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시는 분이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경찰이 물었다. “네.” 장아줌마가 맞은 켠 집을 가리켰다. “여기 살아요.” “혹시 이분을 아세요?”경찰이 심유진을 짚으며 말했다. “당연히 알죠! 1년 반동안이나 이웃으로 지냈는데. 이사 와서 인테리어 할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녀는 심유진을 위해 열렬히 변호했다. “짜고 치는 거 아니고요?” 중년남성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장아줌마는 열쇠로 집문을 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 “응.” 안에서 장아줌마의 남편이 웃으며 뛰여왔다. “오늘 또 야근했어? 왜 이렇게 늦었어.” 중년남성은 할 말을 잃었다. 경찰들이 말했다. “집주인이라는 분이랑 연락 좀 해보세요.” 남성은 스피커폰으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이소연이라는 걸 심유진은 단번에 알아챘다. 남성이 심유진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 집주인님 집문서는 가짜고 자신이 진짜 집주인이라고 그러는데 지금 잠시 여기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 집문서가 가짜일리가요!” 이소연이 발끈했다. “저희 아들이 남기고 간 집문서예요. 제 아들 이름이 써져있는 거 똑똑히 보셨잖아요.” 남성이 그녀를 변호했다. “저랑 제 와이프 모두 확인했죠. 근데...” “제가 얘기할게요.” 심유진이 휴대폰을 뺏어 들고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심유진이에요.” 상대방은 조용했다. 심유진은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집을 살 때 돈은 다 제가 냈어요. 조건웅 씨는 일전 한 푼 보태지 않았을뿐더러 불법으로 이 집을 자기 명의로 바꿔놨고요. 전에 고소했는데 얼마 전에 결과가 나왔더라고요. 법원이 이 집을 다시 저한테 돌려줬어요. 그래서 지금 가지고 계신 집문서는 이제 무효니까 제 집을 함부로 넘기실 권한은 없으세요.” 이소연은 몇 초간 침묵했다. 심유진의 말을 이해하려
경찰이 자리를 뜨자 남성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말했다. “이 집이 누구 소유던지 어차피 나는 계약을 했고 세 달 치 집세도 냈으니까 그전까지는 집 못 뺍니다.” 그는 문을 닫아버렸다. 심유진은 부동산 쪽에 상황을 설명하고 여형민에게 부탁해서 이소연 측에 소송장을 보냈다. 조건이가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본가로 돌아가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사영은이 준 백만 원으로 빚도 갚고 집안 인테리어도 싹 다 고치고는 제법 즐겁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돈에 쪼들리지 않는 여유로운 집안인데도 집세를 탐하는 것이 참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양심은 없고 욕심만 많네요.” 여형민이 볼펜을 돌리며 말했다. “하긴 누가 돈을 마다하겠어요. 돈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죠.” 심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동생분은...” 여형민이 심연희를 언급했다. “혹시 지금 CY그룹에 출근하시는 건가요? 얼마 전에 사원식당에서 본 것 같아서요.”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리 라이브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하더라고요.” “왜요?”여형민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번에 제로씨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동생분 매니저를 만나서 잠시 얘기 나눴거든요. 근데 bj매니저로 일하면 월급이 굉장히 낮대요. 제로씨 같은 핫한 사람이면 수입이 쏠쏠하지만 동생분 이력서로는 신인정도만 담당할 수 있을걸요. 집안도 괜찮으신분이 왜 고생을 사서 하신대요.” “자기만의 삶을 찾고 싶은가 봐요.” 심유진이 웃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죠.” “동생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여형민이 믿기 어려워하며 말했다. “독립하긴 좀 힘들 것 같은데...” 여형민의 표정을 보아하니 심유진은 모르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한 달 전쯤에 허대표님이랑 외출하다가 마주쳤었거든요. 밖에서 오래 기다린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얼굴이며
제로의 매니저들과 인사를 나누고나서 심유진은 간식을 나눠드리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일하는데 방해하는거 아니야?” “7시부터 라이브 시작이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방해는 무슨.” 제로는 과자를 한봉지 뜯으며 웃었다. “아까 뭔가 토론하는것 같던데...” “아니예요.” 제로 매니저인 이율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냥 잡담중이였어요.” “맞아요.” 제로 담당자인 김이현도 말을 보탰다. “들키지 않으려고 항상 회의하는척 하거든요.” 심유진은 요즘 애들을 따라가기 바쁜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얘기 하고있었어요?” 심유진이 물었다. “아리에 bj매니저가 한분 새로 오셨는데 빽있는 집안에서 온것 같더라고요. 지금 신인bj 두명 맡고있는데 팬은 얼마 안되고 게임 실력도 별로인 애들을 데리고 아진쪽이랑 광고를 계약했더라니까요. 광고비만 1년에 몇억이예요.” 이율은 조금 분해보였다. “아진이 뭐예요?” 심유진은 이쪽에 관해서는 아는게 없었기에 자연스레 브랜드명도 알지 못했다. “국내에서 컴퓨터 관련된 제품을 가장 잘 만드는 회사예요.” 이율이 설명해줬다. “제로가 이쪽에 발을 들이고나서부터 키보드며 이어폰, 마우스 그리고 컴퓨터 의자까지 그쪽 회사에서 협찬을 엄청 받았었어요. 제로가 광고도 엄청 많이 해줬었는데 계약얘기는 한번도 안하더니...” “저번에 아진쪽에서 광고모델은 필요없다고 하지 않았어?” 김이현이 물었다. “맞아! 그러니까 그 심연희라는 사람이 빽이 있다는거야.” 이율이 눈을 흘겼다. “심연희?” 심유진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심연희일줄은 몰랐다. “왜? 언니가 아는 사람이야?” 제로가 물었다. 심유진은 심연희와 자신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싶지 않았다. “어... 그냥 조금 아는 사이야.” 이율과 김이현이 흥미롭다는듯이 물었다. “그러면 혹시 무슨 빽이 있는건지도 알고계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둘은 조금 실
제로가 강력하게 요구했기에 심유진은 라이브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라이브가 진행될 때 심유진은 휴대폰으로 라이브방송을 시청하며 상당한 금액의 선물을 보냈다. 선물을 보내자마자 모니터에 심유진의 닉네임이 떴다. “제로최고님, 선물 너무 감사합니다!” 이율과 김이현이 옆에서 박수를 피며 좋아했다. “헐, 진짜 감사드려요. 대박. 역시 아름다우셔서 그런가 통도 크시네.” 심유진은 머쓱해났다. “이 기능은 요즘에 생긴 건가요?” 그녀는 라이브 방송에서 선물을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생긴 지 한 달쯤밖에 안 됐어요.” 이율이 말했다. “말도 마세요. 이 기능이 생기고 나서 팬들 사이에서도 누가 선물을 많이 보내나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더라고요. 이번달 수입이 저번달보다 배는 늘었어요.” “잘됐네요.” 심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에 메시지가 두 개나 떴다. “연희사랑해 님이 풍선을 다섯 개 보냈습니다.” “연희사랑해 님이 풍선을 다섯 개 보냈습니다.” 심유진이 기억한 게 맞다면 풍선 한 개당 백만 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저 사람은 어마어마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 “아니 또 저분이시네.” 이율이 눈을 흘겼다. “그냥 광고를 해라 광고를. 아니 심연희랑 관계가 있는 사람인 걸 아주 온 세상에 다 알릴 기세예요.” “네?” 심유진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bj한테 선물을 보낸 건데 심연희 씨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방금 선물을 보낸 게 심연희 씨가 관리하는 애들이에요. 그러니까 저 돈 중에 어느 정도는 심연희 씨 주머니에 들어가는 거죠. 매번 어마어마한 선물에 광고까지 받았으니 이번달 수입이 저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어쩌면 저희 회사에서 가장 많이 번 매니저가 되지 않을까요?” 이율은 매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지난 1년간 최고수입은 저였는데 저런 낙하산한테 밀렸네요. 분하다 분해.” “진정해.” 김이현이 이
심연희의 옆에 마르고 키가 작은 남자 두 명이 서있었다. 유명 브랜드의 후드티를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한 모습이 심유진이 상상하고 있던 남자 bj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구부정한 자세와 조금 경박해 보이는 웃음소리가 왠지 상상하고 있던 모습과 비슷했다. 이율은 제로를 보며 말했다. “우리 조금 기다렸다가 가자.”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고, 제로 형님 아니십니까!” 그중 한 남자애가 제로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기고만장해 보이는 모습에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늘 라이브 랭킹 3위로 밀려나셨던데 저희를 원망하시는 건 아니죠?” 이율과 김이현 모두 불쾌해 보이는듯했다. 심유진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로는 차분했다. “잘하시던데 당연한 성과죠.” 타격감이 전혀 없는듯한 답변에 그 둘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엘리베이터가 마침 도착하자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심연희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급히 재촉하기만 했다. “빨리 가기나 해, 뭔 말이 이렇게 많아.”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둘은 심연희의 말 한마디에 순한 양이 돼서 엘리베이터에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도 심유진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강압적인 태도의 심연희를 처음 봤다. 자신의 앞에서는 항상 애교 많고 연약한 모습만 보였기에 충격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심유진은 이거야말로 심연희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저 둘 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제로를 얼마나 따랐어. 맨날 제로한테 게임 한수만 가르쳐달라고 애교도 부리고. 근데 지금 봐, 기세등등해서는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잖아.” 이율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제로가 그런 이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언니, 참아. 그래도 나 아직 3위안에는 들잖아.” “그래도 화가 나는 걸 어떡해. 실력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편법을 써서 올라온 주제에 널 비웃잖
심유진이 한참을 변명하고 나서야 제로는 그녀가 아무 문제없다는 걸 믿었다. 하지만 식사하는 내내 심유진은 계속 심연희와 허태준 생각이 나서 식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식사자리가 끝나고 심유진은 리친시아로 돌아왔다. 저 멀리 서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마침 허태준이 차를 자주 세우는 위치였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심유진은 그 두 사람이 자신이 바로 자신이 계속 신경 쓰던 그 사람들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둘은 대화하는 내내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그다지 친밀해 보이진 않았다. 심유진은 더욱 궁금해졌다. 저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그녀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를 돌려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리친시아의 지하주차장은 그들이 사는 아파트와는 조금 멀었다. 여형민이 자리를 양도하기는 했으나 심유진은 차를 세울 데가 전혀 없을 때 빼고는 지하주차장까지 와서 차를 세우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허태준 앞을 지날 때 그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가 손을 갑자기 뻗었기에 급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그를 칠 수도 있을뻔한 상황이었다. 허태준이 운전석의 창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심유진은 차창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허태준이 허리를 숙이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차장이요.” 심유진은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전에는 계속 길옆에 세워두지 않았었나?” 심유진은 계속 심연희가 신경 쓰여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허태준은 그런 그녀를 보고 지금 심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차 옆을 가리키며 명령하듯 말했다. “저기에 세워.” 허태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그의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왔다. 심유진은 아까 심연희가 저 차에 타던 모습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아니에요, 그냥 주차장에 세울게요.” 심유진이 차갑게 거절했다. 그때 심연희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언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심연희가 차창을 잡으려다가 자연스럽게 허태
그에게서는 심연희의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심연희는 향수를 듬뿍 뿌리고 다니는 편이었기에 몇 미터 밖에서도 그 향이 맡아질 정도였다. 심연희가 심유진 집에서 며칠 지낼 때 심유진의 옷에서 온통 향수 냄새밖에 나지 않아 다들 무슨 향수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만약 정말 허태준이 심연희를 집까지 데려다 준거라면 좁은 차 안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향수 냄새가 배어야 정상이었다. “둘이 사이가 되게 좋네. 너무 부럽다.” 심연희는 가까워 보이는 둘을 보며 입꼬리가 더욱 경직된 것 같았다. 허태준이 말했다. “심연희 씨도 정재하 씨랑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성의도 없고 영혼도 없는 형식적인 칭찬이었다. 심연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심유진은 그제야 정재하가 떠올라 심연희에게 물었다. “정재하 씨랑 화해했어?” 심연희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화해까진 아니고... 그냥 나한테 자꾸 매달리는데 내가 거절을 잘 못하는 거지.” “그래?” 허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빛이 더욱 서늘해진 것만 같았다. “정재하 씨가 데려다주는 거 몇 번 봤는데? 그리고 되게 주동적으로 차에 타길래 나도 화해한 줄 알았지.” 심연희는 허태준이 그 장면을 목격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제가 타지 않으면 계속 쫓아다니는 게 너무 귀찮아서...” 심연희의 구차한 핑계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 허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부턴 정재하 씨가 찾아온 걸 보면 그냥 바로 신고할게.” 심연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허태준과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네, 감사해요.”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허태준은 19층을, 심연희는 27층을 눌렀다. 심연희가 이사를 간 후 심유진은 한 번도 그를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건 알고 있었으나 몇 층에 사는지는 몰랐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그녀는
심연희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으나 흐르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9층에 도착하자 허태준은 심유진을 감싸 안은채 내리고 심연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마워요.” 심유진이 말했다. 방금 허태준이 말한 건 모두 심유진이 마음속에 품고 있으나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어릴 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늘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가족이건 친구건 이유 없이 남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니 그녀는 심연희마냥 당당하게 다른 사람을 질책할 줄 몰랐다. 이런 자신이 싫었던적은 없다. 그저 가끔 떠올렸을 때 조금 서러울 뿐이었다. “동생조차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데 그냥 고맙다고만 하면 다야?” 허태준은 그녀의 집문 앞에 기대서서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움찔했다. “아니면...” 심유진이 그런 그를 살짝 떠봤다. “밥 먹고 갈래요?” “허!” 허태준이 코웃음 쳤다. “밥 한 끼로는 안될 것 같은데.” “네?” “앞으로 매일 아침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저녁에 당직 안서는 날엔 데리러 갈게.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나 보러 와줘. 같이 점심 먹자. 저녁은... 이제 상황 봐서 다시 정하는 걸로.” 요구가 과하지 않았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허태준이 손해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요구를 거는 건지 심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요?” “정말 모르겠어? 당신 동생이 나 좋아하잖아.” 허태준의 목소리가 매우 평온했다. 이런 엄청난 말을 하면서도 마치 오늘 날씨가 정말 좋다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 마냥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눈빛에 심유진의 둔한 반응에 대한 불만이 조금 묻어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심유진도 그렇게 둔한 게 아니었다. 그녀도 당연히 보통의 관심과는 미묘하게 다른 그 호감을 눈치채고 있었다. 심지어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둘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발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