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이라 원래도 잠옷이 얇았고 유시아는 자취하고 있었기에 슬립 원피스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심하게 버둥거린 탓에 그녀의 옷차림이 흐트러졌다.임재욱은 유시아를 안고 강압적으로 입을 맞췄다.유시아는 피할 수도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임재욱 씨,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날 이렇게 괴롭히면 안 되죠... 읍...”임재욱은 그녀의 말에 짜증이 솟구쳐 강하게 키스하며 그녀의 울먹거림을 전부 집어삼켰다.아주 잠깐이지만 임재욱은 자신이 유시아 때문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성과 욕망이 서로 얼기설기 얽혀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임재욱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찢길 듯했다.그의 머릿속에 눈물범벅이 된 유시아의 얼굴과, 소현우가 파티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저랑 시아가 만나게 된 건 임재욱 씨 덕분도 있으니 제가 한 잔 마실게요.”‘제기랄, 내가 얘기했었잖아. 내가 질리기 전까지는 다른 남자한테 꼬리치지 말라고.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왜 소현우 그 자식이랑 만나는 건데?’임재욱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밤은 고요했다. 구름이는 방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임재욱은 베개에 누워 유시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눈꺼풀을 뜨는 것마저 힘들었다.그렇게 잠이 든 임재욱은 4, 5시쯤 되어서야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임재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이곳은 그가 와본 적이 있는, 유시아의 방이었다.유시아의 방은 크지 않았다. 방 안에는 작은 침대 하나와 옷장 하나, 침대 서랍 위에는 귀여운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창문에는 흰색 커튼이 쳐져 있었고 방 안에서는 유시아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방 안은 엉망진창이었고 침대 시트는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그의 옷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임재욱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고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 쪽으로 가보니 유시
문을 닫자 익숙한 ‘철컥’ 소리가 들렸다.임재욱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유시아의 집 문 앞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아 무엇이라도 해서 공허한 마음을 채워야 할 것 같았다.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호주머니를 만졌다. 안에는 담배 한 갑만 들어있었고 라이터는 없었다. 챙기지 않은 건지 아니면 유시아의 집에 놔두고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몸을 돌린 임재욱은 라이터를 챙겨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보니 자신이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게 떠올랐다.‘0416...’그것은 예전 비밀번호였다. 유시아는 그의 손을 잡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었다.“... 이건 우리 결혼기념일이에요. 우리 집 비밀번호기도 하죠.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요.”임재욱은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피식 웃었다.“잊어버리면 발로 뻥 찰 거예요.”유시아는 발끝을 살짝 들고 그의 턱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내 마음을 여는 비밀번호이기도 하니까 절대 잊으면 안 돼요.”그는 그 비밀번호를 잊지 않았지만 이젠 유시아가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앞으로 그녀는 임재욱에게 절대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고 임재욱은 평생 그녀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순간 마음속에서 슬픔이 차올랐다. 도어락을 잡은 그의 두 손이 살짝 떨렸다. 그는 이내 손을 떼고 몸을 돌린 뒤 그곳을 떠났다....점심이 되어서야 유시아는 잠에서 깼다.방 두 개에 거실 하나인 작은 집 안에는 그녀와 구름이만 남아있었다.유시아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뒤늦게 일어나 구름이의 사료를 준비했다. 그러고는 시트와 베개를 정리했고 임재욱에 의해 찢어진 슬립 원피스를 휴지통 안에 버렸다.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유시아는 욕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임재욱의 손에 닿은 모든 물건이, 그리고 자기 몸까지 유시아는 역겹게 느껴졌고 또 치욕적이었다.특히 어젯밤 그녀는 또 한 번 임재욱에게 속았다.밖으로 나올 때 보니 부
사실 두 사람은 별로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유병철이 자살하고 유시아가 고아가 된 후 심하윤은 마치 친언니처럼 유시아를 살뜰히 챙겼다. 그 뒤 유시아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심하윤은 미국으로 유학하러 떠났다.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거의 3년간 만나지 못했다.유시아는 임재욱 때문에 자신에게 잘해줬던 사람들을 밀어내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게다가 심하윤은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유시아가 감옥에 갔었다고 해서 그녀를 깔볼 사람도 아니었다.유시아는 심하윤이 귀국하는 날을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 다음 날, 유시아는 간단히 집을 정리한 뒤 화판을 등에 지고 구름이를 이동 가방 안에 넣은 뒤 함께 외출했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교외 쪽 호숫가에 도착한 뒤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구름이는 소심한 편이라 매번 밖에 나갈 때마다 아주 얌전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도 않고 그녀의 곁에 앉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어서 아주 사랑스러웠다.유시아는 예전부터 그곳을 좋아했다. 조용한 곳이다 보니 유시아는 그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예전에 유시아는 대학교 때 미술학과 인재였다. 그녀는 겨우 17살의 나이에 입학해 반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고 동시에 재능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라 많은 교수님이 그녀를 주목했다.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 임재욱은 그녀와 결혼을 약속할 때 그녀에게 자퇴하기를 요구했고 유시아는 교수님이 만류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퇴하여 정운시로 돌아와 결혼 준비를 했다.그때 거의 모든 미술학과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유시아에게 꿈 두 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는 교환 학생으로서 프랑스로 유학 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제학과의 임재욱과 사귀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두 개의 꿈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았고 자신을 향한 교수님들의 기대를 저버렸다.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만회할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아파트 입구. 소현우는 자신의 차에 기댄 채로 핸드폰으로 업무 메일에 답장하면서
소현우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유시아는 그와 만날 자격이 없었다.유시아는 그가 준 온기를 탐해서는 안 됐다. 그리고 그 기회를 틈타 자신을 마치 짐짝처럼 그에게 맡겨서도 안 됐다.그녀는 자신의 가장 좋은 걸 모두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 가장 뜨거웠던 마음 모두 말이다. 그래서 소현우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었다.소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뭘 안 그런다는 거야?”“앞으로 오해하게 하지 않을게요.”유시아는 난처해져다. 그녀는 당황한 듯 그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인 뒤 이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소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성큼성큼 따라갔다.“시아야...”밤하늘 아래, 유시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예쁘고 큰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겁을 먹은 사슴처럼 사랑스럽고 가련했다.“만약 저번 연애로 인해 힘을 다 소진해서 날 사랑할 여력이 없는 거라면, 넌 그냥 얌전히 여기 있으면 돼.”소현우는 말하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넌 여기 있으면 돼. 내가 널 사랑할게.”유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현우는 그녀의 손에 작은 상자를 올려둔 뒤 곧바로 떠났다.그는 자신의 차에 오른 뒤 창문을 내리고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아야, 내 선물 버리면 안 돼.”말을 마친 뒤 그는 운전해서 떠났다.유시아는 집으로 돌아온 뒤 그가 준 선물을 열어 보았다. 그것은 도자기 인형이었는데 예전에 그녀가 SNS에 올렸던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긴 머리에 흰색 치마를 입은 아주 생동감 있는 모습이었다.그 사진을 찍을 때 유시아는 겨우 16살이었다. 그때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였다. 동시에 돌아가고 싶지만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때이기도 했다.유시아는 손에 들린 도자기 인형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여 그 인형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마치 시공간을 넘어 16살의 자신에게 입을 맞추듯
유시아는 별말 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보리차를 우려서 그의 앞에 놓아줬다.소현우는 밥을 다 먹은 뒤 차를 마셨고 그녀를 도와 설거지까지 해놓은 뒤 테이블 위에서 차 키를 들고 떠나려 했다.그는 항상 이랬다. 그냥 밥만 먹고 떠날 뿐, 선 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문 앞까지 걸어간 그가 갑자기 유시아를 향해 말했다.“시아야, 우리 내일 같이 갤러리 전 보러 가자. 고민석 씨 갤러리 전이라 너도 좋아할 것 같아.”소현우의 말에 유시아는 그 일을 떠올렸다.“내일 따로 볼일이 있어요. 그리고 저녁에 아마 밥 안 할 것 같으니까 오지 말아요.”“내일 뭐 하러 가는데?”소현우는 한 마디 더 보탰다.“내가 같이 가줄까?”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지인이 내일 귀국해서 공항에 마중 나가는 거예요.”소현우는 흠칫하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알겠어. 가는 길에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다음 날 아침, 유시아는 연한 파란색 원피스에 모자를 쓰고 공항버스에 탔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비행기는 연착되지 않고 제때 도착했다.유시아는 사람들 틈 사이에 서 있다가 심하윤을 발견했다.3년이 지났는데 심하윤은 예전보다 더 예뻐진 듯했다. 볼살이 있는 작은 얼굴은 핑크빛이 돌았고 몸매도 좋았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꽃무늬 원피스에 밀짚모자와 밀짚 가방을 매치해서 누가 봐도 여행하러 온 사람 같아 보였다.저 멀리서 유시아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윤 언니...”심하윤은 빠르게 다가가 유시아의 앞에 서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마음 아픈 얼굴로 유시아의 가녀린 어깨를 쥐고 말했다.“시아야, 너 왜 이렇게 말랐어?”유시아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인 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서 나왔다.심하윤은 아버지 심송학에게 미리 연락하고 귀국한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항 밖에서 아무 택시나 잡아 먼저 유시아의 집에 가볼 생각이었다.유병철이 자살
심하윤이 준비한 유시아의 선물은 샤넬 원피스였다.흰색의 원피스는 디자인과 마무리가 훌륭했고 얇고 가벼운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졌다.유시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거친 손가락을 보았다. 그녀는 순간, 이 치마가 비싼 청자 화병처럼 아름답지만 취약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그녀의 거친 손가락에 올이 풀릴 것 같았다.그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그녀를 애지중지한 덕에 하루 세 끼, 집안일 같은 건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녀의 손은 대부분 그림을 그리는 데만 쓰였고 유복한 환경 덕분에 그녀의 손은 희고 부드러우며 가느다랬다.그러나 3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박스를 접거나, 재봉틀을 쓰거나 박스를 옮기거나, 심지어 궂은 날씨에도 농장에서도 갖은 고된 일을 하느라 그녀의 두 손은 형편없이 변했다.지금의 유시아는 사람들 앞에 가장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자신의 투박한 두 손이었다.그것은 23살 여자의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칠었다.그리고 출소한 뒤 유시아는 새 옷을 사본 적이 없다.문밖에서는 심하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시아야, 다 입었어? 지퍼 올리기 힘들어서 그래? 내가 들어가서 도와줄까?”“아뇨.”유시아는 말을 마친 뒤 화장실 문을 열고 안에서 나왔다.흰색 원피스는 그녀에게 딱 맞았다. 슬림한 핏의 원피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돋보였고 언발란스한 치마 아래 희고 긴 두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아주 아름다웠다.“너무 예쁘다.”심하윤은 칭찬했다.“역시 마르니까 모델 같아. 뭘 입어도 예뻐. 나도 살 좀 빼야겠다.”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살을 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 음식이 부실하고 자주 막노동해야 했으며 오랫동안 긴장한 상태로 있다 보니 살이 찔 수가 없었다.유시아는 별안간 심하윤이 부러워졌다. 심하윤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고 해외로 가서 유학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을 수 있었다.심하윤은 유시아가 바라 마지않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유시아가 느
소현우는 웃었다.“잘 됐어. 여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을 테니까 내가 가면 불편하겠네.”소현우는 어깨와 머리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우고 두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그런데 오늘 두 사람 대화하는 도중에 내 이야기가 나올까? 나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나올까?”유시아는 잠깐 침묵하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장난치지 마요...”소현우는 웃었다.“알겠어. 그럼 나중에 다시 약속 잡는 걸로. 내일 다시 연락할게. 끊어.”“네, 알겠어요.”유시아는 휴대전화를 자신의 호주머니 안에 넣은 뒤 몸을 돌렸다가 하마터면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유시아는 화들짝 놀라면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느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던 홍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그녀는 오늘 슬림한 핏의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출하기 직전 심하윤이 그녀를 붙잡고 억지로 립스틱을 바른 덕에 안색이 훨씬 나아 보였고 이목구비도 더욱 뚜렷해 보였다.3년간의 감옥 생활 탓에 유시아는 많이 수척해졌지만 또 그 때문에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꽃은 막 피었을 때도 예쁘지만 바람과 비를 맞은 뒤 물기를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또한 사랑스러웠다.임재욱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유시아가 한 말이 맴돌고 있었다.“장난치지 마요...”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장난을 치듯 말이다.임재욱은 유시아가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라고 생각했다.유시아를 바라보는 임재욱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듯 눈동자가 소유욕으로 번뜩였다.유시아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시아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 소현우와 통화할 때 선 넘는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임재욱을 보자 본능적으로 두려워졌다.앞에 있는 길은 매우 좁아 그곳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임재욱을 지나쳐 가야 했다.그러나 그는 길을 비켜줄 생각이
유시아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오늘만 그런 거예요. 평소 우리는 접점이 없어요. 각자 자기 삶을 살아요. 하윤 언니, 걱정하지 마요. 나 괜찮아요.”임재욱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심송학마저 그를 피하려고 하는데 심하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게다가 임재욱은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심하윤이 그녀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유시아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 뒤로 두 사람은 스파를 받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10시였다.심하윤은 유시아의 작은 침대에 그녀와 함께 누워 말했다.“시아야, 너 이제 연애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남자 친구가 널 보호해 주면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유시아는 그 말을 듣더니 살짝 당황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녀와 소현우가 연애 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소현우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잘 챙겨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건 유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현우를 받아들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그에게 잘해주려 했다.물론 예전에 임재욱을 사랑했을 때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여자 친구로서 노력하려 했다. 그에게 음식을 해주고 그를 걱정해 주고 그에게 사랑과 애정을 돌려주려 하고...심하윤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보았다.“시아야, 너 남자 친구 있지?”유시아는 문득 저번 일을 떠올렸다. 그녀와 소현우가 레스토랑에 있을 때 심하윤의 어머니가 마침 그 모습을 보았다. 심하윤은 어머니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기에 어쩌면 이미 그 일을 알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그런 생각이 들자, 유시아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네, 있어요.”심하윤은 눈을 깜빡이다가 활짝 웃었다.“소현우 씨야?”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 사람이 잘해줘?”“당연하죠.”유시아는 천장에 달린 조명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그 사람과 있으면 온기가 느껴져요. 현우 씨는 내가 출소한 뒤 나한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에요.”심하윤은 코웃음 쳤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