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임지영이 막 기숙사 밖으로 나오자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몸을 돌리자 한 학생이 숨을 헐떡이며 강의동 방향을 가리켰다.

“임지영, 오 선생님께서 널 사무실로 오라고 했어.”

“알았어.”

임지영은 몸을 돌려 강의동으로 걸어갔는데 길에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악의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또 말썽이 많아지겠구먼.’

...

사무실.

임지영이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오 선생님 외에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현과 송연아였다.

고현의 독사 같은 눈빛이 곧 임지영을 독살시킬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고르던 임지영은 주먹을 쥐어서야 발걸음을 안정시키고 다가갔지만 고현의 눈빛은 그녀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때 가냘픈 그림자가 다가왔는데 이 사람은... 전생의 꼭두각시 친구 심유나였다.

심유나는 예전에 임지영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저혈당으로 쓰러졌을 때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 때문에 임지영은 항상 그녀를 믿었고 심지어 말을 잘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한 학생인 심유나와 부잣집 아가씨인 송연아가 진작에 손잡았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심유나는 임지영의 신변에서 항상 양 탈을 쓴 늑대 역할을 했다.

임지영이 오자 심유나는 예전처럼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임지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앞질러 말했다.

“지영아, 빨리 송연아 학생에게 사과해. 네가 공모전 정원을 위해 인터넷에 송연아 학생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

‘이 일이구나.’

임지영은 담담하게 심유나를 쳐다봤는데 눈빛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불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지영아, 너 왜 그래? 난 다 너를 위해서야. 지금 사과하고 공모전 참가 정원을 송연아 학생에게 돌려주면 대표님과 선생님도 너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거야.”

전생에 심유나는 권세가 있는 사람을 건드릴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송연아가 그녀더러 임지영이 고현의 침대에 올라가 결혼하고도 강요했다는 루머를 퍼뜨리라 했는데 임지영이 그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임지영은 슬그머니 손을 떼며 말했다.

“나를 믿는데 내가 왜 사과해야지? 이런 사과는 내가 이 죄명을 인정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

심유나는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지영을 쳐다봤다.

고현에게 아첨하던 교감 선생님은 이 말을 듣고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임지영을 바라봤다.

“임지영! 여긴 학교야! 송연아는 학교에서 선발한 학생이고 사전에도 말했는데 너의 질투심이 이렇게 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먼저 인터넷에 너와 대표님의 일을 언급하더니 이젠 송연아에게 루머를 뒤집어 씌워? 너처럼 성품에 문제 있는 학생은 절대 학교를 대표해 공모전에 참가할 수 없어!”

항상 임지영을 돌봐왔던 오 선생님은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교감 선생님, 임지영은 이런 학생이 아니에요. 지영아...”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송연아가 고현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이 가득한 채로 불쌍하게 말했다.

“교감 선생님, 오 선생님,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정원은 지영에게 주세요. 저는 이미 평판이 나빠져서 공모전에 나가도 학교에 먹칠만 할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고현을 바라봤는데 그 눈빛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혼자 묵묵히 억울함을 삼키는 것 같았다.

“고현 씨, 창피하게 해서 미안해요.”

이 장면은 임지영을 도우려는 오 선생님조차 할 말을 잃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송연아의 능력이었다. 그녀는 항상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을 방법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현은 송연아의 어깨를 감싸며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옷을 문질러 줬는데 이 모습은 다정하고 사랑이 넘쳐 보였다.

손에 낀 비취반지는 그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임지영을 바라보는 고현의 눈빛은 먹구름이 뒤덮인 것처럼 위험해 보였는데 마치 겨울밤 하늘에 놓인 별처럼 사람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임지영, 이리 와. 아니면 그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해.”

전생에 고현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송연아를 두둔하는 기억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고현의 수단은 참혹했다. 송연아를 기쁘게 하려고 임지영에게 육체적 고통을 줬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주었는데 조금씩 그녀의 희망을 무너뜨리며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번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야!’

임지영은 이를 악물고 고현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님, 증거는요?”

고현은 말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얄팍한 비웃음이 엿보였다.

임지영은 심유나가 설명하기 전까지 그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영아, 미안해. 난 더는 네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지 못하겠어. 넌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대표님과 송연아의 감정을 파괴할 수 없어.”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현을 바라봤다.

“대표님, 제가 지영이를 타일렀지만 말리지 못했어요. 확실히 지영이가 인터넷에 송연아에 관한 루머를 퍼뜨렸어요. 지영의 휴대전화에 있는 계정에 오르면 파파라치에게 연락한 과정을 볼 수 있어요. 솔직히 지영이는 공모전 정원만 위해서 한 짓이 아니에요. 지영이는... 대표님과 송연아가 함께 있는 걸 질투했어요. 지영이는 오랫동안 대표님을 짝사랑했고 그 일기장을 매일 갖고 다녔어요. 믿기지 못하겠으면 가방을 뒤져보세요.”

말을 마친 심유나의 눈가에서는 마침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입가로 흘렀는데 청초한 얼굴에 수줍은 표정을 더해서인지 더 가엾어 보였다. 심유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고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송연아가 힐끗 눈치 주지 않았다면 아마 두 눈이 고현의 몸에 밀착되었을지도 모른다.

임지영이 반박하기도 전에 교감 선생님은 임지영의 가방을 가로채서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힘껏 쏟아냈다.

곧 분홍색 일기장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송연아는 일부러 놀란 척 말했다.

“지영아, 더 변명할 말이 있어?”

임지영은 무표정하게 일기책을 송연아 앞에 버렸다.

“똑똑히 봐.”

일기책을 열어봤는데 짝사랑에 관한 내용은 없었고 오히려 모두 전공에 관한 필기만 보이자 송연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심유나를 바라봤다.

심유나는 일기장을 빼앗아 세 번이나 뒤적거리더니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난 분명히 봤는데...”

“심유나, 너 혹시 미쳤어? 대표님을 짝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대표님을 짝사랑할 수 있겠어?”

임지영은 웃으면서 심유나와 고현을 번갈아 보았다.

이 상황을 눈치챈 송연아는 음흉한 눈빛으로 심유나를 쳐다봤는데 이것이 바로 임지영이 원하는 바였다. 개는 개와 싸워야 재밌는 법이다.

다만 그녀가 덫을 놓자 고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임지영은 고현이 그녀의 일기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엇을 볼까? 내가 당신에 대한 마음을 담았다고 착각한 걸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어.’

교감 선생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심유나는 얼른 설명했다.

“저도 언제 노트가 바뀌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계정은 변할 수 없어요.”

말을 마치자 송연아는 직접 바닥에서 휴대전화를 들어 확인했고 심유나는 자발적으로 임지영의 잠금 해제 비밀번호를 눌렀다.

송연아는 클릭하기 전에 자신의 고상한 품격을 돋보이게 하려고 어쩔 수 없는 듯이 말했다.

“지영아, 난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만약 네가 잘못만 인정한다면 이 일은 없던 거로 할게.”

“볼 자신이 없어? 그럼 날 탓하지 마.”

송연아는 고현의 앞에서 임지영의 휴대전화를 열고 계정에 올랐는데 멍해졌다.

임지영은 쭈그리고 앉아 가방을 정리하며 설명했다.

“어제 내 계정이 해킹을 당한 걸 발견하고 다행히 고객센터에 바로 연락해서 신고했어. 피드백을 보니 해킹 시간과 로그인 장소가 정확히 적혀 있었어. 보아하니 학교에서 로그인했던데 그 시간에 난 학교에 없었거든.”

임지영은 무심한 척 심유나를 흘겨보았는데 그녀는 열등감에 빠진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 일관된 수법을 썼다.

임지영은 더 캐묻지 않고 고현을 바라봤다.

“대표님, 더 물어볼 것이 있어요? 없다면 저는 공모전을 준비하러 이만 가볼게요.”

임지영은 이 말을 할 때 억양을 높였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오히려 고현의 눈빛이 전례 없이 어두워졌는데 임지영은 여태껏 그의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