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인하대교를 건너지 않고 아예 바다로 향했다. 차를 세운 한현진은 안전벨트를 풀더니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차가 멈춘 것을 느낀 강한서가 눈을 떴다. “집에 도착했어요?”한현진이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집에 가요. 졸려요.”한현진은 강한서의 안전벨트를 풀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하는 질문 몇 개만 대답하면 집에 데려다주고 자게 해줄게.”강한서가 곤란하다는 듯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질문이요.”한현진이 강한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첫 번째 질문, 내가 누구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더니 말이 없었다. 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에 가서 자고 싶지 않은가 봐?”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현진 씨요.”한현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방금 우리 집에선 그렇게 안 불렀잖아.”강한서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술에 취하고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생각 안 나?”한현진은 운전석 시트에 기대앉아 천천히 시트를 눕히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생각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생각나면 집에 가서 자자.”한현진이 이렇게 고집을 부릴 줄 몰랐던 강한서는 그만 멍해졌다. “질문에 대답만 하면 집에 데려다준다면서요.”“아.”툭 한 글자를 내뱉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난 원래 뱉은 말은 안 지키는 사람이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잘 거예요?”한현진은 눈조차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운전 더는 못 하겠어. 그냥 여기서 자.”강한서는 칠흑처럼 어두운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고집부리지 마. 여긴 너무 추워. 김 교수님께서 몸을 차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한현진이 멈칫하더니 눈을 떴다. “김 교수님? 어느 김 교수님 말하는 거야?”“너 치료해 주시던 김 교수님. 아기 갖고
한현진이 움찔, 몸을 굳혔다. 그녀는 순간 강한서가 뭘 묻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납치되었을 당시 납치범들이 그녀를 때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강한서가 죽어라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던 덕에 한현진은 납치범들의 폭력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강한서가 폭력의 피해로부터 한현진을 지켜줬다. 한현진은 강한서 등에 난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사람은 죽일 각오로 그를 내리쳤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강한서와 한현진은 그날 충분히 함께 도망갈 수 있었고 강한서가 잡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눈물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울음소리만 더 커졌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가슴이 저릿해졌다. “현진아, 울지마.”강한서가 한현진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난 네가 우는 게 제일 무서워.”한현진이 코를 훌쩍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는 게 아니라 좋아서 그래.”한현진이 손을 들어 강한서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졌다. “강한서, 나 다시 한번 불러봐.”강한서의 맑은 두 눈에 취기가 서려 있었다. 평소엔 차갑고 도도하던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엔 누구보다 순한 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아.”“현진아.”“현진아...”한현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강한서에게 입 맞췄다. 은은한 술 냄새가 입술 사이로 흘러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예쁜 목선이 드러났다. 그순간의 한현진은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한서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한현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쯤, 강한서가 갑자기 한현진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숨을 몰아쉬는 한현진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한서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조금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왜 그래?”한현진이 입을 열자 원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강한서의 호흡이 흐트러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너... 아빠로서의 경험치가 꽤 있어 보이네?”강한서가 말했다. “우리는 은서처럼 장난기 많은 아이 말고 착하고 얌전한 아이 낳자.”“...”한현진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너 사람 참 곤란하게 하네.”‘아이 성격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은서 얼마나 귀여워.”강한서가 코방귀 뀌며 말했다. “네 앞에서는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아? 너 만나게 해달라고 얌전한 척하는 거야.”한현진이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은서 예전부터 날 알고 있었어?”“우리 웨딩 촬영하고 나서 은서가 보고 싶다고 난리를 피워서 보여줬거든.”말하는 강한서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예쁘대. 난 죽은 사람처럼 딱딱한 얼굴이고. 아프면서도 얌전히 있는 법이 없어. 굳이 결혼식에 너 보러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내가 하락하지 않았더니 자기 혼자 몰래 나왔다가 스쿠터에 치였었어.”“안 그래도 빈혈인 애가 그렇게 장난기가 많아서야..”은서에 대해 얘기하는 강한서의 말을 들으며 한현진은 점점 멍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신혼 첫날밤의 진실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은서가 몰래 결혼식에 오려다 교통사고가 났고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라 은서를 보살피고 있던 강한서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전에 수혈을 해준 적이 있는 송민영에게 도움을 청했다. 강한서가 정체불명의 여자와 결혼한 것을 마음에 두고 있던 송민영에게 그건 결혼식을 망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니 송민영은 강한서가 입장하기 바로 직전 그에게 은서의 교통사고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강한서가 송민영을 데리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간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나, 이젠 강한서와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결혼식장에 버림받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 일은 한현진에게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 박힌 돌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날은 한현진에게 있어서 인생의 몇 안 되는 중요한 날 중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강한서의 등을 다독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너 언제 기억 돌아왔어?”강한서의 눈빛이 멍해졌다. 한현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머리가 오락가락하네...’웅 울리는 진동에 한현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송민준이 보낸 문자였다. [첫 번째 선물 박스 안에 있는 물건, 잊지 말고 꼭 봐.]문자 내용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무슨 물건이길래 일부러 문자까지 보내는 거지?’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은 차에서 내려 선물 박스를 뒤졌다. 송민준이 말한 박스 안에는 봉투에 담긴 서류가 들어있었다. 다시 차에 오른 한현진은 머리 위의 버튼을 눌러 차의 불을 켜고 봉투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넘긴 한현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서류는 바로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부탁했었던 황 닥터의 신상정보가 들어있었다. 조사를 부탁했을 때까지만 해도 한현진은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저 송가람이 모셔 온 그 의사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황 닥터는 국내에서의 이력이 너무 없었고 주로 해외에서 진료를 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결국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최면...’한현진은 오늘 강한서와 송가람의 대화를 엿듣던 상황을 떠올렸다. 송가람의 몸 근처에서 풍령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를 들은 강한서는 곧바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비록 지금 생각해 보면 강한서의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난 최면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데... 그 풍령 소리가 설마 최면사가 강한서에게 건 심리적 신호인 건가?’‘하지만 강한서처럼 내면이 강인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최면에 걸린 거야?’미간을 찌푸리던 한현진의 머릿속에 반짝 뭔가가 스쳐 갔다. 그녀는 순간 강한서가 먹던 약을 떠올렸다. ‘그 진통제... 그게 대체 뭐야?’얼굴이 사색이 된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약 어딨어?”한현진의
“난 그런 적 없어!”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너 그랬어. 그리고 송가람과 만나겠다고도 했어.”한현진이 단호하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오히려 술에 취한 강한서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어?”한현진이 진심 반 거짓 반으로 말했다. “응. 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 보고 싶지도 않다면서.”강한서의 표정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변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게 분명해. 내가 했던 말 주워 담을 수 있을까?”“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게 가능해? 난 이미 들었어.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쥐어짜 내더니 불쌍한 얼굴로 겨우 한마디 했다. “내가 했던 말 잊어버리면 안 돼?”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풉 소리 내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한서의 귓불을 만지며 살며시 그의 코를 비볐다. “안아주면 잊어버릴게.”그 말을 들은 강한서가 얼른 한현진을 품에 안았다. “잊었어?”한현진이 눈을 꼭 감았다. “아직.”몇 초가 지나가 강한서가 다시 물었다. “이젠 잊었어?”한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 잊은 것 같아.”또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잊었—”“또 쓸데없는 얘기하면 안 잊을 거야.”“...”한현진은 강한서의 품에 기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강에서 내 손 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잠시 생각하던 강한서는 더듬더듬 그날의 일을 한현진에게 전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두 사람의 무게를 버텨낼 수 없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그런 상태로 있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현진은 몸무게가 가벼웠고 수영도 할 줄 알았으니 그녀의 생존 확률이
그날 밤에 대한 강한서의 기억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 그를 구해주었다. 한현진은 송가람을 떠보던 오늘의 강한서를 떠올렸다. 송가람은 분명 강가에서 강한서를 찾았다고 했다. 강한서의 기억과 조합해 본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강가에서 찾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강한서를 물속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송가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은 곧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강한서의 일에서만큼은 송가람은 절대 자기 공로를 숨길 리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물에 뛰어들어 강한서를 구했다면 그에게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송가람이라면 분명 그것을 빌미로 강한서에게 강력하게 어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 강한서를 구한 사람은 따로 있고 송가람은 그저 어부지리로 강한서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송가람은 어떻게 마침 강한서를 찾을 수 있었을까?한현진은 또다시 강한서와 송가람의 대화를 떠올렸다. ‘강운 씨가 송가람을 부른 거라고 의심하는 건가?’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목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니 엉성하게 목걸이를 해주고 있는 강한서의 손이 보였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뭐해?”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새해 선물.”꽤 시간을 들여 겨우 목걸이를 걸어준 강한서가 두 눈을 반짝이며 한현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준 게 예뻐.”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강한서의 말에 아무 리액션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거울을 내려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강한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강한서가 선물한 목걸이는 주강운이 한현진에게 줬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다만 디테일이 조금 더 정교할 뿐이었다. 한현진은 순간 강한서가 생략하고 말하지 않은 부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준 게 주강운이 사준 것보다 더 예뻐.한현진은 손을 뻗어 목걸이를 만지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이젠 시간이 늦어 주강운이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더 있다 가라며 인사치레를 건네던 송병천도 곧 운전기사를 불러 주강운을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주강운은 동료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밖에서 그를 데리러 온 동료의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은 송병천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라탔다. 운전을 한 사람은 요즘 주강운이 새로 데리고 있는 제자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이제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장한 듯 예의를 갖춘 그가 주강운을 불렀다. “변호사님.”그리고 주강운에게 무슨 말을 건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강운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목을 움직여 스트레칭하더니 휴대폰을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수백 통의 부재중이 찍혀 있었고 그 대부분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시윤에게서 온 카톡 2개 외에도 일과 관련된 메시지와 새해 인사 몇 개가 있었다. 그는 주시윤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새해부터 누구 보라고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거니?][할아버지 화 나셨어.]주강운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채팅방을 나가버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출발해.”제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변호사님?”“사무실. 가져야 할 물건이 있어.”주강운의 제자는 그제야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강운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또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온 거라고 생각한 주강운은 짜증스레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문자를 보낸 사람은 양지원이었다. 그녀는 새해 인사로 한 마디를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부자 되세요. 세뱃돈 보내줘요.]주강운은 그 문자를 여러 번 되뇌며 읽어보았다. ‘단체 문자는 아닌 것 같은데.’잠시 생각하던 주강운은 양지원에게 계좌이체로 세뱃돈 5만 원을 보냈다. 그러자 양지원은 곧바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또 몇 초가 지나
한현진의 본가. 숙취 해소제를 마신 송병천은 서해금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도우미는 주방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송민준은 한현진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첩을 들고 있는 송가람을 발견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송가람은 어두운 곳에 있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오직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송가람의 손이 지금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송민준은 아무 말 없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런 송가람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진첩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송가람은 테이블 위에 툭 소리 나게 던져 버리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갔다. 송가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송민준은 그제야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사진첩을 집어들었다. 가죽으로 된 사진첩의 표지에는 송가람의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송민준은 소리 없이 그 흔적을 쓸어내리고는 사진첩을 펼쳤다. 동생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려고 사진첩을 넘기던 송민준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흙물을 뒤집어쓴 사진은 어디 있지?’미간을 찌푸린 송민준이 사진첩을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 ‘없어?’그는 고개를 돌려 식탁을 닦고 있던 도우미에게 물었다. “가람이 말고 이 사진첩 건드린 사람 또 있었어요?”잠시 생각하던 도우미가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 보셨어요. 도련님과 회장님께서 아가씨 차에 짐을 옮기실 때 강 대표님께서 사진첩을 잠시 보셨어요.”송민준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사진을 훔쳐?’‘사람이 할 짓이야?’송민준은 사진첩에서 사진 몇 장을 빼내고는 사진첩을 덮어 다시 박스에 넣었다. 그러고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물어보시면 제가 몇 장 꺼내 사무실에 가져갔다고 하세요.”“네, 도련님.”저녁 늦게 잠이 든 데다 숙취까지 더해져 강한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대낮이었다. 팔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팔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