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너... 아빠로서의 경험치가 꽤 있어 보이네?”강한서가 말했다. “우리는 은서처럼 장난기 많은 아이 말고 착하고 얌전한 아이 낳자.”“...”한현진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너 사람 참 곤란하게 하네.”‘아이 성격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은서 얼마나 귀여워.”강한서가 코방귀 뀌며 말했다. “네 앞에서는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아? 너 만나게 해달라고 얌전한 척하는 거야.”한현진이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은서 예전부터 날 알고 있었어?”“우리 웨딩 촬영하고 나서 은서가 보고 싶다고 난리를 피워서 보여줬거든.”말하는 강한서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예쁘대. 난 죽은 사람처럼 딱딱한 얼굴이고. 아프면서도 얌전히 있는 법이 없어. 굳이 결혼식에 너 보러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내가 하락하지 않았더니 자기 혼자 몰래 나왔다가 스쿠터에 치였었어.”“안 그래도 빈혈인 애가 그렇게 장난기가 많아서야..”은서에 대해 얘기하는 강한서의 말을 들으며 한현진은 점점 멍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신혼 첫날밤의 진실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은서가 몰래 결혼식에 오려다 교통사고가 났고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라 은서를 보살피고 있던 강한서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전에 수혈을 해준 적이 있는 송민영에게 도움을 청했다. 강한서가 정체불명의 여자와 결혼한 것을 마음에 두고 있던 송민영에게 그건 결혼식을 망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니 송민영은 강한서가 입장하기 바로 직전 그에게 은서의 교통사고 소식을 알렸다. 그렇게 강한서가 송민영을 데리고 결혼식장을 빠져나간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나, 이젠 강한서와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했지만 결혼식장에 버림받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 일은 한현진에게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 박힌 돌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날은 한현진에게 있어서 인생의 몇 안 되는 중요한 날 중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강한서의 등을 다독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너 언제 기억 돌아왔어?”강한서의 눈빛이 멍해졌다. 한현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머리가 오락가락하네...’웅 울리는 진동에 한현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송민준이 보낸 문자였다. [첫 번째 선물 박스 안에 있는 물건, 잊지 말고 꼭 봐.]문자 내용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무슨 물건이길래 일부러 문자까지 보내는 거지?’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은 차에서 내려 선물 박스를 뒤졌다. 송민준이 말한 박스 안에는 봉투에 담긴 서류가 들어있었다. 다시 차에 오른 한현진은 머리 위의 버튼을 눌러 차의 불을 켜고 봉투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넘긴 한현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서류는 바로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부탁했었던 황 닥터의 신상정보가 들어있었다. 조사를 부탁했을 때까지만 해도 한현진은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저 송가람이 모셔 온 그 의사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황 닥터는 국내에서의 이력이 너무 없었고 주로 해외에서 진료를 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결국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최면...’한현진은 오늘 강한서와 송가람의 대화를 엿듣던 상황을 떠올렸다. 송가람의 몸 근처에서 풍령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를 들은 강한서는 곧바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비록 지금 생각해 보면 강한서의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난 최면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데... 그 풍령 소리가 설마 최면사가 강한서에게 건 심리적 신호인 건가?’‘하지만 강한서처럼 내면이 강인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최면에 걸린 거야?’미간을 찌푸리던 한현진의 머릿속에 반짝 뭔가가 스쳐 갔다. 그녀는 순간 강한서가 먹던 약을 떠올렸다. ‘그 진통제... 그게 대체 뭐야?’얼굴이 사색이 된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약 어딨어?”한현진의
“난 그런 적 없어!”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너 그랬어. 그리고 송가람과 만나겠다고도 했어.”한현진이 단호하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오히려 술에 취한 강한서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어?”한현진이 진심 반 거짓 반으로 말했다. “응. 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 보고 싶지도 않다면서.”강한서의 표정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변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게 분명해. 내가 했던 말 주워 담을 수 있을까?”“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게 가능해? 난 이미 들었어.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쥐어짜 내더니 불쌍한 얼굴로 겨우 한마디 했다. “내가 했던 말 잊어버리면 안 돼?”한현진이 참지 못하고 풉 소리 내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한서의 귓불을 만지며 살며시 그의 코를 비볐다. “안아주면 잊어버릴게.”그 말을 들은 강한서가 얼른 한현진을 품에 안았다. “잊었어?”한현진이 눈을 꼭 감았다. “아직.”몇 초가 지나가 강한서가 다시 물었다. “이젠 잊었어?”한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 잊은 것 같아.”또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잊었—”“또 쓸데없는 얘기하면 안 잊을 거야.”“...”한현진은 강한서의 품에 기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강에서 내 손 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잠시 생각하던 강한서는 더듬더듬 그날의 일을 한현진에게 전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두 사람의 무게를 버텨낼 수 없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그런 상태로 있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현진은 몸무게가 가벼웠고 수영도 할 줄 알았으니 그녀의 생존 확률이
그날 밤에 대한 강한서의 기억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 그를 구해주었다. 한현진은 송가람을 떠보던 오늘의 강한서를 떠올렸다. 송가람은 분명 강가에서 강한서를 찾았다고 했다. 강한서의 기억과 조합해 본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강가에서 찾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강한서를 물속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송가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은 곧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강한서의 일에서만큼은 송가람은 절대 자기 공로를 숨길 리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물에 뛰어들어 강한서를 구했다면 그에게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송가람이라면 분명 그것을 빌미로 강한서에게 강력하게 어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 강한서를 구한 사람은 따로 있고 송가람은 그저 어부지리로 강한서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송가람은 어떻게 마침 강한서를 찾을 수 있었을까?한현진은 또다시 강한서와 송가람의 대화를 떠올렸다. ‘강운 씨가 송가람을 부른 거라고 의심하는 건가?’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목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니 엉성하게 목걸이를 해주고 있는 강한서의 손이 보였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뭐해?”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새해 선물.”꽤 시간을 들여 겨우 목걸이를 걸어준 강한서가 두 눈을 반짝이며 한현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준 게 예뻐.”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강한서의 말에 아무 리액션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거울을 내려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강한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강한서가 선물한 목걸이는 주강운이 한현진에게 줬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다만 디테일이 조금 더 정교할 뿐이었다. 한현진은 순간 강한서가 생략하고 말하지 않은 부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준 게 주강운이 사준 것보다 더 예뻐.한현진은 손을 뻗어 목걸이를 만지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이젠 시간이 늦어 주강운이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더 있다 가라며 인사치레를 건네던 송병천도 곧 운전기사를 불러 주강운을 집까지 데려다주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주강운은 동료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밖에서 그를 데리러 온 동료의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주강운은 송병천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라탔다. 운전을 한 사람은 요즘 주강운이 새로 데리고 있는 제자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지 이제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장한 듯 예의를 갖춘 그가 주강운을 불렀다. “변호사님.”그리고 주강운에게 무슨 말을 건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강운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목을 움직여 스트레칭하더니 휴대폰을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수백 통의 부재중이 찍혀 있었고 그 대부분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시윤에게서 온 카톡 2개 외에도 일과 관련된 메시지와 새해 인사 몇 개가 있었다. 그는 주시윤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새해부터 누구 보라고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거니?][할아버지 화 나셨어.]주강운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채팅방을 나가버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출발해.”제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변호사님?”“사무실. 가져야 할 물건이 있어.”주강운의 제자는 그제야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강운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또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온 거라고 생각한 주강운은 짜증스레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문자를 보낸 사람은 양지원이었다. 그녀는 새해 인사로 한 마디를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부자 되세요. 세뱃돈 보내줘요.]주강운은 그 문자를 여러 번 되뇌며 읽어보았다. ‘단체 문자는 아닌 것 같은데.’잠시 생각하던 주강운은 양지원에게 계좌이체로 세뱃돈 5만 원을 보냈다. 그러자 양지원은 곧바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또 몇 초가 지나
한현진의 본가. 숙취 해소제를 마신 송병천은 서해금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도우미는 주방에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송민준은 한현진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첩을 들고 있는 송가람을 발견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송가람은 어두운 곳에 있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오직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송가람의 손이 지금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송민준은 아무 말 없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런 송가람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진첩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송가람은 테이블 위에 툭 소리 나게 던져 버리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갔다. 송가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송민준은 그제야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사진첩을 집어들었다. 가죽으로 된 사진첩의 표지에는 송가람의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송민준은 소리 없이 그 흔적을 쓸어내리고는 사진첩을 펼쳤다. 동생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려고 사진첩을 넘기던 송민준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흙물을 뒤집어쓴 사진은 어디 있지?’미간을 찌푸린 송민준이 사진첩을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 ‘없어?’그는 고개를 돌려 식탁을 닦고 있던 도우미에게 물었다. “가람이 말고 이 사진첩 건드린 사람 또 있었어요?”잠시 생각하던 도우미가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 보셨어요. 도련님과 회장님께서 아가씨 차에 짐을 옮기실 때 강 대표님께서 사진첩을 잠시 보셨어요.”송민준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사진을 훔쳐?’‘사람이 할 짓이야?’송민준은 사진첩에서 사진 몇 장을 빼내고는 사진첩을 덮어 다시 박스에 넣었다. 그러고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물어보시면 제가 몇 장 꺼내 사무실에 가져갔다고 하세요.”“네, 도련님.”저녁 늦게 잠이 든 데다 숙취까지 더해져 강한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대낮이었다. 팔을 뻗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팔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멈칫하던 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자기
입을 달싹이던 한현진이 또 입을 꾹 닫았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설마 우리가 어젯밤에—”한현진은 말하며 가볍게 박수쳤다. “떡이라도 친 줄 아는 거예요?”강한서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당연하죠. 내가 미쳤어요?”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왜 강한서는 매번 자기가 취하기만 하면 대단해지는 줄 착각하는 거야? 뭔가 본인에 대해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한현진의 말에 멈칫하던 강한서는 여전히 그 말을 조금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의 시선이 한현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 목에...”‘목?’거울을 가져온 한현진이 손을 뻗어 목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아, 이거? 어젯밤 샤워하다가 조금 쓸렸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다가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놀리듯 속삭였다. “네가 이렇게 만든 줄 알았던 거예요?”말하며 그녀는 목덜미를 강한서 쪽으로 들이밀었다. “한번 해 봐요. 비슷한지 비교해 보게.”그 말에 강한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한현진이 깔고 있던 셔츠를 힘껏 빼내더니 굳은 얼굴을 하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자 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재미없긴.’욕실에서 한참을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온 강한서는 잠옷만 입은 채 문 앞을 막고 서 있는 한현진을 볼 수 있었다. 머리의 물기를 닦던 강한서의 손이 멈칫 행동을 멈췄다. 그는 한현진을 피해 가려고 했지만 한현진이 걸음을 옮겨 또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내려다보았다. “왜요?”맑고 반짝이는 한현진의 눈빛이 강한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요.”잠시 말이 없던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좀 비켜줄래요?”한현진이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래요.”말하며 옆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한현진이 그만 바닥에 떨어진 물을 딛고 미끄러져 하마터면 다리가 찢어질 뻔했다. 다행히 남다른 운동신경의 강한서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를 받쳐주어 넘어지지는 않을 수
강한서는 대체 무슨 계획이 있기에, 한현진이 그 계획에 끼어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일까?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은 강한서를 믿고 이해하기로 했다. 강한서는 더는 각방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인월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강한서의 본가로 향한 두 사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현진은 나갔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집안을 볼 수 있었다. 계단과 안방의 바닥에는 전부 두툼한 양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께서 너무 오바하셨네요.”“...”‘할머니께서 내가 아침에 미끄러졌던 걸 아신다고?’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이건 할머니께서 세심하신 거죠.”말하며 바닥에 깔린 카펫에 발을 올렸다. “꽤 부드럽네요.”강한서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지만 한현진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또 얼른 표정을 숨겼다. “전 서재에 갈게요.”“네.”대답한 한현진은 곧 고개를 숙이더니 살풋 웃음을 흘렸다. ‘유치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여전하네.’설 다음 날, 송민준은 지난번 비행기 추락사고의 조사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M 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한서는 집안 어르신들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다녀와야 했다. 정인월은 친척 사이의 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매년 명절마다 찾아봬야 했다. 결혼했을 땐 매년 한현진과 강한서가 찾아뵀었지만 이혼을 한 지금 한현진과 함께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올해 새해 인사는 강한서가 혼자 다녀와야 했다. 한현진은 송민준에게 깔린느의 제일 유명한 향을 전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할 일 없이 휴식 기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이 기회에 향수의 향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울 생각이었다. 설 연휴가 지나면 회사로 들어가야 했으니 깔린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현진이 방에서 노트에 향을 기록하고 있던 그때, 차미주가 고스톱을 치자며 전화를 걸었다. “내가 가도 부족하잖아. 강한
대장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물론이죠. 이미 먼저 주혁 씨에게 연락했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상의한 후 곧바로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의 집안 사정으로 회사가 이렇게 좋은 혜택을 주는데 그가 신청하지 않겠어요? 절대 그럴 리 없죠.”원율은 잠시 담배를 피운 뒤 담배 끝을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부서에도 더 전해야 하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대장님, 일 보세요.”원율을 보내고 나서 대장은 다시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혁 씨, 가족이 두 명이니까 연간 십만 원도 안 되게 더 내면 돼.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고 가족이 병원 갈 때 드는 비용은 전부 보장돼. 이 작은 돈 아끼려고 하지 말고 큰 기회를 놓치지 마.”주혁은 돈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싫어한 건 그 돈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위한 보험에 가입하면 이번 주 금요일에 반드시 그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설령 병원이 서대금이 손수 준비한 곳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 사실이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이었다.대장은 계속해서 재촉하며 보험 가입 후의 이점을 설명했다. 결국 주혁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도 함께 가입시켜줘. 나중에 주민등록증 사진 보내줄게.”“알겠어. 잘 쉬고 빨리 회복해. 듣자 하니 곧 송가람 씨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서? 잘 됐어. 정해지면 꼭 한턱 쏴.”주혁은 송가람 밑에서 일하게 될 생각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부드러운 감정이 스며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확정되면 한 번 쏠게.”최종적으로 제출된 명단에 주혁의 가족이 포함된 것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로소 안심했다. 체크업은 금요일과 토요일로 이틀에 걸쳐 나뉘어 진행되었고 한현진은 주혁이 토요일에 가는 것을 일부러 확인한 후 같은 날에 병원을 가기로 했다.주혁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의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주혁
회의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한현진은 물건을 정리한 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서해금을 향해 파일을 들고 다가갔다. “아주머니, 방금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직원들을 생각해서 한 거니까 당연히 지지해야지. 우리 모두 같은 회사에 있는 한 하나의 팀이니까.” 한현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제가 먼저 조사를 했다고 문제 삼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집에 보내주신 곤약도 가람 씨 통해 잘 받았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여유 있게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아끼는 거지. 너무 예의 차리지 마.”한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회사에 온 이래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게 해드렸어요. 제가 성격이 직설적이고 고집도 세서 가끔 말이 거칠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도 아주머니께서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무겁고 어쩌면 제가 너무 어리석게 행동했나 싶어요.”“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서해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말이야. 어른이 아이와 다툴 일이 뭐가 있겠어? 현진아, 아주머니는 네 친엄마는 아니지만 너희 어머니와는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 네가 송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아주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뻐.” “지금 네가 집안에서 가람이랑 함께 지내는 걸 보니 젊은 시절 너희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가끔 떠올라. 우리가 반평생을 함께 지냈고 너희는 진짜 자매가 된 거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란 거야.”한현진은 속으로 토할 뻔했다. ‘정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만약 당시 아이를 바꾼 일과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온화하고 친절한 여자과 관련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없다면 이렇게 진심 어린 말투를 들었을 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
하지만 이 제안이 실행되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그것을 한현진 덕분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서해금은 아마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해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나쁘지 않지만 실비보험은 본래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보장이기에 만약 직원들에게 요금을 부과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은 이를 회사가 급여를 삭감하려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직원들의 가족은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아 이 비용이 꼭 필요한 지출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전액을 회사가 부담하게 된다면 일부 직원들이 가족을 허위로 신고해 다른 사람의 보험을 대신 받으려 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을 겁니다.”한현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말하는 방식에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서해금이 자신의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가족을 위한 보험을 구매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회사는 강제로 요구하지 않아요. 다만 구매의 문턱을 낮춰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원하는 사람은 구입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서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서해금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열었다. “현진 씨, 구입을 개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은 괜찮지만 보험사와의 협상이 필요해요. 어떤 보험사도 손해 보려고 하진 않잖아요.” 한현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보험사와의 협상은 제가 맡을게요. 지금 여쭤보는 건 서 대표님 개인의 의견이에요. 동의하시는지요?” 서해금은 당연히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 소문이 바로 회사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직원들을 위하는 좋은 상사의 이미지가 무너질 게 뻔했다. 서해금은 절대 자기를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서해금은 잠시 침묵한 뒤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