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신미정이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서 일찍 쉬렴.”그러나 강민서는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신미정에게 물었다. “엄마, 한현진 임신했어요?”그 말에 신미정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들었어?”“제대로 들은 건 아니에요. 엄마가 한현진이 임신했다고 하는 것만 들었어요.”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엄마 말이 사실이에요?”강민서는 줄곧 신미정 곁에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전엔 한현진 때문에 강한서가 그녀를 경찰서에 넘겨 유치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한현진과 강민서 사이에 화해는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신미정은 굳이 강민서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 오빠는 분명 먼저 파혼하려고 했어. 그러더니 갑자기 한현진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아름드리로 데려갔어. 그리고 네 할머니는 또 영양사를 고용해 아름드리로 보냈고. 어쩐지 이상한 낌새가 있어서 네— 네 삼촌에게 알아보라고 했어. 그랬더니 역시, 네 오빠가 한현진을 아름드리로 데리고 간 건 기억 회복 때문이 아니라 한현진이 임신했기 때문이었어.”강민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물었다. “오빠가 아빠가 되는 건 좋은 일 아니에요? 전엔 엄마도 계속 한현진이 임신하길 바라셨잖아요.”“좋은 일은 무슨.”신미정이 버럭 화를 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강민서를 본 신미정은 순간 자신이 한현진에게 약을 먹인 일을 강민서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일은 강민서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없었다. 신미정은 감정을 억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오빠는 애초부터 한현진을 위해 날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어. 한현진이 우리 모녀를 얼마나 원망하는지 너도 알잖니. 만약 한현진이 아이를 낳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면 이 집에 우리 모녀의 자리 따위가 있기는 할 것 같아?”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엄마, 우리는 오빠 가족이에요. 한현진이 멋대로 굴도록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
재벌 가문이란 영원히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신미정은 긴장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가 핑계를 대고 잠시 아름드리에서 지내면서 기회가 있을 때 손을 써. 그리고—”신미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오빠와 한현진 잘 살펴봐. 네 오빠가 정말 소문처럼 한현진을 멀리하는 게 맞는지 확인해.”강민서가 대답했다. “알겠어요.”신미정은 연와가 담긴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연와를 조금 뜨더니 강민서에게 먹으라며 내밀었다. “아름드리에서 좀 지내면서 한현진이 경계를 늦출 때까지 기다려. 최대한 의심 받지 않게 행동해.”강민서는 신미정이 건네는 연와를 조금 먹더니 말했다. “엄마, 강현우는 정말 오빠의 실종과는 연관이 없는 거예요?”신미정이 멈칫하더니 곧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면 경찰이 걔를 풀어줬겠니? 네 오빠 사고는 전부 다 그 한현진 불여시 때문이야. 한현진이 주강운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기 때문에 그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납치범이 네 오빠를 강운이로 착각한 거 아니겠지? 한현진은 정말 재수 없는 X이야. 네 오빠는 걔를 만나고부터 되는 일이 없잖니.”말을 마친 신미정은 또다시 말투를 바꿔 강민서에게 말했다. “그 사건이 정말 현우가 개입되어 있다면 네 둘째 삼촌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 둘째 삼촌이 널 얼마나 아끼는데. 둘째 삼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니.”강민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연와가 담긴 그릇을 비웠다. 다음 날 아침, 강한서는 회사로 출근했고 송민준은 전화로 한현진에게 아름드리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전 잘 지내요. 강한서도 절 어쩌지 못해요. 오히려 제가 괴롭히고 있죠.”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요즘 있었던 일을 송민준에게 들려주었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한현진의 말을 들으며 송민준은 그녀가 사실은 강한서 곁에서 행복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아, 맞다. 전에 네가 나에게 알아봐
황씨 아주머니의 말에 강민서가 멈칫했다. “아주머니, 말씀을 바로 하셔야죠. 이 집의 모든 방은 전부 제 오빠 거예요. 한현진이뭐라고 여기가 저 여자 방이에요?”그러더니는 그녀는 짐을 옮기는 사람에게 지시했다. “이것들 전부 안에 넣어줘요.”“민서 아가씨가 여기서 지내시면 현진 씨는 어디서 지내라고요.”강민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죠. 아무 데서든 지내라고 해요.”황씨 아주머니는 강민서와 한현진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현진 씨... 이게...”그에 비해 한현진은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덤덤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제 짐 좀 정리해 주세요. 전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황씨 아주머니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한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회의실로 향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전화에 걸음을 멈추고 민경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요. 전화 받고 갈게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강한서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곧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 씨가 강민서를 여기로 와서 지내라고 했어요?”그 말에 멍해진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민서가 아름드리에 갔어요?”그의 대답에 한현진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요?”“민서가 저에게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걔가 아름드리엔 왜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 제 방을 차지해 버렸어요. 전 이제 어디서 지내요?”강한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일단 아무 방에나 들어가 있어요.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요. 회의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아무 방에나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정말 어떤 방이든 상관없어요?”회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자 강한서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의 끝나고 돌아가서 다시 얘기해요.”한현진이 대답했다. “그래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이 도우미에게 말했다. “제 짐은 안방으로 옮겨주세요.”도우미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현진과 강민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말했다. “오빠, 왔어?”이상하게도 한현진은 그 말에서 안심하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긴장하는 거야? 설마 강한서가 없으면 내가 자기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강한서가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할머니가 한현진이 오빠 기억 찾는 걸 도우러 여기 있다고 하던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오빠가 한현진을 알고 지낸 지 이제 몇 년이나 됐다고.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나랑 더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기억이 더 빨리 돌아오지. 그래서 내가 왔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가 오라고 한 거야?”강민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내가 그냥 온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돌아가. 여긴 네가 올 필요가 없는 곳이야.”그러자 강민서가 불퉁하게 말했다. “한현진도 올 수 있는 곳에 왜 나는 오면 안 돼? 아, 몰라. 아무튼 난 안 가. 나도 오빠 돕고 싶어.”“네가 뭘 도와? 이건 오히려—”강한서가 멈칫하며 말을 멈췄다. “오히려 뭐?”강민서가 캐묻자 입을 꾹 강한서가 곧이어 말을 이었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 너까지 소란 피우지 마.”“내가 무슨 소란을 피웠다고 그래? 오빤 아무 상관도 없는 남에겐 도움받으면서 친동생이 돕는 건 싫다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줄곧 말이 없던 한현진이 갑자기 말했다.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요. 혹시 강한서 씨가 빨리 기억을 찾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죠. 얼른 기억이 돌아와야 저도 얼른 돌아가죠.”“...”‘몰입은 잘하네. 정말 내 기억 회복을 위해 여기서 지내는 거야?’강한서는 한현진의 말에도 강민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얼른 돌아가.”강민서가 이를 악물었다. “오빠. 전에는 내 부탁은 절대 거절하지 않았잖아. 지금은 왜 그러는 거야? 혹시 두 사
“그럼 여기서 지내게 해줘, 오빠. 내가 언제까지고 오빠 골칫덩이리이지만은 않을 거야.”강민서를 보는 강한서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젠 그만 내려와.”강민서는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강한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겠다고 했잖아. 뭘 더 어쩌겠다는 거야?”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강민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못 넘어가겠어...”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난간에서 강민서를 내려놓고 나서야 강한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한현진은 옆에서 그런 강한서를 그저 지켜볼 뿐 전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엔 강한서가 너무 오랫동안 강민서를 오냐오냐해준 탓이었다. 진작 어렸을 때 매를 들었다면 강민서는 지금보다는 철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강민서는 아름드리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자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다가와 변명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내일 돌려보낼 거예요.”“괜찮아요. 민서도 강한서 씨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요.”한현진은 의외로 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강한서가 어리둥절해졌다. ‘민 실장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었는데.’사실 한현진은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만약 강민서가 본가로 돌아간다면 한현진은 다시 그 게스트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민서를 아름드리에서 지내게 하면서 그 기회를 틈타 그녀가 아름드리에서 지내야만 하는 목적이 뭔지 지켜볼 수도 있었다. “신경 쓰이지 않아요?”강한서가 물었다. “아뇨?”한현진이 눈이 휘게 웃었다. 그녀는 퍽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강민서는 강한서 씨 동생이잖아요. 제가 얼마나 철이 없는 사람이어야 남매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겠어요.”“...”‘그렇긴 하지만... 왜 뭔가 비꼬는 것 같은 거지?’“그럼 잠시 동안만 여기서 지내게 해요. 만약 나중에라도 현진 씨가 불편하다고 하면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깐 난 아무런 쓸모가 없었어. 덕분에 이긴 거지.”차미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음성 채팅을 팀 전원 모드로 전환할래? 얘 목소리도 엄청 좋아. 전에 나한테 둘레집은 이미 촬영 시작했던데 왜 넌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없는 거냐고 묻더라고. 촬영하는 거 보러 가고 싶다면서 말이야.”“됐어.”한현진이 게임에 집중하며 말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덕질은 무슨.”“목소리라도 들어봐. 어차피 너인 줄 모르잖아. 네 아이디 좀 봐. 막타 뺏으러 옴이라니. 대체 어떤 아이돌이 이런 닉네임을 지어. 너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차미주의 말에 설득당한 한현진은 괜히 궁금해져 음성 채팅을 전체로 전환했다. 곧 소년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소년미가 흘러넘쳤다. 2005년 생인 남자아이는 말을 예쁘게 할 줄 알았다. 그는 한현진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곧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누나, 와서 블루 가져요.”“누나, 제가 미니언 막고 있을게요.”“누가, 내가 복수해 줄게요.”한현진은 게임을 잘하지 못하면서 지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평소엔 그저 상대방에게 킬을 당하기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남자아이가 누나, 누나 부르며 따라다니니 그녀는 어쩐지 웃기기도, 조금 뻘쭘하기도 했다. 펜타킬을 한 남자아이는 한현진에게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누나, 저 멋있죠?”그 말투는 마치 쥐를 잡고 위풍당당하게 주인에게로 와 자랑하는 오만한 고양이 같았다. 한현진이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완전 멋져.”그 말에 강한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손을 뻗어 힘을 실어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한현진이 얼른 음성 채팅을 껐다. 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본 한현진은 움찔하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오히려 강한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 씨가 왜 제 방에 있는 거죠?”한현진이 말했다. “강한서 씨가 아무
강한서는 눈앞에서 강민서가 다다미 소파를 방으로 옮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집을 돌아다녔지만 잘 곳이 소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긴 그의 집이었다. 심지어 집안엔 도우미도 두 명이나 살고 있었다. 집주인인 그가 소파에서 잔다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강한서는 안방 앞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거두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현진이 잠옷을 입고 걸어 나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문 앞에서 이미 30분을 서성였어요. 저랑 같이 잘지, 고민은 끝났어요?”잠시 말이 없던 강한서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와 자는 게 아니에요.”그가 한현진의 말을 정정했다. “아하.”강한서의 말에 대꾸한 한현진이 곧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합방이겠네요.”“...”강한서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민서가 제 서재에 있던 다다미 소파를 자기 방으로 옮겨서 제가 잘 곳이 없어요.”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하룻밤만 대충 자죠. 내일 침대를 가져오라고 할 거예요.”한현진은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리를 비켜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들어와요.”옷깃을 끌어 내리며 심호흡하던 강한서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한현진은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자 강한서가 이불을 안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현진이 그런 강한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침대에서 자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무리하지 마요.”강한서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현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에 느껴지던 거부감은 점점 더 사그라들었고 그는 오히려 ‘지난번처럼 손이 차지는 않아서 다행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강한서는 한참 만에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요.”한현진이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
송가람은 한현진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별로 좋은 얘기들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돌아온 후 송민준이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거나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방을 바꿔주라고 했다거나, 혹은 한현진이 싸구려 물건들로 2억이 넘는 인테리어 소품을 가져갔다는 그런 얘기뿐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강한서는 한현진이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나보고 싶다. 그런 이유로 송가람이 없단 어느 날엔가 강한서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당시의 그는 한현진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그녀를 본 순간 눈앞의 여자가 바로 한현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한성 그룹 밖에는 단정한 옷차림의 한현진이 로우번을 한 채 건물 밖으로 나와 박부자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한현진은 조막만 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메이크업으로도 하긴 했지만 눈 밑에 서린 피곤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송가람이 말하던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한현진은 마치 화려한 장미나 모란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강한서는 마음이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한현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송가람이 어디냐며 전화가 와서야 그는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송가람은 강한서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이 강한서의 곁에 없을 때도 그녀는 병실에 최소한 두 명을 붙여 강한서를 돌보도록 했다. 돌본다기보다는 감시에 가까웠다. 강한서가 매일 뭘 했는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송사람에게 보고했다. 강한서는 송가람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애써 모른 척하며 몰래 한현진을 만나러 간 일을 송가람에게 숨겼다. 그땐 다친 곳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고 많은 일들이 파악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당시의 강한서에겐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송가람은 결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한현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강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