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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홀은 넓었지만 고현의 음침한 분위기가 극에 달해 모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화가 났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담뱃갑을 꺼내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불을 붙였다.

흰 연기를 내뿜으며 그의 얼굴을 뒤덮자, 그는 이렇게 흐릿한 연기를 뚫고 임지영을 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지었다.

“꺼져”.

그러자 고재호도 불쾌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류하는 황급히 임지영을 일으켜 세웠다.

임지영은 손을 뿌리치고 홀에 똑바로 서서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불편하니 지금 당장 떠날게요. 할아버지, 여러 해 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더라도 떳떳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전생처럼 소심하고 겁먹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임지영은 말을 마치고 나서 돌아서서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에 떨어진 고현의 눈빛은 위험하고 매서웠다.

...

홀을 나서자 피임약 여러 알이 가져온 위장 반응이 몰려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임지영은 몇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는데 기절해 버렸다.

임지영은 깨어나자 류하가 침대 옆에 앉아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걸 보았다.

그녀가 깨어나니 다가와서 따귀를 때렸는데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간지럼 태우는 것 같았다.

“날 놀라게 하려는 거지? 그 약을 함부로 먹어도 되는 거야?”

“엄마, 소용없어요. 제가 그 약을 먹지 않으면 평생 고씩 가문을 벗어날 수 없어요.”

임지영이 허약하게 말했다.

“너... 팔자가 사나워. 일찍 부잣집 자식을 만나 시집을 잘 가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었지?”

류하가 타일렀다.

“엄마처럼요?”

이게 어디 편안한 삶이란 말인가?

류하는 말을 하려다가 그쳤다.

그때 문이 열리며 고성민이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깨어났으면 죽이라도 조금 마셔.”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 임지영은 고성민의 귀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긁힌 자국으로 보아 무슨 날카로운 물건에 맞은 것 같았다.

분명 고재호의 짓일 것이다.

그는 줄곧 그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이 미련한 것을 싫어했으며 한사코 자식 있는 여자와 결혼한 것을 원망했다.

임지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저씨, 폐를 끼쳤으니 빨리 갈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류하는 기분이 언짢았다.

고성민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의사가 깨어났으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따뜻한 물 한 잔 따라와.”

류하가 물 가지러 가자 고성민은 침대 옆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지영아, 꼭 가야 하는 거야?”

“아저씨, 제가 남으면 어머니와 아저씨께 폐를 끼칠 거예요. 저도 이만큼 컸으니 자신을 잘 챙길 수 있어요.”

“능력 없는 내 탓이야.”

고성민은 카드를 꺼내어 임지영의 베개 밑에 넣었다.

“거절하지 마. 여자애는 밖에서 돈을 쓸 곳이 많아.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조심해서 나가. 무슨 일 있으면 네 엄마한테 전화하고.”

임지영은 감격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

고성민은 임지영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고현이도 이상했어. 예전과 어딘가 달라.”

임지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물었다.

“왜 그러는데요?”

“네 엄마가 네가 기절했다고 소리쳤더니 고현이 갑자기 뛰쳐나와서 널 안고 갔어. 아버지가 너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마 고현의 방에 누워있었을 거야.”

“네?”

임지영은 놀라서 이불을 꽉 쥐었다.

“걱정하지 마, 고현은 네가 고씨 가문에서 죽으면 구설에 오를까 걱정돼서 그런다고 했어.”

“네.”

그래야 고현답다고 생각한 임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의 모든 것이 꿈과 같았다.

임지영은 약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떠날 때,그녀는 류하를 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류하가 반드시 울며불며할 것이니 말이다.

고씨 가문 저택을 나설 때 하인들은 모두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것을 꺼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에 서서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빛을 보며 이날이 드디어 다 간다고 생각했다.

경성은 가을이 일찍 와서 저녁 바람이 쌀쌀했는데 임지영은 가방끈을 꼭 잡고 떠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씨 가문 저택은 독립된 정원식 저택으로 경성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지만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기 위해 주변 공지까지 사들였다.

에워싸고 있는 개인 공원에서 가끔 행사하며 외부에 개방하기도 했지만 이곳은 지하철도 없고 버스도 없고 택시도 거의 없다.

임지영은 아무리 빨라도 20분은 걸어야 가장 가까운 플랫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람을 안고 가로등 아래에서 몇 분 동안 걸어 나갔을 때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들려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길을 내주었지만 뜻밖에도 차는 그녀 옆에 멈추었다.

“임지영 씨, 타세요.”

차창이 내려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고현의 비서 진성이었다.

임지영은 어리둥절해 하며 흘끗 뒷좌석을 보았다. 붉은 비취반지를 낀 채 손으로 무릎에 두드리며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고현이 보였다.

임지영은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삼촌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가방끈을 당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곧 진성은 빠른 속도로 차에서 내려 임지영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예의 바른 웃음을 지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임지영 씨, 차에 타세요. 임지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도련님께서 이렇게 짐을 들고 가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누구에게나 좋지 않다고 하셨어요. 임지영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제 방법으로 임지영 씨를 차에 태울 수밖에 없어요.”

임지영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뒷좌석 차창을 들여다보았으나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현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현의 수법은 경성에서 매우 악명 높았고 전생에 그녀도 본 적이 있다.

정말 강경하게 맞서고 있으니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 짐작이 간 임지영의 몸에 갑자기 온기가 없어지고 온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그녀는 어렵게 환생했는데 더는 고현의 노여움에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임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을 향해 걸어갔지만 진성은 그녀를 뒷자리에 밀어 넣었다.

차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차 안의 술 냄새를 맡았다.

고현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반쯤 감은 채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데 얼굴의 절반은 그늘에 가려져 있어 위험하고 냉엄해 보였다.

고현은 눈을 뜨고 담담하게 말했다.

“가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임지영은 목구멍에 무엇인가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이런 느낌을 기억했는데 마치 그가 전생에 별로 했던 말투랑 똑같았다.

“가고 싶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임지영이 한을 억누르고 몸을 옆으로 옮기며 막 대답하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류하가 걸어온 것이다.

임지영은 류하가 기회를 잡을 줄 모른다고 원망할까 봐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고현의 침울한 시선은 그녀의 휴대폰에 떨어져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임지영은 어쩔 수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임지영! 너 정말 나 열 받아 죽게 할 거야? 내가 널 푸대접했어? 왜 집을 나가는 거야?”

류하는 울먹이고 있었는데 글자마다 막무가내였다.

그녀도 자신이 딸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 그럼 조심해.”

류하는 한숨을 쉬었지만 마지못해 타협했다.

“지영아, 아니면... 삼촌한테 소개팅 도와달라고 할게. 혼자 밖에 있는 것보다 의지할 남자가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삼촌이 꼭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를 찾아줄 거야.”

류하가 또 설교하기 시작했다.

임지영은 고현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그의 안색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급히 작별인사를 했다.

류하는 모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엄마한테 둘러대지 마. 나도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하자. 며칠 후 맞선 봐...”

“엄마! 끊어요.”

임지영은 한마디 뱉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전생에도 류하는 맞선을 주선했지만 그녀와 고현의 일이 생기면서 흐지부지됐다.

‘고현이 못 들었겠지?’

사실 들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차 안은 갑자기 진공상태인 듯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가로등은 나뭇가지에 의해 어두웠다 환했다 하며 차창으로 스며들어 고현의 뚜렷한 윤곽을 미끄러져 지나갔다.

임지영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곧 가벼운 코웃음이 들렸다.

“맞선. 임지영, 어젯밤 한 말 중 도대체 진실이 있긴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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