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소현우가 결혼식 날에 죽을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절대로 유시아를 소현우한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심지어 그는 이번 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임재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시아야, 나는 그냥 네가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어. 평생 소현우의 그림자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유시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가서 택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안에 있는 두 장의 종이를 꺼내더니 한참 동안 복잡한 눈빛으로 들여다보았다.다음 날 아침, 유시아는 소씨 가문의 도우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이채련 사모님이 편찮으시니 빨리 병원에 와보라는 소식이었다.유시아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간단히 치장하고 밖으로 나섰다.대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어떻게 병원까지 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차가 없었고 이 동네는 택시도 별로 없었다.하지만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그는 익숙한 벤틀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임재욱이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차 문을 열고 내려왔다.“시아야, 어디 가?”유시아는 임재욱이 차를 몰고 온 것을 보고,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빠르게 다가가서 말했다.“지금 당장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해요. 나 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급해요…”“너 어디 아파?”유시아가 덤덤하게 말했다.“저 말고 현우씨 어머님이 아프세요.”임재욱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좀 어두워지는 듯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 출발했다.브런치 카페를 지나갈 때 임재욱이 차를 잠시 세우고 내려가 그녀에게 아침을 사다 주려고 했다.하지만 유시아는 정신이 온통 병원에 쏠려 있었기에 그의 손목을 꽉 쥐고는 다급하게 말했다.“빨리 좀 가요. 급하단 말이에요…”임재욱이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너는 빈혈에다가 저혈당이어서
유시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임재욱이 사 온 아침도 먹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이채련의 병실로 들어갔다.이채련은 현재 VIP 개인 병실에 있는데 그녀를 돌보는 사람은 나이 있는 도우미 한 명뿐이었다.도우미 아주머니의 말로는 소현우가 떠나고 나서 이채련의 성격이 괴팍해졌다고 한다.예전의 그녀는 시끌벅적한 걸 좋아했지만, 지금은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짜증 난다며 집에 있던 대부분의 도우미를 모두 잘라 버렸다. 현재 이채련을 간병하고 있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그녀 곁에 있은 시간이 제일 길기에 남겨 두었다고 한다.며칠 뒤면 소현우의 생일인데, 이채련은 요며칠 동안 계속 그 생각만 하며 기분이 울적해 있다가 오늘 아침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고 한다.평소에 이채련을 돌보는 것까지는 혼자 할 수 있었지만, 환자를 혼자 간병 하기에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달리다 보니 유시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유시아가 한숨을 쉬며 도우미에게 말했다.“집에 돌아가서 눈 좀 붙이고 계세요. 어머님은 제가 돌보고 있을게요.”몸이 불편했던 도우미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나니 병실 안에는 유시아와 깊이 잠들어 있는 이채련, 둘만 남게 되었다.유시아는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이채련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는 지난번 장례식에서 봤을 때 보다 살이 더 빠져서 양 볼이 움푹하게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요즘 본인을 꾸밀 정신도 없어서 얼굴에는 주름이 더 두드러지게 나와 있었고 흰 머리도 몇 가닥 보였다.유시아는 초췌한 이채련을 보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심 아저씨의 생일 연회에서 처음 만났던 이채련은 누구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아들이 떠나자 그녀는 버팀목을 잃은 사람처럼 나날이 무너지고 있었다.임재욱은 소현우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유시아와 이채련의 행복까지 빼앗아 갔다.몇 분 후, 침대에 누워 있던 이채련
“걱정하지 마세요.”유시아가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처신 잘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잘못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임재욱도 마찬가지였다.어찌됐든 이채련을 설득해서 죽을 먹이고 오후에 도우미가 다시 돌아오자, 유시아는 병원을 떠났다.병원 입구를 나서자마자 임재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병원 입구예요.”유시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택시 타고 집에 가려고요.”“내가 데리러 갈게. 우리끼리 해야 할 얘기도 있고.”의외로 유시아도 흔쾌히 동의했다.“좋아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요.”전화를 끊은 임재욱은 엔진을 힘껏 밟아 제일 빠른 속도로 병원에 도착했다.그는 멀리서부터 병원 입구에 서 있는 유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가을이기도 하고 소현우도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유시아는 여전히 얇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바지와 신발도 어두운 계열의 색깔이었기에 멀리서 보면 그녀는 마치 검은색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임재욱의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그는 그녀의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주었다.“시아야, 타.”유시아가 순순히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그래서, 저랑 무슨 얘기 하려고요?”“일단 밥부터 좀 먹고. 먹으면서 얘기하자.”임재욱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요즘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텅 빈 별장이 감옥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을까.그래서 그는 그녀를 데리고 나와서 바람을 쐬게 해주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 식당 앞에 도착했고, 임재욱은 유시아를 데리고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하지만 유시아는 별 입맛이 없는지 몇 입 먹는가 싶더니 금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한편 임재욱은 자기가 여태껏 유시아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까 아침을 살 때도 느꼈지만 그는 유시아가 베이글을 진짜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몰랐다. 솔직히 말해 그는 유시아의 취향에
유시아는 반나절이나 멍하니 있다가 가볍게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의 신서현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리고 예운 별장에 있는 프리지어는 또 어떻게 할 거예요? 저렇게 말라가고 썩어가게 놔둘 거예요?”“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임재욱은 약간 어두워진 그녀의 큰 눈을 바라보더니눈빛에는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신서현은 죽었어. 소현우도 죽었고. 이제부턴 그 사람들 얘기는 꺼내지 말자. 어때?”유시아는 피식 웃더니 “그래서 당신은 내가 더는 당신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서로 공평해졌으니 같이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몇 년 동안 임재욱은 유시아가 신서현을 죽게 했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일때문에 유시아를 감옥에 넣어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임재욱도 유시아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고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결혼식을 파탄시켜 버렸다. 이제 두 사람은 공평해진 셈이니 임재욱은 유시아에게로 돌아가 그녀에게 자그마한 따뜻함과 사랑을 베풀기로 했다. 하지만 가슴 찢어지던 과거의 상처와 피가 낭자하던 현실을 이대로 무마시킬 수 있단 말인가?이 남자, 어떤 때에는 참 유치하기에 그지없었다. “시아야, 지나간 건 지나가게 놔두고 우리는 앞만 보고 가야 돼. 내가 너를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갈게.” 임재욱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이건 분명한데 넌 소현우를 사랑하지 않아. 단지 그의 따뜻한 배려에서 못 벗어났던 거야. 왜 인정을 안 하는 거야?”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호흡이 가빠지듯이 씩씩거렸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임재욱 씨,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당신이 끼어들 바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런 자격이 없단 말이에요.”그녀는 말하고 나서 곧바로 몸을 돌려 룸 밖으로 나가버렸다. 임재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끝내는 임재욱의 강요에 못 이겨 그의 벤틀리에 앉아 반월 별장으로 돌아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 임재욱은 카드
“그래. 빨리 갈게.”임재욱은 전화를 끊고 회의실로 다시 돌아갔지만,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고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마냥 엉켜있었다. 직원이 숫자를 잘못 보고하는 상황도 발생하였지만, 그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오히려 직원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손에 땀을 쥐었다. 임재욱은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끝내자고.”그리고는 곧장 회의실을 뛰쳐나왔다. 사무실로 들어와 곧바로 두 사람의 항공권을 예매한 뒤 임재욱은 대우 그룹에서 빠져나와 차를 타고 반월 별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임태훈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재욱아, 저녁에 시간 되냐? 가족들이 다 모여 식사한 지도 오래됐는데 본가에 들러 밥 한 끼 먹자꾸나. 내가 주방장에 네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놓았단다.” “오늘은 시간이 안 되니깐 다음에 하시죠.”임재욱은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십 분 뒤 차는 반월 별장 앞에 멈췄다. 임재욱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생각했다. "이 속도면 충분해. 영감탱이가 절대 눈치채지 못할 거야."외국으로 나가서 여러 개 나라를 거친다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할아버지라도 절대 그들을 찾을 수가 없다. 드디어 할아버지의 덫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은근한 쾌감이 솟아올랐다. 안전벨트를 벗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시아가 있는 별장으로 걸어가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유시아가 눈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긴팔로 된 겉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 헤쳤으며 조막만 한 얼굴은 화장을 안 한 탓인지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욱 씨 왔어요?”임재욱은 "응"하고 답하면서 신발도 갈아 신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들어서자, 소현우의 영정사진이 보였고 그 앞에는 생일 케이크가 놓여져있었고 케이크에는 불이 켜진 초가 꽂혀있었다. 임재욱은 흠칫하다가 오늘이 소현우의 생일인 것이 기억났다. 그는 전에 걸려 왔었던 한 통의 전화가 생각나면서 온몸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임재욱은 시선을 거둬 그녀를 바라보
그녀를 제일 많이 사랑하고 그녀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그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유시아에게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는 죽어버렸다. 그것도 그렇게 처참하게 말이다. 그런 그 남자를 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단 말인가?유시아는 지금 소현우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싶었다. 그의 생일을 차리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그를 위하여 복수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그를 죽어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 그이를 죽인 거야. 메일을 보내 협박하였지만, 그이가 그걸 못 보고 나와 결혼을 강행한 거야. 그래서 당신이 그이를 거리바닥에서 죽게 한 거야…”유시아는 점점 창백해지는 임재욱의 얼굴을 보면서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임재욱 씨, 이 세상에는 왜 당신과 같이 잔인한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신서현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나를 감옥에 처넣어 괴롭혀도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현우 씨를 죽여버릴 수 있어? 그이가 나를 사랑하고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외에 또 무슨 잘못이 있었어? 왜 당신의 욕심 때문에 그이가 목숨까지 잃어야 하냐고? 왜?”임재욱은 머리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무슨 이메일?”“당신이 더 잘 알면서 왜 나한테 물어? 임재욱 씨, 당신에게 미안한 짓을 한 건 나야. 그런데 왜 현우 씨를 죽이냐고? 그이를 돌려줘. 나에게 다시 돌려주면 안 돼?”유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소현우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결국 그녀를 혼자 덩그러니 버려놓고 떠나갔다. 순진하기에 그지 없는 그 남자는 죽기 전까지도 임재욱을 그녀의 구세주로 생각하고 임재욱에게 그녀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였다…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여 유시아는 그가 그런 멍청한 유령이 되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과일칼을 움켜쥐고 칼이 그의 몸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깊게 찔렀다. “임재욱 씨, 나는 절대로 당신을
임재욱은 걸어가다가 갑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앞으로 꿇어앉은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김 닥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김 닥터뿐이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져야 할뿐더러 유시아의 안전도 고려해야 했다. 개인 병원의 차량도 무단통행이 가능하기에 김 닥터가 가장 빨리 와 줄 수 있고 또한 임재욱은 사전에 문을 열어두었기에 김 닥터는 두 명의 조수와 함께 재빨리 달려와 의식이 없는 임재욱을 구급차로 들어 구급 준비를 시작하려고 하였다. 김 닥터는 똑같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유시아를 보고 잠깐 망설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임재욱은 자신에게 임재욱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구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기에 그는 모른 체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구급차 문이 닫히자, 기사는 기사대로 운전하고 소형 구급실과도 같은 뒷좌석에서는 김 닥터와 조수들이 임재욱에게 다급히 지혈과 구급을 실행하였다. 구급차가 큰길에 올라서자마자 흰색 아우디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강석호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정운시에서 김 닥터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정이 지나서야 유시아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소현우를 봤다. 그는 사고 당일 입었던 흰색 정장을 입은 채로 별장 안에 서서 슬픔과 실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다가가 소현우의 손을 잡고 부둥켜안으면서 울었다.“가지 마, 내 곁에 남아주면 안 돼? 당신은 모를 거야. 당신이 없는 이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든지…”하지만 소현우는 마치 화 난 듯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문을 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유시아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허공에 떠도는 공기만 잡혔다. 그녀는 울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불 꺼진 별장 안으로는 밖의 가로등 불빛만 보인다. 바닥은 차
임재욱이 눈을 뜨자 눈앞은 온통 창백한 하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주위를 돌아보고 난 그는 여기가 김 닥터의 개인 병원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김 닥터에게 전화했고 김 닥터가 달려와 구원을 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임재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때 병실 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도금된 지팡이 하나가 먼저 문으로 들어왔다. 임태훈은 침대로 다가와 젊은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웃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정말 갈수록 가관이더구나, 여자 하나 때문에 여차하면 죽을 뻔했더구나!”임재욱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끌어올렸다. 결국은 이 노인네의 귀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이 또한 이번 일은 절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시아는요?”임재욱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유시아는 어떻게 하셨어요?”임태훈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놈이 그 여자를 걱정하고 있다. 그는 임재욱의 아래턱을 잡고 “내가 뭘 어떻게 하겠냐? 그 여자가 나라 법을 어겼으니, 나라에서 알아서 처리를 할 것 아니냐. 널 찌른 그 칼에 그 여자의 지문이 가득 남아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니?”고의 상해죄, 이건 형법에 저촉된다. 설령 자신이 크게 다치지 않는다 해도 이 노인네의 일방적인 성격에 따르면 8년, 10년 없이는 유시아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다.정운여자감옥…유시아의 3년을 고스란히 바쳤던 곳인데 그녀의 후반생을 또 거기서 지내게 한단 말인가?임재욱은 전에 여자감옥을 방문할 때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등골이 싸늘해졌다. “한 방에 총살하는 것이 더 좋겠네요.”그는 유시아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임태훈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쇼는 하지 말거라. 그 누구보다도 그 여자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란걸 나도 알고 있단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쉽게 그 여자를 죽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감옥 경찰한테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