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말고, 천천히.”서한기가 담담하게 말하고는 여시화의 몸을 꼼꼼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검사가 끝난 후 서한기가 말했다.“별일 없는 것 같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이 상처 다 나아 있었을 텐데 말이야.”조금 전 쫓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본 서한기는 자기 보스가 문제를 일으킨 줄 알았다.하지만 보스는 항상 본분을 지킬 줄 알았다. 그러니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검사를 하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정말 속셈도 많아.’순간 깜짝 놀란 여시화가 서한기에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여시화는 서한기가 이처럼 빨리 알아차리지는 못할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서한기는 여시화가 여전히 연기하는 걸 지켜보았다.서한기가 코웃음 치며 자못 꽤나 딱딱하게 말했다.“방금 내가 눌렀던 부위 몇 군데가 공에 맞았던 데 맞아? 분명히 아니잖아? 공의 작용점은 이 범위 내야. 또 네 배는 벌겋게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아파?”자신의 연기가 들통나자 여시화가 얼굴을 붉혔다.서한기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이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여시화에게 향했다.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여시화는 얼굴이 더 화끈거리는 듯했다.평생토록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 ‘모두 송성연 때문에 망했어. 모두 쟤 때문이야!’아까 여시화를 거들어 주던 아이가 그녀의 표정을 본 뒤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시화의 뒤에서 따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진짜 시화가 일부러 그런 척한 거야? 아니, 왜 그런 건데? 설마?] [맞아, 아무 이유도 없이 시화는 송성연을 왜 모함한 거야? 둘 사이에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평소에 그렇게 착해 보이던 시화가 이런 애라고? 송성연 뒤에 대단한 후원자가 있다더라. 교장도 그녀에게 관여하지 않는데 보건교사 한 명 매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뭐.] [하긴, 전에 보건교사와 송성연이 연애한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이런 상황에
여시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새파랗게 질렸다. 서한기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럼 뻔한 거 아냐? 여시화가 거짓말하고 있다잖아?] [자기 직업으로 농담을 할 사람은 없을 거야.]서한기가 다시 물었다.“너,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 받을 용기는 있기나 하니?”여시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만약 정말 간다면, 그녀가 거짓말을 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겠는가?그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만약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송성연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을 뿐인데, 사태가 이 지경까지 발전하게 될 줄이야. 여시화는 일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결국 일개 여고생에 불과한 여시화는 그리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말 세말 하더니 곧 본 모습을 드러냈다.모두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여시화의 이런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제 발 저린 모습이 아니가. 설마 진짜 송성연을 모함한 거란 말인가?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시화를 바라보며 그녀의 해명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이때 한 여자아이가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아이는 평소 겁이 많고 말을 좀 더듬었다.그래서 학교에서 자주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드물게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온 여학생이 성연을 위해 증언했다.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긴장하고 불편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또박또박 증언했다.“방금, 여시화가 못되게 굴었어. 먼저, 먼저 송성연을 공으로 쳤어. 그리고…… 사과하는 태도 때문……. 성연이가 그래서 여시화에게 그런 거야.”갑자기 밝혀진 진실에 여시화는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했다.이제 와 다시 여시화를 보니 한 떨기 수련화를 연출한 것에 불과했는데, 그동안 모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군중 속에서 여시화에 대한 비난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평소 내가 보기에 여시화 괜찮은 아이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조금
성연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좀 늦은 시간에 동아리 방에 가서 연습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진우진과 거리를 두었다.진우진은 몇 번이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성연의 태도에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성연은 대본을 들고 동아리 회장을 찾았다.“회장, 이 대본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성연이 부르자, 회장이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왔다.“왜요? 대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성연이 바로 말했다.“필요 없는 애매한 부분은 삭제해도 되잖아요? 손만 잡는 걸로 해요. 다른 스킨십은 안 할 거니까.”무진의 어두운 표정을 떠올린 성연은 모모 씨가 잔뜩 흐린 얼굴로 다가와서 자신을 붙잡지 않도록 규칙을 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원래 제기하려고 했던 의견이긴 했으나 여시화의 일이 추진 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여시화는 진우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진우진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욕심 부리다 밑천도 못 건지고 도리어 자신이 손해를 본 셈이니.비록 성연이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진우진과 너무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엔 아무것도 없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연의 말을 들은 회장이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것들을 삭제하면 볼 만한 게 뭐 있다고?”요즘 고등학생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들먹이며 회장이 끝까지 설득하려 했다.요즘 애들은 이런 몽롱하고 애매한 느낌을 좋아한다.자신의 사심이기도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포텐 지점이었다.그녀는 이미 수없이 상상했었다. 진우진과 송성연을 대상으로 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화면인가.성연이 없애라고 해서 없애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극 전체가 별로야. 전부 이 장면에 기대고 있는데 말이지.성연은 회장이 이 극본을 위해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준비를 하고 왔다.회장에게 말했다.“극본이 완성되면 관중들의 감정을 더 끌어올릴 수 있어. 봐, 여기를 좀 더 늘리면
성연은 그렇게 말을 한 후에도 심리적 부담감은 전혀 가지지 않았다.진우진 스스로 고민하라지. 자신이 그를 대신해서 의혹을 풀어줄 책임은 없으니까.모처럼 시간이 나자 성연은 자연스럽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했다.책상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게임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한쪽에서 성연이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진은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진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대본은 안 외워도 돼?”성연은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정신을 분산시키며 대답했다.“안 외워도 돼요. 어차피 대본 수정하고 있으니까요.”“왜?” 무진이 되물었다.성연은 연극 동아리의 극 줄거리 문제를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무진은 물어본 후에야 성연이 극본을 쓴 학우에게 극본 수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무진의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일부러 성연에게 물었다.“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는데?”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하나 튀어나오며 왠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홱, 하고 고개를 돌린 성연이 다소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당연히 귀찮아서죠. 누가 또 화 낼까 봐요.”이 밴댕이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성연은 극 줄거리를 수정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무진의 기분이 저조하면 왠지 자신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는다.‘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범하게 자신의 태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불쾌함을 부결하지 않았는데, 그는 확실히 불쾌했다!성연이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그가 어떻게 두 눈 빤히 뜨고 볼 수 있겠는가?성연은 나이가 어리고 놀고 싶은 마음도 강할 것이다. 아직 어리니까, 항상 자극적인 일을 찾아 헤맬 것이다.함께 지내는 동안 ‘소년소녀가 남몰래 정이 들다’, 이 말이 그냥 듣기에는 참 아름답게 들린다.하지만 무진은 이런 일이 발생하기
다음 날, 성연은 학교로 갔다. 막 교실에 도착했을 때, 진우진이 찾아와서는 성연의 자리 옆에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교실 안 모든 학우들의 시선이 진우진과 성연을 향하며, 눈에는 호기심의 빛이 반짝였다.그렇지 않아도 성연은 줄곤 학교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이제 또 불어오는 바람에 풀이 흔들리듯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 자명하다.또 진우진은 북성남고 킹카라 할 수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서면 더욱 볼 만할 것이다.반 아이들의 시선을 느낀 성연은 돌연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그 보다 의아함이 더 컸다. 진우진은 왜 여기에 와서 서있을까 하는.성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실 이것도 진우진과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성연은 더욱 평온한 태도를 유지한 채 먼저 물었다.“왜 그러는데?”성연이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며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입술을 오므리고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너랑 얘기하고 싶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너를 화나게 한 거야?”이전에는 자신을 대하는 성연의 태도가 다정함까지는 아니라 해도 꽤 괜찮다고 느꼈다.그런데 바로 어제 저녁부터 성연은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이런 인식은 우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다는 것이다.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연은 일반 친구처럼도 대하지 않았다.만약 진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반드시 고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성연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어째서 또 이 문제를 꺼내는 거야?’성연은 좀 무력감을 느끼며 대답했다.“아니야.”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진우진은 아직도 모른단 말야?그러나 성연의 말을 들었음에도 우진은 믿지 않았다.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내보였다.“대본을 수정하라는 게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어서라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진우진은 이유를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조용히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점심 시간에 옷을 갈아입은 성연은 연씨 저택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빌라 단지 입구에 기대어 서있던 서한기가 물었다.“보스, 진우진은 어떻게 된 겁니까?”학교의 소문은 서한기도 조금 들었다.매번 보건실에 오는 학생들은 많든 적든 한 두어 마디 말을 섞기 마련이다.그래서 매일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들에 대해 서한기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성연은 진우진과 여시화에 대한 일을 간단히 설명해 준 후, 진우진이 자신을 찾아온 일도 함께 말했다.그 말을 들은 서한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 녀석이 우리 보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서한기가 바로 곧 말했다.“보스, 내가 가서 혼내 줄까?”성연이 그를 흘겨보았다.“무척 한가한가 보네? 할 일도 없이.”성연의 뜻을 알아차린 서한기는 더 이상 이 일을 꺼내지 않았다.말을 마친 성연이 연씨 저택으로 향했다.연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거실로 걸어가자 연경훈도 함께 있었다.연경훈을 본 성연은 그날 밤의 일이 떠올라 무척이나 난감했다.성연이 나타난 것을 본 경훈의 눈이 확 뜨였다.“고 선생님.”성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경훈에게 인사를 건넸다.연경훈과는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으나 드러낼 수도 없었다.그저 차분히 어르신에게 주사를 놓을 수밖에.다행히도 치료 후반부에 이르러서인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경훈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을 터. 성연은 자신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 몰랐다.치료를 마친 성연이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하지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총총히 떠나려 던 때.눈치를 보던 연경훈이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고 선생님, 내가 데려다 줄게요.”성연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바쁜 일도 많으실 텐데, 볼일 보세요.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또 폐 끼치지 않도록 기사도 데리고 왔어요.”경훈은 성연에게 절대 폐 끼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성연은 경훈의 대답을 기다리지
줄곧 크게 마음 쓰는 것 없이 살았던 연경훈을 귀찮게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지금 그는 패배한 수탉과 같았다.두 사람의 관계가 꽤 괜찮다 보니 무진이 친절하게 물었다.“왜 그래?”무진이 자신을 신경 써 주자 경훈이 답답한 마음에 성연과의 일을 말했다.“아니 거절할 거면 거절하라고 했는데. 지금 마치 사나운 맹수를 만난 듯 도망가요. 커플이 될 수 없어도 친구는 될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싫은가?” 경훈은 내심 신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나름 자신의 조건이 꽤 괜찮다고 자부했다.그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가면 적어도 고 선생도 약간의 감정이 생길 줄 알았다.그런데 자신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신을 피하고 있을 줄이야.이때까지 자라면서 순풍에 돛 단 듯이 어려움 없이 살았건만 난생 처음으로 이런 어려움에 봉착했다. 마음이 무지 힘들었다. 동시에 자괴감에도 빠졌다.‘내가 정말 그렇게 부족한가?’무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여자가 있어. 또 다른 여자를 만나면 돼.”순간 경훈은 울고 싶었다. 풀이 죽었다. 자기 곁에는 어떻게 하나같이 다들 이런 사람들뿐인 지.자신이 실연당했는데 다들 대수롭지 않은 듯 대했다.위로의 말도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게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성연이 학교로 돌아오자 소문은 이미 미친 듯이 퍼져 있었다.학교 게시판에서는 아예 건물까지 지어 놓고 그 위에 성연과 진우진이 몰래 만나고 있는 사진이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대세를 쫓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와, 너희들은 봤어? 진우진 송성연, 정말 잘 어울리더라. 두 사람 외모가 받쳐주니 말이다.][똑같은 사람인데, 우리 엄마는 나를 만들다 잠드셨나 봐. 어쩜 이렇게 귀신같이 낳아 주셨는지 말이야?][너희들, 송성연의 인성과 품성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잊었어? 예전에 보건 선생과 스캔들이 있었잖아? 그렇게 빨리 찢어지고는 다시 킹카를 꼬드겨 적극 대시하게 만들다니 수단이 정말 좋은가봐.]이런 괴상한 글을
여시화는 며칠 전 성연을 모함하다 아이들에게 들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가족들은 정신과 의사를 불러 그녀와 대화하게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위로해 주었다.집에서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은 다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그런데 학교에 왔는데도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는 다는 걸 알았다.오히려 진우진과 송성연의 소문만 자자해서 여시화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이때 여시화 옆에 늘 따라다니는 추종자가 붙어있었다. 여시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걸 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시화야, 송성연에게 본때를 보여줄 사람을 찾아볼까? 송성연, 진짜 여우야. 킹카 진우진까지 반했대.”“닥쳐!” 마음이 초조해진 여시화가 작은 소리로 한 마디 했다.전부터 온갖 방법을 찾아가며 진우진의 뒤를 쫓아다녔건만 정작 자신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송성연과는 알게 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서로 딱 붙어 있는 모양이 마치 자기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여시화는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지체없이 밴드부를 찾아와서 진우진을 찾을 생각이었다.그리고 진우진에게 그날 일을 해명하려고 했었다. 진우진에게 나쁜 이미지로 남을까 걱정이었다.그런데 저런 장면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진우진이 성연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는 걸 알았다.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옆에서 여시화의 표정을 보던 추종자는 목이 움츠러들며 입도 뻥긋할 수 없었했다.그녀의 음울한 시선이 성연의 몸 위에 똑바로 떨어졌다.성연은 대본을 맡은 친구와 수정된 대본을 논의하고 있었다.감각이 예민한 성연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원망으로 표독해진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리니 미처 스커트 자락만 살짝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녀와 극본에 대해 논의하던 학우가 성연의 동작을 보더니 호기심에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복도만 보일뿐.“송성연, 뭘 보고 있어?” 학생이 물었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