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밖으로 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바깥소식을 듣지도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강석호가 오더니 영감이 사람을 시켜서 외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면서 몸에도 좋은 고급 영양제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권했다.“이번에는 영감의 뜻에 좀 맞춰주는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될 것이야.”임씨 집안 사람들한테 있어서 손가락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도 참지 못하였다.강석호는 임씨 집안에서 몇 년간 있었기에 재욱 할아버지의 성격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임재욱은 잠시 조용했다가 입을 열었다.“그녀는요?”“그날 밤에 갇혔어.” 강석호는 말을 잇다가 다시 임재욱에게 화제를 돌렸다. “재욱 님께서 어서 나으셔야 할아버지의 화도 이내 가라앉으실 겁니다.”그러면서 강석호는 영양액 한 봉지를 따서 임재욱에게 건네주었다. “이것 좀 드세요, 상처가 아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임재욱은 움직이지 않고 다만 “그날, 네가 줄곧 나를 미행하였던데 할아버지께 나의 행적을 이른 것이 맞느냐?”유시아와 같이 도망가기로 한 며칠 전부터 임재욱은 거의 강석호의 차를 타지 않았고 항상 혼자 다녔었다. 하지만 항상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그래서 그가 마지막쯤에 김 닥터에게 전화를 걸어도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강석호가 듣자, 고개를 살짝 떨구며 말했다.“저는 임씨 집안 하인이니 매 사는 다 임씨 집안 사람들을 위합니다.”임재욱은 팔을 천천히 들어 그 손의 약을 엎었다. “나가!”강석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약 한 봉지를 뜯어 타 주었다. “임 대표님, 대표님이 계속 나아지시질 않으면 유시아 님을 더더욱 구해낼 수가 없게 됩니다, 대표님도 유시아 님이 계속 감옥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맞죠?”임재욱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 영감이 너에게 이런 말을 하라고 시키신 거야?”“아닙니다,”강석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냥 임 씨네 남자들이 그게 누구든 간에 절대 이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문밖에는 정유라가 서있었고 그 옆에는 임청아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재욱아….”임청아가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오빠 몸의 상처들이 다 나았나요? 왜 이렇게 빨리 걷기 시작했어요? 얼른 침대에 가서 누워 쉬세요.”임재욱은 초조한 듯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오라고 하시더니?”정유라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임청아가 먼저 흥흥대면서 말했다.“난 오빠가 이럴 줄 알았어, 유라 언니가 쓸데없이 걱정한 거잖아.”원래 청아와 유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필경 집안끼리도 아는 사이이고 유라가 두 살 언니지만 미래의 형수가 될 사이이기에 줄곧 언니 동생 사이로 잘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아버지와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옛날에는 청아를 동생처럼 이뻐하고 사랑했었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없는 사이가 되였다. 청아는 유라가 더 이상 옛날의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언니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방들어와서 들고 있던 보양식이 담긴 보온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발길을 돌렸다.임재욱은 이복동생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창밖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네가 왜 여길 와?”“재욱 오빠, 난 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에요예요.”임청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오빠는 진짜 나를 안 보고 싶어요?”임재욱은 창밖을 보며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네가 안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 할아버지 손에 있다는 것이야.”그는 이미 유시아의 일이 꼭 해결될 수 있다고 예감했지만 그러기엔 쌍방이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얼마나 혹독한지는 영감의 양심에 달려있었다.재욱의 멋있으면서도 냉랭한 옆태를 바라보는 정유라의 마음은 절망감이 감돌았다.하지만 그녀는 문득 이 남자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를 위해 아무리 많은 인내와 퇴보를 해도 그의 사랑이나 연민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특수한 분부가 없었더라면 감옥에서는 죄인들을 이렇게 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안건이 아직 진행되지도 않았고 재운은 피해자로서의 진술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이런 협박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재욱은 사진을 들고 있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가 문 앞의 경호원을 향해 소리치면서 말했다.“영감에게 지금 당장 전화해서 나를 만나러 오라고 해.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고 다른 사람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해.”경호원은 그를 막았고 그는 길을 비켜주지 않자, 몸싸움을 버리기 시작했다.허리의 상처는 곧 심한 몸부림으로 터졌고 선홍색의 피가 환자복을 물들였다.임태훈이 황급히 달려왔을 때 임재욱은 이미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으로 다시 병실로 옮겨졌고 복부의 상처도 다시 싸매지고 있었다.그는 아픔을 잘 참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은 사람인지라 심한 통증과 출혈로 한쪽 얼굴은 창백해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의 상처를 다시 치료해 주었고 간호사분은 그에게 진 통주사를 놓았으며 그 후에야 방을 떠나가셨다. 그리고 그 방에는 오직 할아버지와 손자 둘뿐이었다.임태훈은 쥐고 있던 사진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지금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 않던데 금방 퇴원해도 되지 않느냐? 구월 초아흐레가 참 좋은 날이었는데 네가 놓쳐서 참 아쉽구나, 하지만 십월 초열흘도 괜찮은 것같으니, 그날에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임재욱은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임태훈은 그의 손주가 마음속으로 이미 타협을 끝냈다고 백 퍼센트 확신하였다.유시아의 손은 그림 그리는 데 쓰는 것인데 망가지면 얼마나 아까울까?만약 할아버지가 그녀를 놓아준다면 임재욱은 뭐든지 할 준비가 되었다. 정유라와의 결혼까지도 말이다.임재욱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난 할아버지가 후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재욱아, 몸조심 잘하거라.”임태훈은 그의 표정을 주시하면서 또 말하였다.“너는 임씨 집안의 후계자로서 앞날이 창창한데 어째서 길옆의 자그마
바깥의 온도는 정말 많이 떨어졌고 거리는 온통 누렇게 시든 잎들로 덮어있었다.환경미화원들이 끝이 없이 쓸고 또 쓸었다. 마치 사람의 풀리지 않는 근심 걱정처럼 말이다.임재욱은 창밖을 쳐다보면서 점점 이마를 찌푸렸다.가을인데 감옥 안에는 에어컨도 없고 난방시설도 없고 핫팩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교도관들의 매일 뿐이니 임재욱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요 며칠간 시아는 얼마나 외로웠을까?오늘 저녁에는 무슨 밥을 먹을까? 같은 방을 쓰는 수감당한 데 왕따당하지는 않을까?너무 나약해서 참 걱정이야.하지만 그녀는 칼을 들고 자신을 찌르기도 했는데 말이야.이래보니 여자들은 참 복잡한 생물인 것 같아.차는 곧 옛 주택에 이르렀고 임재욱은 정유라를 따라 함께 집에 도착했는데 마침 저녁 시간 때였다.임태훈은 오늘 그들이 올 줄 알고 맛있는 것을 대접하라고 하인들에게 분부를 내렸다.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모두 이러한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즐겼다. 비록 손자가 어떤 꿍꿍이일지는 몰랐지만, 그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많이 먹으라고 권유하기만 하였다.“상처가 나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좋은 것들을 먹고 많이 몸보신해. 이 삼계탕은 약불로 몇 시간 동안 끓인 것이니 어서 먹어봐.”임재욱은 한 입 먹어보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입맛이 별로 없네요, 올라가서 먼저 휴식을 취하겠습니다.”말이 끝나자, 그는 일어나서 방으로 향했다. “만약 무슨 일정이 있으시면 저를 부르세요, 단, 시월 초열흘 전까지 우리의 거래를 끝내길 바랍니다.”그와 할아버지와의 거래가 더 빠르게 성사될수록 유시아는 감옥에서 더 빨리 나올 수 있다.과거의 잘못은 만회할 수가 없지만 재욱은 그녀가 다시는 그런 곳에 갇히질 않기를 원할 뿐이다.재욱은 그녀가 맑은 공기를 하지 마시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바람 뿐이였다.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바람이 없었다.옛집에도 그의 방이 있었는데 그 방은 임씨 집안에 들어오고부터 쭉 지내왔던 방이었다. 그곳은 2층에서 가장 좋은
유시아는 선도 아팠고 위도 아팠고 온갖 맞은 자리는 다 아파 났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이곳은 너무나도 어두웠고 감옥에 갇힌 뒤로 그녀는 햇빛을 본 적이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른 채로 시간의 개념도 점점 희미해져 가서 자신이 갇힌 지 며칠 됐는지도 가늠이 안 갔다.그녀는 여기서 나갈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고 두 눈은 어둠을 바라보면서 심호흡하며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철문 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이어서 머리 위의 전등이 밝았고 전등의 눈부신 흰색 광은 시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리게 하였다.밖에서 두 남성이 들어오자, 유시아를 들어 올려 밖으로 향했다.유시아는 순간 마음이 철렁하였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하였다.왜냐하면 이는 그녀가 또 끌려 나가 매를 맞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철문을 몇 개 연속으로 지나갔지만, 시야가 예상했던 매 대신 그녀는 말끔하고 깨끗한 방에 도착하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수갑을 풀어주었고 또 누군가는 그녀의 죄와 복을 벗겨주었다.그리고 강석호가 나타났다.“아가씨 괜찮으세요?”강석호가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안타까운듯 말하였다.“임 대표님이 정말 당신에게…. 아니면 병원에 가보실까요?”유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이가 당신보고 오라 한 것입니까?”“임재욱 님께서 저보고 와보라고 했습니다!”강석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오늘 임 대표님이 바쁜 틈을 타서 저보고 모든 수속을 밟고 아가씨를 출소시켜 드리라고 했습니다. 저만 따라오세요.”유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석호의 뒤를 따라 검은색 차에 올랐다.강석호는 발동을 켜고 재빨리 감옥에서 벗어났다.창밖으로 따스한 가을 햇살이 들어와 유시아를 비추어주었다.이 자유롭고 따뜻한 느낌,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그녀는 창문에 기대여 번화해진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신이 나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던 중 웨딩차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는 곧 청수별장에 도착했고 강석호는 주차를 마치고 자동차의 사물함에서 밀봉 자루에 든 과도를 꺼내어 유시아에게 건네주었다.“이 칼자루에 있는 지문은 전부 아가씨의 지문이고 이게 곧 아가씨의 죄를 증명할 가장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건 오늘 임 대표님께서 결혼하시면서 어르신한테서 몰래 빼내온 것입니다. 그리고 저더러 칼을 아가씨와 교환하며 꼭 한마디 전달해달라더군요: 앞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절대 충동적으로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결국 자기 자신 일 테니까요.”유시아는 칼을 건네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마워요.”이윽고 그녀는 칼자루를 들고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별장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졌던 집과 핏자국은 아직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한 상태였다.유시아가 고개를 들어 거실의 벽에 걸려있는 전자달력을 바라보았다.오늘은 음력 10월 10일로 임재욱이 정유라와 결혼하는 날이었다.유시아의 입가에는 천천히 자조적인 씁쓸한 웃음이 담겼다: 이것 봐, 얼마나 날을 잘 골라?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음력 10월 10일로 정하여 완전무결하고 십 중 십구로 좋은 날이 될 것이다.그녀와 달리 날짜를 8월 8일로 정하여 괜히 인터넷 용어 중 잘 가라는 인사말과 같은 바람에 그녀와 소현우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되지 않았는가.--강석호는 차를 몰고 임재욱이 결혼식을 올린 호텔로 향했다.그가 도착할 때 결혼식은 이미 끝나 있었고 신랑 신부 측에서 술을 따르는 환절이었다. 적지 않은 매체에서 카메라를 높게 치켜들고 결혼식의 전체 과정을 추적했다.대우 그룹 후계자의 결혼식은 전국적으로 성대한 결혼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임태훈 어르신의 묵인을 받았기에 녹화한 영상들을 인터넷에 생방송으로 뿌려 조회수만 얻으면 돈을 벌 수 있다.임태훈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 사람들의 공경과 인사를 받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해 흥을 돋웠다.강석호가 임태훈을 향해 걸어가 무심코
정유라는 예쁘게 얹은머리를 풀지 않고 몸에는 다홍색 코트를 걸친 채 탈의실에서 걸어 나와 강석호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임재욱에게 다가갔다.“재욱 씨,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 많이 힘드셨죠? 아직 몸도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함께 할아버님 집에 가서 쉬어요.”정유라를 바라보는 임재욱의 눈빛 속에는 신혼부부의 애틋함과 다정함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마냥 차갑기 그지없었다.“전 좀 이따 일이 있어서요. 혼자 할아버지 댁에 가세요.”“오늘 결혼하는 날인데 무슨 일이 있어요?”임재욱은 여전히 덤덤한 안색으로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하나하나 보고해드려야 하나요?”정유라:“...”정유라는 처음부터 임재욱에게 있어 이 결혼식은 그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거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임재욱이 온 오전 그녀와 함께 연기하며 얻어낸 건 다름 아닌 유시아가 무사히 출소하는 것이다.그리고 현재, 연극이 끝나고 그에 따른 출연료도 주었으니 더이상 그녀에게 맞춰 가식적인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혼 첫날인데 정유라는 계속하여 억울하게 임재욱에게만 매달리는 것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재욱 씨, 오늘 결혼식을 올렸는데 식이 끝나자마자 절 이곳에 혼자 버려두면 저더러 임씨 집안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라는 거예요? 저희 방금 결혼했는데...”두 사람이 결혼한 뒤, 임태훈은 원래 신혼집으로 디럭스에디션 별장을 마련해주겠다고 했었으나 임재욱이 본가에서 지내며 할아버지에게 효도하겠다고 반대하며 무마된 것이다.그러나 지금 만약 임재욱을 데리고 본가에 가지 않는다면 임씨 가문의 하인들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새로 시집을 온 며느리는 임재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그녀는 결국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이다.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무뚝뚝하게 말했다.“정유라, 당신이 결혼하기 전 어떻게 저와 약속했는지 다 까먹은 거예요?”정유라:“...”지난번 약혼식
이듬해 10월, 또 한 번의 초가을이 다가왔다.몇 차례 비가 내린 뒤 정운시의 기온은 뚝 떨어졌고 창문에도 이제 수증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유시아는 꿈속에서 어렴풋이 침대 머리맡에서 날카롭고도 다급해 보이는 휴대폰 벨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것을 듣게 되었다.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유시아는 허우적거리며 이불 속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잡아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그녀의 귓가에는 곧이어 반장 임주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시아, 너 어떻게 된 일이야?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출근을 안 해? 이제 일하기 싫다 이거야?”유시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휴대폰 위에 뜨는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주란 님, 저 오늘 예인이랑 시간 바꿨는데, 예인... 예인이 아직 안 갔어요?”“난 너희들이 어떻게 시간을 조절했는지는 모르고 아무튼 지금은 널 대신해서 출근할 사람이 없으니까 당장 튀어와. 아니면 영원히 나오지 마!”임주란은 씩씩대며 퉁명스럽게 말을 마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멍한 눈빛으로 귓가에서 울리는 통화 종료음을 듣고 있던 유시아는 휴대폰 속에서 예인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유시아는 그저 오늘 생리가 와서 배가 아파 사전에 예인과 상의하여 오늘 저녁 타임의 근무를 먼저 예인이 대신해주고 그녀가 회복한 뒤 다시 갚아주기로 말을 끝낸 상태였다.그런데 지금, 이 믿음이 안 가는 여자한테 바람맞혔다는 것이다.유시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어쩔 수 없이 배에 붙여놨던 핫팩을 떼고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이부자리에서 나와 출근 준비를 하였다.구름이도 유시아가 다급하게 옷을 입고 목도리를 하자 자신의 집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주인의 스케줄이 이상하다는 듯 웅웅 소리를 내었다.그러자 유시아는 구름이의 큰 귀를 어루만져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나 지금 출근할 테니까 집에 잘 있어야 해. 꼭 얌전해야 해.”말을 마치자마자 유시아는 다급히 가방을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