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고 달걀을 꺼내려고 하다가 한참을 냉장고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심유진에게 물었다. “어제 케이크는 다 먹었어?” “아니요.” 심유진이 휠체어에 탄 채 냉장고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 조각만 먹고 냉장고에 넣어뒀어요. 어제 태준 씨가 저녁을 안 먹고 들어와서 아마 조금 먹었을걸요.” “그럼 남은 건?” 어머니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확인했다. 케이크를 제외하고는 냉장고 안의 모든 재료가 어제 그대로였다. 심지어 쓰레기통에서조차 케이크의 잔해를 찾지 못했다. 이 미스터리는 허태준이 집에 돌아와서야 풀렸다. “케이크? 내가 먹었어.” “다 먹었다고요?” 심유진이 놀라서 물었다. 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느끼하지 않았어요?” 심유진은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그녀에게도 그 케이크는 한 조각만 먹어도 느끼했다. 게다가 허태준은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르겠던데? 배고팠나 보지 뭐.” 그리고 그다음 날, 심유진은 전날에 만들어서 넣어둔 에그타르트 6개가 또 깔끔하게 사라진 걸 발견했다. 역시나 허태준이 먹은 것이었다. “저녁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요?””배가 안 불러서.” 세 번째 날도, 네 번째 날도... 상황은 여전히 똑같았다. 나중에 심유진은 아예 디저트를 만들고 냉장고에 넣어두는 게 아니라 식탁에 올려뒀다. 이러면 허태준이 재차 가열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허태준 어머니는 매일 찾아와서 심유진에게 베이킹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허태준이 고양이에 대한 태도도 물어봤다. “태준이는 고양이랑 잘 지내?” “나쁘지 않아요.” 심유진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허태준은 이제 고양이를 던져버리겠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가깝게 지내지 않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이 대답에 매우 만족했다. 다음 단계를 진행해도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저녁에 다른 일정 있니?”
어차피 어머니도 허태준이 꼭 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에 심유진도 딱히 강요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아이한테 줄 케이크 만들어야 하니까 태준 씨 몫까지 만들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저녁 꼭 잘 먹고 들어와요.” 요즘 매일 저녁 디저트를 먹는 허태준이 생각나 심유진이 신신당부했다. 허태준이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 줄 시간은 있고 날 위해 만들 시간은 없어?” “아이가 이번에 돌이래요. 선물로 케이크를...” “내가 케이크 하나 사 갈 테니까 당신이 만든 건 나한테 줘.” 허태준이 명령했지만,심유진은 대꾸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었다. “돌아와서도 고양이 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아, 알겠어요. 태준 씨 것도 만들게요.” 심유진이 얼른 대답했다. 허태준은 오랜만에 고양이를 다리에 올려놓은 채 자상하게 털을 쓰다듬어 줬다. 태준 어머니는 허태준이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어도 딱히 놀랍지 않았다. 허태준이 자신을 잘 알고 있듯 그녀 역시 허태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심유진이 얘기하면 조금 져주지는 않을지 기대를 걸어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게 할 방법이 있으니 상관없었다. 돌잔치는 로열호텔에서 진행됐다. 식탁이 네 개밖에 없는 방이었다. 돌잔치라기보다는 그냥 가족 모임 정도의 분위기였다. 어머니가 다 한 가족이니 긴장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 “한 가족”의 범위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보였다. 바로 심연희였다. 심연희는 붉은색의 긴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대부분 편하게 입고 온 자리에 과하게 격을 차린 모습이 위화감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정장을 빼입은 정재하가 보였다. 심연희는 정재하의 팔짱을 낀 채 그 형식적인 웃음을 띠며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정재하는 내내 무표정으로 어딘가 넋이
“그래도 삼촌인데 참석은 못하더라도 선물은 보내야지.”어머니는 겸손하게 얘기했지만,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러 찾아왔다. 얘기가 아니라 아부를 떨려고 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그때 중년 부부 한 쌍이 이쪽으로 걸어왔다.“안녕하세요, 허 사모님.”“정 사장님, 정 사모님. 안녕하세요.”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어머님이 심유진에게도 그들을 소개했다.“이쪽은 태하 그룹의 정준성 사장님이시고 이쪽은 사모님이셔.”태하그룹이 어떤 회사인지 심유진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눈앞의 이 두 분이 정재하의 부모님일 것이다. 정재하가 마침 이쪽을 쳐다봤다. 심유진과 눈이 마주치자,그가 바로 예의 있게 미소를 지었다. 심유진도 같이 미소로 화답했다.심연희는 그 눈 맞춤을 어두운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정재하를 끌고 심유진 쪽으로 다가왔다.“어머님, 아버지.”심연희가 정준성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그 둘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냉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심연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심유진 옆으로 다가와서 애교스럽게 불렀다.“언니~”이 호칭에,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유진이가 동생이 있었더라?”허태준 어머니가 물었다. 요즘 거의 날마다 심유진과 함께 있었으나 한 번도 동생 얘기를 꺼내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심연희는 긴장해하며 심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웃음마저 경직되는 것 같았다.“저희 이모 딸이에요.”심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심연희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허태준 어머니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에 심유진의 자신의 이모를 사영은 이라고 소개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 지금 심유진을 언니라고 부르는 이 여자애가 바로 심 씨네 집안의 딸, 어쩌면 그때 파혼한 그 계집애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정재하 부모님도 이 바닥에서 수년간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상대했던 터라 허태준 어머니의 감정변화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
“언니는 진짜...”심연희는 눈빛에 자책과 속상함이 가득했다. 심유진이 어떡하면 이 “우애 깊은 자매”를 연기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휠체어가 자동으로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 얘기하면 허태준 어머니가 휠체어를 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휠체어에 기대 있던 심연희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정재하가 빠르게 심연희를 부축했다.“죄송해요.”허태준 어머니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며느리랑 저쪽에 아이도 좀 보러 가야 해서요. 나중에 또 얘기하죠.”정재하 부모님도 인사를 나눴다.“그래요. 나중에 뵐게요.”거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정준성이 차가운 눈길로 정재하를 바라봤다. 정재하는 고개를 숙이고는 심연희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말했다.“이만 가자.”심연희는 멀어져 가는 심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정재하는 심연희를 방안의 어느 한구석에 데리고 왔다. 모두 오늘의 주인공 아니면 이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허태준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느라 그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우린 먼저 가자.”정재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안돼!”심연희의 반응이 격했다.“난 안 가!”“연희야!”정재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심연희의 눈물에 또 마음이 약해졌다.“내 말대로 하자. 응? 여기 뭐 재밌는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잖아. 저번에 가고싶다던 레스토랑 지금 갈까? 어때?”“싫어!”심연희의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정재하는 그 모습이 마음 아팠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며 가볍게 볼에 입을 맞췄다.“울지 마.”정재하는 이제 심연희를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가족들이랑 친해지고 싶은 건 알겠지만 이렇게 급해할 필요는 없어. 여차하면 경주에 돌아와서 일해도 되고.”심연희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하지만 내 사업은 이제 시작인걸…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로 승진할지도 몰라…“정재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뭔가 괜찮은 방안이 떠올랐는지 말을 꺼냈다.
지안이의 엄마인 정은결이 고개를 들고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이모!” 허태준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팔을 벌렸다. “나도 한번 안아보자.” 자애로운 눈길이 정은결 품에 안겨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정은결이 아이를 넘겨주며 말했다. “지안아, 이모할머니한테 한번 안길까?” 지안이는 엄마 품을 벗어나도 울지 않는 순한 아이였다. 허태준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부둥부둥 달랬다. “지안아, 할머니 알아보겠어? 아이고,울지도 않고 너무 착하네.” 심유진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오늘 허태준과 함께 오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얼른 아이를 가져야 한다며 재촉할 게 뻔했다. 심유진이 한창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정은결이 입을 열었다. “유진 씨는 태준 오빠랑 언제 아이 가질 생각이세요?” 허태준 어머니가 행동을 멈추고 심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심유진은 어김없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저희는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돼서 아마 아직도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결혼한지 얼마 안된게 무슨 큰 문제라고.“ 허태준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은결이도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애 가졌어. 지안이 좀 봐, 얼마나 귀여워!” 심유진은 더 이상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허태준 어머니의 동생도 말을 보탰다. “태준이 좀 잘 설득해 봐요. 결혼도 늦었는데 아직도 애 가질 생각이 없으면 어떡해. 나이도 제일 많은 애가 제일 늦으니까,동생들도 다 따라가지. 그래도 우리 연명이는 결혼도 하고 애도 가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허태준 어머니야말로 마음이 조급했지만 차마 심유진 앞에서 자기 아들을 욕보일 수는 없었다. ”다 큰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무슨 잔소리를 그렇게 해.” 어머니가 일부러 쿨한 척 대답했다. “아이고, 너희 시어머니 쿨한 척하는 것 좀 봐. 말은 이렇게 해도 손주 보고 싶어 죽으려 하신다. 그러니까 얼른 손주
지안이는 오늘 외출해서부터 지금까지 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지금 처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리자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주위 어른들이 모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특히는 지안이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했다. “우리 손주가 왜 이럴까? 배가 고픈가?” 정은결이 웃음을 참으면서 지안이를 살짝 째려봤다. “아니에요, 제가 안는 게 싫은가 봐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정은결이 심유진을 바라봤다. “유진 씨가 좋은가 봐요. 그나저나 저한테도 이렇게까지 붙어있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질투가 날 지경이네요.” 심유진은 조금 쑥스러웠지만 지안이가 계속 울자 다급히 지안이를 다시 안았다. 신기하게도 심유진이 안자마자 지안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는 다시 그 똘똘한 눈을 깜빡이며 심유진을 쳐다만 봤다. “지안이가 유진 씨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얼른 하나 낳아야겠어.” 심유진은 입을 앙다물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심유진이 웃으며 지안이를 부르자 지안이가 대답이라도 하듯이 방긋 웃었다. 허태준 어머니는 이때다 싶어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때 마침 허태준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다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지 한데 몰려있었다. 허태준은 어머니가 보낸 문자가 생각나 발걸음을 다그쳤다.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인파를 비집고 그 사이로 들어가자,아이를 안은 채 환히 웃고 있는 심유진이 보였다. 그 장면이 너무 사랑스러워 허태준은 멍하니 쳐다만 보며 발걸음을 옮길 생각도 못 했다. “허태준?” 누군가 허태준을 알아봤다. “태준아, 오늘 못 온다며.” “바쁜 일은 다 마무리한 거야?” 모두 허태준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허태준은 머리가 아파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 가족들이었으니 낯선 사람을 대하듯 차갑게 굴어서는 안 됐다. 허태준은 예의상 웃어 보이며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어머니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유진이가 넘어졌다면서
모두가 와서 싸움을 말렸다. 어머니는 허태준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결국 손을 놓았다. 심유진은 방금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몰라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허태준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심유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봐요, 당신 조카예요.” 심유진이 지안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허태준은 지안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못생겼어.” 아이 엄마가 앞에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허태준 때문에 심유진은 당황해서 다급히 정은결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태준 씨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은결도 몹시 당황했다. 정확히 말하면 불쾌했다. 하지만 상대가 허태준이었기에 기분이 나빠도 얘기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원래 신생아 때는 다 못생겼거든요. 저랑 애 아빠도 못생겼다고 막 놀리고 그랬어요.” 심유진은 당연히 이게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이 말을 보탰다. “봐, 친부모도 못생겼다 하는 거 보면 진짜 못생긴 거네.” 정은결은 이제 표정 관리도 하기 힘들었다. 심유진은 마음속으로 허태준을 욕하며 눈짓으로 그만 말하라고 눈치 줬다. “지안이가 얼마나 예쁜데요.” 심유진이 지안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 눈을 좀 봐요. 똘망똘망하니 얼마나 예뻐요. 피부는 또 얼마나 좋고요! 크면 무조건 여자아이들이 환장하는 미남일걸요.” 심유진은 예의상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허태준은 지금 심유진 품에 있는 아이가 우리 둘의 아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기대를 하니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어머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를 안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허태준이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 생각하며 어머니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재하와 심연희가 떠나려고 할 때 그들은 다급히 들어오는 허태준을 마주쳤다. 심연희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오빠, 태준오빠한테 유독 관심이 많네?” 정은결이 웃으면서 일부러 정재하를 놀렸다. “관심 있는 거 아냐?” 정재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아니 방금 진짜 그래 보였다니까.” “넌 애 엄마라는 사람이 어쩜 아직도 그러냐. 애가 보고 따라 배울까 봐 무섭다.” 정재하가 동생을 가르치려 들 때 심연희는 또 심유진 쪽에 찰싹 달라붙었다. “언니도 경주에 잠깐 머물렀다가 가는 거야?” “아마도?” 심유진이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심유진도 확답을 주기 어렵긴 했다. 다시 발령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심연희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허태준은 지안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안아봐도 돼요?” 심연희가 정은결에게 물었다. “그럼요.” 정은결이 시원하게 대답했다.“근데 지안이가 울지도 몰라요.”정은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연희가 아이를 받아 안았다. 심연희의 품에 안기자마자 지안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심연희는 그 울음소리에 당황해서 하마터면 아이를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정은결도 더 이상 심연희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아 재빨리 지안이를 받아 안았다. 정은결은 마음속의 불만을 간신히 삼키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안이는 유진 누나만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럼,제가 조금 더 안고 있을까요?” 심유진이 손을 뻗었다. “아니에요.” 정은결은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한참 안고 있었는데 좀 쉬셔야죠. 전 지안이 우유 좀 먹이고 올게요.” 정은결이 아이를 안고 떠나자,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졌다. “재하야, 잠깐 나 좀 보자.” 정준성이 불렀다. 낯빛을 보아하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 듯싶었다. 정재하는 노심초사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방금 연희 데리고 나가지 않았니? 왜 아직 여기 있어?” “제가 데리고 왔어요. 허 대표님이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