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칠은 충격에 빠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제사장 일족은 황실과 동등한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며, 대제사장은 황제마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 여자는 제사장 일족이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 거라 장담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일행은 함께 한 객잔으로 들어갔다.무리의 재정 상태를 담당하고 있는 구십칠은 대범하게 비싼 술과 고기를 주문했다. 그들을 위한 축하 의식을 치르기 위함이었다.땡전 한 푼 가진 게 없는 낙청연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거하게 한 끼 얻어먹었다.낙청연이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구십칠이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랐다.“앞으로 잘 부탁해.”낙청연은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술잔을 집어 그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당연한 말씀을. 너와 나 모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거잖아.”말을 마친 낙청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얼굴에 지어진 의미심장한 미소와 투명한 눈망울은 영혼이라도 꿰뚫을 것 같았다.그 순간 구십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그는 당황함을 감추려 제사부전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제 당신에게 필요 없을지는 모르지만 나한테도 필요가 없어졌어.”아마 십중팔구 이 책도 구십칠이 훔쳐 온 장물 중 하나일 것이다.진법으로 둘러싸인 제사장 서고에서 책을 훔쳐 도망쳐 나온 구십칠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신도라는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는 자였다.낙청연은 제사부전을 집어 몇 장 펼쳐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오래된 익숙한 감정들이 살아나고 있었다.사부님의 압박에 못 이겨 제사부전을 암기하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사부님이 제시한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그날 밥은 없었다.너무 배가 고팠기에 하루 만에 이 두꺼운 책을 전부 암기했다.사부님은 보상으로 그녀에게 맛있는 반찬을 사주었다.그때의 그녀는 자신이 또래 아이들과는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그리고 자신이 재능이 얼마나 많은
그 다음으로 홍해 역시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낙청연은 느긋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창가로 비쳐 들어와서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감쌌다.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처럼 신성하고 아름다웠으며, 또한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사악하고 매력적이었다.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진익에게는 이런 표정 하나하나가 도발이고 모욕이었다.십대 악인이 스스로 주인으로 모시겠다며 무릎을 꿇었다.한주먹이면 목숨을 잃을 것처럼 연약한 여자의 앞에!놀란 건 진익뿐이 아니었다.현장에 있던 무장 금위군 역시 충격에 빠진 듯, 입만 뻐금거렸다.잔인하고 악랄하기로 세간에 이름을 날린 십대 악인. 그중에서 홍해는 사람만 보면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놈이었다!그런데 그들 모두가 일제히 한 여자 앞에 무릎을 꿇다니.충격적인 장면에 객잔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숨 막히는 고요 속에 낙청연이 제사부전을 집어 들더니 진익에게 던졌다.“이건 돌려드리죠.”날아오는 서책을 한 손에 받은 진익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살아나도록 그것을 힘껏 틀어쥐었다.황자가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아무리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너희를 돌려보낼 수는 없어.”“너는 노예 감옥의 진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 그 진법은 전 대제사장께서 직접 설치한 거라 복원하기 아주 힘들거든. 그에 대한 죄를 물을 것이다!”홍해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해가 진익을 향해 칼을 겨누며 으르렁거렸다.“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우리가 두려워할 것 같아?”“노예 감옥에서 사람 안 죽이고 얌전히 있던 것만 해도 우리는 예의를 지켰어! 여기서 더 뭘 어쩌라는 거야!”진익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들이 반항한다면 저들을 죽일 명분이 생긴다.낙청연은 여전히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일단 칼 좀 내려봐. 황자님, 이런 생각은 혹시 안 해보셨는지요….”“제가 진법을 변동했으니 복원도 가능하다고
날카로운 눈빛과 경계심 가득한 말투에 낙청연은 오히려 상대가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힘없이 식탁으로 쓰러지며 멍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왜지?”온심동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까.”온심동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천천히 낙청연에게 다가왔다.“천궐국에서 굴러온 자가 진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면 제사장 일족은 무슨 수로 이 나라에서 얼굴을 들고 살겠니?”“나는 힘겹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단다. 내 위치를 위협하는 인간은 절대 살려둘 수 없어. 너에게 진법을 복원할 능력이 정말 있든, 그냥 죄를 모면하고자 했던 변명이든 난 너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온심동 역시 허약한 겉모습만 보고 쉽게 죽일 수 있다고 마음먹은 것이다.말을 마친 그녀는 낙청연의 목덜미를 향해 비수를 치켜들었다.한 방에 죽일 생각이었다.하지만 비수가 떨어지던 순간, 낙청연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순간 놀란 온심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독에 당한 게 아니었어?’낙청연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온심동의 손에 들었던 비수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하지만 온심동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비수를 잡고 다시 낙청연을 향해 휘둘렀다.낙청연은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 식탁을 발로 걷어차서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힘없이 뒤로 물러난 온심동이 살기 어린 눈빛을 하고 그녀를 쏘아보았다.겉보기에 불면 날아갈 것처럼 허약한 여자의 실력이 이 정도였다니!‘안 돼! 죽여야 해!’온심동은 다시 비수를 잡고 달려들었다.전부 상대의 급소만 노린 공격이었다.그녀 역시 십대 악인을 길들이려 노력한 적 있었다. 하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만약 낙청연이 그들을 거두었다는 소문이 돌면 대제사장 자리 역시 위협을 받게 된다!그러니 절대 이 여자를 살려둘 수 없었다.낙청연은 처음에는 유연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같은 스승을 모시던 제자라서 온심동의 습관
낙청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힘없이 의자에 가서 앉았다.온심동은 힘들게 대제사장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그녀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목숨을 빼앗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그녀가 기억하는 어린 사매는 어디로 간 걸까.그녀보다 타고난 재능은 부족해도 부지런한 편이었고 놀기도 좋아하고 잘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였다.하지만 오늘 만난 온심동은 그녀가 기억하던 그 사람이랑 완전히 달랐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침서가 다가왔다.“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해결했네. 역시 낙요야. 여국 제일의 대제사장!”침서는 의자를 두 손으로 짚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낙청연을 바라보았다.하지만 낙청연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습니다. 이제 장군 차례입니다.”침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넌 도성에서 명성을 떨치게 될 테니까. 대제사장 자리는 시간문제야.”그 말에 낙청연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오심동을 해치지는 마세요.”“지금 대제사장은 오심동이야. 너를 대제사장으로 올리려면 그 애를 죽일 수밖에 없어.”침서는 잔인한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그 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잘 압니다. 그 애는 제 상대도 되지 않는데 목숨까지 거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낙청연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침서는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래. 네 말을 들어야지 어쩌겠어. 미래의 대제사장님.”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낙청연의 이름은 도성 곳곳에 퍼졌다. 황실과 제사장 일족도 소란스러웠다.십대 악인이 어떤 인물들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들을 굴복시킨 자는 여태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을 낙청연이 해낸 것이다.게다가 그들을 데리고 노예 감옥을 탈출하면서 진법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니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이 일을 전해들은 고묘묘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방 안에서 물건들을
낙정은 부진환이 자신을 본다면 분명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처마 밑에 서 있던 그림자는 담벼락을 짚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부진환은 고통을 억누르며 창백한 얼굴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왕야, 이제 돌아가시지요. 여기서 봐봤자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소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부진환은 굳은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말했다.“그냥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그런다. 낙정은 무조건 없애야 해! 저 여자를 살려둘 수는 없어!”소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야. 제가 부근 삼거리의 출입구에 사람을 더 보냈습니다. 낙정은 날개가 달려도 도망가지 못해요! 그러니 이제 돌아가시지요.”부진환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걸음을 돌렸다.낙정은 기를 쓰고 포위를 뚫으려고 발악하고 있었다.하지만 어마어마한 병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잡히고 말았다.봉쇄한 거리 양켠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 있었다.낙청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옥으로 압송되었다.황궁에서는 치열한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제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요? 약속을 어기겠다는 말씀이십니까?”엄내심이 분노를 억누르며 따지고 물었다.황후로 책봉된 후, 그녀가 이렇게 속내를 다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었다.부운주가 차갑게 말했다.“그렇다.”그 말에 엄내심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낙정이 부황을 시해하려 한 증거가 수두룩하다. 이런 자를 살려둘 수는 없어. 황후에게 억한 마음으로 이러는 거 아니야.”엄내심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원망에 찬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제가 이렇게 사정해도 소용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꼭 죽여야만 하나요?”부운주는 여전히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엄내심은 씩씩거리며 황제의 서재를 나갔다.낙정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여국에는 풍수사가 많지만 그녀의 신변에는 믿을만한 풍수사가 없었다. 그건 그녀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래서
낙청연은 며칠 동안 정양한 덕에 상태가 좋아져 의자에 앉은 채로 햇볕을 쬐고 있었다.“대체 진법 어디를 얼마나 고친 것이냐?”온심동이 차가운 어조로 따져 묻자 낙청연은 눈을 감은 채로 느긋하게 대꾸했다.“대제사장은 너다. 그런데 왜 내게 묻는 것이냐?”온심동은 주먹을 꽉 쥔채로 분개했다.온심동의 능력은 출중하지 않았고 낙요 사저만큼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도 없었다.낙청연은 온심동이 얼마나 민망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심동에게 있어 낙청연은 그저 천궐국의 섭정왕비에 불과한데 대제사장인 그녀보다 더 대단했다.“그것을 묻기 위해 오늘 날 찾아온 건 아니겠지. 내가 쉽게 알려줄 리도 없고 말이다.”온심동은 이를 악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제사 일족이 네 가입을 요청한다.”그 말에 낙청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드디어 눈을 떴다.“내 생각보다 조금 늦었구나.”낙청연이 입꼬리를 당겼고 온심동은 불쾌한 듯 말했다.“이것은 제사 일족이 처음 이례적으로 외부인을 초청하는 것이다. 네 주제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낙청연은 웃었다.“제사 일족이 날 초청하는 것은 내가 진법을 회복하길 바라서겠지. 그런데 네 태도를 보니 남에게 부탁하는 태도가 아니구나.”온심동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현재 황실은 진법을 복원하라고 그녀를 닥달하고 있었다. 노예영(奴隸營)은 아주 중요한 곳이다. 만약 회복하지 못한다면 안에 있는 죄 지은 노예들이 잇따라 도망쳐 나와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온심동이 여러 번 시험해봤으나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었다.더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면 황제가 그녀에게 죄를 물을 것이 분명했다.온심동은 성질을 참으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제사 일족은 네가 필요하다! 네가 가입해줬으면 좋겠다!”낙청연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이 정도면 괜찮구나.”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언제 입궁할 것이냐?”온심동이 대답했다.“입궁하기 전에 우선 진법을 복원하거라.”“그러면 내일 입궁할 수 있을 것이다.”“알
밤이었다.진익은 한 객잔에 도착해 부하에게 물었다.“다 알렸느냐?”“다 알렸습니다! 오늘 밤 성문이 열리면 날이 밝기 전에 적어도 오백 명이 성에 들어갈 것입니다!”진익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오백 명이라, 10대 악인과 연약한 여자 한 명 상대하기에는 충분하겠지?”부하가 대답했다.“당연히 충분합니다! 그 오백 명도 전부 일반인이 아닙니다. 철갑옷을 입은 금군도 당해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연약한 여자는 물론이고 10대 악인까지 전부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진익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싱긋 웃었다.“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거라. 절대 우리가 한 짓이란 걸 침서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자님!”-다음 날 아침 일찍 낙청연은 10대 악인을 데리고 현무가에 도착했다.그 거리는 궁문으로 바로 통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거리에 도착해 보니 예전처럼 떠들썩하지 않았다. 거리는 한적했지만 양쪽 점포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순간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차루와 주루 안에 앉아있는 남녀들은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구십칠은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들 문제가 있는 것 같다.”“다들 조심하자고.”10대 악인은 주변을 경계하며 수시로 대비했다.그러나 앞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그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매섭고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낙청연의 가녀린 몸은 널따란 망토에 가려졌다. 바람이 불어 망토가 날리자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드러났다.창백한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길옆 주루에 있던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저렇게 허약해 보이는 여인이 어떻게 10대 악인을 굴복시킨 거지?”“그러게. 우리는 몇 년 동안 시험을 봐도 제사 일족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저 허약한 여인은 대제사장이 제사 일족에 들어오라고 요청했다고 하더군.”“게다가 저 10대 악인이 왜 저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낮추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저 얼굴 때문이 아니겠나
적이 너무 많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그들은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바빴다.바로 그때,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와 손에 든 장검으로 낙청연의 머리를 찌르려 했다.“낙청연, 죽어!”그 목소리에 낙청연은 살짝 흠칫했다.너무 익숙한 목소리였다.랑심!검광이 번뜩이자 눈이 시렸던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막으며 눈을 감았다.멀지 않은 곳에 있던 침서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의아해했다.“눈이 어떻게 된 거지?”위험이 덮쳐오자 낙청연은 신속히 몸을 피했고 검을 들어 랑심을 막아낸 뒤 거리를 벌렸다.낙청연은 서늘한 눈빛으로 랑심을 바라봤다. 정말 그녀였다.랑심은 아직 낙청연을 죽이는 걸 포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여국까지 쫓아왔다. 의지만큼은 참 대단했다.랑심은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낙청연을 노려봤다.“오늘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내 손으로 죽이지는 못해도 다른 사람들이 널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걸 지켜볼 것이다!”랑심은 다시 한번 살기등등하게 낙청연을 공격했다.심지어 죽을 각오마저 한 듯했다.낙청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지만 살기 때문에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휘날렸다.“무릎 꿇거라!”서늘한 음성에는 약간의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거리를 뒤흔들었다.랑심은 손목을 떨다가 갑자기 무릎 한쪽을 꿇으며 피를 토했다.다음 순간, 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싸우고 있던 홍해는 이제 막 검을 휘둘렀는데 그 광경에 겁을 먹고 다급히 멈췄다.하마터면 멈추지 못할뻔해서 연신 뒷걸음질 쳤다.10대 악인은 깜짝 놀랐다.그들은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는 걸 보고 넋이 나갔다.진익 또한 놀랐다. 그는 창문틀을 잡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장관을 보는 순간 그는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부하가 옆에서 물었다.“황자님, 저희가... 그들을 구해야 합니까?”진익은 벽을 쾅 때렸다.“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을 것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상대가 안 되오.”낙요는 고개를 돌려 바둑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당신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바둑을 두며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요.”부진환은 바둑알을 하나하나 거두었다.낙요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햇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러고 보니, 나의 답답함을 풀 사람은 당신뿐이오.”“심시몽은 어의원의 심사를 통과하고 정식으로 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소. 그리고 강소풍의 집안에서도 그들의 혼사를 승낙하여 두 사람은 곧 혼사를 올릴 것이오.”“갑자기 심면과 낙현책도 혼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소.”부진환이 웃으며 말했다.“일찍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이들도 조급해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오?”낙요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걱정하지 않소. 대소사를 모두 당신이 걱정하고 있지 않소? 초경의 수위가 있으니, 몇 년이 지나도록 용모가 변하지 않았소. ”“나 같으면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으니, 일찌감치 늙었을 것이오.”몇 년 동안 부진환은 그녀를 도와 적지 않은 조정의 일을 분담했다.그녀도 부진환의 동반에 습관이 되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진환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턱을 괴고 물었다.“이 나이가 되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하오?”“걸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단란히 모여있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오? ”부진환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후회하지 않소.”“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오.”“게다가 당신은 여제요. 당신이 늙었다고 해도 누가 감히 푸대접하겠소?”“당신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 난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초경의 수위로 늦게 늙는다고 하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이 늙으면 내가 당신을 부축하고 업고 다닐 것이오.”낙요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참 좋소.”이듬해 가을.심시몽은 강소풍과 혼사를 올렸고 어의원 5품
강소풍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어머니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셨소.”설명할수록 강소풍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심시몽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그를 위로했다.“자네의 뜻을 알고 있소. 설명할 필요 없소.”“시몽... 미안하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방법을 강구하여 어머니에게 자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오. 분명 어머니도 자네를 받아들일 것이오. ”그 말에 심시몽은 살짝 놀라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나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었소?”심시몽은 강소풍이 특별히 그녀를 찾아와 이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연을 끊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니요. 그럴 리가 있소.”“나는 단지 이전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뿐이오. 이번 달 안에 혼담을 꺼낼 수 없을 텐데, 나를 기다려줄 수 있소?”“말재주가 좋지 않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어머니께서는 자네가 연약하고 힘없다고 생각하시오. 앞으로 내가 출정하면 자네가 홀로 집안을 지킬 텐데, 우리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시오.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대충 뜻을 알아차렸다.“어머니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며느리를 원하고, 자네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기를 원하시오.”“나는 비록 무공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소.”고개를 들어 올린 심시몽의 눈빛은 밝았다..강소풍은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정말이오?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싶소?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심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소? 자네가 포기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강가는 장군 집안이라 분명 우리 언니와 같은 여인을 좋아할 것이오. 난 비록 언니와 비길 수 없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오.”“여제께서 나에게 약옥을 주었소. 만약 순 의원과 의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어의원에 들어갈 기회가 있소.”“성공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약간 의아해했다.“공주는 저를 탓하지 않습니까...”“그분은 공주시다. 천하를 품고 있는데, 어찌 네가 범한 작은 잘못을 추궁할 리 있냐?”“지금 너의 변화를 보면 공주도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려야 할 예의는 없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나면 공주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거라.”심시몽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예. 내일 가겠습니다.”“저는 먼저 약옥을 넣고 의관에 가겠습니다.”심시몽은 기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고,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도 방금의 의기소침함이 없었다.심면도 기뻤다.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 같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소풍이 집에서 어머니와 싸우고 있었다.“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를 현학서원에 보내 양성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도 마땅히 너와 어울릴 만한 부인을 얻어야 한다. 너와 전장을 누비며 적을 죽이는 그런 사람 말이다.”“힘없이 연약하게 집안에서 서방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아가씨는 안 된다.”“이전에 그 심시몽을 위해 집안의 빙천영지를 훔쳤고, 심지어 벌을 받고도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심시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 아이와 혼사를 올리려는 것이냐?”“말도 안 된다!”강부인은 단호한 태도로 조금도 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강소풍은 내키지 않는 듯 반박했다.“심시몽이 평범하다니요? 어떻게 평범하다는 말입니까? 심시몽은 그저 무공이 부족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예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하물며 그녀의 언니는 이미 태자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니 심시몽도 좋은 아가씨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강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언니는 언니이고, 심시몽은 심시몽이다. 어찌 동일하게 논할 수 있겠냐?”“강가는 권세에 빌붙지 않고, 심시몽의 언니가 태자라는 것을 봐서 그녀를 맞이하려
“나중에 자네가 신의가 될지도 모르오.”심시몽이 웃으며 말했다.“자네의 좋은 말대로 되길 바라오.”모두 술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면이 임계천에게 물었다.“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소?”“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소.”임계천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에 그저 궁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다들 기분이 좋았고 투지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술을 너무 늦은 시각까지 마셔서 그들은 심가에서 묵었다.오전이 되자, 각 집안의 하인들이 부랴부랴 사람을 찾아왔다. 몇 사람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으로 끌려갔다.궁에서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강소풍은 금군 기사영 통령으로 봉해져 도성과 황궁의 안위를 지키게 되었다.임계천은 형부로 전근되었다.소우청과 봉함선은 수주의 군영 부장군으로 명을 받았다.소우청의 행처는 그의 아버지 소진오가 좋은 경험을 하기를 바라며 부탁한 것이다.낙요는 봉함선이 여인이기에 그녀를 그렇게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동적으로 수주에 갈 것을 청구했다.봉함선이 말했다.“여국은 역대로 여 장군이 없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여장군이 되고 싶습니다.”“만약 힘들고 험한 곳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포부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낙요는 그녀의 담력과 야심을 높이 사고 그녀의 청을 승낙했다.“나는 네가 여국의 첫 번째 여장군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들 외에 현학서원의 다른 학생들도 그들로 하여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행선지를 얻었다.유독 심시몽에 대해, 낙요는 따로 안배를 해주지 않았다.백서가 걱정했다.“어찌 유독 심시몽만 얘기가 없으십니까? 심시몽이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낙요가 웃었다.“아니다. 이미 심면을 시켜 심시몽에게 한가지 물건을 보냈다.”백서는 살짝 놀랐다.“일찍이 계획이 있으셨군요.”이때의 심시몽은 홀로 넋을 잃고 연못가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수
유생이 드디어 알아차렸다.“그랬구나. 내가 어찌 이걸 잊은 것이냐.”“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구나. 이렇게 운 좋게 제사장 자리를 주울 수 있으니.”심면이 답했다.“아닙니다. 전에 제가 청주 전쟁에서 조난했을 때, 제자들을 통솔해 적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현책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났습니다.”“사저가 소제사장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유생은 쑥스러워하며 낙현책을 힐긋 쳐다보았다.“네가 이렇게 말하면 낙현책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낙현책이 웃으며 답했다.“그녀가 말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너는 나보다 대제사장이 더 잘 어울린다.”“나는 무학에서 너보다 좀 나을 뿐이다. 정말 대제사장이 되려면 너보다 잘할지 모를 일이다.”“다만 제사장 일족의 심사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하물며 나도 대제사장이 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여제가 기뻐하기를 바랄 뿐이다.”이 말을 듣고 유생은 마음이 놓였다.“불쾌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구나. 권력과 지위 앞에서 네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한 잔 권하마!”유생이 술잔을 들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고,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 마시는 것이오?”“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니, 의리가 없소!”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강소풍과 임계천이 술병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오늘 밤 다들 왔구나!”“자, 심면과 유생을 위해 한 잔 하세!”모두 자리에 앉아서 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그렇게 한참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한 강소풍이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가에 겹경사가 닥칠 것이오.”모두 멍해졌다.강소풍은 낙현책과 심면을 바라보았다.“여제가 두 사람의 일을 인정했으니, 언제 혼사를 치르는 것이오?”심면은 갑자기 얼굴을 붉어지며 황급히 강소풍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술을 마셔도 자네의 입을 막지 못한 것이오?”
“저희가 어찌 가족입니까?”“50냥의 이득을 본 걸 후회한다면서요?”이 말이 나오자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유생이 그날 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어쩐지 상자를 도둑맞았더라니.유룽은 체면을 깎으며 사과했다.“유생아, 우리는 한 가족이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정상이다. 그러나 다들 나쁜 생각은 없다.”“이전의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이렇게 너희들에게 사과하마!”“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 너를 위해 잘 경축해야지 않겠느냐!”둘째아버지와 셋째 아버지도 모두 따라서 사과했다.집안 재산을 나누겠다고 얘기한 그날 그들이 각박한 만큼 지금 아주 자상했다.“유생아, 집으로 가자. 지나간 일은 잊고,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그래. 가족이 함께 지내면 얼마나 시끌벅적하냐? 따로 이곳에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으냐?”“우리 집에 좋은 술도 두 병 간직하고 있는데, 유생을 축하하러 오늘 꺼내마!”유생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차분하고 차갑게 말했다.“다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집안 재산을 나누고 연을 끊었는데, 어찌 번복할 사람이 있겠습니까?”“잘살든 못살든 더 이상 유가와 관계가 없습니다.”“다들 가시지요. 굳이 우리 집 앞에서 매달리려 한다면, 관아에 신고할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유생은 방안으로 돌아와 차갑게 문을 닫았다.문밖의 사람들은 후회에 휩싸였다.게다가 둘째는 첫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형님 탓입니다. 제사장 자리가 발표되기도 전에 넷째네를 쫓아내더니, 지금은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셋째도 불평했다.“유생은 앞으로 대제사장이 될 것이오. 앞으로 유생 덕을 보긴커녕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할 수도 있소...”유롱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어찌 또 내 잘못이 되었냐?”“애초에 심사 결과가 나오자, 다들 하나하나 달려와서 유생네가 끝났다고, 그들 일가를 헛되이 잘해줬다고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넷째 일가를 쫓아낸 것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유가 사촌들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유생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왜 제가...”왜 낙현책이 아닌가?장 총관이 웃으며 말했다.“어서 명을 받으시지요. 소제사장”유생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얼른 명을 받고 고마움을 전했다.장 총관은 자리에 있던 병사들을 힐긋 보고 유생에게 친절하게 물었다.“소제사장,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유생은 웃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어찌 사양하십니까? 제가 필요한 곳이 없다면, 이만 궁으로 돌아가 명을 전해야 합니다.”“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유생은 장 총관을 골목 밖까지 배웅했다. 장 총관이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주었다.“아가씨는 아직 소제사장의 권력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성에서 제사장의 권력은 여제와 대제사장에 버금갑니다.”“태자와 동등한 권력입니다.”“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처리할 필요도 없으니, 제게 한마디만 분부하면 됩니다.”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오늘 여제께서 태자도 정하셨습니까? 심면입니까?”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심가에 뜻을 전하고 왔습니다.”장 총관을 떠나보내고 유생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선택받을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낙현책한테 졌기 때문이다.심면도 태자로 봉해져서 참 좋았다.오늘 밤 심면을 찾아 축하하려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돌아갔다.병사들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소제사장, 오늘 분명 오해일 것입니다. 저희는 먼저 떠나겠습니다.”유생이 차가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멈추거라!”그들은 뻣뻣하게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직무를 잃을 수도 있다.“수사를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안 하시오?”“저희가 감히 소제사장의 집을 수색할 용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
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궁을 나가려던 참이다. 함께 가자.”유생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심면을 찾으러 가는 것이냐?”“심사 결과가 나온 후, 심면을 만나지 못했구나.”“심면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낙현책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런가 보구나.”“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거라.”“그래.”두 사람이 함께 궁으로 나온 후 유생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낙현책은 심면의 집으로 향했다.유가의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관아의 사람들이 유생의 집 앞을 막고 그녀의 부모님을 잡고 그들을 관아에 데리고 가려 했다.옆에는 그녀의 사촌들이 있었다.안색이 바뀐 유생은 다급히 달려갔다.“그만하시오!”“뭐 하는 것이오?”유생은 바로 부모님을 뒤에 감쌌다.유롱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냐니? 집안 재산을 나누었으니, 유가와 이젠 연이 없는 것이다. 집안 재산도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찌 유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냐? 그 상자에는 족히 수십만 냥이 있다!”“감히 너희랑 아무 연관도 없다고 할 수 있느냐?”유생은 그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고, 관리에게 고소할 줄도 몰랐다.“우리가 훔쳤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증거도 없이 저희를 잡다니, 법을 따르셔야죠.”유롱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유가 사람들이 네가 돌아온 것을 봤다!”“변명하지 말거라. 할 말이 있으면 감옥에 가서 변명하거라!”물건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유생이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그 돈을 되찾으려 했다.“내가 돌아갔다고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까? 농이 심하십니다!”“관청에 따라서 갈 수 있지만, 저희 부모님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사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유롱이 화를 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패다! 당연히 관아로 데려가야 한다!”“나으리, 그들은 수십만 냥을 훔쳤습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나리께서 반드시 돈을 되찾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조영궁.심사 결과가 나온 후 오랫동안 기다리던 낙요는 드디어 낙현책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여제.”낙현책은 고개를 숙이고 여제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사 결과가 나온 지 오래됐는데, 어찌 이제야 나를 찾아온 것이냐? 잘 고려한 것이냐?”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낙요는 그의 결정을 알아차렸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낙현책은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여제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저는 대제사장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낙요는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외는 아니었다.“잘 생각했느냐? 이 일은 번복한 기회가 없다.”낙현책이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심사숙고한 후 내린 결정입니다.”“제가 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했고 최종 심사에서 1등까지 하였는데, 여제를 실망하게 했다.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웠다.“실망하지 않았다.”“네 실력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찌 실망했겠느냐?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거라. 마음을 놓고 네 목표를 향해 가거라.”“나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여제가 화를 내지 않자, 낙현책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는 감동에 겨웠다.“고맙습니다.”낙요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동안 심면을 만나지 않았겠구나? 어서 네 결정을 알리러 가거라.”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을 나갈 준비를 했다.그동안 심면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있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누군가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낙현책이 궁을 나서려는데 제사장족 제자가 그를 가로막았다.“유생이 궁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소.”“급한 일? 알겠소.”유생은 그동안 궁에 있지 않았다. 갑자기 궁으로 찾아온 것을 보아, 중요한 일이 있는 듯했다.먼저 그녀를 만나고 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