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방금 급해서 힘을 세게 준 것 같기도 했다. 심유진이 얼른 소매를 걷어 확인해보려고 하자 Freddy는 깜짝 놀라서 팔을 숨겼다. “아니에요.” 심유진은 이상한 반응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빠한테 얘기해서 병원 갔다 올까?” “싫어요!” 심유진이 타일렀지만 Freddy는 반응이 격렬했다. Freddy가 뒤로 물러서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아빠한테 얘기하지 마요! 병원도 안가!” 심유진은 두려워났다. “알겠어. 얘기도 안 하고 병원도 가지 말자. 이리 와서 얘기 좀 하자.” 심유진이 손을 저었지만 Freddy는 여전히 경계하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허태준이 경적을 울리고 나서야 심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Freddy는 그 틈을 타서 얼른 Allen의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Allen이 뭐라고 말을 하자 Freddy는 차창을 내리고 환하게 웃으며 심유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까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유진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심유진이 반응이 없자 허태준은 다시 한번 경적을 울렸고 그제야 심유진은 별이를 데리고 차에 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주차를 해놓은 위치는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둘 다 10분도 훨씬 더 걸렸다. “당신 상사랑 얘기 좀 하느라.” “무슨 얘기요?” 허태준은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별이를 보며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 근데...”허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일단 멀리해. 심상치 않은 사람인 것 같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허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심유진이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했다. 하은설이 일하는 호텔 근처였는데 하은설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이기도 했다. 심유진은 하은설을 우연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이곳으로 골랐다. 아직까지 자신의 문자에 답장도 안 하는 모습을 보니 긴급 습격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밥은 집에 가서 먹게 됐다. 심유진은 입맛이 없어서 대충 몇 입 먹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이 방에 따라 들어갔을 때 심유진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자국소리에 고개를 든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라기보다는 통화할 때 목소리가 낯익어서 의심을 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확인하려고 공항에 데리러 가겠다고 한 거고요?”“응.” 허태준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하은설이 거절했기에 허태준은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실을 확인했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줄 거야?” 허태준이 물었다. 심유진이 어떻게 얘기하냐에 따라 허태준도 계획을 바꿔야 했다. “모르겠어요.” 심유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심유진은 내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요. 저희 때문이라면 당연히 은설이에게 멀리하라고 얘기하겠지만 정말 은설이한테 반한 거면 어떡해요?” 하은설이 행복해하던 표정이 심유진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하은설이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생각대로라면 두 번째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허태준이 찬물을 끼얹었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꼭 쥔 채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럼 어떡해요?” 심유진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은설이한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기꾼이고 지금까지 다 계획 있는 행동이었다고 얘기해 줄 수는 없잖아요.” 그럴 경우 하은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게 될지 상상하기 싫었다. 가장 좋은 친구고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준 은인 같은 사람이며 별이를 제외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속상해할 거예요.” 심유진이 울컥해서 눈물을 흘렸다. “성격 좋아 보여도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라고요.” 허태준 역시 마음이 아팠다. 허태준은 세심하게 눈물을 닦아줬다.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가해내자.” “무슨 방법이요?” 심유진이 눈물
“완벽하긴 한데.” 허태준은 일단을 인정해 주고 협상을 했다. “내가 할 테니까 조용히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는게 어떨까?” 심유진은 허태준을 믿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전에 은설 씨가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야 돼.” “그건 좀 힘들어요.” 심유진은 갑자기 김이 빠졌다. 심유진과 하은설은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하은설을 속이기는 쉽지 않았다. “전에 은설이한테 거짓말하면 다 들켜요.”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네.” 허태준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자 심유진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사 가자.” “네?” 심유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사 가자.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언젠가는 나가야 돼. 사놓은 집이 몇 채 있는데 원래 같이 둘러보고 고르라고 하려고 했어. 근데 지금 긴급한 상황이니까 일단 가장 가까운 집에서 잠시 지내자.” 국내의 유명인들이라면 부동산 사업은 다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허태준 정도의 신분이라면 대형 빌딩 여러 채를 사서 임대를 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아직 허태준과 동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언제요?” “오늘? 늦어서 내일.” 허태준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주말에 시간 있을 때 이사 해야지. 아니면 또 일주일 미뤄야 돼. 일주일 동안 계속 만날 텐데 그러면 들킬 위험도 크고.” 심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알겠어요. 내일 옮겨요. 별이한테 짐 정리하라고 말할게요.” “그래.” 성공적으로 속이니 허태준은 기분이 좋았다. 허태서는 어차피 지금 힘을 못 쓸 테니 며칠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사를 한다는 말을 듣자 별이는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컸다. 이모랑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빠랑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심유진은 별이를 설득하는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
심유진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허태준은 여전히 차분했다. “전부터 옮기겠다고 했잖아요. 요즘 시간이 있으니까 미리 짐을 조금 옮겨두려고요.” 허태준이 이렇게 말하자 하은설은 자신이 먼저 이사 얘기를 꺼냈던 것이 생각나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집을 찾은 거예요?” 허태준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계획했죠.” 하은설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대표님!”심유진은 일부러 등을 돌리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하은설은 심유진을 안으며 물었다. “왜? 나랑 떨어지기 아쉬워?” 심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하은설은 오히려 심유진을 위로했다. “걱정 마. 밥 얻어먹으러 자주 갈게.” “그래.” 심유진은 눈을 꼭 감으며 복잡한 생각을 최대한 떨치려고 노력했다. “이모!” 좀 전에 심유진에게 한소리를 듣고 별이는 더 하은설에게 달라붙었다. “오늘 데이트했어?” 하은설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심유진을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별이를 쿡쿡 찔렀다. “애들은 어른들 일에 신경 쓰지 마.” “이모 기분 좋지 않아? 우리 이사 가면 남자친구 데리고 와도 되잖아.” “심유진!” 하은설이 심유진을 째려보며 말했다. “아들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심유진은 하늘에 맹세하며 하은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맨날 너랑 막장 드라마나 봐서 그렇겠지.” 하은설은 말문이 막혔지만 별이를 훈육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모는 솔로야. 남자친구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마. 시집 못 가면 나중에 별이네 집에 눌러 살거 야.” “어?” 별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어젯밤에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하은설은 놀라서 얼른 별이의 입부터 막으며 조용하라는 눈짓을 했다. “잘못 들었어!” “됐어.” 심유진이 차가운 시선으
심유진도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얘기했어요?” “내가 전남편인걸 알더라고.” 허태준이 차분히 말했다. “그냥 추측이겠죠. 전 얘기한 적 없어요.” 심유진은 자신의 개인사를 얘기하기 싫어했기에 별이가 친아들이라는 사실도 별이가 실수로 Freddy 앞에서 말해버렸고 Freddy가 그걸 또 Allen에게 말했기에 알려진 것이었다. “정소월도 알고 있었어.” 이 이름을 말하며 허태준은 초조한 마음으로 심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눈빛이 변하는 게 보였다. “정소월이라는 이름은 몰랐지만 우리 셋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어.” 그래서 Allen은 지금 이게 다 연기라고 생각하고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유진 씨는 저랑 어울려요.” “만약에 뒷조사를 해서 알아낸 거라면 우리를 잘 아는 사람이 찾아갔을 것 같아. 그리고 허태서가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심유진은 정소월이라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불쾌함을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대화의 중점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허택양이 확실히 우리 때문에 온 거라는 말이에요?” “의심일 뿐이야.” 허태준은 확실한 답변을 주기가 어려웠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찌푸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해결할 거라고 했잖아.” 이제 심유진은 하은설만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하은설과 허택양을 헤여지게 만드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허태준이 전화 한 통만 하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심유진은 지금 허태준의 안위가 가장 걱정됐다. 허택양이 어떤 일을 벌이던 결국 최종목적은 허태준을 없애는 것일 것이다. “아니면 귀국할래요?” 심유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응?” “국내는 여기보다 안전하잖아요.” 국내는 허태준이 꽉 잡고 있었기에 보호받기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돌발사건이 너무 많고 보복성적인 총기사건과 길거리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깡패들이 있었기에 암살의 위험이 더 높았다. “제
허태준은 귀국행 비행기표를 사고 떠나기 전 심유진을 도와 이사를 마쳤다. 새 집은 원래 집과 도로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43층이나 되는 호화로운 건물은 전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허태준이 가지고 있는 집중에 가장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심유진과 별이가 살기에는 가장 알맞았다. 인테리어는 예전에 살던 주인이 해놓은 대로였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처 바꿀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점은 있을 건 다 있었기에 인테리어 때문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심유진과 별이 모두 매우 만족했다. 허태준은 짐을 옮기고 숨 돌릴 새도 없이 바삐 떠나야 했다. 별이는 울면서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생사 이별을 하는 사람 같았다. “가지 마! 아빠 안 간다고 했잖아!” 허태준은 항상 별이에게 따뜻한 아빠였기에 이렇게 우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매정하게 떠날 수는 없었다. 그저 차근차근 도리를 설명해 줄 뿐이었다. “일만 처리하고 금방 돌아올 거야.” 하지만 별이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가지 마!” 결국 심유진이 강제로 떼여놓고 나서야 허태준은 떠날 수 있었다. 허태준이 떠나자 별이는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심유진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별이는 얼굴을 닦더니 허태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허태준은 바로 받고는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엄마 너무 대단해. 내가 그렇게 우는데도 안 잡았어.” “엄마는 아빠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그런 거야. 화내지 마.” “화 안 내.” 별이는 심유진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빠 정말 돌아가는 거야?” “응.” 허태준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쫓겨난 마당에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귀국해서 결판을 내야 하긴 했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허태준이 별이에게 말했다. “엄마 말 잘 듣고 엄마 화나게 하지 마. 알겠지?” “응
허태준이 떠나자 별이는 데려다주는 임무는 심유진에게 차려졌다. 이제 다친 다리도 다 나아서 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불편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퇴근시간이 별이의 하학시간보다 늦었기에 예전처럼 선생님께 잠시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허태준은 떠나기 전에 김욱에게 이 얘기를 했었기에 김욱도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 퇴근하라고 했지만 심유진이 원하지 않았다. 블루 항공은 금방 대표직들이 전원 사직하는 대참사를 겪었으니 다들 야근하면서 업무를 다그쳐야 할 때였다. 게다가 회사를 나간 직원들이 여러 고객들을 데려갔기에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그러니 심유진도 당연히 그들과 함께 이 고난을 이겨나가야만 했다. 허택양이 나타났기에 심유진은 또 더 큰 압력을 느꼈다. 심유진은 김욱에게 점심시간에 회사 업무에 대한 전달을 받을 수 있냐고 물었고 김욱 역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심유진은 밥 친구였던 Maria를 버리고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들고 김욱의 사무실로 갔다. 밥을 먹으면서 회사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육윤엽도 들어와서 회사 비전에 대해 얘기하군 했다. Maria는 여러 번 심유진에게 같이 쇼핑을 가거나 밥을 먹자고 초대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허태준과 하은설이 별이를 챙겨줄 수가 없으니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 심유진은 최대한 거절했다. Maria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바빠요? 남자친구가 생겨서 몰래 연애라도 하는 거예요?” “연애를 몰래 할 필요가 있나요?” 심유진이 되물었다. Maria는 손을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알리기 싫을 수도 있죠.” “아니에요. 별이를 데리러 가야 해서 그래요. 집에 챙겨줄 사람이 없거든요.” “그 잘생긴 기사님은요?” “휴가 썼어요.” 심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며칠 있다가 올 거예요.” 하지만 Maria는 그래도 심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럼 주말에 시간 있어요? 토요일에 쇼핑
심유진이 그들을 떼여놓을 계획을 고민하는데 하은설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시간 있어? 나랑 병원 좀 같이 가줄 수 있을까?” 심유진은 김욱의 사무실에 있다가 그 문자를 받고 바로 하던 일을 내려놓고는 반차를 썼다. 하은설은 회사에 가지 않았는지 집으로 데리러 오라고 했다. 생얼로 외출한 하은설은 안색이 안 좋았고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와 있었다. “왜 그래?” 하은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뭐?” 심유진은 놀라서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핸들을 잘못 돌려 사고가 날 뻔했다. 다행히 얼른 정신을 차렸지만 뒤에서 오고 있는 차량들은 짜증을 내며 경적을 울렸다. 하은설은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감쌌다. “진정해!” 심유진은 아예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참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잠시 진정 좀 할게.” 하은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천천히 자신의 상황을 말했다. “이번달에 생리가 며칠이나 미뤄졌어. 평소에는 딱딱 정해진 시간에 오거든. 그래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테스트해봤는데 두줄이 떴어. 근데 아닐 수도 있어!” 하은설이 도대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심유진을 위로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매번 피임 잘해서 가능성이 낮아.” 심유진은 이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허택양이 정말 의도를 품고 접근한 거라면 일부러 임신을 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심유진은 두려움과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시동부터 걸었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 결과는 빨리 나왔다. 큰 이변 없이 하은설은 정말 임신이 맞았다. 하은설은 검사결과가 적힌 종이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이 물었다. “얘기할 거야?” “모르겠어.” 고개를 젓는 하은설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럼 아이는 낳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어.” 심유진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