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전부터 이 일의 배후에 허태준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허태준이 이렇게 시원하게 자기 입으로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예상이 맞구나 싶어서 식은땀이 쫙 났다. 그녀는 심연희를 아끼지도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심연희가 대구에서 사고를 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영은이 내내 귀찮게 굴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말한 대로 할게요.” “좋아.” 허태준이 만족하며 손을 놓고 바로 섰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심유진을 등지고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심유진의 출근시간은 9시였기에 그녀는 보통 8시 반에 출발했다. 그 정도면 아침을 먹을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허태준이 말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삼십분이나 일찍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1층에 내려갔을 땐 허태준이 아니라 심연희가 서있었다. 어젯밤 심연희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장문의 사과 메시지를 보냈었다. 우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언니, 내가 미안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대표님 말이 다 맞아. 내가 언니한테 전혀 신경을 못썼어. 동생으로서의 책임감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 “내가 고칠게. 앞으로 진짜 언니한테 잘할게.” 심유진은 감동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머리가 아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심연희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심연희는 심유진을 보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언니!” 심연희는 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건넸다. “내가 직접 만든 아침이야.” 도시락통 안에는 샌드위치가 두 개 들어있었다. 이건 바쁜 요리가 아니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유진은 도시락통을 건네받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심연희는 그런 심유진을 끌어안았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제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미안해.” 심유진이 웃었다. “괜찮아.” “그럼 혹시... 이제 화 안
그녀의 이 행동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허태준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래.” 그는 조수석의 문을 대신 열어주고는 머리가 차에 부딪히지 않도록 살짝 감싸주며 그녀가 차에 타는 걸 지켜본 후 자신도 운전석 쪽으로 갔다. 심연희가 따라와서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저도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허태준이 물었다. “정재하 씨가 안 데려다 주나?” 심연희는 난감해했다. “제가 더 이상 쫓아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심연희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쫓아온다고 해도 이젠 제가 모른척할 거예요.” “하지만 우린 같은 길이 아닌 거 같은데.” “네?” 심연희가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몰라하는 틈을 타서 허태준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심연희를 분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여형민이 차를 몰고 그녀의 옆을 지나다가 경적을 두 번 울렸다.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심연희는 사양하는척하며 말했다. “제가 너무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심연희가 차문을 열려고 하는데 여형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불편하시면 말고요.” 여형민은 빠른 속도로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오직 심연희만이 그 자리에 남아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차 안에서 허태준은 자꾸 올라가는 자신의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는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아까 너무 잘했어.” 그는 심유진을 칭찬했다. “고마워요.” 심유진은 그저 예의상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심유진은 이미 식당에 들어섰는데 허태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CY로 와.”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는듯한 목소리였다. 아침에 헤어질 때 하고는 완전 딴판이었다. 심유진은 어떤 부분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지 알지 못했지만 이럴 때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허태준은 뭔가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요?” “왜, 아침에 잘만 부르더니.” 아침에 뭐라고 불렀더라? 심유진은 다급히 기억을 되짚어봤다. 그러고 보니 태준 씨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아까는 심연희 앞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였기에 막상 둘이 있을 때 부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건 한층 더 가까워 보였고 자신과 허태준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심유진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가져온 음식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형민에게 문자를 보내려는데 그가 텔레파시라도 받은 양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앞만 쳐다보며 들어왔기에 심유진이 서있는걸 미처 보지 못했다. “왜 너랑 심연희 씨 사이에 뭔가 있다는 소문이 도는 거야?” 그가 허태준에게 물었다. 심유진은 인사를 건네려다가 멈칫했다. 허태준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심유진 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며 허태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허태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서 조사해 보라고 했어. 누가 낸 소문인지 밝혀내기만 하면...” 뒤의 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제 제로를 만나서 그들과 나눴던 대화내용이 떠올랐다. 만약 정말 이 소문의 근원이 그들이라면... 심유진은 벌써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제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다른 사람한테 심연희와 회장님에 관한 얘기한 적 있어?” 제로는 방송이 있을 때만 회사에 오기 때문에 오늘 발생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난 말한 적 없어. 언니들은 잘 모르겠는데... 근데 왜 그래?” “한번 물어봐봐.” 심유진의 타자속도가 빨라졌다. 전송버튼을 막 눌렀는데 여형민이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왜 여기 계세요?” 심유진이 휴대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으며 웃어 보였다.
"그럼 회사에서 심연희와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사실은 너란 말이야?" 허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위협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유진은 온몸이 얼어붙었고, 그녀의 두꺼운 코트로는 허태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한 말을 뒤엎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의 이성은 빨리 돌아왔고,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무겁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맞아요.” 허태준이 김이현을 추적하고 제로와 이율을 연루시키는 것보다 그녀가 혼자서 책임을 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녀와 허태준의 친분에 의하면 아마도, 어쩌면 그들은 여전히 일종의 ‘친분’ 을 가지고 있고, 그는 화를 내고 벌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녀를 죽일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허태준의 미소가 깊어질수록 그의 눈은 더욱 차가워져만 갔다. “좋아.”두 글자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심유진은 또 한 번 몸을 떨었고, 그는 그 이후로 다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젓가락을 바꾼 뒤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중간중간 여형민이 여러 번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했지만 허태준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심유진도 줄곧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자 여형민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허태준은 빈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1시 반이 다 돼 가는데 왜 안 가고 있어?”그가 심유진에게 물었고, 그녀는 줄곧 겁에 질린 채로 있어서 시간이 흐르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1시 30분쯤 됐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재빨리 남은 밥을 버리고 가방을 손에 든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저는 다시 일하러 갈게요! 그럼 두 분도 잘 계세요!" 그녀는 출근 시간이 늦어졌다는 생각과, ‘수라장’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걸음도 떼기 전에 허태준이 뒤에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데려다줄게.”그가 너무 단호하게 말한 탓에 그녀는 거절할 타이밍도 잡지 못했다. 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덥
"허 대표님, 저는 이 행동이 제 책임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그녀는 단지 그의 여자친구인 척했을 뿐이지, 그들이 실제 커플이 할 일을 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자 허태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이건 네가 함부로 루머를 퍼뜨린 대가야. 물론 이걸로 그치지 않을 거야. 나와 심연희의 스캔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놓도록 해.” 그 순간 심유진의 얼굴이 십 년은 늙은 듯했다.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지, 그럼 저녁에 봐.”허태준은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고, 그녀에게 유독 시크한 뒷모습만 보여주고는 떠났다. 그들이 얘기를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심유진은 너무 화가 나서 버튼을 힘껏 두 번 쳤다.그러자 멀리서 허태준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세게 쳐서 부수면 물어내야 할걸.”심유진은 그의 말에 즉시 손을 등 뒤로 숨겼고 서둘러 부인했다."아뇨, 제가 안 했어요, 잘못 들은 거겠죠.” 허태준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잡담을 나누던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귓속말을 나누던 무리들도 모두 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진지하게 업무를 보는 척 양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박수를 두 번 치며 모두를 주목시켰다."다들 기억하도록 하세요, 방금 나간 심유진 씨가 바로 제 여자친구입니다. 이 일을 여러분이 아는 어느 누구라도 다 말하고 다녀도 됩니다.” 그가 해도 된다는 것은 “무조건”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대표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모두 그의 숨은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알아들었습니까?”허태준이 물었다.그러자 모두가 만장일치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여형민은 여전히 허태준의 사무실에 머물면서 테이블에 남은 음식을 “소탕”하고 있었다. 이때, 입구에서 소리가 들리자 그는 고개를 돌려 허태준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물었다. "심유진을 데려다주고 오는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그냥
심유진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간신히 오후에 출근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소미는 그녀에게 미친 듯이 윙크를 하며 입모양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뒷문으로 가요!”로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이소연을 피하기 위해 매일 뒷문으로 가곤 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소미의 눈짓과 입모양으로 심유진은 곧장 이소연이 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여형민이 보낸 경고장은 어제 아침 조 씨 집안에 도착했고, 그것도 이소연이 직접 받은 것이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녀가 싸우고 싶은 건지, 아니면 화해를 하고 싶은 건지, 뭐가 되었든 올 게 온 것이다. 심유진은 가방을 꽉 붙들고 떠나려고 몸을 돌렸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그녀의 뒤를 쫓는 발소리는 경쾌했고, 나이가 든 이소연 같지 않았다. “거기 서!” 한 사람이 그녀 앞으로 달려오더니 팔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고, 자세히 보니 그녀의 추측과는 달리 눈앞에 있는 사람은 조건이었다. "왜, 찔리는 거라도 있어서 도망치려 했나 봐?” 그러자 심유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되물었다."내가 찔리는 게 뭐가 있다고?” "네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해놓고서는 아직도 찔리는 게 없다는 거야?”조건이는 분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심유진, 넌 뻔뻔한 거야, 아니면 양심이 없는 거야?”"네가 잘 알았으면 좋겠는데,”심유진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게 말했다.“이 일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너희랑 얽히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빨리 네 엄마한테 가서 임대료를 돌려달라고 해.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 테니까. 안 그러면 법정에서 험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어.” "우리가 왜 임대료를 돌려줘야 하지?”조건이가 당당한 모습을 한 채 말했다. "부동산 증서에는 우리 형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어. 형이 죽어도 이 집은 우리 엄마 아빠의 몫이 있는데, 네가 무슨 근거로 다
“우선, 네 형은 내가 죽인 게 아니야.”그녀는 이 점을 강력하게 부인함과 동시에 사실을 분명하게 얘기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넌 경찰에 네 형이 평생 반신불수의 몸으로 살 운명이 되자 집안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자살을 했다고 진술했어.”그러자 조건이가 반박하려 했다. “그건……”그는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반쯤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건 너희가 우리 엄마한테서 2억 원의 입막음 비용을 받았기 때문 아닌가?”심유진이 그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네 형은 알까? 자신이 가족들에게 고작 2억 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그녀가 이미 다 까발리자 조건이도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다.“네가 잘못이 없다면, 너희 엄마가 우리 가족에게 2억 원을 왜 보상했지?” 그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심유진은 지금 이 장면을 녹화해 그녀의 똑똑한 친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녀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그녀의 딸이 어떤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똑똑히 알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영은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게 분명했다.조 씨 집안사람들이 이 문제를 들춰내서 심 씨 집안에 폭로하지 않는 한 심유진이 어떤 오해를 받고 어떤 굴욕을 당하든 서영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네 형의 자살 원인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무슨 근거로 다 내 탓으로 모는 거야? 그럼 나는 네 부모가 매일 병실에서 말다툼을 하고, TV에 나와서 창피를 줘서 네 형이 죽은 거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럼 원인은 네 부모에게 있으니 너희 부모가 보상을 해 줘야지. 난 아직 네 형이랑 이혼을 안 했고, 그 사람의 병원비도 다 내가 냈으니까.”심유진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고, 다년간의 직장 생활은 그녀에게 인내심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강하게 나가는 법도 알려 주었다.조건이는 그녀를 당해낼 수 없다."너, 너 이건 억지라고!”그는 심유진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뜨고 욕을 퍼부었고, 그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심유진은 옅
심유진은 말 한마디 없이 치료비와 수고비를 그에게 보내 주었고, 사과 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중개인은 여전히 그녀를 무시했다.그녀는 다시 조건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임차인이 너희들이 돌려준 임대료를 받지 못했다고 하던데, 이체 기록을 보내줘봐.’조건이는 정말로 그녀에게 은행의 모바일 앱에서 캡처를 한 사진을 그녀에게 보냈는데, 몇 시간 전 계좌로 200만 원 정도의 돈을 이체했다고 나와 있었다. 이 금액은 지불한 임대료와 딱 일치했고, 심유진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 사진을 가지고 중년 부부를 찾으러 갔다.그녀가 처음 초인종을 눌렀을 때 그들은 문도 열어주지 않고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에게 소리쳤다.“우리는 월세를 냈으니 절대로 이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소연 씨의 아들이 임대료를 돌려줬다고 하는데요.”심유진은 문에 바짝 붙어서 말했다."게다가 계좌이체 기록을 캡처해서 보내주기까지 했어요.” “무슨 이체 기록이요?”문 안의 남자는 더욱 화를 냈다. "돈을 돌려주지도 않았는데 계좌이체 기록이 어떻게 있다는 겁니까? 설마 두 사람이 짜고 쳐서 우리를 속이려는 건 아니겠죠?” 그의 분노는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또 조건이는 다른 전과가 많은 자였기에 심유진은 그 캡처 사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이 계좌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제가 다시 이소연 씨를 찾아가겠습니다.” 방은 한동안 조용했고, 심유진은 인내심을 갖고 마침내 그 남자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한 손으로는 문짝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빗자루를 쥐고 만반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사진은 어디 있죠?" 그는 경계를 하며 심유진을 쳐다보았고, 두 눈은 얼굴처럼 붉었으며 말을 할 때마다 강한 술 냄새가 풍겨졌다. 심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가 볼 수 있도록 휴대폰을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