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은 바로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왜 그래?” 거대한 몸집에 꽃무늬 앞치마를 한 모습, 심유진은 이미 익숙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심유진이 여전히 기침을 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허태준이 얼른 따뜻한 물을 떠 왔다. 심유진은 그들과 멀리 떨어진 베란다까지 가서야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마셨다. 겨우 기침이 멎자 심유진이 허태준과 별이를 보며 말했다. “둘 다 나랑 멀리 떨어져 있어요.” 허태준이 다가오려고 하자 심유진은 얼른 뒤로 물러서며 경고했다. “특히 그쪽! 오지 마요!” 허태준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잘 때만 해도 자신을 안고 자던 사람이 왜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유진은 기침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빨개졌다. 심유진은 허태준의 시선을 피하며 빙 돌아서 자신의 방 앞에까지 왔다. “저녁은 둘이 먼저 먹어요. 전 나중에 먹을게요. 옮으면 안 되니까.” 심유진은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저녁밥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왜...” 심유진은 뭐라고 하려다가 허태준의 어두운 표정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허태준은 쟁반을 침대에 올려뒀지만 전처럼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심유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심유진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해 먼저 물었다. “왜요?” 허태준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전처럼 차가운 말투가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억울함이 묻어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심유진은 왠지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미안함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요. 태준 씨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제가...” 심유진은 별이가 했던 질문을 허태준에게 그대로 알려줬다. 말을 마치니 온몸이 부끄러움 때문에 달아올랐다. 허태준은 더 이상 처음처럼 긴장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허태준의 표정이 갑자기 굳혔다. “왜 같은
허태준은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심유진은 화가 나서 베개를 던졌지만 피하지 않고 맞아주는 허태준을 보니 순간 분노보다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괜찮아요?” 허태준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심유진은 더 당황했다. 심유진은 얼른 허태준에게 다가갔다. “많이 아파요?” 심유진은 허태준 앞에 앉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다급히 물었다. 허태준이 고통을 참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심유진은 식은땀이 났다. 맞은 부분을 어루만져 주려다가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심유진은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때 허태준이 손을 덥석 잡았다. 순식간에 심유진은 허태준의 품에 안겨버렸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목과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의 품에 꽉 채워 넣었다. “심유진.” 허태준이 심유진의 귀를 살짝 물었다. 뜨거운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제 인정해. 넌 나 없으면 안 돼.” 허태준의 목소리가 마법처럼 마음을 파고들었다. 심유진은 서서히 얼굴이 붉어졌다. “Mike고 Allen이고 그 누구도 다 안돼. 나여야 해.” 마음속으로만 하고 있던 생각을 허태준이 크게 말해버리니 심유진은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뭔 소리예요! 이거 놔요! 안 놓으면 쫓아낼 거예요.” 하지만 심유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허태준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유진.” 허태준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보다 훨씬 진지한 말투였다. 심유진이 그 목소리에 멈칫했다. “자기 마음을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허태준은 말을 마치고 손을 놓았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밥 먹어.” 허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이나 말투 모두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따가 그릇 가지러 올게.” 하지만 심유진은 입맛이 없어서 침대에 앉은 채 허태준이 두고 간 음식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모두 심유진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지만 젓가락질을 할
심유진은 허태준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별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허태준은 별이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허태준이 이렇게 잘해주는 건 별이에게 온전한 가족을 선물해주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심유진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허태준과 별이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엄마 밥 다 먹었어?” 별이가 먼저 물었다. “아직.” 심유진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심유진은 허태준을 바라봤다. “잠시 서재로 와요.” 허태준은 리모컨을 별이에게 넘겨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조금만 더 보다가 씻고 자. 알겠지?”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이가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얘기 잘해.” 심유진이 살짝 눈을 흘기자 별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TV에 집중했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따라서 서재로 들어갔다. 별이가 듣기라도 할까 봐 심유진은 문을 굳게 닫고 잠그기까지 했다. 허태준은 흥미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심유진이 자신을 쳐다볼 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뭐 하려고?” 심유진은 허태준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허태준은 얼른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 이리 와.” 어이없어하는 심유진을 보며 허태준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책상에 기댔다. “날 부른 거 보면 생각 정리가 끝난 건가?” “그거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허태준은 조금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럼?” 심유진은 허태준의 컴퓨터를 켰다. 허태준은 잠시 멈칫하다가 심유진을 제지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한발 늦고 말았다. 앳된 얼굴을 한 심유진의 사진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이게 뭐예요?” 심유진이 허태준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허태준은 당황했지만
심유진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절 알고 있었던 건데요.” 심유진의 학교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좋은 대학에 가면 집에서 독립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하나 때문에 미친 듯이 공부만 했고 휴식일에도 집에서 책을 보거나 문제집을 풀었다. 공부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니 허태준이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면 자신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자신을 알아본건 아닐까 기대하던 허태준은 굉장히 실망했다. 허태준은 그동안 심유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자신 역시도 심유진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기대도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심유진에게 자신은 그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평범한 행인일 뿐이었다. “로열 호텔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너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어.” 허태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꽉 쥐었다. 냉담한 말투로 그는 다시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다. “사진은 어디에서 본 건지 기억이 안 나. 그냥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마음에 들어서 배경화면으로 해놓은 거야.” 허태준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심유진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 존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그 말에 설득당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진에서 뒷배경이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 고등학교 교문이 보였다. 그러니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학교 학생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중 허태준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허태준은 우연이라고 했지만 이런 우연은 말도 안 됐다. “진짜요?” 심유진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가 왜 거짓말하겠어?”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일로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심유진은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진의 출처를 캐묻는 건 포기하고 심유진은 허태준과 협상에 돌입했다. “그럼 사진 좀 바꿔주면 안 돼요? 너무 못생겼어요.” 심유진은 정말 그
별이에게 들키는 것보다 하은설이 알게 되는 게 문제였다. 심유진은 하은설이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얼마나 놀릴지 벌써 상상이 갔다. “지금 찍어 줄게요. 됐죠?” 심유진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은 그제야 만족한 듯 보였다. “그래.” 심유진은 카메라를 들고 대충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핸드폰이 예전 모델인 데다가 아무런 보정도 들어가지 않는 일반 카메라로 찍으니 건질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사진을 확인한 허태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렇게 억지로 찍으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허태준은 휴대폰을 심유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싫으면...” “싫지 않아요!”심유진이 허태준의 말을 끊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어줄게요. 찍으라는 대로 찍을게요” 허태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이리 와봐.” 심유진은 고분고분하게 옆으로 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와락 품에 안고는 심유진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 순간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허태준은 완벽히 그순간을 담은 사진을 찍어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따뜻한 햇빛이 비춰 분위기가 더욱 오묘해 보였다. 심유진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지만 허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이 사진으로 할게.”허태준은 심유진을 놓아주고 열심히 사진을 골랐다. 마치 방금 전의 스킨십은 사진을 찍기 위한 가벼운 행동이었다는 듯이 말이다.“됐어.”허태준은 바로 배경화면을 바꿨다. 허태준이 자신에게 입을 맞춘 사진을 보자 심유진은 또 얼굴이 붉어졌다.“이건 안 돼요!”심유진이 노트북을 빼앗으려는데 허태준이 날렵하게 피했다.“내가 찍고 싶은 대로 찍게 해 준다며.”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타 허태준은 노트북을 들고 얼른 서재에서 빠져나갔다.“더 볼일 없으면 별이랑 게임하러 갈게.”“잠시만요!”심유진이 다급히 쫓아갔지만 허태준
심유진도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조금씩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별이와 눈이 마주쳤다. 별이는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심유진이 얼른 허태준에게서 떨어져서 별이에게 해명하려고 하는데 별이가 씩씩 거리며 말했다. “나만 빼고 왜 둘이 안고 있어!” 억울해하는 아이의 모습에 심유진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하지만 허태준은 침착했다. “이리 와.” 별이는 바로 눈을 반짝이며 허태준에게 갔다. 허태준은 노트북을 심유진에게 넘겨주고 별이를 들어 올렸다. 별이는 허태준의 목을 꽉 껴안으며 볼에 뽀뽀를 했다. “아빠가 최고야!”표정이 복잡한 심유진을 보며 허태준이 일부러 물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도!” 별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기에 당연히 엄마도 놓치지 않았다. 별이가 심유진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엄마도 안을 거야!” 심유진이 피동적으로 끌려갔다. 허태준은 한 팔에 한 명씩 꽉 끌어안았다. 허태준이 한쪽 팔로 심유진의 허리를 감자 심유진이 은근슬쩍 선을 넘지 말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허태준은 모른 척 별이에게 말을 걸었다.“이제 기분이 나아졌어?”“잠시만!”별이가 휴대폰을 꺼내면서 우물쭈물 말했다.“사진도 찍고 싶어.”“당연히 찍어야지.”허태준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별이도 애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심유진은 사진을 찍는 걸 싫어했지만 두 사람의 공세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래.”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들었다.“하나, 둘, 셋! 김치!”별이의 찬란한 웃음과 조금은 어색한 심유진의 웃음, 그리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허태준까지 한 프레임에 가득 담겼다. 별이는 바로 그 사진을 하은설에게 보내주며 말했다.“이 사진 프린트 해줘! 유치원 친구들한테 보여줄 거야.”심유진은 말리고 싶었지만 그동안 별이가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받았던 시선들을 생각하니 결국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그제야 심유진의 손에 들린 노트북에 주의를 돌렸다.“아빠 꺼야?”“
별이는 얌전히 대답했다. “알겠어.”허태준은 오묘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노트북 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 거 써도 돼.” 심유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맙지만 필요 없거든요?” 낮에 심유진과 허태준이 같이 자는 모습을 본 별이는 오늘은 꼭 자기도 같이 자겠다고 떼를 썼다. 심유진은 이제 열이 내렸지만 아직도 감기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기에 혹시 별이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한참을 설득했다. 끝내 허태준이 별이와 함께 자는 걸로 타협을 봤다. 심유진은 혼자 큰 침대를 차지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어린아이처럼 침대위에서 뒹굴거려 보기도 했다. 근데 불을 끄고 혼자 조용히 있으니 자신의 숨소리도 느껴지는 이 공간이 유달리 외로웠다. 심유진은 순간 두려워져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하지만 공허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유진은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감기약 기운 때문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알람소리를 못 들은 심유진은 출근하기 10분 전이 되여서야 일어났다. 심유진은 화장도 못하고 대충 씻은 다음 다급히 집을 나섰다. 허태준은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나간 건지 집에 아무도 없었다. 주방 테이블에는 허태준이 준비한 아침과 쪽지가 있었다. “별이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아침 먹고 있어. 데려다줄게.” 하지만 심유진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심유진은 택시를 타고나서야 허태준에게 문자를 남겼다. “이미 회사로 출발했어요.” 심유진은 당연히 늦었다. 회사에서 낙하산으로 찍혔기 때문에 심유진은 이미 한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 심유진은 Maria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들 어디 갔어요?” Maria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심유진은 김욱의 사무실에도 들어가 봤지만 역시 사람이 없었다. 육윤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분명 정상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비록 다들 자리에 없었지만 노트북은 켜진 상태였고 가방
고개를 들자 어두운 표정을 한 육윤엽이 보였다. 뒤쪽을 보니 김욱과 Maria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심유진이 서있는 걸 보고 육윤엽이 놀랐는지 멈칫했다. 심유진은 얼른 모르는 사람인척하며 공손하게 인사부터 했다. 육윤엽이 인사를 받으며 친하지 않은 척 자리를 떠났다. 김욱도 멈칫하더니 상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전에 알리지 않고 지각했으니 이번 달 보너스는 취소하겠습니다. 일단 사무실로 오셔서 상황 설명해 주시죠.” 회의실의 직원들은 모두 이 말을 들었다. Maria는 동정의 눈빛을 보냈지만 다른 직원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심유진은 얌전히 김욱의 뒤를 따라 사무실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피곤해.” 김욱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잘하는 짓이다.” 김욱과 육윤엽 모두 심유진이 신분을 숨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괜히 쓸데없이 피곤한 짓을 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열은 내렸어?” 김욱이 노트북으로 업무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내렸어.” “하긴, 열이 안 내렸으면 태준 씨가 널 출근하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지.” 김욱이 심유진의 패딩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이렇게 입었으면 얼마나 좋아.” “동기들이 촌스럽다고 한단 말이야.” 심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얼른 적응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 김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곧 회사 관리인이 될 사람이니까 직원들과의 관계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거야. 그러니까...” 김욱이 심유진이 보내준 PPT를 켜면서 말했다. “브리핑할 준비는 다 됐어?” 심유진은 준비한 대로 브리핑을 완벽하게 해냈고 김욱도 매우 만족했다. “감기가 다 나으면 나랑 고객들 만나러 다니자.” 회사 업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자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 심유진은 조금 흥분됐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서류를 붙들고 있는 것보다 외근이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