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이 그들을 떼여놓을 계획을 고민하는데 하은설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시간 있어? 나랑 병원 좀 같이 가줄 수 있을까?” 심유진은 김욱의 사무실에 있다가 그 문자를 받고 바로 하던 일을 내려놓고는 반차를 썼다. 하은설은 회사에 가지 않았는지 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했다. 생얼로 외출한 하은설은 안색이 안 좋았고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와 있었다. “왜 그래?” 하은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뭐?” 심유진은 놀라서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핸들을 잘못 돌려 사고가 날 뻔했다. 다행히 얼른 정신을 차렸지만 뒤에서 오고 있는 차량들은 짜증을 내며 경적을 울렸다. 하은설은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감쌌다. “진정해!” 심유진은 아예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참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잠시 진정 좀 할게.” 하은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천천히 자신의 상황을 말했다. “이번달에 생리가 며칠이나 미뤄졌어. 평소에는 딱딱 정해진 시간에 오거든. 그래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테스트해봤는데 두줄이 떴어. 근데 아닐 수도 있어!” 하은설이 도대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심유진을 위로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매번 피임 잘해서 가능성이 낮아.” 심유진은 이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허택양이 정말 의도를 품고 접근한 거라면 일부러 임신을 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심유진은 두려움과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시동부터 걸었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 결과는 빨리 나왔다. 큰 이변 없이 하은설은 정말 임신이 맞았다. 하은설은 검사결과가 적힌 종이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이 물었다. “얘기할 거야?” “모르겠어.” 고개를 젓는 하은설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럼 아이는 낳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어.” 심유진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책임감 있는 남자라면 결혼하기 전에 임신시키지 않았을 거야.” 심유진은 허택양의 진짜 신분은 밝히지 못하고 그냥 간접적으로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결혼하자는 말을 안 한 건 맞아.” 하은설이 말했다. “근데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하긴 했어.” “그럼 지금 전화해서 임신했으니까 어떡할 거냐고 물어봐.” 심유진은 마음이 조급했지만 하은설의 인생이니 대신 결정을 내려줄 수 없었다. “나...” 하은설이 망설였다. “이틀만 고민해 보면 안 될까?” 하은설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지금 마음이 너무 복잡해. 조금 진정할 수 있게 해 줘. 그래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심유진도 더 이상 하은설을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 어느덧 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됐다. 심유진이 하은설에게 물었다. “같이 별이 데리러 갈래?” “응.” 하은설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원에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여 다니고 있었다. 심유진은 하은설을 자신의 뒤에 두고 혹시나 생길 위험에 대비했다. 하은설도 긴장하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가끔씩 뒤를 돌아볼 때마다 심유진은 하은설이 주위의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심유진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부러 하은설을 재촉했다. 겨우 별이의 교실 문 앞까지 도착했다. 대부분 아이들은 이미 떠났는데 별이는 교실 안에 없었다. 선생님은 심유진과 하은설이 온 걸 보고 잠시 멈칫하다가 얼른 해석했다. “오후에 한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다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졌거든요. 그래서 별이가 그 아이랑 같이 병원에 갔어요.” “별이가요?” “선생님도 함께 계세요. 아이 부모님이 바쁘셔서 올 수가 없었는데 별이가 평소에 그 아이랑 친해서 혹시 혼자 병원에서 무서울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저희는 어머님이 평소처럼 늦게 오실 줄
심유진은 간호사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멍든 아이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미끄럼틀에서 떨어진 사건은 목격자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별이도 그 목격자 중 한 명이니 거짓말일리가 없었다. 심유진은 웃으며 간호사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별이를 데리고 나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별이가 얼른 해석했다. “엄마, 간호사 아줌마가 하는 말 믿지 마. 선생님들 다 엄청 좋은 분들이야! 학대 한 적 없어! 진짜 미끄럼틀에서 떨어진 거야 내가 봤어.” “엄마도 알아” 심유진이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치원 옮길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병원은 바이러스가 많기에 심유진은 하은설과 같이 들어가지 않았고 하은설은 차 안에서 기다렸다. 별이는 하은설을 발견하고는 심유진의 손을 놓고 잽싸게 달려갔다. 별이가 하은설을 와락 안으려는데 심유진이 호통쳤다. “멈춰!” 별이는 깜짝 놀라서 행동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심유진은 얼른 다가가서 별이를 뒷좌석에 앉혔다.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예전처럼 어리 궂게 행동하면 안 돼.” 엄숙한 표정을 한 채 심유진이 별이를 가르쳤다. “예전보다 많이 커서 그렇게 이모한테 달려들면 이모가 다칠 수도 있어. 알겠어?” 별이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하은설에게 사과했다. “이모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조금 놀란 하은설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별이 앞에서는 여전히 따뜻한 모습이었다. “그래. 이모도 용서했어.” 심유진은 하은설을 한번 쳐다보고는 차에 올랐다. 별이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하은설에게 물었다. “이모, 남자친구는 갔어?” 하은설은 표정이 굳어졌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건 왜?” 별이는 더욱 의아했다. “근데 어떻게 나 데리러 온 거야?” 하은설은 일부러 별이의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 이모는 별이 보고
심유진은 하은설이 아이를 남기지 않았으면 했지만 하은설이 어떤 선택을 하던지 일단은 건강을 챙기는 게 중요했다. 하은설은 복잡한 심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고마워.” 별이는 하은설과 완전 다른 반응이었다. 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허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또 직접 요리한데.”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보낸 별이의 문자를 보고 허태준도 포옹을 해주는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 “돌아가면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별이는 또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다. “이모도 있어서 오늘은 맛있는 거 먹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허태준은 흥미가 생겼다. “이모랑 같이 있어? 남자친구는 갔대?” 허태준은 업무용 휴대폰을 꺼냈다. 허택양이 미국을 떠났다는 소식은 없었다. “아니. 일하러 갔나 봐. 오늘 이모랑 엄마가 같이 데리러 왔어.” 별이의 말에 허태준은 더욱 경계했다. 심유진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하은설은 출근시간 외에 계속 허택양과 같이 있었다. 허택양이 이 시간에 일을 할리는 없을 것이다. 허태준은 갑자기 그 두 사람을 떼여놓을 생각이라던 심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엄마 어디 이상한데 없지?” 허태준이 묻자 별이는 심유진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없어. 평소랑 똑같아.” 허태준은 더욱 의아했다. 하은설과 관련된 일에서 심유진이 이렇게 침착함을 유지할리가 없었다. 허태준은 별수 없이 별이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엄마 잘 지켜봐 줘. 혹시 수상한 부분 있으면 알려주고.” 삼계탕은 조리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은설은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표정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푹신하고 편안한 가죽소파에 누워서 하은설이 또 한 번 감탄했다. “역시 돈이 좋네.” 심유진은 어이없어하며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마셔.” 하은설이 장난스럽게
하은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 뇌는 장식이야?” 심유진이 소파에 내팽개쳐진 휴대폰을 주어서 하은설에게 줬다. “그렇게 안 받을수록 그 사람도 생각이 많아질 거야.” 하은설은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심유진의 감시하에 영상통화를 받았다. 심유진에게 허택양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하은설은 일부러 방향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은설 역시 심유진처럼 서비스직에서 오래 일했던 사람이기에 감정을 숨기는데 능했다. 허택양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직이요.” 하은설은 귀뒤로 넘긴 머리를 다시 내리며 화장 안 한 얼굴을 감췄다. “삼계탕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삼계탕이요? 좋겠네요.” 허택양이 부러워하며 말했다. “은설 씨가 없어서 밥이 넘어안가요.” 허택양의 목소리는 엄청 스윗했다. 담백하면서도 귀여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애교였다. 하지만 심유진은 그런 애교에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느끼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심유진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은설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지만 심유진이 옆에 있었기에 일부러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오글거리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밥 챙겨 먹어요.” 심유진은 소름이 돋아 팔을 문지르자 하은설은 휴대폰 카메라를 피해 심유진에게 눈을 흘기고는 입모양으로 꺼지라고 경고했다. “흥.” 심유진이 돌아서서 자리를 피하자 하은설은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하은설과 허택양은 한참을 꽁냥 거리다가 심유진이 밥 먹으라고 부를 때가 되여서야 아쉬워하며 통화를 끝냈다. 심유진은 수저를 놓으며 투덜거렸다. “아까 전화받기 싫다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 하은설은 웃으며 삼계탕을 가득 담았다. “내일 휴일이라 만나기로 했어.” 하은설이 뜨거운 국을 후후 불며 말했다. “알려줄 거야.” 그 말에 국을 뜨던 심유진은 순간 삐끗해 다 흘
여형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 씨 친구가 허택양 아이를 임신했다고?” 허태준이 조용하라는 듯 차갑게 노려봤다. “은설 씨는 낳겠대?” 허태준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하은설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심유진은 하은설의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일 허택양과 얘기해 보겠대요.” 허태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요?” 그 모습에 심유진은 긴장이 됐다. “허택양은 아이를 지우라고 하지 않을 거야.” 허태준이 차분하게 얘기했다. “아이가 은설 씨를 묶어둘 좋은 미끼가 될 테니까. 그럼 은설 씨가 더 자신에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겠지. 당신한테 불리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은설 씨가 아이 때문에 협조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어.” “그럴 일은 없어요.” 심유진이 반박했다. 심유진은 자신과 하은설 사이의 우정은 그 누구도 깨트릴 수 없다고 믿었다. “은설 씨가 당신을 허택양보다 중요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기 핏줄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야. 허택양은 거기에 건 거고.” 허태준은 갑작스러운 비웃음 소리에 하던 말을 멈췄다. “풉.” 여형민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아예 대놓고 웃었다. “너네 집안 형제는 어떻게 하는 짓이 똑같냐.” 여형민이 비웃었다. “허택양은 자기 형보다 나을 줄 알았더니 결국 또 여자와 아이를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려고 하네.” 심유진은 여형민의 말을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여자와 아이를 이용해서 목적에 달성한다라... 허택양은 확실히 하은설과 배속의 아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게 맞지만 허태서는 뭘까? 심유진은 한참 동안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정소월과 허아리밖에 없었다. 심유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표정변화를 눈치챈 허태준도 표정이 안 좋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가해?” 허태준이 여형민에게 물었다. 여형민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한가하기는. 아까
허태준이 그 말을 꺼낸 탓에 심유진은 온밤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심유진은 방황하고 막막했던 임신 초기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은설도 곁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베개가 젖어있었다. 연한 파란색을 띤 베갯잇에 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혹시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심유진은 일부러 이불과 베개를 다 씻어서 베란다에 널어뒀다. 별이가 일어나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엄마, 오줌 싼 거야?” 심유진은 대꾸해주지 않고 아침상을 차린 뒤 열쇠를 들고 집문을 나섰다. “삼촌 데리러 갈게.” 집에 아이가 있기에 김욱은 일부러 심유진 집에서 업무토론을 진행하기로 했다. 김욱의 차는 대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심유진을 보자마자 그는 트렁크에서 종이 박스 하나를 꺼내서 심유진에게 건네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챙겼다. 무거운 박스에 심유진이 물었다. “이건 뭐예요?” 김욱이 턱으로 심유진이 든 박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파일.” 그리고 자신이 든 걸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별이한테 줄 거.” “별이건 사지 말라니까.” 심유진이 원망했다. “별이는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 장난감도 너무 많아서 둘 곳이 없을 정도라고.” 육윤엽과 김욱이 별이에게 사줬던 장난감들 중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게 가득했다. 하지만 김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박했다. “어쩌다 만나는 건데.” 심유진은 이사하면서 김욱과 육윤엽의 슬리퍼도 같이 가져왔다. 김욱은 신발을 갈아 신으며 신발장을 예의주시했다. “뭘 그렇게 봐?” 심유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김욱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별이 신발은 안 부족한가 싶어서.” 심유진은 화를 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 부족해! 필요한 게 하나도 없어! 사 오면 다 버릴 줄 알아.” “알겠어.” 김욱은 대충 대꾸했다. 별이는 아침을 먹다 말고 문소리를 듣고는 얼른 달려왔다. “삼촌!”김욱은 별
한참을 봐도 허태준이 생활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심유진은 김욱에게 자신과 허태준 사이의 관계를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대충 핑계를 댔다. “나랑 별이가 잠시 머무를 곳이야. 은설이가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원래 나한테 호감을 표시하던 사람이거든. 은설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데 혹시 들키면 상황이 난감해지잖아. 마침 태준 씨가 빈 집이 있다고 하길래 일단 이사 왔어.” 김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업무 전달은 오전 내내 진행됐고 심유진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자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달을 시켰다. 밥을 먹으며 심유진이 김욱에게 말했다. “오후에 별일 없으면 애 좀 봐줄 수 있어? Maria랑 쇼핑하고 저녁 먹기로 했거든.” 김욱은 흔쾌히 동의하고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일찍 들어와.” 심유진은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 Maria와 주말에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Maria는 여전히 깔끔하게 꾸몄지만 옷 스타일은 평소보다 훨씬 캐주얼했다. 심유진을 보자마자 Maria는 열정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Maria가 묻자 심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따라갈게요.” 하지만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심유진은 그 말을 후회했다. Maria는 지치지 않는 기계처럼 쇼핑을 했고 매장 내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녔다. 심유진은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입어보고 바로 사는 스타일이었지만 Maria는 옷을 열 벌 정도 골라두고 하나하나 입어본 뒤 심유진에게 평가까지 부탁했다. 하지만 결국 한벌도 사지 않았다. 심유진은 가게 안의 소파에 앉아서 직원이 준 물을 마시며 하은설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해? 얘기는 잘 끝났어?” 그때 Maria는 또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더니 기대에 찬 눈길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어때요? 예뻐요?” 심유진은 이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아까 했던 말들을 또 한 번 반복했다. “예뻐요. 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