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임재욱은 송연아를 쉽게 속여 자기 뜻대로 그녀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하지만 앞으로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고 임재욱과 유시아도 이젠 끝이다.임재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왜냐면 신시연은 임재욱이 구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기에 그는 일을 빨리 처리해야 했다!유시아는 임재욱을 보낸 후에야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먼저 구름이를 안정시킨 후, 소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소현우는 회사 문서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비서와 보조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고 소현우는 화면에 뜬 번호를 보더니 얼른 전화를 받았다.“유시아? 뭐 하고 있었어?”“현우 씨, 혹시... 신시연을 고소했어요?”소현우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비서에게 눈짓했고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린 비서는 당장 사무실에서 나왔고 나올 때,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주었다.사무실에 소현우 한 사람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관심의 어조로 입을 열었다.“시아야, 혹시 임재욱이 찾아갔어? 또 너를 괴롭힌 거 아니야?”유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신시연의 일에 대해서 몇 마디 했어요.”소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임재욱이 또다시 널 찾아오면 그냥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이 일은 원래 너와 아무 상관이 없잖아, 내가 신시연을 고소한 거야,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대가는 치러야지!”신시연이 사람들 앞에서 유시아를 때리고 욕하고 모욕하는 것은 유시아의 명예권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인신 상해 혐의도 있었는데, 후자는 그나마 공소할 수 있어 본인이 나서지 않고 변호사에게 맡겨도 되었다.신시연은 정운시에 온 이후로 임재욱을 믿고 점점 더 까불었다. 그녀가 감히 유시아에게 그렇게 한 것도 임재욱이 뒤에서 봐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소현우가 신시연을 기소한 것은 어찌 보면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재욱을 경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시연의 오만함도 짓누를 수 있었다.신시연은
“응.”유시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힘이 가득 느껴졌다.“현우 씨, 난 반드시 그럴 거예요.”소현우를 위해서라도,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도 유시아는 잘 살아갈 생각이었다.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도 않을 생각이었다.소현우가 대답했다.“시아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쁘다...”그는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그리고 신시연 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사실 이 일로 신시연이 감옥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날 많은 목격자가 있었지만 유시아가 심하게 다친 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만약 그가 선임한 변호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신시연은 당분간 구치소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건 젊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에게 있어서 충분히 괴로울 것이었다.유시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이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왜?”소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임재욱 씨가 복수할까 봐?”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임재욱을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한 건 신서현 씨가 편히 눈 감을 수 있길 바라서예요. 내가 서현 씨에게 양보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소현우의 말이 맞았다. 이 세상에 그녀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유시아는 더 이상 신서현에게 빚진 게 없었다.“알겠어.”소현우가 말했다.“네 말대로 돌아가면 바로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일을 처리하라고 할게.”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소현우는 할 말이 있는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시아야, 저녁에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을래?”유시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러면 나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그럴 필요 없어요.”유시아가 말했다.“현우 씨 일 바쁘잖아요. 내가 찾으러 갈게요. 어차피 나 지금 할 일도 없고 한가하니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열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유시아는 그의 말에 따라 종이백을 열어 봤다. 안에는 연한 핑크색 상자가 있었는데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 핑크색 장미꽃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상자를 여는 순간 향긋한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것은 로즈온리 시리즈 제품이었다.그리고 로즈온리 시리즈의 주제는 ‘믿음과 사랑, 유일한 사랑’이었다.유시아는 이 브랜드의 장미꽃을 처음 받아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이 브랜드의 장미꽃은 비싸기도 했지만, 더 가치 있는 것은 그 제품이 가지는 의미였다. 그건 하나의 약속이었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의미를 품은 그것은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선물로 줄 수 있었다.유시아는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소현우 쪽으로 밀어냈다.“미안해요, 현우 씨. 난...”‘이걸 받을 자격이 없어요.’유시아는 속으로 묵묵히 말을 끝맺었다.그녀는 그에게서 이런 약속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과거 온 마음을 다해 임재욱을 사랑했던 유시아에게 이제 남은 거라곤 피로와, 따스함과 희망을 향한 동경뿐이었다.그녀는 소현우와 만날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전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버림당한 적이 있고 오점이 있는 여자였으니 말이다.소현우는 유시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시아야,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아뇨, 그건 아니지만... 전 이걸 받을 자격이 없어요.”유시아는 덤덤히 말했다. 그녀는 소현우와 약속을 잡아서는 안 됐다고 속으로 후회했다.아마 너무 외로웠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녀에게 마음을 쓴다면, 유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마치 오랫동안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말이다.그러나 그건 소현우에게는 불공평한 일이었다.소현우는 실소를 터뜨렸다.“시아야, 이 세상에 그런 자격 따위 없어. 네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가 중요해. 난 너랑 만나고 싶은데...”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시아야, 넌 어때?”“난...”유시아가 그 한
소현우는 줄곧 자신의 자리에 앉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고 심송학의 아내가 떠난 뒤에야 소현우가 물었다.“시아야, 너 출소하고 난 뒤 심씨 집안 사람들이랑 연락했어?”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임...”그 한 글자를 내뱉은 유시아는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심송학 아저씨 집안에 폐를 끼치게 될까 봐 두려워서 연락하지 않았어요.”“난 두렵지 않아.”소현우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대우 그룹도 두렵지 않고.”유시아는 덤덤히 웃었다.“알아요.”그는 겨우 몇 년 사이 세현 그룹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지능과 재능, 수단과 박력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그를 만난 건 유시아에게 행운이었다.밤이 되어 유시아는 베란다 쪽 러그 위에 앉아 창밖의 야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구름이는 사료를 배불리 먹은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구름이는 자기 머리를 유시아의 종아리에 비볐다가, 그녀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주인에게 무시당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유시아는 손을 뻗어 구름이의 새하얀 털을 만지작대면서 작게 말했다.“현우 씨 참 좋은 사람이지?”구름이는 동의하듯 짧게 짖었다.유시아는 피식 웃으며 구름이를 품에 안았다.“만약 내가 처음 만났던 사람이 소현우 씨라면...”그러나 그녀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구름이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허탈한 듯 웃을 뿐이었다.소현우를 먼저 만났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다정하고 너그러운 소현우는 중2 때 유시아의 눈에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 그를 사랑할 리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유시아가 진짜로 사랑했던 건 키 크고 잘생겼으며 냉담하고, 그녀를 멀리했던 임재욱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불나방처럼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이제 산산이 부서진 그녀는 소현우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임재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현우를 차선책으로 삼는 건 좋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모욕이니 말이다....임재욱이
신시연은 저도 모르게 임재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오빠... 오빠 요즘 핼쑥해졌네요. 몸 잘 챙겨요.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요. 오빠가 잘 지내야 언니도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거예요.”신시연은 임재욱이 신서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가 신서현을 잊지 않는다면, 신시연은 임재욱에게 기대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임재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넌 학교로 돌아가. 이 일은 그냥 잊어버려. 그리고 앞으로는 유시아 괜히 건드리지 마.”신시연은 당황했지만 감히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오빠, 난 이만 가볼게요.”신시연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임재욱은 차 안에 앉아 신시연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신시연과 신서현은 몸매도 분위기도 매우 닮았다. 그래서 신시연이 가끔 애교를 부리거나 그를 등지고 있을 때면, 임재욱은 저도 모르게 신서현이 떠올랐다.만약 신서현이 아직 살아있다면...임재욱은 미간을 구기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 힘껏 빨아들였다. 그는 애써 자신의 허황한 망상을 멈추려 노력했다....저녁때쯤, 임재욱은 파티에 참석했다가 소현우를 만났다.소현우는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임재욱이 다가오자 상대방에게 몇 마디 한 뒤 그를 향해 다가갔다.“임재욱 씨, 잘 지내셨나요?”임재욱은 그를 보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소현우 씨...”“임재욱 씨.”소현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정중했다.“오늘 오전에 변호사 말을 들어보니 신시연 씨를 데려가셨다면서요? 신시연 씨는 어떤가요? 괜찮나요?”유시아의 변호사는 소현우가 고용한 사람이었고 재판하는 동안에도 그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일종의 시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임재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소현우
유시아는 구름이를 씻긴 뒤 낮은 의자에 앉혀 놓고 구름이를 그리려고 했다.그러나 구름이는 얌전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안아달라고 애교를 부렸다.유시아는 얼마 그리지 못하고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구름아, 착하지. 여기 앉아 있어야 널 그릴 수 있어. 가만히 있으면 내가 간식 줄게...”그러나 구름이가 자꾸 품속을 파고드는 바람에 유시아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둘이 이 일을 의논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구름이를 품에 안고 문가로 향했다.문구멍을 통해 밖을 바라본 그녀는 임재욱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거라곤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몇 번이나 실패한 임재욱은 조금 초조해진 건지 손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유시아...”구름이는 위기를 감지한 건지 짖어댔고 유시아는 본능적으로 구름이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녀는 구름이를 안고 침실 안으로 숨은 뒤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나 새로 산 휴대전화 연락처에는 소현우 한 사람뿐, 경비원의 연락처도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이때 소현우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소현우를 자신과 임재욱 사이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면 어떡하지? 신고해야 하나?’유시아는 숫자 세 개를 입력했다. 그러나 기다란 손가락은 잠깐 주저했고 결국엔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임재욱은 밖에서 문만 두드릴 뿐, 무슨 일로 왔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경찰을 부른다고 해도 그냥 그를 설득해서 돌려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임재욱이 그녀에게 복수할지도 몰랐다.유시아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밖이 조용해진 것 같자 유시아는 구름이를 이불 위에 내려놓은 뒤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문구멍을 통해 보니 임재욱은 비틀거리면서 서 있었다.그는 문을 세게 친 뒤 그대로 쓰러졌고, 유시아는 순간 당황하여 문을 열고 나갔다.“임
여름철이라 원래도 잠옷이 얇았고 유시아는 자취하고 있었기에 슬립 원피스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심하게 버둥거린 탓에 그녀의 옷차림이 흐트러졌다.임재욱은 유시아를 안고 강압적으로 입을 맞췄다.유시아는 피할 수도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임재욱 씨,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날 이렇게 괴롭히면 안 되죠... 읍...”임재욱은 그녀의 말에 짜증이 솟구쳐 강하게 키스하며 그녀의 울먹거림을 전부 집어삼켰다.아주 잠깐이지만 임재욱은 자신이 유시아 때문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성과 욕망이 서로 얼기설기 얽혀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임재욱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찢길 듯했다.그의 머릿속에 눈물범벅이 된 유시아의 얼굴과, 소현우가 파티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랑 시아가 만나게 된 건 임재욱 씨 덕분도 있으니 제가 한 잔 마실게요.”‘제기랄, 내가 얘기했었잖아. 내가 질리기 전까지는 다른 남자한테 꼬리치지 말라고.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왜 소현우 그 자식이랑 만나는 건데?’임재욱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밤은 고요했다. 구름이는 방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임재욱은 베개에 누워 유시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눈꺼풀을 뜨는 것마저 힘들었다.그렇게 잠이 든 임재욱은 4, 5시쯤 되어서야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임재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이곳은 그가 와본 적이 있는, 유시아의 방이었다.유시아의 방은 크지 않았다. 방 안에는 작은 침대 하나와 옷장 하나, 침대 서랍 위에는 귀여운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창문에는 흰색 커튼이 쳐져 있었고 방 안에서는 유시아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방 안은 엉망진창이었고 침대 시트는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그의 옷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임재욱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고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 쪽으로 가보니 유시
문을 닫자 익숙한 ‘철컥’ 소리가 들렸다.임재욱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유시아의 집 문 앞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아 무엇이라도 해서 공허한 마음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호주머니를 만졌다. 안에는 담배 한 갑만 들어있었고 라이터는 없었다. 챙기지 않은 건지 아니면 유시아의 집에 놔두고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몸을 돌린 임재욱은 라이터를 챙겨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보니 자신이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게 떠올랐다.‘0416...’그것은 예전 비밀번호였다. 유시아는 그의 손을 잡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었다.“... 이건 우리 결혼기념일이에요. 우리 집 비밀번호기도 하죠.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요.”임재욱은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피식 웃었다.“잊어버리면 발로 뻥 찰 거예요.”유시아는 발끝을 살짝 들고 그의 턱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내 마음을 여는 비밀번호이기도 하니까 절대 잊으면 안 돼요.”그는 그 비밀번호를 잊지 않았지만 이젠 유시아가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앞으로 그녀는 임재욱에게 절대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고 임재욱은 평생 그녀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순간 마음속에서 슬픔이 차올랐다. 도어락을 잡은 그의 두 손이 살짝 떨렸다. 그는 이내 손을 떼고 몸을 돌린 뒤 그곳을 떠났다....점심이 되어서야 유시아는 잠에서 깼다.방 두 개에 거실 하나인 작은 집 안에는 그녀와 구름이만 남아있었다.유시아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뒤늦게 일어나 구름이의 사료를 준비했다. 그러고는 시트와 베개를 정리했고 임재욱에 의해 찢어진 슬립 원피스를 휴지통 안에 버렸다.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유시아는 욕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임재욱의 손에 닿은 모든 물건이, 그리고 자기 몸까지 유시아는 역겹게 느껴졌고 또 치욕적이었다.특히 어젯밤 그녀는 또 한 번 임재욱에게 속았다.밖으로 나올 때 보니 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