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형민의 집에 가기 전에 심유진은 집에 들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한 선물을 챙겼다. 허태준과 여형민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가 도착했을 때 허태준은 이미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태준은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벽에 기대서 서있다가 심유진이 오는 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심유진이 들고 있는 종이백에 꽂혔다. “이게 네가 준비한 선물이야?” “맞아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태준을 보니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선물 교환 안 할 거예요?” “어.” 허태준이 대답을 하며 도어벨을 울렸다. “재미없잖아.” 심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태준과 심유진이 동시에 파티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여형민의 오래된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허태준과도 잘 아는 사이라 ‘허태준의 여자친구’ 란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허태준이 정말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심유진은 여형민과 인사를 나누고 선물만 건네주고는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친구들이 너무 열정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며 술을 따라주려 했다. “얜 술 못 마셔.” 누군가 얼음을 넣은 보드카를 심유진에게 건넸으나 허태준이 그 손을 가로막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흥분한 친구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보통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보며 멈추는데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허태준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 다들 내일 허태준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톡톡히 놀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제수씨는 못 마시지만 너는 마실 수 있지?” 누군가 용감하게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허태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는 최대한 허태준과 시선을 안 맞추면서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아이고, 못 마시는 거면 어쩔 수 없이 제수씨가 대신 마셔야겠네.” 허태준은 이 일을 꼭 기억해야겠다
허태준의 이 한마디 말에 분위기가 더욱 후끈해졌다. “야, 천하의 허태준이 마누라한테 잡혀 사네.” “와, 드디어 허태준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제수씨, 최고예요 정말.” “제수씨, 아주 그냥 호되게 혼내주세요.” 심유진이 장단을 맞췄다. “어떻게 혼낼지 잘 생각해 볼게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있는 것이 억지로 맞춰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힐끗 쳐다봤다. 미소를 짓는 모습이 아까보다는 많이 편안해 보였다. 실내의 열기 때문인지 조금 홍조를 띠는 흰 피부와 조명이 비친 눈동자가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허태준은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줬다. 갑자기 목이 타는듯한 느낌에 그는 방금 내려놓았던 술을 한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니 다들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오늘 그냥 혼나시기로 하셨나 봐?” “자자자, 오늘 태준이 소원 성취하게 해 주자.” 누군가가 술병을 들고 와 빈 술잔을 채웠다. 심유진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을 핑계로 술을 안마시려고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심유진은 그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여자친구로서 다른 사람이 술을 먹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켜서 배달앱을 뒤적거리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음... 이 시간에 몽둥이는 배달이 될까요?” “제수씨,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를 깎아서라도 튼튼한 걸로 준비해 드릴게.” “태준이 혼나는 거 영상으로 좀 남겨주세요.” 다들 한 마디씩 거들며 허태준을 놀렸다. 아내에게 잡혀 산다는 이미지가 자존심 상할 법도 한데 허태준은 전혀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유진이 억지로 장단을 맞추는 것일지 몰라도 일단은 그녀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왜, 나 혼내게?” 그가 심유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에 닿는 그의
심유진은 허태준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독한 술을 한병 다 마셔버리는 걸 지켜봤다. 하지만 허태준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고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다들 술을 한병 더 열려고 하는데 여형민이 다음 코너를 소개했다. “이제 선물을 교환해 볼까요?” 사실 선물교환은 모두가 별로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남정네들끼리 직접 준비한 선물을 교환한다는 건 사실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형민은 어색해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 두는 걸 매우 즐거워했다. 지금까지는 다들 이 시간을 가장 싫어했을지 몰라도 올해는 달랐다. “그래, 꼭 제수씨 선물로 골라야지.” “웃기지 마, 내가 고를 거야.”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제수씨 선물은 태준 대표님한테 남겨드려야지. 아휴, 이 눈치도 없는 것들아.” 허태준은 그 말에 순간 감동받아 저 친구 회사랑 어떻게 합작할지 계획까지 세울뻔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에이, 선물도 안 들고 왔는데 참여하면 안 되지.” “제수씨가 대표님 선물은 따로 빼놨겠지. 이번에는 양보하라 그래.” “태준아, 우리도 정상적인 선물 좀 받아보자.” 심유진은 자신의 선물이 이렇게까지 환영을 받을 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이 시간까지 파티에 남아있을 줄도 몰랐다. 사실 뜨개질을 열심히 하긴 했어도 명품들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초라한 선물일 뿐이었다. 선물교환 코너가 시작되고 여형민이 번호표가 들어있는 검은 상자를 들고 왔다. 모두 상자 안에서 번호표를 뽑고 같은 번호인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표를 뽑고 있는데 선물을 가져오지 않은 허태준은 그냥 조용히 심유진 옆에 앉아있기만 했다. 심유진과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이 곧 나타났다. “우와! 나야! 내가 뽑았어!” 그가 번호표에 입을 맞추며 로또 1등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했다. 다들 부러워하면서 선물 교환 코너가 끝이 났다. 그 뒤
심유진은 선물이라면서 챙겨준 과일들을 양손 가득 들고 여형민집을 나섰다. 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에 왠지 익숙한 종이백이 들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이건 제가 가져온 선물 아니에요?” 그녀는 아까 자신의 선물을 가져간 사람이 가장 열정적으로 허태준에게 술을 붓던 사람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뽑은 사람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나 주던데.”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저 중간 과정을 많이 생략하고 얘기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는 사실 말이다. 사실 심유진도 허태준의 지위나 능력이 그중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두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축복을 건네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선물을 가졌던 아마 결국 허태준에게 전달해 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물을 모르는 사람에게 줬다면 그냥 잠깐 민망하고 말았을 텐데 허태준이 가졌다면 이건 얘기가 달랐다. “비싼 건 아니에요, 너무 기대하지 마요.” “그래.” 엘리베이터는 금방 19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지만 심유진은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허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머리 아파.”허태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조금 풀린 것 같았다. 항상 차갑던 손도 지금은 후끈후끈했다. 심유진은 술에 취하면 미열이 오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허태준은 종래로 심유진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인적이 없으니 심유진은 그도 이런 숙취를 겪진 않을까 싶었다. 그녀가 허태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왠지 몸이 뜨거운 것 같아 심유진은 허태준 집에 들어가자마자 구급상자부터 찾았다. 허태준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작고 여린 그 여자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물도 떠주고 수건으로 얼굴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위가 아픈 것도 잊어버릴 만큼 순간 만족감이 밀려왔다. 그는 취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몸이 안 좋았다. 야근하느라 저녁을 못 먹
심유진이 빈컵을 받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태준의 태양혈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면서 안마해 줬다. 그녀는 팔꿈치로 소파를 짚으며 허태준 쪽으로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허태준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너무 뜨거워 심유진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심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예뻐서.” 허태준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심유진이 놀라서 손을 멈췄다. 둘의 눈빛이 마주쳤다. 허태준의 눈빛은 깊고 맑았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도 조금 엿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천진난만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에는 이 단어만큼 그를 잘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것 같았다. “진짜 예뻐.” 허태준이 심유진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얘기했다. 심유진은 순간 허태준이 자신을 놀리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취기에 말이 잘못 나온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고마워요, 태준 씨도 예뻐요.” 그저 할 말이 없어서 예의상 대답해 준 건데 허태준은 이 말을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어디가 예쁜데?” 심유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서대로 칭찬했다. “눈이 크고 눈썹이 짙고 속눈썹도 길어요. 코가 높고 입술은 얇고 피부가 좋고 비율도 좋죠.” 허태준은 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웃음은 더욱 환해지고 눈빛이 더욱 빛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나 좋아해?” “당연히 좋아하죠.” 이런 남자를 싫어할 여자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날 떠나려고 해?” 허태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진 표정이었다. “제가 언제요?” 심유진은 당황했지만 금방 이 상황을 이해했다. 어쩌면 지금 허태준이 말하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성운 별장에서 고열에 시달릴 때 계속 외우던 그 여자인 것 같았다. 심유진은 조금
상황이 비슷해서인지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대입했다. 어쩌면 허태준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여자는 자기보다 훨씬 행운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여자는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진짜?” 허태준이 진지하게 물었다. 순간 심유진은 그가 취하지 않은 건 아닐까 착각할뻔했다. “정말이에요.” 그녀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왜 당신을 속이겠어요.” 허태준이 심유진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 또 떠날 거야?” 허태준의 손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온기가 손을 타고 전해졌다. 심유진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안 가요.” “그럼 언제 나한테 시집올 거야?” 허태준의 눈이 기대로 가득 차있었다. “당신이 원할 때요.” 한두 번이 어렵지 세 번 속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심유진은 이제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았다. 아무튼 내일 아침 일어나면 허태준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럼 내일 혼인신고부터 할까?” 허태준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뭔가 찾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 찾아요?” “휴대폰.” 허태준은 옷의 모든 주머니를 다 뒤졌다. 그러다 외투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아냈다. “여형민한테 전화를 걸어서 보증서를 가지고 오라고 해야겠어.” 그는 얘기를 하며 전화를 걸었다. “무슨 보증서요?” “당연히 내일 나랑 혼인신고 하러 가겠다는 보증이지. 하도 말한 대로 하지 않아서 이렇게 안 하면 마음이 안 놓여.” 심유진이 당황했다. 그냥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려던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줄 몰랐다. 허태준은 이미 여형민에게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잠깐 올라와.” “파티가 아직 안 끝났는데...” “지금 당장.” 만약 허태준이 지금 자신과 다른 여자를 헷갈려하는 게 아니라면 심유진은
허태준은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벨이 울리자마자 문을 열었다. 얼마나 빠른지 여형민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혼자야? 유진 씨는?” 여형민이 목을 빼들고 방안을 들여다봤다. 거실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심유진이 보였다. “유진 씨가 있는데 난 왜 불러?””일단 들어와.” 허태준은 별다른 해석 없이 서재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왔다. 그 사이에 심유진이 여형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취하셨어요. 저를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젠 저랑 결혼까지 하시겠대요.” 여형민은 자초지종을 아는 사람이었다. 심유진의 설명을 들으니 허태준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예상이 갔다. 허태준이 서재에서 나오자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거실에 앉아있었다. 허태준이 종이와 펜을 여형민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는 보증서를 써, 이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앞으로 내 마음대로 할 거라는 말도 보태고.” 심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뭘 마음대로 해요, 혹시 위법행위면 어떡하려고.” “그럼 어떻게 고칠까?” 허태준은 심유진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지만 그 차가운 눈빛에서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보였다. 심유진은 더 이상 반항할 수가 없었다. 여형민이 심유진의 팔을 잡았다가 그 시선에 손을 옷자락으로 가져갔다. “잠시만 기다려봐, 유진 씨랑 얘기 좀 할게.” 의외로 허태준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 가봐.” 여형민과 심유진은 베란다로 나갔다. 심유진은 아직도 이 급전개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할 얘기가 뭐예요?” 여형민은 베란다의 문을 굳게 닫았다. 혹시 허태준의 귀에 이 대화가 들어갈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얘기할게요. 허태준 씨는 술버릇이 되게 고약한 사람이에요 취하기만 하면 엄청 귀찮게 군다고요. 평소에도 강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데 술이 들어가면 훨씬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려요. 자신이 갖고 싶어 하
여형민의 말은 심유진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알겠어요, 서명할게요.” 여형민은 2분도 안 지나서 보증서를 써왔고 심유진도 빠르게 서명했다. 계획대로 여형민이 보증서를 주머니에 넣으려 하면서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줘.” 허태준이 그런 여형민을 막았다. “그래, 줄게 줄게. 고작 종이 한 장인데 뭘 그렇게까지 해.” 허태준은 보증서를 손에 꼭 쥔 채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가봐.” “이제 필요 없어졌다 이거지?” 여형민이 눈을 살짝 흘기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밖에 서서 몰래 심유진에게 손가락으로 ok를 그려 보였다. “머리는 아직도 아파요?”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의 모습으로 이미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증명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허태준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파에 드러누워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심유진은 조금 짜증이 나면서도 웃겼다. 취한 허태준은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이 또 밉지만은 않았다. “늦었으니까 그만 씻고 자요.” “안 갈 거야.” 허태준이 그녀를 째려봤다. “나 씻을 때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지?” 심유진은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심유진이 웃으면서 급히 해석했다. “지금 온몸에 술냄새가 풍겨요. 불편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보증서도 썼는데 제가 어딜 도망가요.” 허태준은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올게.” 욕실로 가는 허태준의 발걸음이 불안해 보였다. 휘청거리는 모습에 심유진은 급히 가서 부축했다. 분명 아까 여형민에게 문을 열어줄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말이다. 심유진은 욕실까지 허태준을 부축하고 금방 자리를 떴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한마디 보탰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 불러요. 문밖에 있을게요.” “그래.” 욕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방금 취기가 가득했던 허태준은 사라지고 평소의 차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