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의 따뜻한 몸 때문에 심유진의 얼어붙은 손은 조금씩 온도를 되찾기 시작했다.심유진은 시름이 놓였다.“이제 가도 되죠?”그녀는 허태준한테 물었다.허태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그녀의 손을 옷 속에서 빼냈다.“목욕물을 받아놓을 테니 목욕해.”그는 말하면서 별이한테 임무를 안배해 줬다.“엄마한테 판람근을 탄 물을 갖다주고 다 마실 때까지 감독해.”“네!”별이는 임무를 받자마자 총총 뛰어갔다. 심유진이 막아서려야 막아설 틈도 없었다.허태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 마시고 욕실로 가.”**허태준은 이미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넣었다. 판람근의 위치도 별이한테 이미 알려주었다.별이는 조심스레 보온병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심유진 곁으로 다가왔다.“엄마, 빨리 마셔요!”별이는 보온병을 심유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이는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심유진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태준의 임무를 엄격히 집행하는 듯했다.판람근의 쓴 향에 심유진은 이마를 찌푸렸다.심유진은 별이한테 장난쳤다.“너무 쓴데, 안 마시면 안 돼?”“안 돼요!”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보았다. 심유진의 장난에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다 마셔야 해요!”심유진은 욕실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보자 소리를 낮춰 별이와 협상했다.“지금은 아빠가 우리 둘 대화를 듣지 못하니 이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주방에 가서 약을 다 버리고 아빠한테 비밀로 하자. 응?”별이는 심유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서 일어난 후 슬리퍼를 끌면서 욕실로 총총 달아갔다.반쯤 열린 문 사이로 심유진은 별이가 허태준한테 고자질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아빠! 엄마가 또 말을 안 들어요! 약을 안 먹겠대요! 약을 슬그머니 버리겠대요!”심유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들놈을 괜히 키웠어.일 분 후 허태준은 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허태준의 차가운 시선으로
심유진의 몸은 흠칫하였다.심유진은 무의식적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발을 움직이자마자 등은 물방울이 가득 맺힌 문에 닿았다. 얇은 셔츠는 금세 젖었다. 면으로 짜인 셔츠는 피부에 닿았고 재질의 훌륭한 통기성은 허울이 되었다.안개 속에 허태준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준수한 얼굴도 점점 또렷해졌다.심유진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구석에서 벌벌 떨었다.“오, 오지 마요.”심유진은 떨린 목소리로 경고했다.“발은 다 나았거든요. 허태준 씨의 도움이 필요 없어요.”허태준은 말없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몇 초 후 그녀한테 손을 내밀었다.“와봐.”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심유진은 손을 이미 문고리에 올려놓았다. 머릿속은 재빨리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허태준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심유진은 경황실색하여 고막이 터질 정도로 소리 질렀다.허태준의 시선은 덤덤히 그녀의 얼굴에 머물면서 그녀한테 귀띔했다.“조용히 해. 별이를 놀래킬라.”심유진은 즉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내려줘요!”그녀는 그의 귓가에 이를 악물고 공기와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허태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그는 제멋대로 욕조 옆 걸상에 앉았다. 심유진을 품에 안은 채 조심히 그녀의 양말과 슬리퍼를 벗겨냈다.심유진은 발가락과 발끝을 겨우 걸칠만한 덧신을 신고 있었다. 공기 중에 노출된 발목은 이미 얼어서 보라색을 띠고 있어 하얗고 긴 다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허태준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속눈썹 틈새로 심유진은 그의 불만을 볼 수 있었다.심유진은 잘못한 것을 알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화를 돋우어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까이다.“내일에는 어그부츠를 신고 출근할게요. 제일 긴 어그부츠요!”심유진은 제기했다.허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위로 올렸다.하루 종일 하이힐을 신었고 방금 전 지하철역에서 몇백 미터를 걸어왔기에 심유진의 장딴지
”고마워요.”심유진이 말했다.허태준은 이마를 찌푸렸다.별이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허태준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별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허태준을 교육하기 시작했다.“아빠, 엄마한테 괜찮다고 말해야죠!”허태준은 심유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별이는 기뻤다. 하지만 심유진은 등 뒤가 차가워 나는 것 같았다.그녀는 급히 우유를 마시고 컵을 팽개친 채 도망가듯 안방으로 갔다.“잘게요! 다들 일찍 자요!”별이는 도망가는듯한 심유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엄마는 다 컸는데 왜 아직도 철이 없죠?”허태준은 부드러운 눈을 하고 별이의 고개를 어루만졌다.“엄마는 철이 안 들어도 괜찮아. 별이랑 아빠가 엄마를 보호하면 돼.” **아마도 우유의 작용인지 심유진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하지만 한밤중에 추워서 깼다.두터운 오리털 이불은 그녀의 몸에 잘 덥혀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꿈결에 차 던진 것이 아니었다.심유진은 따뜻해지려고 몸을 움츠리고 두 팔로 자신을 꼬옥 안았다. 하지만 뼛속부터 전해져오는 냉기는 그녀를 떨게 했다.처음에는 보일러가 고장난 게 아닐지 의심했다.그녀는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보일러 밸브를 검사하러 갔다.서재를 지날 때 그녀는 놀랍게도 아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서재 안에 있던 사람도 밖의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전해지더니 몇 초 후 서재의 문이 열렸다.허태준은 여전히 생활복을 입고 있었다. 눈썹사이로는 예전보다 강한 예리함이 묻어져 나왔다.그의 어깨를 넘어 심유진은 책상 위의 노트북을 보았다. 아마 밤을 새우면서 일을 했나 보다.“왜 아직 안 잤어?”허태준은 물었다.심유진은 점퍼를 더 여미면서 말했다.“보일러가 고장난 것 같아서 보러 가는 중이었어요.”그녀는 얘기할 때 치아가 떨려 아래위 이가 맞부딪혔다.허태준은 의심스러웠다.“보일러가 고장났어?”심유진은 놀
이날 밤 심유진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밤중에 추워서 덜덜 떨다가 또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어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그녀가 깼을 때 방안은 빛 한줄기 없이 어두웠다.그녀는 어렴풋이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여느 때와 같이 그녀는 습관적으로 옆으로 누워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려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자마자 큰 힘에 의해 잡혀 왔다.심유진은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찬찬히 보고 나서야 침대 옆에 엎드린 거뭇한 그림자를 발견했다.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검은 그림자가 허태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허태준은 자신의 팔을 깔고 있어 몸이 뒤틀린 채로 두 다리를 쭉 땅에 뻗었다.심유진은 가슴이 아파 허태준과 두 손이 잡힌 채로 허태준을 밀어보았다.“일어나봐요!”허태준은 잠에 깊게 들지 않아 심유진이 부르자마자 눈을 떴다.“깼어?”그는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는 잠에 잠겨 거칠어졌다.심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허태준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열은 내린 것 같네.”그는 시름을 놓은 말투로 말했다. 허태준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짚어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더 잘래?”그는 물었다.심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허태준은 창가로 걸어가 두터운 암막 커튼을 열어 그 작은 틈새로 햇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한줄기 햇빛은 금세 방안을 밝혔다.심유진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침을 삼켜 목구멍에 물을 묻혔다. 그리고는 급하게 물었다.“몇 시예요? 별이는 학교 갔어요?”밖의 빛을 보니 이르지 않은 것 같았다.허태준은 돌아와서 그녀의 폰을 켰다.“열 시가 다 되어가. 별이는 학교에 안 갔어. 아마도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을 거야.”그녀가 이불을 차던지는 것을 대비해 허태준은 온밤 심유진을 돌보았다. 중도에 해열 패치를 두 번이나 갈아주어 아침 다섯 시쯤 스르르 잠이 들었다.여덟 시가 되어서 별이는 허태준을 찾아왔다. 그는 심유진의
그는 손을 빼기도 싫었다. 따뜻했던 온기가 사라지니 마음도 차갑게 식었다. 심유진은 이번에 그를 말리지 않았다. 심유진은 아침을 안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별이는 아니었다. 허태준이 아침 메뉴를 준비하는 사이 심유진은 대충 씻고 컴퓨터와 업무 자료를 들고 하은설의 방으로 갔다. 어젯밤에 허태준과 별이 때문에 야근해야 하는 것도 까먹었었다. 열은 이미 내렸지만 아직도 몸살 기운이 있었기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심유진은 얼른 노트북을 끄고 서류들을 숨겼다. “누구세요?” “나야.” 허태준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죽 좀 만들어왔어.” 그릇에 따끈한 죽이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먹고 약 먹자.” “일단 여기 두세요. 배고플 때 먹을게요.” 심유진은 자신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킬까 봐 얼른 허태준을 내쫓았다. “열도 다 내려서 괜찮아요.” 하지만 허태준은 나가지 않았다. 허태준이 예리한 시선으로 심유진을 훑어보다가 심유진 등 뒤의 수상한 물체에 시선을 돌렸다. “저건 뭐지?”심유진이 다급히 손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허태준은 바로 이불을 걷어버렸다. 쌓여 있는 서류를 본 허태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하고 있었어?” 심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허태준은 매정하게 모든 물건들을 압수하고 접시를 심유진에게 넘겼다. “먹어. 안 그러면 이거 다 버려버릴 거니까.” 심유진은 허태준이 말하면 말하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심유진은 죽을 먹고 감기약도 고분고분하게 삼켰다. 하지만 허태준은 그래도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옆에서 지켜봐야겠어.” “이미 다 뺏겨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그래도 걱정되면 별이한테 감독하라고 하고 태준 씨는 이만 자요. 네?” “안돼.” 하지만 허태준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허태준은 아무 말 없이 심유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눈빛 속에 감정이 다 들어있었다. “아직 일주일 안된 거 아는데 그래도...” 허태준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대답 들을 수 있을까?” 심유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그걸 물을 줄은 몰랐다. 심유진은 계속 날짜를 체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약속한 일주일이 되기까지 아직도 삼일이나 있었다. 일을 미루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심유진은 계속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자신을 위로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저는...” 심유진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허태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재촉할 생각이 없었다. 심유진의 마음에 생긴 응어리가 풀리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유진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 심유진은 확실히 자신을 관심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유는... 허태준은 행복한 생각에 둘러싸여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물음을 입밖에 꺼내고 말았다. “괜찮아.” 허태준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손을 풀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허태준은 한발 물러섰다. 심유진은 맞잡았던 손이 떨어지자 순간 조금 속상했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허태준이 이미 침대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어두운 눈빛을 한 허태준이 조용히 심유진과 눈을 마주쳤다. 휘몰아치던 감정들은 사라지고 고요함과 평온함만이 남았다. “올라와.” 허태준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거절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 심유진이 머뭇거리는데 허태준이 한마디 더 했다. “그럼 컴퓨터는...” 허태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심유진은 가장 빠른 속도로 침대에 누웠다. 허태준은 이불을 덮어주고 심유진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허태준의 턱이 심유진의 정수리에 닿았다. “
심유진은 조심스럽게 문에 붙어서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실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허태준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가만히 자신의 노트북과 서류들을 가져왔다. 방문을 열자마자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깼어?” 별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심유진은 안 좋은 타이밍에 나타난 별이를 보고 조금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허태준도 별이를 따라 나왔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왠지 부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심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때 별이가 먼저 소리쳤다. “엄마, 입술이 왜 그래?” 심유진이 멈칫했다. 별이는 나이가 어렸기에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넘어졌어? 아니면 모기에 물렸어? 어? 근데 모기는 겨울에 없을 텐데.” 심유진은 얼른 입을 가리고 방으로 도망쳤다. 퉁퉁 부은 입술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살짝만 만져도 통증이 느껴졌다.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마 허태준이 자신이 잠든 틈을 타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별이가 아직 지켜보고 있었기에 심유진은 그냥 억지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거실에 다시 나갔을 때 허태준은 별이와 레고를 맞추고 있었다. 육윤엽이 저번에 사 온 마을 모형이었다. 별이 혼자 했을 때는 며칠을 만들어도 10분의 1 밖에 만들지 못했었는데 둘이 함께 하니 이미 얼추 모형이 완성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완전 대단해!”별이가 심유진에게 자랑했다. “아빠가 이거 만들어줬어. 내일 유치원에 가져가면 다들 부러워할 거야. 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줘야지.” 심유진은 웃으면서 그런 별이를 지켜봤다. 심유진이 다가오자 허태준이 탁자 위의 마스크를 쓰라고 눈짓했다. “일단 이거 써. 애도 있으니까.” 허태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이 다시 심유진의 입술에 머물렀다. 심유진은 바이러스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업적을 가리기 위해 쓰라는 건지 알 수
심유진은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의 불쾌한 기억 때문이었다. 심씨네 집안은 나름 잘 사는 집이었기에 카메라가 금방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소학생이었던 심연희도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는 새로운 물건에 호기심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심연희가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다닐 때마다 심유진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카메라 필름은 20장 밖에 없었고 집안에는 암실도 없었으며 당시에는 사진관도 매우 적었다. 그래서 심연희는 사진을 잔뜩 찍은 다음 기사님에게 부탁해서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사진관까지 가서 사진을 뽑아왔다. 심연희는 나이가 어렸기에 카메라를 그저 장난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도 대충 찍었고 찍은 사진들을 보면 초점이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낭비한 필름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심연희는 신경 쓰지 않았고 집안사람들은 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영은이 그 사진들 중 심유진이 흐릿하게 찍힌 사진을 들고 와서 욕설을 퍼부었다. “필름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 왜 옆에서 알짱대고 난리야.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우리 집 돈만 축내는 주제에.” 사영은은 그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던졌다. 그때 사영은의 눈빛을 심유진은 평생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심유진은 한 번도 심연희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훔쳐보지 않았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주겠다 할 때마다 심유진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거부감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니 허태준의 배경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사진도 무조건 몰래 찍은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심유진은 허태준이라는 사람을 몰랐다. 그럼 이 사진은 어떻게 얻은 걸까. 심유진은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컴퓨터를 끄고 업무부터 시작했다. PPT를 완성하고 복사본도 여러 곳에 저장해 둔 후 김욱에게 전송하고 나서야 심유진은 안심하고 노트북을 껐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Judy가 삭제할 방법이 있을지 지켜보고 싶었다. 노트북과 파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