에야 성연이 극본을 쓴 학우에게 극본 수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무진의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일부러 성연에게 물었다.“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는데?”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하나 튀어나오며 왠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홱, 하고 고개를 돌린 성연이 다소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당연히 귀찮아서죠. 누가 또 화 낼까 봐요.”이 밴댕이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성연은 극 줄거리를 수정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무진의 기분이 저조하면 왠지 자신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는다.‘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범하게 자신의 태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불쾌함을 부결하지 않았는데, 그는 확실히 불쾌했다!성연이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그가 어떻게 두 눈 빤히 뜨고 볼 수 있겠는가?성연은 나이가 어리고 놀고 싶은 마음도 강할 것이다. 아직 어리니까, 항상 자극적인 일을 찾아 헤맬 것이다.함께 지내는 동안 ‘소년소녀가 남몰래 정이 들다’, 이 말이 그냥 듣기에는 참 아름답게 들린다.하지만 무진은 이런 일이 발생하기
다음 날, 성연은 학교로 갔다. 막 교실에 도착했을 때, 진우진이 찾아와서는 성연의 자리 옆에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교실 안 모든 학우들의 시선이 진우진과 성연을 향하며, 눈에는 호기심의 빛이 반짝였다.그렇지 않아도 성연은 줄곤 학교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이제 또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흔들리듯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 자명하다.또 진우진은 북성남고 킹카라 할 수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서면 더욱 볼 만할 것이다.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낀 성연은 돌연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그 보다 의아함이 더 컸다. 진우진은 왜 여기에 와서 서있을까 하는.성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실 이것도 진우진과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성연은 더욱 평온한 태도를 유지한 채 먼저 물었다.“왜 그러는데?”성연이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며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입술을 오므리고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너랑 얘기하고 싶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너를 화나게 한 거야?”이전에는 자신을 대하는 성연의 태도가 다정함까지는 아니라 해도 꽤 괜찮다고 느꼈다.그런데 바로 어제 저녁부터 성연은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이런 인식은 우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다는 것이다.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연은 일반 친구처럼도 대하지 않았다.만약 진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반드시 고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성연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어째서 또 이 문제를 꺼내는 거야?’성연은 좀 무력감을 느끼며 대답했다.“아니야.”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진우진은 아직도 모른단 말야?그러나 성연의 말을 들었음에도 우진은 믿지 않았다.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내보였다.“대본을 수정하라는 게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어서라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진우진은 이유를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조용히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점심 시간에 옷을 갈아입은 성연은 연씨 저택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빌라 단지 입구에 기대어 서있던 서한기가 물었다.“보스, 진우진은 어떻게 된 겁니까?”학교의 소문은 서한기도 조금 들었다.매번 보건실에 오는 학생들은 많든 적든 한 두어 마디 말을 섞기 마련이다.그래서 매일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들에 대해 서한기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성연은 진우진과 여시화에 대한 일을 간단히 설명해 준 후, 진우진이 자신을 찾아온 일도 함께 말했다.그 말을 들은 서한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 녀석이 우리 보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서한기가 바로 곧 말했다.“보스, 내가 가서 혼내 줄까?”성연이 그를 흘겨보았다.“무척 한가한가 보네? 할 일도 없이.”성연의 뜻을 알아차린 서한기는 더 이상 이 일을 꺼내지 않았다.말을 마친 성연이 연씨 저택으로 향했다.연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거실로 걸어가자 연경훈도 함께 있었다.연경훈을 본 성연은 그날 밤의 일이 떠올라 무척이나 난감했다.성연이 나타난 것을 본 경훈의 눈이 확 뜨였다.“고 선생님.”성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경훈에게 인사를 건넸다.연경훈과는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으나 드러낼 수도 없었다.그저 차분히 어르신에게 주사를 놓을 수밖에.다행히도 치료 후반부에 이르러서인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경훈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을 터. 성연은 자신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 몰랐다.치료를 마친 성연이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하지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총총히 떠나려 던 때.눈치를 보던 연경훈이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고 선생님, 내가 데려다 줄게요.”성연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바쁜 일도 많으실 텐데, 볼일 보세요.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또 폐 끼치지 않도록 기사도 데리고 왔어요.”경훈은 성연에게 절대 폐 끼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성연은 경훈의 대답을 기다리지
줄곧 크게 마음 쓰는 것 없이 살았던 연경훈을 귀찮게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지금 그는 패배한 수탉과 같았다.두 사람의 관계가 꽤 괜찮다 보니 무진이 친절하게 물었다.“왜 그래?”무진이 자신을 신경 써 주자 경훈이 답답한 마음에 성연과의 일을 말했다.“아니 거절할 거면 거절하라고 했는데. 지금 마치 사나운 맹수를 만난 듯 도망가요. 커플이 될 수 없어도 친구는 될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싫은가?” 경훈은 내심 신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나름 자신의 조건이 꽤 괜찮다고 자부했다.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가면 적어도 고 선생도 약간의 감정이 생길 줄 알았다.그런데 자신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신을 피하고 있을 줄이야.이때까지 자라면서 순풍에 돛 단 듯이 어려움 없이 살았건만 난생 처음으로 이런 어려움에 봉착했다. 마음이 무지 힘들었다. 동시에 자괴감에도 빠졌다.‘내가 정말 그렇게 부족한가?’무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여자가 있어. 또 다른 여자를 만나면 돼.”순간 경훈은 울고 싶었다. 풀이 죽었다. 자기 곁에는 어떻게 하나같이 다들 이런 사람들뿐인 지.자신이 실연당했는데 다들 대수롭지 않은 듯 대했다.위로의 말도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게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성연이 학교로 돌아오자 소문은 이미 미친 듯이 퍼져 있었다.학교 게시판에서는 아예 건물까지 지어 놓고 그 위에 성연과 진우진이 몰래 만나고 있는 사진이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대세를 쫓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와, 너희들은 봤어? 진우진 송성연, 정말 잘 어울리더라. 두 사람 외모가 받쳐주니 말이다.][똑같은 사람인데, 우리 엄마는 나를 만들다 잠드셨나 봐. 어쩜 이렇게 귀신같이 낳아 주셨는지 말이야?][너희들, 송성연의 인성과 품성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잊었어? 예전에 보건 선생과 스캔들이 있었잖아? 그렇게 빨리 찢어지고는 다시 킹카를 꼬드겨 적극 대시하게 만들다니 수단이 정말 좋은가봐.]이런 괴상한 글을
여시화는 며칠 전 성연을 모함하다 아이들에게 들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가족들은 정신과 의사를 불러 그녀와 대화하게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위로해 주었다.집에서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은 다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그런데 학교에 왔는데도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는 다는 걸 알았다.오히려 진우진과 송성연의 소문만 자자해서 여시화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이때 여시화 옆에 늘 따라다니는 추종자가 붙어있었다. 여시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걸 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시화야, 송성연에게 본때를 보여줄 사람을 찾아볼까? 송성연, 진짜 여우야. 킹카 진우진까지 반했대.”“닥쳐!” 마음이 초조해진 여시화가 작은 소리로 한 마디 했다.전부터 온갖 방법을 찾아가며 진우진의 뒤를 쫓아다녔건만 정작 자신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송성연과는 알게 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서로 딱 붙어 있는 모양이 마치 자기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여시화는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지체없이 밴드부를 찾아와서 진우진을 찾을 생각이었다.그리고 진우진에게 그날 일을 해명하려고 했었다. 진우진에게 나쁜 이미지로 남을까 걱정이었다.그런데 저런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진우진이 성연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는 걸 알았다.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옆에서 여시화의 표정을 보던 추종자는 목이 움츠러들며 입도 뻥긋할 수 없었했다.그녀의 음울한 시선이 성연의 몸 위에 똑바로 떨어졌다.성연은 대본을 맡은 친구와 수정된 대본을 논의하고 있었다.감각이 예민한 성연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원망으로 표독해진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리니 미처 스커트 자락만 살짝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와 극본에 대해 논의하던 학우가 성연의 동작을 보더니 호기심에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복도만 보일뿐.“송성연, 뭘 보고 있어?” 학생이 물었
성연의 말을 들은 진미선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송종철 역시 좀 멋쩍은 표정이다.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원수 진 사람들인 줄 알만큼 전혀 부모, 자식 같지 않았다.이게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장면이라니, 성연은 그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두 사람과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며 시간 끌고 싶지 않았던 성연은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런데 왜 왔어요? 저는 두 분과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별일 없으면 찾아오지 마세요.”진미선과 송종철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던 성연의 시선이 진미선을 똑바로 향하며 말했다.“지난번에 이미 도와 드리며 말했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요.”이 일에 있어서 성연은 아주 원칙적이었다. 한번만 도와준다고 했으니 한번으로 끝이었다.만약 엄마 진미선이 이걸 빌미로 다시 매달린다고 해도,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짜증스러워하는 성연의 표정을 보며 진미선이 얼른 입을 열었다.“그건 오해야. 오늘은 그냥 너를 보러 온 거야. 며칠 전에 쇼핑하면서 옷을 몇 벌 봤는데,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주려고 일부러 왔어. 네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 안에 구두와 가방도 같이 들어있어.”마지 못해서이긴 하지만 진미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반드시 성연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 한다는 걸.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찌 되었든 성연은 자신의 딸이었다.자신은 성연이의 엄마였고, 또 외할머니와의 관계를 봐서라도 성연은 자신에게 그리 모질게 대하지 못할 터였다.자신이 성연을 잘 구슬리며 예전에 소홀히 했던 부분들을 다시 채워 주기만 한다면, 성연이 가진 것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성연은 고개를 숙여 쇼핑백 속의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유명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에 든 밝고 선명한 색상의 옷들은 모두 자기 연령대의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다.진미선이 꽤나 신경을 써서 골랐다는 게 느껴졌다.왕씨 집안에서 대우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