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신미정이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서 일찍 쉬렴.”그러나 강민서는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신미정에게 물었다. “엄마, 한현진 임신했어요?”그 말에 신미정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들었어?”“제대로 들은 건 아니에요. 엄마가 한현진이 임신했다고 하는 것만 들었어요.”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엄마 말이 사실이에요?”강민서는 줄곧 신미정 곁에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전엔 한현진 때문에 강한서가 그녀를 경찰서에 넘겨 유치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한현진과 강민서 사이에 화해는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신미정은 굳이 강민서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 오빠는 분명 먼저 파혼하려고 했어. 그러더니 갑자기 한현진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아름드리로 데려갔어. 그리고 네 할머니는 또 영양사를 고용해 아름드리로 보냈고. 어쩐지 이상한 낌새가 있어서 네— 네 삼촌에게 알아보라고 했어. 그랬더니 역시, 네 오빠가 한현진을 아름드리로 데리고 간 건 기억 회복 때문이 아니라 한현진이 임신했기 때문이었어.”강민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물었다. “오빠가 아빠가 되는 건 좋은 일 아니에요? 전엔 엄마도 계속 한현진이 임신하길 바라셨잖아요.”“좋은 일은 무슨.”신미정이 버럭 화를 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강민서를 본 신미정은 순간 자신이 한현진에게 약을 먹인 일을 강민서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일은 강민서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몇 없었다. 신미정은 감정을 억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오빠는 애초부터 한현진을 위해 날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어. 한현진이 우리 모녀를 얼마나 원망하는지 너도 알잖니. 만약 한현진이 아이를 낳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면 이 집에 우리 모녀의 자리 따위가 있기는 할 것 같아?”강민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엄마, 우리는 오빠 가족이에요. 한현진이 멋대로 굴도록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
재벌 가문이란 영원히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신미정은 긴장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네가 핑계를 대고 잠시 아름드리에서 지내면서 기회가 있을 때 손을 써. 그리고—”신미정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오빠와 한현진 잘 살펴봐. 네 오빠가 정말 소문처럼 한현진을 멀리하는 게 맞는지 확인해.”강민서가 대답했다. “알겠어요.”신미정은 연와가 담긴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연와를 조금 뜨더니 강민서에게 먹으라며 내밀었다. “아름드리에서 좀 지내면서 한현진이 경계를 늦출 때까지 기다려. 최대한 의심 받지 않게 행동해.”강민서는 신미정이 건네는 연와를 조금 먹더니 말했다. “엄마, 강현우는 정말 오빠의 실종과는 연관이 없는 거예요?”신미정이 멈칫하더니 곧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면 경찰이 걔를 풀어줬겠니? 네 오빠 사고는 전부 다 그 한현진 불여시 때문이야. 한현진이 주강운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기 때문에 그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납치범이 네 오빠를 강운이로 착각한 거 아니겠지? 한현진은 정말 재수 없는 X이야. 네 오빠는 걔를 만나고부터 되는 일이 없잖니.”말을 마친 신미정은 또다시 말투를 바꿔 강민서에게 말했다. “그 사건이 정말 현우가 개입되어 있다면 네 둘째 삼촌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 둘째 삼촌이 널 얼마나 아끼는데. 둘째 삼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니.”강민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연와가 담긴 그릇을 비웠다. 다음 날 아침, 강한서는 회사로 출근했고 송민준은 전화로 한현진에게 아름드리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전 잘 지내요. 강한서도 절 어쩌지 못해요. 오히려 제가 괴롭히고 있죠.”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요즘 있었던 일을 송민준에게 들려주었다.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한현진의 말을 들으며 송민준은 그녀가 사실은 강한서 곁에서 행복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아, 맞다. 전에 네가 나에게 알아봐
황씨 아주머니의 말에 강민서가 멈칫했다. “아주머니, 말씀을 바로 하셔야죠. 이 집의 모든 방은 전부 제 오빠 거예요. 한현진이뭐라고 여기가 저 여자 방이에요?”그러더니는 그녀는 짐을 옮기는 사람에게 지시했다. “이것들 전부 안에 넣어줘요.”“민서 아가씨가 여기서 지내시면 현진 씨는 어디서 지내라고요.”강민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죠. 아무 데서든 지내라고 해요.”황씨 아주머니는 강민서와 한현진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현진 씨... 이게...”그에 비해 한현진은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덤덤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제 짐 좀 정리해 주세요. 전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황씨 아주머니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한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회의실로 향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전화에 걸음을 멈추고 민경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요. 전화 받고 갈게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회의실로 향했다. 강한서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곧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 씨가 강민서를 여기로 와서 지내라고 했어요?”그 말에 멍해진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민서가 아름드리에 갔어요?”그의 대답에 한현진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요?”“민서가 저에게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걔가 아름드리엔 왜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 제 방을 차지해 버렸어요. 전 이제 어디서 지내요?”강한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일단 아무 방에나 들어가 있어요.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요. 회의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아무 방에나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정말 어떤 방이든 상관없어요?”회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자 강한서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의 끝나고 돌아가서 다시 얘기해요.”한현진이 대답했다. “그래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이 도우미에게 말했다. “제 짐은 안방으로 옮겨주세요.”도우미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현진과 강민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강민서가 강한서에게 말했다. “오빠, 왔어?”이상하게도 한현진은 그 말에서 안심하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긴장하는 거야? 설마 강한서가 없으면 내가 자기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강한서가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할머니가 한현진이 오빠 기억 찾는 걸 도우러 여기 있다고 하던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오빠가 한현진을 알고 지낸 지 이제 몇 년이나 됐다고.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나랑 더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기억이 더 빨리 돌아오지. 그래서 내가 왔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가 오라고 한 거야?”강민서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내가 그냥 온 건데?”강한서가 말했다. “돌아가. 여긴 네가 올 필요가 없는 곳이야.”그러자 강민서가 불퉁하게 말했다. “한현진도 올 수 있는 곳에 왜 나는 오면 안 돼? 아, 몰라. 아무튼 난 안 가. 나도 오빠 돕고 싶어.”“네가 뭘 도와? 이건 오히려—”강한서가 멈칫하며 말을 멈췄다. “오히려 뭐?”강민서가 캐묻자 입을 꾹 강한서가 곧이어 말을 이었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 너까지 소란 피우지 마.”“내가 무슨 소란을 피웠다고 그래? 오빤 아무 상관도 없는 남에겐 도움받으면서 친동생이 돕는 건 싫다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줄곧 말이 없던 한현진이 갑자기 말했다.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요. 혹시 강한서 씨가 빨리 기억을 찾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죠. 얼른 기억이 돌아와야 저도 얼른 돌아가죠.”“...”‘몰입은 잘하네. 정말 내 기억 회복을 위해 여기서 지내는 거야?’강한서는 한현진의 말에도 강민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얼른 돌아가.”강민서가 이를 악물었다. “오빠. 전에는 내 부탁은 절대 거절하지 않았잖아. 지금은 왜 그러는 거야? 혹시 두 사
“그럼 여기서 지내게 해줘, 오빠. 내가 언제까지고 오빠 골칫덩이리이지만은 않을 거야.”강민서를 보는 강한서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젠 그만 내려와.”강민서는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강한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겠다고 했잖아. 뭘 더 어쩌겠다는 거야?”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강민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못 넘어가겠어...”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난간에서 강민서를 내려놓고 나서야 강한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한현진은 옆에서 그런 강한서를 그저 지켜볼 뿐 전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엔 강한서가 너무 오랫동안 강민서를 오냐오냐해준 탓이었다. 진작 어렸을 때 매를 들었다면 강민서는 지금보다는 철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강민서는 아름드리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자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다가와 변명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내일 돌려보낼 거예요.”“괜찮아요. 민서도 강한서 씨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요.”한현진은 의외로 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오히려 강한서가 어리둥절해졌다. ‘민 실장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었는데.’사실 한현진은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만약 강민서가 본가로 돌아간다면 한현진은 다시 그 게스트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민서를 아름드리에서 지내게 하면서 그 기회를 틈타 그녀가 아름드리에서 지내야만 하는 목적이 뭔지 지켜볼 수도 있었다. “신경 쓰이지 않아요?”강한서가 물었다. “아뇨?”한현진이 눈이 휘게 웃었다. 그녀는 퍽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강민서는 강한서 씨 동생이잖아요. 제가 얼마나 철이 없는 사람이어야 남매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겠어요.”“...”‘그렇긴 하지만... 왜 뭔가 비꼬는 것 같은 거지?’“그럼 잠시 동안만 여기서 지내게 해요. 만약 나중에라도 현진 씨가 불편하다고 하면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깐 난 아무런 쓸모가 없었어. 덕분에 이긴 거지.”차미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음성 채팅을 팀 전원 모드로 전환할래? 얘 목소리도 엄청 좋아. 전에 나한테 둘레집은 이미 촬영 시작했던데 왜 넌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없는 거냐고 묻더라고. 촬영하는 거 보러 가고 싶다면서 말이야.”“됐어.”한현진이 게임에 집중하며 말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덕질은 무슨.”“목소리라도 들어봐. 어차피 너인 줄 모르잖아. 네 아이디 좀 봐. 막타 뺏으러 옴이라니. 대체 어떤 아이돌이 이런 닉네임을 지어. 너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차미주의 말에 설득당한 한현진은 괜히 궁금해져 음성 채팅을 전체로 전환했다. 곧 소년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소년미가 흘러넘쳤다. 2005년 생인 남자아이는 말을 예쁘게 할 줄 알았다. 그는 한현진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곧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누나, 와서 블루 가져요.”“누나, 제가 미니언 막고 있을게요.”“누가, 내가 복수해 줄게요.”한현진은 게임을 잘하지 못하면서 지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평소엔 그저 상대방에게 킬을 당하기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남자아이가 누나, 누나 부르며 따라다니니 그녀는 어쩐지 웃기기도, 조금 뻘쭘하기도 했다. 펜타킬을 한 남자아이는 한현진에게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누나, 저 멋있죠?”그 말투는 마치 쥐를 잡고 위풍당당하게 주인에게로 와 자랑하는 오만한 고양이 같았다. 한현진이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완전 멋져.”그 말에 강한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손을 뻗어 힘을 실어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한현진이 얼른 음성 채팅을 껐다. 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본 한현진은 움찔하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오히려 강한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 씨가 왜 제 방에 있는 거죠?”한현진이 말했다. “강한서 씨가 아무
강한서는 눈앞에서 강민서가 다다미 소파를 방으로 옮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집을 돌아다녔지만 잘 곳이 소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긴 그의 집이었다. 심지어 집안엔 도우미도 두 명이나 살고 있었다. 집주인인 그가 소파에서 잔다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강한서는 안방 앞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거두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현진이 잠옷을 입고 걸어 나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문 앞에서 이미 30분을 서성였어요. 저랑 같이 잘지, 고민은 끝났어요?”잠시 말이 없던 강한서가 대답했다. “한현진 씨와 자는 게 아니에요.”그가 한현진의 말을 정정했다. “아하.”강한서의 말에 대꾸한 한현진이 곧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합방이겠네요.”“...”강한서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민서가 제 서재에 있던 다다미 소파를 자기 방으로 옮겨서 제가 잘 곳이 없어요.”한현진이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하룻밤만 대충 자죠. 내일 침대를 가져오라고 할 거예요.”한현진은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자리를 비켜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들어와요.”옷깃을 끌어 내리며 심호흡하던 강한서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한현진은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자 강한서가 이불을 안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현진이 그런 강한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침대에서 자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무리하지 마요.”강한서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현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에 느껴지던 거부감은 점점 더 사그라들었고 그는 오히려 ‘지난번처럼 손이 차지는 않아서 다행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강한서는 한참 만에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요.”한현진이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
송가람은 한현진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별로 좋은 얘기들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돌아온 후 송민준이 자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거나 송병천이 한현진에게 방을 바꿔주라고 했다거나, 혹은 한현진이 싸구려 물건들로 2억이 넘는 인테리어 소품을 가져갔다는 그런 얘기뿐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강한서는 한현진이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나보고 싶다. 그런 이유로 송가람이 없단 어느 날엔가 강한서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당시의 그는 한현진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그녀를 본 순간 눈앞의 여자가 바로 한현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한성 그룹 밖에는 단정한 옷차림의 한현진이 로우번을 한 채 건물 밖으로 나와 박부자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한현진은 조막만 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메이크업으로도 하긴 했지만 눈 밑에 서린 피곤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송가람이 말하던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한현진은 마치 화려한 장미나 모란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강한서는 마음이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한현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송가람이 어디냐며 전화가 와서야 그는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송가람은 강한서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이 강한서의 곁에 없을 때도 그녀는 병실에 최소한 두 명을 붙여 강한서를 돌보도록 했다. 돌본다기보다는 감시에 가까웠다. 강한서가 매일 뭘 했는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송사람에게 보고했다. 강한서는 송가람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애써 모른 척하며 몰래 한현진을 만나러 간 일을 송가람에게 숨겼다. 그땐 다친 곳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고 많은 일들이 파악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니 당시의 강한서에겐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송가람은 결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한현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강한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