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한 조수경의 모습에 안금여는 화가 났다.경성 지역의 손씨 집안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날뛰다니.’경성의 큰 가문은 맞지만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서 이런 날강도 같은 짓을 하다니, 그야말로 횡포가 극심했다.조수경이 여기서 지내면서도 불안해할까 걱정이 된 안금여가 안심을 시켰다.“아무 일 없을 거야. 여기서 지내다 폭풍이 지나가거든 다시 이야기하자. 손씨 집안 사람들이라 해도 내 앞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안심하고 여기에서 지내.”다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는 조수경.조수경의 입 모양을 본 안금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그 즉시 손을 들어 다시 감사인사 하려는 조수경을 막아세웠다.“됐다. 내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고맙다’ 세 글자다. 내 친구의 손녀인 넌 내 손녀이기도 해. 이 할머니를 너무 어려워 말거라.”조수경은 안금여의 손을 잡은 채 감동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안금여 할머니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고 아가씨, 너무 부담 갖지 마. 그저 상에 수저 더 놓는 것뿐이야.”강운경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말을 하지 않을 때의 강운경은 꽤나 엄한 인상이다.그래서 조수경에게 무서운 이미지를 심어 줄까 신경이 쓰인 것. “운경 이모, 할머니, 모두 정말 친절하세요.” 조수경은 지금의 이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이고 얘도 참. 너 뭐 좀 먹었니?” 안금여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자신의 배를 쓸던 조수경의 볼이 금세 새빨개졌다.서두르는 바람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고택으로 바로 왔다. 안금여가 자신을 거두지 않는다면 얼른 다른 곳을 찾기 쉽도록.조수경의 얼굴을 본 안금여가 눈치를 채고 강운경에게 일렀다.“운경아, 주방에 먹을 것 좀 준비하라고 하거라.”안금여의 세심한 배려에 조수경은 더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할머니, 아니에요, 배고프지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안금여는 강운경에게 눈짓을 보내
식사를 마친 후, 하인이 조수경을 데리고 방으로 안내했다.목욕을 하고 나온 후에 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마치 새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조수경은 기분이 좋아졌다.그저 방 안에서 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거실로 나가 안금여, 강운경과 함께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그때, 거실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던 안금여는 마침 무진이 유럽에서 북성으로 막 돌아온 게 생각났다.무진을 불러 서로 인사도 시키고 또 앞으로 조수경이 북성에서 지내는 동안 보살피게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어쨌든 지금 강씨 집안을 안팎으로 관리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무진이니까.무진이 하는 말이 좀더 설득력이 있을 터.안금여가 직접 무진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하자 무진이 바로 고택으로 건너왔다.무진이 거실로 들어서자 안금여는 조수경을 가리키며 무진에게 소개했다.“무진아, 여긴 수경이야, 조수경, 할머니 친구 손녀.”안금여의 소개에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같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안녕, 난 강무진이다.”조수경은 무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뚜렷한 이목구비에 맞춤 정장 차림의 무진은 목 끝까지 셔츠 단추를 채고 있어 금욕적이면서 시크한 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조수경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인사했다. “안, 안녕하세요.”무진은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 안금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그저 한 사람 소개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그러나 무진은 생각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안금여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그저 무진과 조수경을 서로 소개시켜 줄 생각뿐이었음을.안금여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무진아, 수경이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야. 나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딸리니까 앞으로 수경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좀 도와주도록 해.”안금여의 말을 듣는 순간 그제서야 무진은 할머니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까닭을 알아차렸다.그러나 할머니의 절친한 친구 손녀라는 생각에 무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다 나누었다 싶은 안금여는 무진에게 조씨 집안에 일어난 변고를 전해주었다.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는 조수경의 마음을 생각해서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무진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무진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두 눈에 동정의 빛을 띄었다. 그저 북성에 놀러 온 조수경이 며칠 고택에 머무는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런 힘든 일을 당하고 왔을 줄이야.그제야 조수경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조수경의 눈자위가 다시 붉어지기 시작하며 음성에도 울먹임이 더해졌다.“무진 오빠, 정말 어쩔 수 없이 여기 고택에 와서 폐를 끼치게 됐어요. 진짜 너무 많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그 말에 무진이 안심시키듯이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 안심하고 여기에서 지내.”할머니의 목적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무진.자신에게 조수경을 비호하라는 뜻.같은 남자로서 무진 역시 손민철이 한 짓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다.또한 할머니가 직접 말씀하셨는데 자신이 안 도울 수가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무진 오빠, 정말 고마워요. 여기가 아니면 전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강씨 집안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강무진은 언뜻 냉정해 보였지만 사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안금여가 조수경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북성에 왔으니 여기서 마음 놓고 지내.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휴가 온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야. 모든 건 금세 지나갈 거야.”“네.” 조수경이 코를 훌쩍이며 감동된 음성으로 말했다.“항상 너희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 손씨 집안 같은 사람들을 그냥 둬서는 안돼. 저들의 기를 살려주면 더 미쳐 날뛰게 될 거야.”조수경이 가족들 생각에 지금까지 끌어왔으리라 생각하며 한 말이다.“할머니, 저희 할머니도 똑같이 말씀하셨어요.”안금여의 말을 듣고 할머니를 떠올린 조수경은 안금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자신의 할머니를 경성에 홀로 두는 게 마음에 걸린 조수경은 자신도 경성에 남아 할머니를 돌볼 생각
안금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되긴 뭐가 돼? 네가 이제 막 왔으니 우리도 제대로 대접을 해야지. 무진이가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 정도 시간은 뺄 수 있다.”일단 조수경의 정서가 걱정되는 데다 손민철 쪽의 사람들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이럴 때는 누군가 함께 있어 주는 게 좋을 테지.’조수경은 망설이며 무진을 한 차례 슬쩍 쳐다보았다.무진에게 호감을 느낀 자신은 무진과 같이 나간다니 당연히 좋았다.하지만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무진은 속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 생각하며 대답했다.“뭐 쇼핑 정도는 시간을 내 볼 수 있겠네요.”조수경의 두 눈이 반짝였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무진이 조수경에게 물었다.조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무진 오빠, 옷을 좀 사고 싶어요. 여기 올 때, 시간이 너무 빠듯해서 제대로 챙겨 오질 못했어요.”손민철이 눈치챌까 봐 거의 야밤도주 하다시피 해서 온 참이었다.무진 역시 수긍하며 말했다. “그래, 데리고 백화점으로 가도록 하지.”고택에는 상시 대기 중인 운전기사가 있어서 언제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안금여는 무진이 좀 냉담한 성정이지만 속은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은 더더욱 없다는 것도.그래서 믿고 조수경을 맡긴 것이다.안금여가 입술을 옆으로 늘이며 살며시 웃었다.“그럼 두 사람 외출해서 쇼핑을 하도록 해. 할머니는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여 너희들을 기다리마. 쇼핑한 김에 겸사겸사 근처에서 좀 놀다 와도 돼. 북성엔 경치 아름다운 곳이 많단다.”“가지.” 무진이 조수경에게 말했다.조수경은 안금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할머니, 나갔다 올게요. 늦지 않게 돌아올게요.”“어여 가거라.”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안금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나이가 드니 젊은 아이들이 자신의 곁에서 북적대는 것이 좋았다.차 안.무진이 오른쪽에 앉고 조수경이 왼쪽에 앉
조수경과 무진은 금세 백화점에 도착했다.WS 그룹 계열의 백화점이다. 움직이기 전에 백화점을 비우라고 무진이 미리 지시한 상태. 조수경이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도록.물론 무진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몰려서 귀찮아지는 일을 피하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고.무진과 조수경이 등장하자 백화점 대표가 직접 나와서 안내했다.“강 대표님, 오셨습니까?”대표의 태도가 유난히 공손하다.무진이 시선을 명품 숍으로 향했다.“원하는 대로 골라 봐.”“무진 오빠, 고마워요.” 조수경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했다.백화점 대표는 과거 무진의 약혼녀에 대한 일은 북성 전체가 다 알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슬쩍 조수경의 얼굴을 보니 예전 기사에 났던 약혼녀 사진과 다른 듯했다.비록 사진은 금세 삭제되었지만, 조수경은 절대 약혼녀가 아니라고 확신했다.그래서 강무진 대표의 애정이 옮겨갔다고 생각했다.그러다 조수경이 무진을 부르는 호칭을 듣고서야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원래 강 대표의 여동생인가 보다. 어쩐지 강 대표가 다정한 모습으로 대한다 했더니, 직접 데려와 옷도 사주고 말이지.’조수경이 가게로 들어서자 즉시 숍 매니저가 다가오며 친절하게 제품들을 소개했다.“고객님, 이것이 최신상입니다. 피부가 이처럼 좋으시니 분명 잘 맞을 겁니다.”조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한번 입어볼 게요.”곧바로 의상을 옷걸이에서 벗긴 후에 조수경을 데리고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강무진 대표와 함께 온 여성이니만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그리고 분명 씀씀이도 크겠지?’‘몇 벌만 팔아도 몇 개월치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어.’조수경은 피팅 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가슴선이 좀 내려온 의상을 입은 채 조수경은 부끄러운 듯이 가슴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숍 매니저는 피팅룸에서 나오는 조수경을 보며 곧바로 칭찬세례를 퍼부었다.“어머, 고객님, 정말 너무 잘 어울려요. 이 의상을 입어서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도 드물어요. 고객님 같은 몸매라야 소화 가능해요.”숍
마침 일을 처리하고 있던 무진은 매번 달려와 묻는 바람에 피곤해 이마를 찌푸렸다.“네가 알아서 골라.”자기가 좋아하면 그냥 사면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매번 물어봐도 자신은 조수경의 취향을 잘 모르지 않나?그런데 무진의 말에 조수경이 애교스럽게 혀끝을 내밀었다.“내 안목을 믿을 수가 없어서요. 난 무진 오빠의 안목을 믿어요.”어차피 사람을 데리고 쇼핑하러 온 이상, 할머니에게 잘 돌봐 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업무만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건 너무 예의가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무진은 휴대폰을 가슴 안으로 집어넣고 소파에서 일어섰다.“가자, 봐줄 테니.”“네.” 무진의 뒤를 따라가는 조수경의 입꼬리가 멈출 생각 없이 올라갔다.조수경은 비교적 얌전하게 생긴 유형이어서 무진은 부드러운 스타일의 옷 몇 벌을 되는 대로 골라주었다.조수경은 무진이 고른 옷들을 끌어안고 피팅 룸 안에 가서 한 벌 한 벌 차례대로 갈아입었다.무진의 눈은 정말 예리하고 할 수밖에 없었다.별 생각 없는 듯이 내키는 대로 골랐음에도 모두 조수경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옆에 있던 숍 매니저가 즉시 칭찬했다.“강 대표님의 안목이 정말 뛰어나시네요. 모두 고객님을 위해 맞춤 제작한 것 같아요.”조수경도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무진 오빠, 오빠의 안목이 훌륭하다는 걸 난 진작 알았어.”무진은 조수경에게 어떤 옷들을 골라주었는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됐어.”“무진 오빠, 하나 더 골라 주세요.” 조수경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무진이 흘깃 돌아보니, 조수경의 손에 들린 옷은 겨우 두세 벌. 확실히 충분하지 않았다.그래서 손이 가는 대로 정장 한 벌을 집어 건네주었다.조수경은 시종 무진만 바라보았다.무진이 고른 옷들은 모두 조수경이 손에 받아들었다.무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너 안 입어 봐?”조수경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난 무진 오빠를 믿어요.”무진이 보기에 이제 거진 옷을
조수경의 말에 잠시 멈칫한 무진. 손민철이 조수경에게 얼마나 악랄하게 하는 지 그야말로 일말의 퇴로마저 막아버렸다.여자를 얻기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수단까지 쓰는 걸 보니 도대체 진짜 좋아하기나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그러나 이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자신은 그저 할머니의 요구에 따라 예를 다하기 위해 데리고 쇼핑을 나왔을 뿐.“가자.” 무진이 앞으로 나와 조수경의 옷값을 지불했다.원래라면 무진 자신이 지불해야 했는데 자존심 강한 조수경이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려 한 것.뒤에 서 있던 경호원이 크고 작은 쇼핑 백들을 들었다. 숍 매니저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인사했다.“언제든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밖으로 나온 후, 조수경은 매우 부끄러웠다.강씨 집안에 머무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옷값까지 지불하게 하다니.어쩌다 자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겠다.“괜찮아.”무진은 간단히 대답했다.조수경은 거대한 강씨 집안은 하는 사업 규모도 커서 이런 푼 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자신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더군다나 강무진 앞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무진 오빠, 걱정 마요. 돌아가면 바로 돌려드릴 게요.”강무진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돈 때문에 찾아왔다고 생각할까 봐. 사실 조수경은 마음 깊숙이 자신에 대한 무진의 생각에 더 신경이 쓰였다.하지만 그런 마음을 깊이 숨긴 채 드러낼 수 없었다.대등해진다면,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됐어. 옷값, 얼마되지도 않아. WS그룹 계열의 백화점이야.” 그러니 무진이 쓴 돈은 결국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자신의 카드로 계산하려던 것을 보면, 조수경이 무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만약 몇 마디 보충해 주지 않으면 더 마음에 걸려 할 터.“그래도 안 돼요. 할머니와 강씨 집안에서 절 호의로 받아주셨는데 제가 그걸 이렇게 이용하면
“회장님, 밖에서 누가 찾아왔습니다. 손민철이라고 하는군요.” 집사가 급히 와서 보고했다.안금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민철이 찾아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됐어, 그냥 들어오라고 해.” 손씨 집안이 경성 지방의 명문대가이지만 회사 내에 손씨 집안과 얽힌 사업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 하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다.제일 중요한 것은 안금여의 확신처럼 일단 강씨 집안 문턱을 넘어온 이상 손민철이 아무리 간이 크다 해도 함부로 할 수는 없으리라 것.“예.” 집사는 즉시 사람을 집안으로 들였다.조수경의 일은 조금 전 옆에 서서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는 집사.손민철이 이곳에 온 것은 십중팔구 조수경의 일 때문일 터.거실에 들어오는 손민철을 안금여가 유심히 살펴보았다.생김새는 나름 잘 생겼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 음흉함이 숨겨지지 않은 채 미간에 드러나 있었다. 아마 횡포를 부리는 것도 바로 저 비열하고 음흉함 때문일 터.“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손씨 집안 큰 자제께서 방문을 다 하셨는가? 우리 북성과 경성은 수 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을 테네?”안금여의 말에는 은근히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그러나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손민철은 화도 내지 않은 채 히죽히죽 웃으며 안금여에게 말했다.“북성에 오면 당연히 강씨 집안 최고 어르신을 찾아 뵈어야죠. 연배가 낮은 아래 사람이 윗 연배의 어르신들을 찾아 뵙고 예를 다하는 게 도리죠.”“손씨 집안 장남이 생각이 깊구만.” 안금여가 냉소하며 말했다.안금여 역시 충분히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았다.손민철에 차와 디저트를 갖다 주게 집사에게 지시했다.손민철은 능청스럽게 앉아서 차를 몇 모금 마셨다.앉은 지 몇 분 되지 않았을 때, 손민철도 더 이상 가장하지 않고 물었다. “어르신, 조수경이 북성에 와서 강씨 집안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이질 않네요. 여기에 있는지 어떤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척 걱정이 됩니다. 조수경
예민주는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원래 길을 잃은 두 아이가 펑펑 울게 만든 다음에, 무진에게 아이들이 그다지 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예상 외로 아이들은 영리한 데다가 일찌감치 철도 들었다. 졸지도 떠들지도 않은 데다가 얌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무진은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점심 휴식 시간이 제한적이었다.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여기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예민주도 아직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영리한 핑계를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들 부자 세 사람만 지낼 기회를 절대 줄 수가 없었기에.결국 세 사람이 대표 집무실에 함께 있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게 둘러댈 일이 아니야.”“너 계속 큰소리로 말하지 마!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몰라?”이제 세 사람은 이미 오후 내내 함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 무진은 회의를 하러 갔기에, 대표실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예민주는 이미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른한 자태로 소파에 기댄 예민주의 얼굴에는 온통 경멸하는 표정만 가득했다.집에서도 이렇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정말 억울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예민주에게 말려들곤 했다.사진이 낮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런데 아줌마,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예민주는 이제 숨기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바로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해! 아무도 너희들 응석을 받아주지 않아!”예민주의 말투는 아주 야박해서 두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역시나 예민주의 말이 막 떨어지자, 사진은 이미 엉엉 울기 시작했다.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초롱초롱한 사진의 두 눈은 지금 완전히 눈물에 젖은 가련한 모습이었다.사무는 평소 집에서는 여동생을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한 손으로 여동생을 가볍게 안고 달래면서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좀 있다가 아
“예민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성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예민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바탕 구역질이 났다.클래식한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서, 다음 순간 성연은 이미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해!” 문 앞에 도착한 성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한기를 보면서 소리쳤다.10여 분 후, WS그룹 1층.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성연은 아주 멋진 드리프트 솜씨로 차를 건물 입구에 세웠다.주차 도우미 직원과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만 남았기에, 직원은 이미 쓰러질 지경이었다.“무즌 주차를 이렇게 해요?” 이렇게 거친 주차 방식을 보자, 직원은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고 성연이 차에서 내렸다.자신에게 다가온 직원의 눈길을 마주하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한바탕 퍼부으려던 직원은 성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말문이 막혔다.“차는 주차장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에 그래도 놔 둬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차가 다른 곳에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겁니다!”“하지만 아가씨, 이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성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나를 믿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말이 끝나자, 성연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갔다. 마치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걸음걸이였다.성연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1층의 안내 데스크.“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데스크의 여직원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웃었다.“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죄송합니다만, 대표
‘그 여자는 분명히 그 다른 쪽이라고 했어. 즉, 그 여자가 알려준 건 잘못된 방향이었어.’‘만약 그 여자가 방향을 몰랐다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있게 위치를 말했어.’‘그건 자신이 있다는 말이야!’이렇게 생각하자, 예민주에 대한 사무의 인상은 더욱 좋지 않았다.다음 순간, 턱을 살짝 든 사무가 두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제 여동생이 아직 저쪽에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가서 여동생을 데리고 올게요.”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좀 놀랐지만, 소년이 돌아서는 걸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대답했다.“아, 여동생! 그래, 그래.”화장실에 간 후, 사무와 사진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혹시 함정이라도 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걸 떠올리자,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첫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 놀이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한편 다른 한쪽. 시재 백화점에 갔다가 별장으로 돌아온 성연은 양 손에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이것들은 모두 성연이 업무를 마친 뒤에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고른 장난감이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너무 바빴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밤이거나, 좀 일찍 집에 돌아와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성연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을 열자 거실은 조용했다. 위층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우리 사진이, 사무? 엄마가 돌아왔어!”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성연이 말했지만, 아이들의 열정적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사진아? 사무야? 너희들 집에 있니?”“사무야?”아래층에서 계속 몇 번이나 소리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큰 집에 성연 자신의 목소리만 울릴 뿐.“보스, 아이들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이때 서한기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집에 없다니?” 성연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순간 마음속에
“그 여자는 이전에 엄마하고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다만 아직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그럼 이따가 우리 어떡하지?” 사진이 약간 지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오전 내내 이곳을 왔다갔다했으니 아이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그리고 방금 위층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전히 아주 자신있게 서한기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후회막심’이다.‘지금 아직 한기 아저씨가 있다면. 바로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서 쉴 텐데.’“일단은 우리 계획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온 건 그 여자하고 상관이 없어.”원래 신중한 사무지만, 지금 사무의 말은 오빠라는 사무의 입장과 아주 딱 맞게 진지했다.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건 핑계였지만,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한참을 가도 식당 창문이나 작은 방은 곳곳에 있는데, 예민주가 말한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억울한 듯이 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사진은 움직이기도 귀찮았다.여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자, 사무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반짝이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지?”말을 마친 사무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오늘 가지는 좀 맛이 없어.”“그래도 괜찮은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사무는 식사 중이던 두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누나, 실례합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 있어요?”목소리는 여리지만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밥을 먹고 있던 두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먹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온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플한 검은색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잘 어울리는 걸.’‘얼굴의 통통한 젖살이 큐티 작살인데!’‘그야말로 너무나 귀여운 아이야!’사무는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
예민주가 무진을 보러 매일 회사에 올 수는 없는 노릇.그러나 자신이 잘 쓰는 방법을 사용해서 WS그룹에 자기 부하를 하나 심었다.매일 무진의 스케줄을 예민주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오늘 아침 전화한 사람은 두 아이가 몰래 대표실에 들어갔는데, 줄곧 대표님을 아빠라고 불렀다고 말했다.평소 기발한 행동을 해서 명문가에 시집가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다.운성 경제의 명맥을 쥐고 있는 무진과 누가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겠는가!매일 프런트에서 자칭 ‘강무진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을 몇 명이나 상대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거의 대부분은 프론트에서 차단되지.’‘그런데 오늘 대표 집무실로 직접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니.’원래 예민주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머릿속에 문득 성연의 모습이 번뜩였다.‘결국 당황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급히 회사로 달려왔는데.’‘뜻밖에도 정말 송성연과 관계가 있었어!’예민주는 다시 눈앞의 이 두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예민주의 눈빛에 음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너희들은 평소에 엄마하고 같이 있지 않니?”사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요, 매일 엄마하고만 같이 있어요. 그래서 아빠가 보고싶어요.”아이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예민주는 내친 김에 계속 캐물었다.“너희들은 이전에 줄곧 외국에 있었는데, 아빠 가족들이 너희들을 찾지 않았어?”“아빠 가족들요?” 뭔가를 눈치챈 듯, 사진이 고개를 돌려서 옆에 있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교환한 두 아이는 자신들만 알 수 있는 작은 신호들을 사용했다.‘이 여자는 그냥 회사를 좀 구경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사무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아주머니, 이게 잘 안 들어가는데요? 좀 도와 주실래요?”갑자기 사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레고 블록을 든 채.예민주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사무가 성깔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남자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약간 쉰듯한 목소리에서는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예민주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이 두 아이 귀엽지 않아요? 오히려 오빠가 그렇게 쫓아냈는데, 만약 누군가 영상이라도 찍었다면, 회사의 명성에 영향을 주지 않겠어요?”“누가 감히 우리 WS그룹을 함부로 보도할 수 있겠어?”무진의 말에는 힘찬 기세가 담겨 있었다.무진이 결코 지나치게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강경할 수 있는 것이다.무진이 이렇게 말하자 예민주는 잠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잠시일 뿐!다시 무진에게 다가간 예민주가 작은 소리로 무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사실 쟤들은 이 참에 오빠하고 잠시 함께 있기 위한 핑계였어요.”예민주가 다가오자, 순간 그윽한 향기가 무진의 코에 스며들었다.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무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막 좁혀졌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다.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접근해서 기회를 틈타 상류층으로 오르려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심지어 한 번만 만나려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사람들도 있다.그런 사람들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매번 비서진이 쉽게 대처했지만,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은 예민주다.자신의 여자 친구인.무진의 이런 습관을 예민주도 사실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예민주는 절대로 이렇게 짙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그래야 무진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무진이 이렇게 배척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예민주는 이 ‘금기’를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방금 무진의 동작은 지금 예민주의 눈에는 적나라한 거부이자 분명한 소외감이었다.그러나 예민주는 감히 이 억눌린 마음을 마음속에 묻어두어야 했다.겉으로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했다.입가에 줄곧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애들하고 얘기를 해 볼게요. 애들이 왜 대표실을
“감탄할 수밖에 없어! 저 아가씨가 사랑 앞에서 저렇게 자신을 낮출 수 있다니!”“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대표님 여자친구는 정말 총명하다는 거야!”“뭔데? 뭔데? 나만 모르는 거야?”“...”회사에서는 업무 시간에 뒷담화를 하지 못하도록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없을까?어떻게 다 금지할 수 있을까?지금 회사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여전히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오히려 당사자들은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회사 식당에 온 예민주는 룸에 도착했다.평소에 무진은 사실 사실 이쪽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손건호가 식사를 가지고 오면 늘 대표 집무실에서 식사를 했다.하지만 여전히 무진을 위한 개인 공간이 갖춰져 있었다.바깥의 인테리어도 좋지만, 내부 공간은 여전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바로 돈이 있어서 좋은 점!단지 식사를 하는 공간이지만, 룸 안에는 대형TV와 편안하고 넓은 가죽 소파가 갖춰져 있었다. 또 각종 커피 메이커, 정수기, 그리고 국외에서 수입한 첨단 설비들이 갖춰져 있어서 그야말로 작은 휴게실이나 다름없었다.“아줌마, 회사 구경을 시켜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에는 왜 왔어요?”사진은 자신의 작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무진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하지만 남자들이 이동하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빠, 나 아빠 옆에 있고 싶어.”무진의 행동이 이렇게 소원하자, 사진은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으려고 했다.여동생을 힐끗 본 사무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나도 어쩔 수가 없어.”“엉엉. 사진이한테는 너무 어려워!”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슬피 우는 소녀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예민주는 들어오기 전에 미리 장난감과 먹을 걸 준비해 달라고 시켰다.지금 이미 예민주가 시킨 물건들을 보내왔다.이쪽을 보니 무진은 옆에 있는 아이의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얘들아, 너희들은 어느 집 아이들인데 지금 회사에 있는 거니?”온화한 모습으로 살짝 몸을 숙인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민주의 모습에는 어떤 허세도 보이지 않았다.두 아이는 이전에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본 데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인 걸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흥분한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면서 사진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저희는 여기를 구경하고 싶어요.”사진은 여린 목소리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예민주는 고개를 돌려서 무진을 한 번 보았다. 무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아줌마가 너희들 회사 구경을 시켜줄까?”“이제 곧 점심 시간이야. 너희들도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걸 사줄까?”예민주의 제안은 시원시원하고 아주 열정적이라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주야, 이 두 아이는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그렇게 애들을 여기 남겨두고 놀게 하다가, 무슨 일에 엮일 지도 몰라.”“괜찮아요. 이 두 아이가 무슨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겠어요. 그저 단지 여기를 지나다가 궁금해서 좀 더 구경하고 싶을 뿐일 거예요.”예민주가 시간을 보니 마침 12시가 다 되었다.“같이 한 바퀴 돌아볼래요? 오빠도 한참동안 나하고 함께 있지 못했잖아요.”철이 든 모습의 예민주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결국 무진의 마음속 예민주에 대한 미안함이 이성에 승리를 거두었다.두 아이는 지금도 무진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다.‘사무실에 있을 때는 우리한테 냉담했지만, 결국 우리 친아빠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잘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모두 처음 겪은 일이기에, 잠시 동안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던 아이들도 마음을 놓았다.‘어렵게 왔는데, 아빠하고 좀 더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