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의 가족활동은 오후에 진행되었다. 일부 반급만 참여하기에 유치원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허태준은 베이킹 재료들이 담겨있는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다른손으로 별이의 손을 잡았다. 심유진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하은설의 문자를 기다렸다. 하은설은 오늘 휴식일이었기에 원래대로라면 집에 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젯밤에 그 베일에 싸인 친구가 왔다고 이른 아침부터 외출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만나서 깨를 볶고 있을 것이다. 심유진은 그 신비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었으나 하은설이 원하지 않았기에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허태준과 별이 그리고 심유진까지 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기에 심유진은 미리 하은설에게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물론 그 친구와 함께 와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하은설은 계속 답장이 없었다. 베이킹 교실에는 이내 사람이 가득 찼다. 준비해 놓은 테이블이 부족했기에 여러 가족들이 한 테이블을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 심유진은 Allen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을 뿐만 아니라 Allen이 Freddy를 데리고 자신과 같은 테이블을 쓸 줄도 몰랐다. 지난번에 영화관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심유진은 Allen과 연락한 적이 없었다. 심유진은 이렇게 우정도 끝나버리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다시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진 씨.” Allen은 예전과 다름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허태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허태준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심유진도 똑같이 예의를 차렸다. Freddy는 계속 쭈뼛쭈뼛 거리면서 Allen의 뒤에 숨었다.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Allen은 자신이 가져온 재료들을 내놓으며 물었다. “같이 해도 될까요?” 심유진은 조금 불편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테이블은 공용이니 말이다. “그럼요.” “뭐 만드실 거예요?” Allen이 물었다. 심유진도 재료들을 꺼내며 대답했다. “간단한 딸기 케이크 만들려고
허태준은 딸기 한알을 심유진의 입에 가져다 댔다. “아 해.” 심유진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런 애정행각이 익숙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얼굴을 붉히며 딸기를 가져가려고 했으나 허태준이 얼른 피했다. “손으로 줄까 입으로 줄까? 하나 골라.” 허태준은 달콤한 목소리로 협박을 잘했다. 심유진은 얼른 입을 벌려 딸기를 물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심유진이 딸기를 베여물자 허태준은 남은 반조각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달다.” 허태준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심유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허태준의 눈빛이 바뀐걸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은 순간 조금 불쾌한 심정이 들어서 허태준의 허리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자제 좀 해요. 집에 가서 봐요.” “알겠어.” 허태준은 웃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심유진은 더 세게 꼬집으며 말했다. “웃지 말라니까요.” 허태준이 웃기까지 하자 여자 선생님들은 아예 대놓고 그를 쳐다봤다. 심유진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바로 표정을 굳혔다. 심유진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 “그대로 유지해요.” 허태준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Allen과 Fredyy는 여유로운 심유진과 달리 매우 다급했다. 케이크보다 쉬운 에그타르트를 선택했는데 계란과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틀에 붓기만 하면 되는 메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우유와 계란 그리고 설탕이 여기저기에 쏟아진 상태였는데 평소에 깔끔 떠는 성격이 아닌 심유진조차 인상을 찌푸릴 지경이었다. “도와줄까요?” 심유진이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더 내버려 뒀다가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허태준이 테이블을 아예 밖에 내다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돼요?”Allen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럼요.” 심유진은 신속하게 재료들을 섞어서 틀에 부었다. “이제 오븐에 반시간정도
Allen의 말투에 묘한 감정이 드러났다. “뭐가 달라요? 저도 여기까지 오기 전에 그런 단계들을 거쳤는걸요.” 심유진은 허태준이 또 뭔가 일을 꾸미기라도 할까 봐 얼른 선을 그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별이와 함께 서로의 얼굴에 생크림이나 밀가루를 묻히면서 놀고 있었다. 심유진은 뭐가 잔뜩 묻은 얼굴들을 보니 머리가 아팠다. “죄송해요.” 심유진은 Allen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별이에게 가서 귀를 잡아챘다. 사실 허태준도 혼내고 싶었지만 교실에 사람이 많았기에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뭐해요” 심유진이 호통을 쳤다. “이따가 밥 먹으러 갈 건데 옷이 더러워서 식당에 출입 못하게 하면 어떡하려고.” “그럼 다른 가게로 가지 뭐.” 허태준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호텔이 조금이라도 더럽기만 하면 바로 청소를 담당한 직원부터 자르던 그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별이는 심유진의 호통에 기가 죽기도 전에 허태준이 자기편을 들어주니 얼른 심유진의 손을 뿌리치고 허태준에게 안겼다. “맞아! 다른 가게 가면 돼!” 심유진은 화가 났지만 뭐라도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허태준이 손에 생크림을 묻히더니 심유진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입가에 생크림을 묻혀버렸다. 그리고 기뻐하며 별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장난에 성공해서 우쭐한 모습이었다. 심유진은 화를 내려고 했지만 신나 하는 둘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 또래보다 항상 성숙하고 무슨 일에서든지 조심스럽던 별이가 정말 아이처럼 기뻐하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태준과 함께 있으면서 별이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심유진은 가끔 그들을 보며 머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더 이상 봐주다가는 케이크가 나오기전에 생크림을 다 써버릴 것만 같았다. 심유진은 다시 표정을 관리하고 생크림을 압수한 다음 얼굴을 닦을 휴지를 건넸다.
허태준은 차갑게 웃었다. “그러게 누가 다른 사람 아내까지 넘보래.” 심유진은 조금 전까지 느꼈던 동정심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 허태준의 말이 매우 도리가 있었다. Allen이 새 아내를 찾기만 하면 Freddy는 완전한 가정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Freddy를 아무리 동정해도 아이의 소원까지 들어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기 아들이 훨씬 중요하니 말이다. 케이크 빵이 완성되었다. 오븐을 열자마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심유진은 빵을 잘라서 별이에게 건네주며 친구들이랑 나눠먹으라고 했다. 별이라면 Freddy에게 가장 먼저 줄줄 알았는데 별이는 다른 테이블부터 가더니 빈접시를 들고 왔다. 심유진은 조금 화가 났다. 별이가 활발하고 장난스러운 사람이 되길 바란 건 맞지만 이렇게 이기적이길 바란 건 아니었다. 심유진은 별이를 불러서 물었다. “왜 Freddy에게는 안 나눠줬어?” 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싫어서 안 나눠줬어.” 별이는 Freddy와 사이가 좋았지만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직도 화해를 하지 않았다. 심유진은 별이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어른의 각도에서 봤을 때 아무래도 조금 더 부드럽게 일을 처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 나눠주면서 한 사람만 제외시키는 건 따돌림이야. Freddy가 많이 속상할 거야.” 심유진은 별이를 타일렀다. “만약에 다른 친구들이 별이만 안 끼워주면 별이도 속상하지 않을까?” 예전 같았으면 별이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Freddy에게 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별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싫어하는 거 아니야. 나도 상처받아서 싫어하는 거야. 아빠가 위법행동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나눠주기 싫어. 속상하든 말든 상관없어. 쟤도 내가 속상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잖아.” 심유진은 순하던 자기 아들이 벌써 사춘기의 징조를 나타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심유진은 케이크 장식을 마무리하다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별이는 딸기를 케이크 위에 올려놓으며 아예 Freddy를 무시했다. Freddy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심유진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인식하고 얼른 에그타르트를 받아서 억지로 하나를 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고마워.” 심유진은 웃으며 Freddy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제야 Freddy도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에그타르트를 먹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다. 시합이 끝나고 예상대로 심유진의 케이크는 등수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반급 친구들의 호평을 얻기도 했다. 비록 멋진 엄마 아빠가 유독 눈에 띄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Allen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심유진에게 물었다. “저녁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심유진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죄송해요. 친구랑 선약이 있어서.”Allen은 실망스러운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봐요. Freddy는 별이랑 오래 못 봐서 그런지 자꾸 별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Allen은 Freddy의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렇지 Freddy?”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던 Freddy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심유진에게 물었다. “맞아요. 언제 별이랑 나가 놀 수 있어요?” 심유진은 Allen의 요구는 단칼에 거절할 수 있어도 아이에게는 마음이 약해졌다. “별이한테 한번 물어볼게.” 심유진은 별이를 대신해 대답할 자격이 없었기에 집에 가서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다행히 Freddy도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기에 심유진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허태준은 차를 조금 멀리 세워뒀다. “조금만 기다려. 차 가지고 올게.” 그때 Allen이 Freddy를 데리고 따라왔다. “Freddy 잠깐만 봐주세요. 저도 차 가지고 와야 해서.” 말을 마치고 그는
그러고 보니 방금 급해서 힘을 세게 준 것 같기도 했다. 심유진이 얼른 소매를 걷어 확인해보려고 하자 Freddy는 깜짝 놀라서 팔을 숨겼다. “아니에요.” 심유진은 이상한 반응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빠한테 얘기해서 병원 갔다 올까?” “싫어요!” 심유진이 타일렀지만 Freddy는 반응이 격렬했다. Freddy가 뒤로 물러서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아빠한테 얘기하지 마요! 병원도 안가!” 심유진은 두려워났다. “알겠어. 얘기도 안 하고 병원도 가지 말자. 이리 와서 얘기 좀 하자.” 심유진이 손을 저었지만 Freddy는 여전히 경계하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허태준이 경적을 울리고 나서야 심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Freddy는 그 틈을 타서 얼른 Allen의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Allen이 뭐라고 말을 하자 Freddy는 차창을 내리고 환하게 웃으며 심유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까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유진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심유진이 반응이 없자 허태준은 다시 한번 경적을 울렸고 그제야 심유진은 별이를 데리고 차에 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주차를 해놓은 위치는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둘 다 10분도 훨씬 더 걸렸다. “당신 상사랑 얘기 좀 하느라.” “무슨 얘기요?” 허태준은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별이를 보며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 근데...”허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일단 멀리해. 심상치 않은 사람인 것 같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허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심유진이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했다. 하은설이 일하는 호텔 근처였는데 하은설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이기도 했다. 심유진은 하은설을 우연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이곳으로 골랐다. 아직까지 자신의 문자에 답장도 안 하는 모습을 보니 긴급 습격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밥은 집에 가서 먹게 됐다. 심유진은 입맛이 없어서 대충 몇 입 먹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이 방에 따라 들어갔을 때 심유진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발자국소리에 고개를 든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라기보다는 통화할 때 목소리가 낯익어서 의심을 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확인하려고 공항에 데리러 가겠다고 한 거고요?”“응.” 허태준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하은설이 거절했기에 허태준은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실을 확인했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줄 거야?” 허태준이 물었다. 심유진이 어떻게 얘기하냐에 따라 허태준도 계획을 바꿔야 했다. “모르겠어요.” 심유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심유진은 내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요. 저희 때문이라면 당연히 은설이에게 멀리하라고 얘기하겠지만 정말 은설이한테 반한 거면 어떡해요?” 하은설이 행복해하던 표정이 심유진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하은설이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생각대로라면 두 번째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허태준이 찬물을 끼얹었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꼭 쥔 채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럼 어떡해요?” 심유진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은설이한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기꾼이고 지금까지 다 계획 있는 행동이었다고 얘기해 줄 수는 없잖아요.” 그럴 경우 하은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게 될지 상상하기 싫었다. 가장 좋은 친구고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준 은인 같은 사람이며 별이를 제외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속상해할 거예요.” 심유진이 울컥해서 눈물을 흘렸다. “성격 좋아 보여도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라고요.” 허태준 역시 마음이 아팠다. 허태준은 세심하게 눈물을 닦아줬다.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가해내자.” “무슨 방법이요?” 심유진이 눈물
“완벽하긴 한데.” 허태준은 일단을 인정해 주고 협상을 했다. “내가 할 테니까 조용히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는게 어떨까?” 심유진은 허태준을 믿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전에 은설 씨가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야 돼.” “그건 좀 힘들어요.” 심유진은 갑자기 김이 빠졌다. 심유진과 하은설은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하은설을 속이기는 쉽지 않았다. “전에 은설이한테 거짓말하면 다 들켜요.”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네.” 허태준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자 심유진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사 가자.” “네?” 심유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사 가자.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언젠가는 나가야 돼. 사놓은 집이 몇 채 있는데 원래 같이 둘러보고 고르라고 하려고 했어. 근데 지금 긴급한 상황이니까 일단 가장 가까운 집에서 잠시 지내자.” 국내의 유명인들이라면 부동산 사업은 다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허태준 정도의 신분이라면 대형 빌딩 여러 채를 사서 임대를 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아직 허태준과 동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언제요?” “오늘? 늦어서 내일.” 허태준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주말에 시간 있을 때 이사 해야지. 아니면 또 일주일 미뤄야 돼. 일주일 동안 계속 만날 텐데 그러면 들킬 위험도 크고.” 심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알겠어요. 내일 옮겨요. 별이한테 짐 정리하라고 말할게요.” “그래.” 성공적으로 속이니 허태준은 기분이 좋았다. 허태서는 어차피 지금 힘을 못 쓸 테니 며칠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사를 한다는 말을 듣자 별이는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컸다. 이모랑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빠랑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심유진은 별이를 설득하는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