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은 그제야 고양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발을 들어 슬리퍼 우에 엎드려 있는 고양이를 떨어트렸다. 별로 심하게 넘어진 게 아니었기에 고양이는 또다시 일어나 슬리퍼 쪽으로 다가갔다. 허태준이 아예 고양이를 품에 안고 카메라를 비추며 정소월에게 소개했다. “심유진이 키우는 거야.” 정소월이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귀여워! 나도 고양이 한마디 키우고 싶었는데...” 정소월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근데 허태서가 못 키우게 했었지...” “마음에 들면 내일 가져다줄게.” 허태준은 심유진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했다. 심유진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어 허태준에게 손을 저으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못 본 척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안되지 않을까?” 정소월은 표정에 기대가 가득했지만 바로 좋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유진 씨가 키우는 건데 허락은 받아야지.” “정확히 얘기하면 어머니가 키우라고 우리한테 주신 거야. 그러니까 나도 양육권이 반은 있다는 소리지.” 허태준은 휴대폰으로 얼굴을 미묘하게 가리며 심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심유진은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허태준은 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자신이 정소월에게 갈 때는 아무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다가 고작 고양이 한 마리에 이렇게 다급해하는 모습이라니... 정말 자신이 고양이보다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인걸까? 허태준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니까 얘를 어떻게 처리하던지 다 내 마음이야.” 만약 허태준이 정말 고양이를 보내버린다면 심유진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아쉬웠다. “아니면 한 마리 사주는 건 어때?” 정소월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만약 이 고양이를 가져다주면 유진 씨도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은데.” 심유진은 허태준이 자신을 보든 말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은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래, 내일
심유진은 허태준이 일부러 저런다는 걸 눈치챘다. “안 돼요. 고양이는 제 거니까 몰래 다른 사람한테 가져다주기라도 한다면 바로 어머님께 전화할 거예요.” 심유진의 말 때문인지 인터넷 연결이 끊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소월의 표정이 굳어졌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던지.” 심유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정소월씨랑 연락한다고 얘기할 거예요.” 허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네가?” “저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심유진은 허태준의 기세에 눌려 울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 어머님 앞에서 한 약속 잊지 않았죠? 제가 다시 한번 말해드려요?” 허태준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결국 정소월이 그를 말렸다. “태준아 됐어, 나 고양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유진 씨한테 드려.” 허태준이 차가운 시선으로 심유진을 바라보며 비꼬는 식으로 칭찬했다. “대단하네?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하길 바랄게.” “네, 그럴게요.” 심유진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다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심유진은 허태준이 자신을 어떻게 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정말 몰래 고양이를 처리해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허태준이 집에 있기만 하면 고양이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았다. 하지만 심유진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고양이보다 자신에게 먼저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실 큰일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심유진은 허태준 아니면 어머니밖에 올 일이 없는 집에서 누가 초인종을 누른 건지 궁금했다. 배달을 시킨 적도 없고 택배를 시킨적도 없었다. 심유진은 인터폰으로 벨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정재하였다. “유진 씨, 계세요?” 심유진은 저번 돌잔치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심연희와 관련 있는 그 누구도 만나도 싶지 않았다. 심유진은 무시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정재하는 굴하지 않고 벨을 계속 울렸다. 소리가 어
심유진은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심 씨네 집안에서 받은 고통이 너무 많았는데 이젠 정재하도 그 집안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럼,태준 씨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찾아오세요.” 심유진은 이렇게 얘기하며 정재하를 돌려보냈다. “태준 씨가 집에 없으면 어차피 들어와도 소용없잖아요.” 정재하가 뭐라고 더 얘기하려는데 심유진은 아예 통화를 끊고 인터폰의 전원마저 뽑아버렸다. 어차피 정재하를 제외 하고는 누구도 벨을 누를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진아, 지금 집에 있니?” 어머니의 말투가 이상했다.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보이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유진은 어머니가 아직도 허태준과 정소월의 스캔들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했다. “그럼요.” 심유진이 웃으며 답했다. “언제 오시려고요?” 어머니가 잠시 멈칫하더니 얘기했다. “오늘은 안 갈 생각이야. 기사님을 보낼 테니까 네가 이쪽으로 와.” 심유진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기사님은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하셨다. 심유진이 초인종의 전원을 다시 켜두었으나 정재하는 다시 벨을 누르지 않았다. 아마 여러 번 눌러봐도 반응이 없으니 먼저 간 것 같았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셨나요?” 심유진이 차에 타자마자 기사님에게 물었다. 이 이유가 아니고서야 어머니가 자신을 부를 리가 없었다. “확실히 손님이 두 분 찾아오셨습니다.” 심유진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다행히 오늘 제법 깔끔한 차림이었다. 한 시간 반 뒤 차량이 허씨네 별장에 도착했다. 심유진은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소파 중앙에 앉아있는 어머니와 양옆 구석에 앉아있는 사영은과 심연희를 목격했다. 휠체어를 움직이던 손이 순식간에 멈췄다. 심유진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심유진은 저 둘이 이곳에 온 목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건 좋은 의
어머니는 그 시선을 피하며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이모분도 어제 그 기사를 보셨대.”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해석했다. 어제 그렇게 소란스러웠으니,사영은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요?” 하지만 심유진은 전혀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나랑 네 삼촌, 아니 이모부도 다 그거 보고 엄청 화가 났어.” 사영은은 하마터면 말실수를 할 뻔했지만 제때에 말을 바꿨다. “이모부는 회사에 일이 많아서 나랑 연희만 같이 왔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 “뭘 알고 싶으시다는 거죠?” 대수롭지 않아 하는 심유진의 태도에 사영은과 심연희 모두 당황했다. 심유진이 지금쯤 화가 나거나 속상해하는 상태일 것으로 예측했었기 때문이었다. 심연희도 말을 보탰다. “언니는 남자가 바람피우는 게 가장 싫다며. 전남편이 바람 피워서 이혼하려고 했었잖아. 그러고 나서 그분이 자살까지 한 걸로 기억하는데,맞지?” 갑자기 새로운 정보들이 가득 생겨 허태준 어머니까지 멍해졌다. 전남편? 자살?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머니는 심유진을 바라보며 고뇌에 잠겼다. 심유진은 이 모녀가 자신에게 또 나쁜 의도를 품고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둘 다 자신이 허태준과 이혼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는 것 같은데 그게 마침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심유진이 직접 어머니한테 얘기하지 못하는 과거들을 저 둘이 알려줬으니,허태준이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심유진은 당황한 척하며 어머니 쪽을 바라보는 동시에 사영은과 심연희를 힐끔 바라봤다. 역시나 조용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기사는 사실이 아니에요.” 심유진이 모녀에게 말했다. “태준 씨는 그분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가서 도와준 것뿐이죠.” “그런 핑계를 누가 믿니?” 사영은이 호통을 쳤다. “도와주러 간 거라고 해도 그렇게 한밤중에 가는 사람이
어머니는 당황했다. 심유진은 허태준이 두 번째로 먼저 결혼을 제의한 여성이었다. 그런 사람을 보내면 다음 며느리는 언제 맞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건 어머니는 정말 심유진이 좋았다. 자기 친딸처럼 아끼던 이유이기도 했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어머니도 표정이 진지해졌다. “화난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이건 유진이랑 태준이 사이의 일이니까 둘이 상의해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네요.” “상의요?” 사영은은 비웃었다. 심유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애잔함이 담겨있었다. “유진이랑 태준 씨 신분이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정말 상의가 되나요? 괴롭힘이나 안 당했으면 좋겠네요.” 원래 같았으면 진작 반박했을 테지만 심유진도 사영은을 통해 자신의 목적에 달성해야 했기 때문에 당황한 척하며 얼버무렸다. “이모, 그런 게 아니라...” “넌 조용히 해!” 사영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방금 자신의 태도가 너무 강압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친절한 말투로 얘기했다. “유진아, 걱정하지 마. 이모가 지켜줄 테니까 괴롭힘 당한일 있으면 다 말해.” “이모, 그런 적 없어요.” 어머니가 심유진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제 인생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가족 중 누구도 유진이를 얕잡아 보거나 괴롭힌 적 없습니다. 태준이를 불러와서 보증할 수 있어요.” “됐어요.” 사영은이 말했다. “그런 말은 누가 못 합니까, 보증한다 해도 진실은 모르는 일이죠.” “태준 씨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조심스레 얘기하는 심유진을 사영은이 날카롭게 쳐다봤다. 심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어머니가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끼어들어 말렸다. “유진이도 이미 태준이를 이해한다고 했는데 왜 굳이 이혼을 강요하세요.” 사영은은 대답 없이 심유진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유진아, 그래서 돈만 보고 결혼하면 안 돼.” 사영은이 이 말을 하는
다행히도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돈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다. 심유진은 이미 절벽 끝까지 몰아세워진 상태였고 흑역사들이 전부 드러났으니,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말지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정권을 심유진에게 줬다. “유진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 문제는 정말 대답하기 힘들었다.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허태준을 믿는다고 말했던 것이 거짓말이 된 셈이고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돈 때문에 허태준을 만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심유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정권을 이 자리에 없는 허태준에게 맡겼다. “전 태준 씨 의견에 따를게요.” 모녀는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영은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렇게 얘기를 해도 왜 듣지 않니. 그냥 이렇게 살 거야?” 심유진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영은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나랑 연희는 오늘 여기 온 적도 없고 아까 그 말들도 한 적 없는 걸로 쳐!” 사영은은 심연희를 끌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집을 나서고 나서 그 둘의 표정에 가득했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의기양양한 웃음만이 남았다.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허태준 엄마도 화가 많이 났겠지. 아마 심유진보고 자기 아들이랑 이혼하라고 난리일 거야.” 사영은이 독한 눈빛을 보였다. “심유진 그 영악한 계집애,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 건 그렇다 치고 사사건건 우리를 방해하기까지 해? 이럴 줄 알았으면 낳지 말 걸 그랬어! 재수 없는 건 아주 지 아빠랑 똑 닮았어.” 심연희는 사영은의 팔짱을 끼고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했다. “엄마, 너무 화내지 마. 언니도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제 우리한테 대들지 못할거야. 그때 가서 마음대로 처리해도 돼.” “그때가 오면 정연우보다도 더 못한 남자한테 콱 시집보내 버릴 거야. 허태준이 구해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두고 봐야지.” 심연희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
사영은과 심연희가 나간 후 거실에 남은 심유진과 허태준 어머니는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어머님.” 심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랑 동생이 한 말들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면서 심유진을 위로했다. “난 괜찮아. 다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이해해야지.” 하지만 그 웃음이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심유진은 어머니가 이미 조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어머님, 사실 고백할 게 있어요.” 심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이자,어머니도 자세를 고쳐 잡으며 진지하게 대했다. “아까 들어서 눈치채셨겠지만,저 사실 결혼을 한 적이 있어요.” 심유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혼을 한 여자라고 하면 사실 아직도 편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었다. 특히 허태준 집안 같은 경우 며느리에 대한 요구도 높을 게 뻔하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심유진을 더욱 못마땅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심유진이 생각했던 것처럼 화를 낸 게 아니라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며 물었다. “왜 이혼했어? 전남편이 바람나서?” 어머니는 아까의 대화를 듣고 대충 상황판단이 끝나신 것 같았다. “네.” “그럼,왜 자살하신 건데?” “구체적인 원인은 저도 잘 몰라요. 저랑 연락이 끊기고 나서 있은 일이에요. 근데 그전에 교통사고가 심하게 나서 불구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집에서 병원비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고요.” 허태준 어머니정도의 능력이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으니 심유진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심유진의 말을 듣고 말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럼 그건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니,자책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혹시 널 다른 시선으로 볼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심유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정을 보고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보기에는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같았니?” “아니요.” 심유진이
하지만 아쉽게도 허태준과는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다. “만약 네가 이혼할 생각이 없다면 오늘 일은 태준이한테 얘기하지 않으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물론 이혼할 거라면 말릴 생각은 없어. 그냥 이모 때문에 성급하게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해 봤으면 해.” 심유진은 이혼하고 싶었지만,어머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심유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돌아가서 태준 씨랑 의논해 볼게요.” 어머니는 이 대답에 조금 실망했지만,뭐라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되던 가장 먼저 나한테 알려주렴.” 어머니는 점심까지 먹이 고나서야 기사님께 부탁해 심유진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차 트렁크에는 어머니가 챙겨준 각종 영양제며 간식들이 가득했다. 집 앞에서 심유진은 유령처럼 그 앞을 맴돌고 있는 정재하를 봤다. 일단 돌아갔다가 몇 시간 후에 다시 올지 고민했지만,기사님이 이미 휠체어를 꺼내고 심유진을 부축하려 했기에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사님이 계시기에 정재하가 자신에게 손을 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정재하는 또 한 번 초인종을 눌렀지만,누구도 응답이 없었다. 몸을 돌리는데 마침 기사님이 심유진을 휠체어에 태운 채 이쪽으로 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정재하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기뻐하며 뛰어갔다. “유진 씨!” 그의 부름에 심유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제가 어떻게 가요.” 정재하는 매우 당당했다. “됐어요. 사과받은 걸로 할게요.” 심유진은 그와 실랑이할 기분이 없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전 이럴 시간 없어요.” “안 돼요!” 정재하가 가까이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심유진의 뒤를 따라 아파트 대문까지 따라 들어갔다. 기사님이 그를 경계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신고해 드릴까요?” 심유진은 이 기회를 틈타 정재하를 위협 했다. “들으셨죠? 안 가시면 신고할 거예요.” “신고해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