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심 매니저는 다릅니다. 저는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규정을 지키지 않는 일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당신들을 제 발로 나가게 하든지 아니면 제가 내쫓을 겁니다. ” 심유진은 자신을 냉혈한 “악인”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관리에 복종하지 않는 저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려고 했다.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고 존중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일을 똑바로 해줬으면 했다.할 말을 끝마친 뒤 심유진은 떠나려 했다.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맞은 켠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잠옷 차림을 한 젊은 남성이 비스듬히 문턱에 기대어 웃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사람은 잘생겼다. 이목구비는 허태준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아우라가 음유적이었다. 그리고 허태준한테서 느껴지는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분위기도 없었다.심유진은 방금 목소리가 너무 커 그 사람을 방해한 줄 알고 연거푸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쉬시는 것을 방해했나요?”남자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그는 장난기가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호텔에 새로 온 객실부 매니저신가요?”심유진은 이분이 일반 고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아마도 큰 확률로 이 호텔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저는 단지 며칠만 대신할 뿐입니다. 곧 있으면 새 객실부 매니저가 올 것입니다.”그녀는 설명했다.“그런가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가워요.”그는 활짝 웃으면서 덧니를 보였다.“일을 마저 하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그는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심유진은 굳게 닫힌 방문을 몇 초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리고 의문을 품은 채 떠났다.방안에서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했다.“응. 아까 허태준과 같이 있던 여자를 만났어. 로열호텔 객실부 매니저인것 같던데.”“사람은…괜찮게 생겼어. 정소월이랑 닮았어. 아마도 허태준이 좋아하는 것이 이런 스타일일 거야.”“나?내가 가라고? 형, 이런 일 한 번이면 됐어. 또 하라니…허태준이 진짜
허태준의 말대로 객실부 신입사원들은 이튿날에 전부 도착하였다.동시에 새로운 총지배인이 온다는 소식도 같이 전해 들렸다.심유진은 의자에 앉아있기도 바쁘게 대회의실에서 열릴 미팅에 참석해야 한다는 메일을 받았다.이번 회의는 전부 호텔 측 경영진이 참석하는 회의다. 당연히 새 상사와 인사하고 회사의 전망과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인 듯했다.심유진은 경주로열의 직원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 낯설었다. 또한 어제 허태준의 귀띔도 명기하여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구석에 앉았다.주변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곧 여기에 나타날 새로운 상사에 관한 얘기였다.그들은 상사의 성별, 나이, 생김새, 성격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하였다. 동시에 아름다운 염원을 갖고 있었다. “총지배인이 친절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회의실대문은 메일에서 공지한 아홉 시에 제때 열렸다. 한 사람이 문을 열자 연이어 세 사람이 걸어들어왔다.제일 처음에 들어온 사람은 어제 심유진이 공구실 밖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그는 회의실을 가로질러 총지배인의 자리에 앉았다. 그사람과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분산되어 그의 양쪽에 앉았다.남자는 마이크를 집은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로열 호텔에 새로 온 총지배인 허택양이라고 합니다.”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삽시간에 회의실에 “허지배인님” 소리가 가득 찼다.심유진은 놀라움 속에서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다.그러니 허태준과 닮았지. 혈연관계가 있는 사촌 형제였구나!허택양의 시선은 회의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심유진의 얼굴에 떨어졌다.심유진은 똑똑히 보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웃는 모습을.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회의 내용은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무료했다. 다들 겉치레식으로 얘기했다.심유진은 필기하는 척하고 허택양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한테 이름이 불렸다.“객실부 심 매니저님—”허택양이 발언하자 회의실의 모든 눈빛은 심유진에게로 집중되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이미 오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고 심유진만 사무실에 남아 심청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심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허택양이 미소를 지은 채 입구에 서있었다. “바빠요?” 심유진이 벌떡 일어섰다. “총 지배인님.” “아이고,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나이도 비슷하니까 그냥 택양 씨라고 불러요.” 심유진은 허택양의 살가운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허태준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직장 상사신데 그렇게 부를 순 없죠. 허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비록 이 호칭은 그를 허태준과 헷갈리게 했지만 심유진은 어떻게든 허택양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허택양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편하실 대로.” 허택양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이 심유진을 불편하게 했다. 심유진은 딱딱한 어투로 말을 돌렸다.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허택양의 시선은 심유진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구체적인 개선 방안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호텔 위생에 관한 일로 인터넷이 뜨겁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고 우리 호텔도 투숙객이 점점 줄어들어요. 심유진 씨가 회사 경영부문이랑 얘기해서 저희가 얼마나 열심히 개선하고 있는지 대외적으로 기사를 하나 냈으면 좋겠어요.” 심유진은 회사 일에는 항상 진심이었다. “네, 오후에 그쪽 책임자랑 얘기해 볼게요.” “전 오후에 바로 기사를 냈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해 보죠.” 허택양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심유진은 그걸 거절할 자격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허택양은 구내식당이 아니라 호텔의 식당에 있는 룸을 잡았다. 경영부문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심유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침에 허택양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심유진은 그들이 허택양의 비서들인 줄
침착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은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허택양은 이런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개의치 않아 했다. 오후에도 허택양은 두 번 더 심유진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일 때문에 온 것이긴 했으나 심유진은 밖에 여러 직원들이 이쪽을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허택양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둘은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허택양은 심유진이 호텔에서 지낸다는 걸 알았기에 저녁식사도 함께 하자고 얘기했다. 심유진은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을 안 먹는다고 핑계를 대며 그 초대를 거절했다. 허택양은 그 변명을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척 섭섭해했다.심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허태준이 보였다. 소파에 기대앉은 채 투명한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와인 한 방울이 흰 셔츠에 튀었지만 허태준은 그걸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65인치짜리 초대형 TV에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홈쇼핑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허태준은 TV를 응시하고 있기는 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허태준의 그윽한 눈에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했다.“무슨 일 있어요?”심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에 했던 얘기는 다 까먹었어?”심유진이 잠깐 멈칫했다가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됐다. 아마도 허택양과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그런 게 아니라 저랑 허 대표님, 아니 태준 씨 사촌동생분이랑은 그냥 일적으로 얘기만 나누는 사이에요.”“일 얘기를 하는데 둘이 같이 밥을 먹고 온 오후 사무실에 같이 있어?”허태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목소리도 서리가 낀 듯 차가웠다. 누가 봐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 심유진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맥이 빠지기도 했다.“그냥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세요.”심유진은 방으로 걸어 들어
허택양과 더는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며칠 동안 계속 객실 쪽에서 서성대다가 누군가 방으로 청소하러 들어갈 때가 되면 “기습”해 들어갔다. 습관을 기르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비록 직원들 모두 청소에 더욱 주의를 돌리고 있긴 했지만 잔 실수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심유진은 살짝 귀띔만 해주고 넘어갔지만 상황이 심각하다 싶으면 기록을 하고 일정한 벌금도 내렸다. 그 규정을 따르지 않거나 처벌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유진은 가차 없이 해고했다.단 일주일 만에 심유진은 “마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심유진은 이 별명에 딱히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이 무서워서라도 일을 자각적으로 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일하게 부담스러운 점은 한주에 한 번씩 진행되는 회의에서 허택양이 자신을 콕 짚어서 칭찬해 줬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마녀”라는 별명을 비웃기도 했다.아마 원래의 의도는 다른 사람들도 심유진을 따라 배워서 직원들을 엄격히 교육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유진은 그 말에 담긴 비웃음을 느꼈다.회의가 끝나고 심유진은 주방 쪽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 두 명이 험담을 하는 걸 듣기도 했다.“마녀라고 불리는 게 뭐가 자랑스럽다는 거지? 그냥 사람들한테 미운털 박혔다는 소리 아냐?”“그냥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여서 칭찬해 주고 싶으신 거겠지!”“맞네... 지난번에 허 대표님이랑 단둘이 식사도 했다잖아. 내가 둘이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도 봤다니까.”심유진은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다 붙잡고 해명할 수도 없고 연예인들처럼 해명 기사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일주일만 있으면 이곳을 떠나게 될 테니 그때 가서 사람들이 뭐라 하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심유진이 예상 못 한 부분이 있었다. 허택양이 본사에 심유진을 대구에서 이쪽으로 이직시켜 달라고 신청을 했다는 것이었다. 허택양은 이 일에 관해서 한 번도 심유진의
심유진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허택양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신청하면 무조건 통과되지 않을 거예요.” 허택양은 심유진과 협상을 하려고 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죠. 일단 이쪽에서 일을 하다가 객실 쪽의 일이 다 순조로워질 때쯤에 한 번 더 신청할게요. 솔직히 대구보다 이쪽이 유진 씨를 더 필요로 해요. 부문을 개선한다는 게 두 주일 만에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제가 유진 씨를 여기에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허택양의 태도가 매우 진지해 보였다. 만약 허태준의 경고와 경주에 대한 나쁜 감정들이 없었다면 심유진은 이미 허택양에게 설득당했을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전 싫어요. 만약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시다면 제가 직접 본사에 연락할게요.” 허택양이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에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상사를 찾아가 본사에 상황 설명을 부탁드리고 자신도 메일을 보내서 이 사실을 몰랐다는 점과 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실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본사는 이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사발령 자료들도 이미 보내놓은 상태였다. 더 이상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걸 인식하자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허태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번에 조금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고 나서 허태준은 평소보다 더 일찍 나가서는 더 늦게 집에 들어왔다. 심유진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나간 상태였고 심유진이 잠들고 나서 돌아온 탓에 일주일 동안 같은 방에 자면서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심유진은 거실에서 11시 반까지 안 자고 버텼고, 그제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태준은 심유진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아직 안 잤어?” 목이 잠긴 탓에 말을 마치고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허태준이었다. 심유진은 하려던 말을 잠깐 미뤄둔 채 다급히 물었다. “감기 걸렸어요?” “심각해요? 약은 먹었어요? 지금이라도 감기약 사 올까요?” 몰아치는 질문에 담겨있는 그
“가능할까요?” “안될 건 없지.” 허태준은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꼬며 말했다. “도와주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데?” 심유진은 이럴 거라고 예상했다. 저번 제로 때 일만 해도 그랬다. 친구 사이에 그냥 서로 도와줄 법한 일들도 허태준은 일종의 거래로 받아들였다. 심유진도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빚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허태준이 원하는 대가들은 항상 난감했다. 이게 바로 심유진이 정말 급하지 않은 이상 허태준을 찾지 않는 원인이었다.“뭘 원하는데요?”심유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음...”허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했다.“나 머리가 아픈데...”허태준의 시선이 심유진을 향했다.“좀 문질러줄래?”이 요구는 뽀뽀거나 포옹보다 훨씬 간단했다.“그래요.”심유진이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소파에 꿇었고, 몸을 살짝 허태준 쪽으로 기울여 태양혈 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줬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그 손길이 닿으니 허태준도 긴장감이 풀리면서 졸음이 밀려왔다.얼마나 지났을까, 허태준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심유진이 나지막이 허태준을 불렀다. “태준 씨?” 대답이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허태준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수염도 조금 올라오고 눈 밑 다크서클도 심해진 모습이 항상 외모를 중요시 여기는 허태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바빴을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유진이 마음이 아파 그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피부도 전보다 거칠어진 것 같았다. 거실에서 재울 수는 없었기에 심유진은 허태준을 살살 흔들었다. “태준 씨, 일어나 봐요.” 허태준은 살짝 움찔했으나 눈을 뜨진 않았다. “졸려...” 허태준이 웅얼거리며 팔을 올려 심유진의 허리를 감았다. “앗!” 심유진이 무방비하게 허태준의 품 안에 안겼다. “태준 씨.” 심유진은 허태준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허태준은 팔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
회의는 오전 내내 지속됐다. 허태준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비서에게서 휴대폰부터 건네받았다. 휴대폰에 뜨는 건 호텔 인사팀 매니저와의 대화 기록이었다. 허태준의 요구에 따라 심유진을 다시 대구로 발령하려 했는데 거절당했다는 문자였다. “이번 발령이 회장님 명령이래요. 만약 대표님께서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라면 회장님이랑 잘 상의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저희 쪽도 많이 난감해지는 입장이에요.” 허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것이 허택양의 계획인 줄 알았다. 기껏해야 둘째 삼촌네가 끼어들었을 줄 알았더니 할아버지까지 가담한 일이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이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 “알겠습니다.” 허태준이 문자를 보내고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어르신은 전화를 받자마자 질문부터 던졌다. “유진이 일로 전화한 건가?” 이미 전화한 이유를 예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태준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이런 일을 벌이신 거죠?” “너네 집이며 사업 중심이며 다 경주에 있어. 그럼 아내 되는 사람도 언젠가는 너 따라서 경주로 올 것 아니냐. 난 그 시간을 좀 앞당겨준 것뿐이지.”“물론 사심도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애가 너야. 그리고 유진 씨도 다른 손주며느리들이랑 다르고. 난 그 아이를 매우 좋아한다. 나이가 있으니 이젠 나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 너네가 다 경주에 있어야 자주 나한테도 들리지.” 이 말을 듣자 허태준도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 그동안 사업만 살피느라 어쩌면 가족들 간의 정은 하나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경주에 있고 싶지 않아 해요.” 허태준은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고 싶긴 했지만 심유진의 감정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 경주에서 안 좋은 일들을 많이 겪었었거든요.” “그럼 한번 물어보는 건 어떠냐. 이 노인네를 봐서라도 몇 년만 경주에 머물러달라고. 나한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 내가 떠나거든 살고 싶은 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