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안. 서영은 광고 담당자를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로 초대했다. 인아는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서영의 이마에 난 상처를 힐끗 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인아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희도가 서영과 만나지 말라고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서영은 인아의 긴장된 표정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서영의 밝고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고서야 인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랫동안 외로움에 갇혀 살던 인아는 그 순간, 서영의 존재가 어린 시절의 희도가 처음 인아의 삶에 빛을 비춰주었을 때처럼 느껴졌다. 서영은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던 인아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빛이었다.십여 분이 흐른 뒤, 비에 젖은 우산을 툭툭 털며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천 대표님.” 천승혁은 40대 중반의 작은 체구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친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서영 씨 맞죠? 날씨가 참 변화무쌍하네요. 아침엔 해가 쨍쨍했는데, 오후 되니 비가 쏟아지네요.” 서영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가 말씀드렸던 인아 씨예요.” 인아도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천승혁은 인아를 유심히 살펴보며 감탄한 듯 미소 지었다. “앉으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서영은 자리에 앉으며 천승혁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그린 그림과 똑같죠?” 천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이상입니다. 인아 씨는 정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서영은 이미 인아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천승혁에게 미리 설명했기에,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이번 광고는 광고라기보다는 새해맞이 이벤트 홍보
[돌아와.] 딱 세 글자만 적힌 메시지였다. 인아는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서영과 기쁘게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핸드폰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 서영이 인아의 어깨를 감싸며 웃으며 말했다. “인아 씨, 봐봐.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잖아? 이 정도면 아기를 키우기에도 충분할 거야. 유희도 같은 남자는 뭐가 필요하겠어?” 인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수화로 대답했다. “사장님,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서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가려고?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우리 계약 성사된 걸 축하해야지.” 인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배를 살짝 만졌다. “약을 먹어야 해요.” 서영은 인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깜빡했네. 아직 아기가 안정되지 않았잖아. 그럼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면 다시 축하하자고.” 인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카페를 나섰다.서영은 인아의 임신을 고려해 평소처럼 빠르게 운전하지 않았다. 신호도 정확히 지키며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비가 내리던 날씨에 대비해 준비해 둔 우비까지 인아에게 입혀주었다. 집에 도착한 후, 서영은 인아의 헬멧과 우비를 벗겨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 천 이사님 쪽에서 준비되면 내가 바로 연락할게.” 인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희도가 집에 있다는 신호였다. 인아는 조심스레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긴장감을 느꼈다.거실로 들어서자 희도는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손은 소파 팔걸이에 걸치고 있었다. 셔츠의 상단 단추가 풀려 있어 쇄골이 드러났고, 표정은 차가웠다. 인아가 들어오는 것을 본 희도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뭔가 잘못됐어. 작은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우선 그 국가들의 제한 사유부터 조
희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의 차가운 기운은 인아를 순간적으로 굳게 만들었다. 그 차가운 기운에 압도된 인아는 당황하며 수화로 더듬거렸다. “사, 사고 싶은 게 있어서요.” 희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뭘 사고 싶은데?” 인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옷을 사려고요, 당신한테 줄 옷을요.” 희도는 잠시 인아의 말을 곱씹듯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옷을 사주겠다고?” 인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희도는 그윽한 시선으로 인아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강인아.” 그 오랜만에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인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희도의 손길이 차갑게 인아의 뺨을 스치며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는 거짓말도 능숙해졌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문서영한테서 이런 걸 배웠나?” 그 말을 듣고 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급하게 손을 저어 부정했지만, 희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인아의 허리를 끌어안아 가볍게 입을 맞췄다.“너무 긴장하지 마. 농담이야. 그래서, 어떤 옷을 사줄 건데?” 희도가 장난스러운 태도로 묻자 인아는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대답할 겨를도 없이 희도의 손은 이미 인아의 스웨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지퍼를 슬며시 내리기 시작했다.인아는 불길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며 문 밖을 흘끗 보았다. 창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회색빛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아는 몸부림치며 희도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두 손목을 단단히 잡아 반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아의 숨은 거칠어졌고, 간절한 눈빛으로 희도를 바라보았지만 희도는 단지 장난치는 듯한 태도였다.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그 태도가 인아를 불안하게 했다.결국 인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자, 희도는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
“희도야, 왜 그래? 오늘따라 엄청 심란해 보이네.” 연서는 차에 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희도가 계속해서 담배만 피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벌써 두 개비째였고, 차는 여전히 주차장에 멈춰 있었다. 희도는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남은 담배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 후, 연서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발은 좀 나아졌어?” 연서는 입을 삐쭉 내밀며 투정하듯 대답했다. “너처럼 바쁜 사람이 내 발 상태까지 신경 써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마.” 연서는 여전히 발목 부상을 핑계로 희도의 관심을 끌고 싶었지만, 희도의 반응은 예상과 달리 무심했고, 인아 쪽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초조함을 느꼈다.“나 지금 너를 달랠 기분이 아니야. 뭐 먹고 싶어?” 희도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연서는 그가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회사에 문제 생겼어?” “작은 문제일 뿐이야.” 희도는 시동을 걸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연서는 그의 회사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더 깊이 묻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즐겨 하는 ‘드래곤’ 게임을 시작했다.연서는 이 게임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지난달에는 랭킹 2위를 이기기 위해 1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했다. 물론 이 모든 돈은 희도의 카드로 결제된 것이었다. 희도는 연서에게 서브 카드를 주었고, 그녀는 그 카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단, 20억 원이 넘는 큰 금액을 사용하기 전에는 미리 알려야 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허락받지 않아도 되었다. 연서는 게임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희도에게 말했다. “희도야, 이 게임에서 새해 홍보 영상을 찍는데 나도 출연해보고 싶어.” 희도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 연서는 희도의 짧은 대답에
서영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한숨을 쉬며 인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해. 사실 인아 씨를 여기로 오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진짜로 차단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이렇게 달려온 걸 보니, 내가 그 남자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 맞지?” 서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인아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됐어, 이제 너를 다시 친구 목록에 추가할게.” 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인아를 다시 친구로 추가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이제 SY게임즈에 갈 거야?” 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서영의 눈빛에 힘입어 거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 그런데 지금 이 옷차림으로는 안 돼. 내가 옷 좀 가져다줄게.” 곧이어 서영은 인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가져왔다. 서영의 옷은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었고, 인아에게 조금 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둘은 서영의 차를 타고 SY게임즈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한 그들은 접수처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홍보팀으로 안내받았다. 천승혁은 그들을 매우 반갑게 맞이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서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분위기가 묘해졌다. 연서는 네일을 만지작거리며 비꼬듯 물었다. “천 대표, 이 사람이 청월을 코스프레할 사람이야?” 천승혁은 당황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연서 씨와 인아 씨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니, 연서 씨는 서연 캐릭터를 맡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연서는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청월을 코스프레할 거야.” 천승혁과 제작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연서가 청월을 고집하면, 인아에게 맡길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승혁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천승혁은 곤란한 얼굴로 서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연서 씨는 우리 게임 서버에서 부자
서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천승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천 대표님, 제가 미쳤다고 이따위 광고 때문에 유연서랑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천승혁은 그제야 이 상황이 단순한 광고 캐릭터를 두고 벌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자존심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고, 연서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서는 그 시선을 느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국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영을 향해 소리쳤다. “문서영, 너 제정신이야? 대체 왜 강인아를 그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나랑 싸워봤자 네가 얻는 게 뭐야?” 서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맘이야. 남편이란 인간은 뭐 하나 신경도 안 써주는데,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너처럼 남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애는 이해 못 하겠지. 우리 인아 씨는 너처럼 남의 남편한테 붙어서 얼굴 철판 깔고 살지는 않거든.” 연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서영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리면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막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 대표님이 오셨어요!” 사무실 안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희도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갑게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희도의 시선은 연서를 지나 서영에게 향했다가, 결국 인아에게 멈췄다. 인아는 그와 눈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었다. 연서는 희도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희도에게 기대며 말했다. “희도야, 문서영이 자꾸 날 괴롭혀!” 서영은 그 모습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독설을 날렸다. “그 입 좀 다물어. 정말 부끄럽지도 않니?” 천승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희도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유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가
가게 주인은 인아가 울먹이며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국수를 살짝 밀어주었다. “어서 먹어요. 이러다 국수가 불어버리겠어요.” 인아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입에 가득 넣기 시작했지만, 국수와 함께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국숫발이 입안에 넘쳐났지만, 이와 함께 가슴 속에 쌓였던 슬픔도 터져 나왔다. 가게 주인은 한참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했다. 마치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인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이 작은 국숫집은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들은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인아는 오후 내내 그곳에 앉아 있었고,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의 고요한 모습이 부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가게 주인은 남편에게 살며시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 아이 참 불쌍해 보여요. 갈 곳이 없는 건 아닐까요?” 남편도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이곳에 와서 일자리라도 찾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지.” 저녁 시간이 지나고 가게가 한산해지자, 주인은 결국 인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집이 어디예요?” 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었다. 다섯 살 이후로 인아는 ‘집’이라는 곳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은 더욱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일하면서 지내도 돼요. 저쪽 창고방에서 잠시 머물 수 있을 거예요. 낮에는 설거지하고 가게 청소만 도와주면 되고요.” 인아는 잠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모아 수화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인아의 모습에 주인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딸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아가씨와 비슷한 나이였을
희도의 길고 늘씬한 실루엣이 문가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인아는 손에 쥔 접시를 무의식적으로 꼭 쥐었다. 희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지금쯤 연서와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이제 그만하지 그래?” 희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인아가 한 달이 넘게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도는 그저 모든 걸 장난으로 받아들였다.가게 아주머니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인아랑 무슨 사이인가요?” 희도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했다. “남편입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인아가 말하길, 남편은 무책임하고 그녀를 내팽개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의 남자는 젊고 잘생긴 데다 어딘지 모르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아가 당신이 자기를 버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다시 찾아왔죠?” 희도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강인아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희도는 진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희도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인아가 가출한 거예요. 그동안 많이 신경 쓰셨겠어요.” 아주머니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 말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인아가 사고라도 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아의 손에서 들고 있던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인아는 서둘러 접시를 주워 들며 수화로 말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사실 인아는 의도적으로 접시를 떨어뜨렸다.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희도에게 말해버릴까 봐 서둘러 주의를 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주머니
인아는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점점 힘이 빠져 결국 주저앉았다. 좁고 답답한 창고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침묵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어둠은 마치 촘촘한 거미줄처럼 인아를 옥죄었고, 인아는 곧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인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방 안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빨라지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희도가 자신을 반성하라고 했지만, 인아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린 것이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장옥순을 데려다 준 것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핸드폰이 손에 잡혔지만, 이미 배터리가 다 떨어져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인아는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으며, 자신이 침실에 있다고 상상하려 했다. 그러나 어둠에 갇혀 있는 이 상황은 어린 시절의 악몽과 너무나 비슷했다. 여섯 살 때도 이렇게 어둡고 좁은 창고에 갇혀 있었고, 그때 역시 아무도 인아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때 쥐와 벌레가 몸 위로 기어다니던 공포는 어린 인아에게는 너무나 컸고, 그날 이후 그 기억은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인아는 그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두려움을 표현할 방법조차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문을 긁고 두드렸지만, 손가락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긁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 인아를 처음으로 구해준 사람이 바로 희도였다. 희도가 문을 열고 그녀를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그 따뜻함, 은은한 박하향, 그 모든 것이 인아에게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도가 다시 인아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순간, 인아의 기억 속에서 완벽했던 희도의 모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추억이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 인아는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마치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마
“난 갈게.” 희도는 차갑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연서는 희도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희도는 단 한 번도 연서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원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희도는 차를 몰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차 안에서 희도는 레스토랑을 한참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인아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희도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담배를 꺼내 두 모금 빨고는 곧바로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다시 차에 올라타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도 인아는 없었다. 침대 시트가 깔끔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제야 희도는 인아의 카드가 모두 정지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인아는 집으로 돌아올 교통비조차 없었을 것이고, 돌아오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희도는 급히 핸드폰을 들어 원호를 호출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한편, 인아는 장옥순을 그녀의 임시 거처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곳은 쓰레기장 근처에 있는 폐차 위에 철판을 덮어 만든 임시 쉼터였다. 장옥순의 말에 따르면 쓰레기장 주인이 불쌍히 여겨 마련해준 곳이라고 했다. 인아는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을 내려놓으며 쉼터를 살펴보았다. 천막 속에서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풍겼다. 장옥순이 전등을 켜자, 낡고 지저분한 침구가 드러났다. 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픈 눈으로 장옥순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장옥순은 인아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종이접기를 함께 하며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인아의 기억 속에서 장옥순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장옥순은 주름진 손을 들어 인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톱에 박힌 때를 보고 주저했다. 그러나 인아는 주저하지 않고 그 손을 꽉 잡고 그녀 옆에 앉았다. “이렇게 더러운 데 앉으면 네 옷이 다 망가진다. 이렇게
연서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후에야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 희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농담이야.” ... 레스토랑 안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아는 조용히 앉아 희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희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인아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집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고, 한때 붐비던 거리는 점점 적막해졌다. 레스토랑의 손님들도 차츰 자리를 떠났고, 마침내 홀 안은 거의 텅 비었다. 그제야 매니저가 다가와 말했다. “사모님, 이제 곧 영업 마감 시간입니다.” 인아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은 모두 떠났고, 레스토랑 안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 상황이 인아에게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이런 실망은 이제 그녀에게 익숙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혼자 텅 빈 집을 지키며 보냈던 지난 수많은 밤들에 비하면 다섯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웨이터가 작은 케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사모님, 오늘이 생일이시죠? 미리 준비된 케이크입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웨이터는 케이크를 그녀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매니저가 웃으며 덧붙였다. “곧 자정이네요. 케이크를 드시고 소원을 빌어보세요.” 인아는 케이크 위에 꽂힌 작은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불빛은 마치 생일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니저의 동정처럼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인아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생일 축하해, 강인아.’ 하지만 소원은 빌지 않았다. 소원을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매니저는 인아의 여윈 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인아가 몇 시간을 앉아
희도는 밤새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침에 인아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집에 없었다. 인아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토록 무기력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인아는 일어나 억지로라도 죽을 끓여 두 그릇을 비웠고, 의사가 처방해준 약도 챙겨 먹었다. 인아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갔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인아가 문을 열자, 희도의 비서인 장원호가 서 있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모님의 생일이라 대표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원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아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다. 원호는 수화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아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원호는 다시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새 옷을 입으시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길 원하십니다.” 인아는 순간 멈칫하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희도가 생일을 챙기겠다는 말이 단순한 형식적인 말일 줄 알았는데, 그가 진심이었다니. 이 상황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호는 인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가고 싶지 않으신가요?”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희도는 그녀의 소중한 것을 불태우고,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일을 챙기겠다고 한다. 역시나 희도에게 있어서 인아의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호는 잠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모님, 어쨌든 대표님은 사모님의 남편입니다.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대표님은 사모님의 보호자이십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인아는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원호를 바라보았다. 원호는 말을 이어갔다. “만약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계신다면, 사모님도 대표님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인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재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재가 흩어져버렸다. 인아는 무력하게 고개를 들어 희도를 바라보았다. 희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파괴한 것이 인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에 비친 인아는, 그저 한낱 쓰레기처럼 중요하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인아는 자신의 모든 것들이 희도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직감했다.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아는 수화로 물었다. “왜! 왜 나한테 이래요?” 희도는 인아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것들은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희도는 인아에게 문서영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녀가 듣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희도의 눈엔 그녀가 이유 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아는 다시 수화로 물었다. “전 친구도 못 사귀는 거예요?” 희도는 무심한 듯 부드럽게 말했다. “나만 있으면 되잖아. 친구가 왜 필요해?” 희도의 말은 인아의 가슴 깊숙이 차가운 비수를 꽂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떨리는 손짓으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겐 당신밖에 없었어요. 당신 곁엔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었잖아요. 전 당신에게 대체 뭐예요? 고양이? 강아지?” 그 말에 희도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손짓은 느리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희도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인아는 이어서 말했다. “난 사람이에요. 나도 마음이 있고, 슬플 때도 있고, 상처받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절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인아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나는 강아지처럼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꼬리를 흔드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인아의 손짓은 절규에 가까웠지만, 그 절규는 희도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희도의 길고 늘씬한 실루엣이 문가에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인아는 손에 쥔 접시를 무의식적으로 꼭 쥐었다. 희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지금쯤 연서와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이제 그만하지 그래?” 희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인아가 한 달이 넘게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희도는 그저 모든 걸 장난으로 받아들였다.가게 아주머니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인아랑 무슨 사이인가요?” 희도는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했다. “남편입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인아가 말하길, 남편은 무책임하고 그녀를 내팽개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의 남자는 젊고 잘생긴 데다 어딘지 모르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아가 당신이 자기를 버렸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다시 찾아왔죠?” 희도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강인아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희도는 진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희도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인아가 가출한 거예요. 그동안 많이 신경 쓰셨겠어요.” 아주머니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 말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인아가 사고라도 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아의 손에서 들고 있던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인아는 서둘러 접시를 주워 들며 수화로 말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사실 인아는 의도적으로 접시를 떨어뜨렸다.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희도에게 말해버릴까 봐 서둘러 주의를 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주머니
가게 주인은 인아가 울먹이며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국수를 살짝 밀어주었다. “어서 먹어요. 이러다 국수가 불어버리겠어요.” 인아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입에 가득 넣기 시작했지만, 국수와 함께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국숫발이 입안에 넘쳐났지만, 이와 함께 가슴 속에 쌓였던 슬픔도 터져 나왔다. 가게 주인은 한참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했다. 마치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인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이 작은 국숫집은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들은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인아는 오후 내내 그곳에 앉아 있었고,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의 고요한 모습이 부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가게 주인은 남편에게 살며시 다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 아이 참 불쌍해 보여요. 갈 곳이 없는 건 아닐까요?” 남편도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이곳에 와서 일자리라도 찾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지.” 저녁 시간이 지나고 가게가 한산해지자, 주인은 결국 인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집이 어디예요?” 그러나 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었다. 다섯 살 이후로 인아는 ‘집’이라는 곳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은 더욱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일하면서 지내도 돼요. 저쪽 창고방에서 잠시 머물 수 있을 거예요. 낮에는 설거지하고 가게 청소만 도와주면 되고요.” 인아는 잠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모아 수화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인아의 모습에 주인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 딸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아가씨와 비슷한 나이였을
서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천승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천 대표님, 제가 미쳤다고 이따위 광고 때문에 유연서랑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천승혁은 그제야 이 상황이 단순한 광고 캐릭터를 두고 벌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자존심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무거워졌고, 연서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연서는 그 시선을 느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국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영을 향해 소리쳤다. “문서영, 너 제정신이야? 대체 왜 강인아를 그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나랑 싸워봤자 네가 얻는 게 뭐야?” 서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맘이야. 남편이란 인간은 뭐 하나 신경도 안 써주는데,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너처럼 남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애는 이해 못 하겠지. 우리 인아 씨는 너처럼 남의 남편한테 붙어서 얼굴 철판 깔고 살지는 않거든.” 연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서영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리면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막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 대표님이 오셨어요!” 사무실 안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희도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갑게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희도의 시선은 연서를 지나 서영에게 향했다가, 결국 인아에게 멈췄다. 인아는 그와 눈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었다. 연서는 희도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희도에게 기대며 말했다. “희도야, 문서영이 자꾸 날 괴롭혀!” 서영은 그 모습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독설을 날렸다. “그 입 좀 다물어. 정말 부끄럽지도 않니?” 천승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희도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유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가
서영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한숨을 쉬며 인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해. 사실 인아 씨를 여기로 오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진짜로 차단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이렇게 달려온 걸 보니, 내가 그 남자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 맞지?” 서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인아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됐어, 이제 너를 다시 친구 목록에 추가할게.” 서영은 핸드폰을 꺼내 인아를 다시 친구로 추가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이제 SY게임즈에 갈 거야?” 인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서영의 눈빛에 힘입어 거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 그런데 지금 이 옷차림으로는 안 돼. 내가 옷 좀 가져다줄게.” 곧이어 서영은 인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가져왔다. 서영의 옷은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었고, 인아에게 조금 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둘은 서영의 차를 타고 SY게임즈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한 그들은 접수처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홍보팀으로 안내받았다. 천승혁은 그들을 매우 반갑게 맞이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서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분위기가 묘해졌다. 연서는 네일을 만지작거리며 비꼬듯 물었다. “천 대표, 이 사람이 청월을 코스프레할 사람이야?” 천승혁은 당황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연서 씨와 인아 씨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니, 연서 씨는 서연 캐릭터를 맡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연서는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청월을 코스프레할 거야.” 천승혁과 제작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연서가 청월을 고집하면, 인아에게 맡길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승혁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천승혁은 곤란한 얼굴로 서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연서 씨는 우리 게임 서버에서 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