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분간 대구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왜요?” 심유진이 놀라서 물었다. 허태준이 해내지 못하는 일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허택양의 지위가 더 높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당신을 발령 낸 게 할아버지 뜻이었어.” 허태준은 변명할 방법이 없어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할아버지 몸 상태는 저번에 봤으니까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갈 거야. 남은 날이 얼마 없다고 여기시는데 혼자 너무 적적하셔서 우리가 자주 찾아뵙길 바라셔.” 심유진도 어르신을 매우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라서인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더 정이 갔다. 그러니 만약 할아버지가 자신이 남길 바라신다면... “그럼 저 안 갈게요.” 심유진의 대답에 허태준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경주에 있기 싫어하잖아.” “경주를 싫어하는 이유는 저희 집안사람들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경주에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천천히 이 도시도 좋아해 보도록 노력할게요.” 심유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그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덥석 안았다. “고마워.” 허태준이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묻은 채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유진은 그런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태준 씨 안 바쁜 날에 같이 할아버지한테 가볼까요?” “그래.” 허태준이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 한평생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허택양은 누구에게서 들은 건지는 몰라도 아침부터 심유진을 찾아와서 물었다. “안 가기로 했어요?” 심유진은 진심으로 대꾸해 주고 싶지 않았다. 경주에 남게 된 것이 할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허택양이 동의도 거치지 않고 발령을 내버렸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태준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다른 사람을 존중해하지 않는 상사는 심유진도
심유진은 멍해졌다. “데이트를... 해서 뭐 하시게요?” 허택양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안 믿으실 수도 있지만...” 허택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뭔가 큰 결심이라도 내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사실 유진 씨가 직원들을 교육하는 걸 본 그날에 유진 씨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경주로 발령 낸 것도 사실 사심이었고요.” 심유진은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정신줄을 잡고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대표님, 자꾸 이런 장난치지 마세요.” 허택양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안 믿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정중하게 얘기했다.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저 정말 유진 씨를 좋아해요.”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진중한 태도에 심유진도 조금 당황했다. 고백을 못 받아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받았던 고백 중에 이번처럼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은 또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택양은 직장 상사였기에 너무 단칼에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났다. “죄송해요, 전 이미 결혼을 했어요.” 심유진은 허태준이 선물한 반지를 하고 오지 않은 걸 또 한 번 후회했다. 허택양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정말 결혼한 거예요 아니면 절 속이는 거예요?” “정말이에요. 안 믿기시면 혼인 신고서라도 가지고 올게요.” 당연히 정말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허태준과의 관계가 폭로될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허택양의 대답을 듣고 심유진은 한시름 놓였다. “결혼을 했건 말건 별 차이가 없으니까요.” 허택양이 사악하게 웃었다. “영원한 부부가 어디 있겠어요. 제가 노력하면 되죠.” 허택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심유진 앞의 책상을 짚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포기하지 않으면 돼요. 언젠가는 저한테 올 거라고 믿어요” 허택양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심유진은 방금 받
처음 할아버지와 만났을 때는 허태준이 갑작스럽게 결정한 일이었기에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었다. 그게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렸기에 심유진은 아침 일찍부터 허태준을 깨워 같이 선물을 고르러 가달라고 했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선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뭘 사던지 다 좋아하실 거야.” 심유진과 함께 백화점이란 백화점을 다 돌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허태준이 그녀를 타일렀다. “할아버지는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으셔. 그냥 성의만 표시하면 좋아하실 거야.” “성의...” 심유진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허태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지난번에 할머니가 설날마다 만들어주시던 만두가 그립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허태준도 확실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긴 했다. 항상 셰프님이 만두를 만들어주실 때마다 아버지가 할머니가 만든 게 훨씬 맛있었다며 추억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하지만 일찍 돌아가셨기에 허태준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 드리려고?” 허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힘 빼지 마.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 할아버지도 만두는 입에도 안 댔어. 다른 사람이 만든 건 그 맛이 안 난다고 하시더라.” “에이,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요.” 허태준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맛이 안 나더라도, 할아버지가 드시지 않더라도 그 마음만은 고맙게 받으실 것 같았다. 심유진과 허태준은 시장에 가서 만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재료를 사들고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니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은 채 돋보기를 쓰고 열심히 책을 읽고 계셨다.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을 맞으러 나온 집사가 방안을 향해 얘기하자 할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지팡이를 짚고 나오려 했다. 심유진은 다급히 달려가 할아버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어르신은 심유진을 보며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손을 꼭 잡은 채 놓기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주방은 단독으로 작은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허태준이 주방보조를 자처했기에 심유진도 거절하지 않았다.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서, 택양 도련님 오셨습니다.” 심유진은 택양이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허택양 씨요?” 심유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당황해서 허태준에게 물었다. 허태준은 여전히 야채를 써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을걸.” “저 사람들이 여길 왜와요? 분명 저희 둘만 초대했다고 했는데?” 심유진은 매우 당황했다. 허태준이 시한폭탄이라면 허택양은 그 도화선 같은 존재였다. 그가 언제 폭발할지는 허택양이 어떻게 자극하냐에 달린 거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가 초대를 안 했다고 해서 오지 못하는 건 아니지.” 허태준의 눈빛에 순간 어둠이 깔렸다. 아마 저들은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오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허태준은 심유진과의 관계를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감추려 할수록 더욱 의심을 살게 뻔했다. 그러니 차라리 당당하게 공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일단 손 씻고 나가서 인사하자.” 허태준이 말했다. “전 안 가면 안 돼요?” 심유진은 누가 봐도 진심으로 가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왜 그래?” 허태준도 이런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제가 낯을 가려서... 그리고 허택양 씨가 저희 둘의 관계를 알게 되면 저한테 불리하다면서요.” “여기까지 찾아온 거면 아마 이미 알고 있을걸.” 허태준이 식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더 이상 숨는 건 의미 없는 일이야.” 심유진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손에 묻은 밀가루를 물로 씻어냈다. “허택양이 저한테 어떻게 불리한데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어쩌면 허택양의 수단에 대해 미리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허태준이 앞치마를 풀며 말했다. 그는 줄곧 허태서와는 연락을 했으나 허택양은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고 그가 대구에 간 후
“태준아.” 허태서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서 앉아.” “형.” 허택양도 아는 체를 했다. “태준아...” 정소월이 그를 불렀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온화했다. “돌아왔구나.” 정소월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웃음에 왠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허태준은 허태서의 옆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심유진을 데리고 할아버지 옆에 착석했다. 허태서는 그제야 심유진에게 눈길이 갔다. “이분은 누구셔?” 허태서가 물었다. 허태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심유진이라고 합니다.” 심유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얼핏 정소월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허택양은 놀란척하며 물었다. “언제 결혼했어요? 저희한테는 왜 얘기 안 했어요.” 순간 허택양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저희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건 아니죠?” 허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어. 혼인신고만 하고 식도 아직 안 올렸고.” 할아버지도 그 사실을 나무랐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 허택양은 그제야 더 이상 캐고 들지 않았다. “결혼식 할 때는 꼭 알려줘요.” 허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근데 만두는 다 빚었어?” “아직이요.” 허태준이 대답했다. “형님이랑 오셨다길래 인사하러 잠깐 나왔어요. 형님이 혹시 예의 없다고 나무라 실가 봐요.” “이 형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다?” 허태서가 웃으며 대답했으나 허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인사도 다 나눴으니까 얼른 만두나 만들어와.” 할아버지의 말에 심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소월도 벌떡 일어났다. “저도 도울게요.” 심유진이 허태준을 바라보며 대신 거절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허태준은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심유진은 정말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 이 집을 나서고 싶었으
정소월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썼다. “사실은...” 정소월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수줍게 얘기했다. “그냥 친구관계는 아니었어요... 태준이가 절 오래 쫓아다녔거든요. 근데 인연이 아니었는지 결국 태서 씨랑 결혼했죠.” 심유진은 태서라는 사람이 방금 나란히 앉아있던 허태준의 사촌 형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랑 태준이 관계 신경 쓰시는 건 아니죠?” 정소월이 살짝 도발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젠 둘 다 결혼도 했고...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심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럼요. 신경 안 써요.” 솔직히 얘기하면 심유진은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우울해졌다. 방금 만난 다음의 반응으로 봐서는 정소월이 혼자 허태준을 좋아한 건 줄 알았는데 실은 반대였다. 심유진은 문득 허태준이 잠결에 집안이랑 연을 끊더라도 그 여자랑은 결혼하지 않겠다며 잠꼬대를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여인이 바로 정소월이었던 것일까? 심유진은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그 남자의 아내 앞에서 신경 쓰이진 않냐며 묻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심유진은 요리하는 속도를 높였다. 그냥 식사 준비가 빨리 끝나서 정소월과 단둘이 있지 말았으면 했다. 정소월은 겨우 반죽을 완성했다. 재벌 집 딸은 아니었어도 외동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여자였다. “이젠 뭘 할까요?” 그녀가 심유진에게 물었다. 심유진은 처참한 반죽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혹시 만두피는 만들 줄 알아요?”사실 대답이 예상가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래도 한번 물어봤다. 역시나 정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할게요.” 심유진이 예의상 웃으며 말하자 정소월도 사양하지 않고 손을 씻더니 주방에서 나갔다. “그럼 수고하세요.” 심유진은 양념장을 다 만들고 반죽을 다시 하고는 만두를 빚었다. 요리가 끝났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주방에는 셰프님 몇 분이 바
고용인들 모두 심유진을 알고 있었기에 고독하게 혼자 문 아래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자 다들 걱정돼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심유진은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오래 서있었더니 좀 힘들어서 그래요.” 주방에 의자가 없었고 다들 바빠서 의자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었다. 아마 가져다 준다고 해도 심유진이 거절했을 것이다. 반 시간가량 지나자 주방에서 누군가 불렀다. “만두 다 삶아졌어요!” 심유진은 얼른 일어나서 확인했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만두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방으로 가져갔다. 식탁은 이미 정중앙에 펴져있었고 셰프님들이 만든 요리도 하나씩 올려지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상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심유진이 들어갔을 때는 다들 이미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앞접시에 이미 음식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식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니 심유진은 갑자기 너무 서러워져 코끝이 찡해났다.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참으며 억지로 웃었다. “만두 다 됐어요!” 심유진이 먼저 할아버지 앞에 한 접시를 올려놓고는 다른 손님들 쪽에도 올려놨다. 그리고 그제야 허태준 옆에 앉았다. “고생했네.” 할아버지가 심유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왠지 아까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실 때의 웃음 하고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허태준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냥 직원들에게 앞접시를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심유진 앞에 놓아줬을 뿐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고생하셨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할 걸 그랬어요.” 결국 먼저 사과를 건넨 건 허택양이었다. “원래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태준 형님이 괜찮다고...” “네, 괜찮아요.” 심유진은 자연스럽게 허태준 편을 들었다. 허태준은 냉담한 말투로 얘기했다. “날도 추운데 할아버지께서 찬 음식 드시면 안 되잖아요.” “맞아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저녁 9시가 되자 잠자리에 드셨다. 허태준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심유진에게 말했다. “식탁 좀 치워줘.” 심유진은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할아버지를 따라 나가고 이 큰 방에 심유진 혼자만 남았다. 저녁을 풍성하게 차렸으나 다들 얼마 먹지 않았기에 거의 반은 넘게 남겼다. 심유진은 이 남은 음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직원들을 몇 명 데려오더니 신속하게 남은 음식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만두를 버리려고 하자 심유진이 다급히 달려가 제지했다. “혹시 이건 제가 포장해 가도 될까요?” 오후 내내 고생해 가며 만든 음식인데 그냥 이렇게 버려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집사님은 친절하게 포장 용기까지 가져다가 남은 만두를 포장해 줬다. “혹시 부족하시면 다른 반찬들도 더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돼요.”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들이 가시려나 봐요.” 집사님이 말씀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태준이 돌아왔다. “다 치웠어?” “네. 거의 다 직원분들이 치우셨어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 심유진은 그걸 꼭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허태준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자.” 차가운 밤공기와 그 차가운 목소리가 심유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둘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태준은 내일 일찍 일어나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해석도 없었다. 또 최악의 연말이다. 사실 익숙했으나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유진은 포장해온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덮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로 예능을 틀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예능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것 외에는 할 일이 없을 뿐이었다.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