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날 꼬집어 볼래?”임지영이 갈비를 뜯으며 말했다. 김지민이 손을 내밀자 이윤지가 그녀의 손을 때렸다.“지영아, 와줘서 고마워. 예전에 우리 기숙사는 늘 사람이 부족해서 다른 기숙사가 부러웠거든.”“그래. 왜인지 넌 항상 심유나와 함께 있었어. 그년은... 아이고.”“아무것도 아니야. 많이 먹어.”전영미가 환하게 웃으며 갈비를 집어주었다.그들을 보며 임지영이 피식 웃었다.“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오히려 난 너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왜? 왜 그래?”순진한 김지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오랫동안 사람을 잘못 믿었는데도 날 불러줘서 고마워.”‘그리고 전생에 도와줘서 고마워.’“지금이라도 잘 보면 돼. 심유나가 너의 열쇠를 맞추었고 네가 없을 때 자주 우리 기숙사에 왔어. 너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우리도 뭐라 말할 수 없었어.”“참, 항상 심유나는 너의 앞에서 불쌍한 척 가난한 척했어. 우리가 일깨워주었는데도 넌 우리가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고 했거든. 실은 심유나는 배후에서 네가 심부름을 시키고 가난하다고 놀려주었다고 소문내어 다들 너랑 접촉하는 걸 꺼려해. 우리는 같은 기숙사니 네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지켜봤잖아. 넌 집에서 가져온 좋은 물건을 거의 다 심유나에게 주다시피 했어.”김지민이 점점 더 흥분하는 전영미와 이윤지를 말렸다.“그만해.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화가 나서 배가 부를 것 같아.”김지민은 임지영에게 메뉴를 건넸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시켜.”“그래.”메뉴를 열어봐도 식욕이 없었던 임지영은 술을 마시자고 말했다.“좋아.”곧 한 사람이 맥주 두 캔씩 주문했는데 양이 많지도 적지도 않아 좋았다. 하지만 마시면서 술을 더 주문하게 되자 결국엔 모두 취할 듯 말듯 비몽사몽에 처해있었다.머리를 받쳐 들고 마음속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임지영은 전영미의 어깨에 기댔다.“넌 고향으로 돌아가지 마. 네가 이 도시에 남고 싶어 하는 걸 알아.”전영미가 흠칫 놀라 물었다.
임지영은 이윤지를 바라봤다.이윤지는 당황해하며 물었다.“나, 나도 안돼?”임지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너, 네 마음대로 해.”테이블에 머리를 떨군 채 취해버린 임지영을 보며 세 룸메이트는 피식 웃었다.“난 지영이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줄 몰랐어.”“심유나가 아니라면 우리 학교의 여신이 어떻게 송연아가 될 수 있겠어?”“어머, 거의 8시 반이야.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세 사람은 임지영을 부축하고 기분 좋게 기숙사로 돌아갔다. 완전히 취하지 않은 임지영은 룸메이트에게 기대며 의외로 편안함을 느꼈다.네 사람은 취했지만 오히려 웃고 떠들며 즐겁게 돌아갔다.가을바람마저도 따듯하게 느껴졌는데 이때 김지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와, 예쁜 하늘이야.”나머지 세 사람도 나란히 서서 하늘을 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맑아 달빛이 환하고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나뭇가지 사이로 달과 별을 바라보던 임지영은 전생의 딸 별이가 생각났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두 별은 눈과 같았고 그 밑에 있는 달은 입 같았는데 마치 별이가 하늘에서 방긋 웃는 것 같았다.“엄마, 엄마... 엄마, 다음 생이 있으면 꼭 자신의 꿈을 잃으면 안 돼요. 저를 위해서 꿈을 포기하는 것도 안 돼요. 저는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나뭇잎이 마침 임지영의 얼굴에 떨어져 그녀의 그리움에 젖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런 후 임지영은 웃었다. 그 웃음은 밤하늘의 별들이 무색할 정도로 예뻤다.‘별아, 엄마는 널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갑자기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임지영은 밤하늘의 경치를 보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세 룸메이트도 나란히 서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뭘 보지?”“몰라.”“난 목디스크가 올 것 같아.”“푸흡...”임지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네 명은 함께 웃었다.한 사람이 바보가 되면 함께 바보짓을 하는 이것이야말로 대학교 생활의 즐거움이었다.임지영은 마지막에야 이것을 깨달았지만 이렇게 좋은
임지영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당연히 널 용서해. 너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또 널 믿어.”얼굴에 술기운을 띠고 웃는 모습은 온화하고 거짓이 없어 보였다.심유나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쌀쌀하게 웃었다.‘바보, 작은 선심을 지금까지 기억하다니! 속아도 싸!’심유나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지영아, 너 공모전을 포기했다며? 괜찮아, 성실하게 일자리를 찾으면 돼. 승부욕은 쓸모없어.”“유나야, 나의 좋은 친구로서 날 격려해 줘야지 않아?”“나... 난 네가 부담스러울까 봐 말한 거야. 다른 뜻은 없었어.”심유나가 얼버무렸다.“응. 공모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디자인 원고를 누가 건드린 것 같아. 너는 내 숙소 열쇠를 갖고 있지?”임지영이 넌지시 물었다.심유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나를 의심하는 거야? 우린 오랜 친구이고 또 너의 룸메이트들이 널 겨냥할 때마다 항상 내가 곁에서 지켜주고 지켜줬어. 그들이 한 짓이 아닐까?”“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원래 열쇠를 함부로 복제하는 게 아니야. 그들을 말하지 마. 그러다가 화가 나서 널 고발하면 어떻게 해? 졸업이 코앞인데 안 좃은 기록을 남길래?”“난 그런 뜻이 아니야.”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깔보던 심유나는 임지영의 말을 듣자 말을 더듬거렸다.“그럼 열쇠를 돌려줘. 내가 애들 앞에서 폐기할게. 그러면 애들은 분명히 널 말할 수 없을 거야.”임지영이 손을 내밀자 심유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길까 봐 두려워 열쇠를 건네주었다.임지영은 열쇠를 받은 후 술에 취한 척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난 디자인 초안이 없어졌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난 망했어...”임지영을 부축한 심유나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졌는데 그녀를 기숙사로 돌려보낸 후 곧 돌아갔다. 심유나가 가자마자 임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열쇠를 룸메이트들에게 주어 폐기하게 했다.그런 후 임지영은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새벽 세 시가
임지영을 사랑하는 류하와 고성민이 이 소식을 알고 준비해줄까 봐 일부러 공모전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인데 바로 고우진이다.어제 고우진은 특별히 전화해서 응원했는데 오늘은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줬다.룸메이트들이 박스를 열어보니 안에는 자줏빛을 띤 실크 롱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가슴 부분에는 수제로 구슬을 박았는데 크기가 들쭉날쭉한 구슬들이 조명 아래에서 영롱하고 은은한 광택을 보였다.허리부터 아래까지는 두 겹의 엷은 실크로 만들어졌는데 옅은 색과 짙은 색을 오묘하게 결합해 몽환적인 색상을 표현했다.“와, 이 드레스는 기숙사의 조명에서도 이렇게 빛나는데 무대에 서면 얼마나... 반짝일까?”김지민이 개그맨처럼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웃을 시간이 없어. 빨리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해야 해.”“...”한 시간 후, 치장을 마친 임지영은 인형처럼 룸메이트들에게 보였다.“너무 예뻐. 지영아, 여자인 나도 너에게 반할 것 같아.”“지영아, 하이팅. 넌 우리 과에서 1등이야.”“지영아, 우린 널 믿어.”임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걸치고 출발했다.룸메이트들은 현장에 가고 싶었지만 갓 인턴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도저히 휴가를 낼 수 없었다.하지만 그들의 격려를 받은 임지영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40분 후에 공모회장에 도착했다.이번 신인 디자인 공모전에서 한 심사위원은 국내에서 이름난 디자이너인데 그녀의 스튜디오는 국내외에서 매우 유명했다.이번 공모전에서 1등 하면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은 햇병아리가 대선배에게 직접 배울 기회이니 일반 인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이번 공모전은 크게 열렸고 기자도 유달리 많았다이때 송연아와 고현이 인터뷰를 받고 있었다.송윤아는 큐빅이 박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고현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도도한 공주 같았다.늘씬한 고현은 여전히 검은색 양복을 입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준수했
규정에 따르면 화장장에서 가족은 화장 과정을 볼 수 없다.임지영은 돈을 들여 차가운 철침대를 짚고 화장터로 들어갔다.공기 중에는 뜨거운 기운이 맴돌았고 햇빛에 재가 날리는 것도 보였는데 어쩌면 유골일지도 모른다.곧 그녀의 아이도 이렇게 될 것이다.임지영은 블랙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초췌한 몸매를 감추지 못했다.빨갛게 부어오른 두 눈은 지금 이 순간 유난히 차분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흰 천 아래의 창백하고 뻣뻣한 작은 손을 만져보고 딸의 손에 분홍색 종이로 접은 별을 두 개 넣었다.“별아, 엄마 기다려.”시간이 되었다.화장장 직원이 다가가 임지영을 밀어내고 흰 천을 들치자 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여덟 살이 됐는데도 앙상하게 여위어 있었고 뚜렷한 갈비뼈 아랫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다.움푹 팬 곳을 노려보는 임지영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가 별이를 잘 지켜내지 못했다.화장장 직원들이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적어도 따님이 떠난 후 신장을 남겨 다른 아이를 구했잖아요. 그 아이가 따님을 대신해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임지영의 눈 밑에 냉기가 감돌더니 피식 비웃었다.“그럼요. 그 아이는 제 남편의 사생아이고 지금 세 식구가 그 아이를 위해 성대한 생일파티를 벌이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은 내 딸의 생일이기도 해요.”직원들은 멍해져서 눈앞의 이 절망적인 여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임지영은 별이를 바라보며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태워요. 좋은 시기를 그르치지 말고. 내 딸이 다음 생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직원들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고개를 저으며 시신을 소각로 앞에 내려보냈다.동정심 때문인지 직원은 그 과정을 가렸다.별이가 아픔에서 해탈되었다는 생각에 임지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더는 별이의 아버지에게 매일 미움을 받을 필요도 없다.“엄마, 아빠는 왜 날 안 좋아해요?”“엄마, 아빠는 왜 연아 이모의 아들을 좋아하죠?”“엄마, 아빠는 나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
그녀가 돌아왔다!그녀가 뜻밖에도 돌아왔다!임지영은 사람들의 의아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힘껏 꼬집었다.아픔이 온몸을 휩쓸고 가자 그녀의 눈에는 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울긴 왜 울어! 우리 고씨 너에게 미안해야 하는 거야?”위에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다가 고재호의 언짢은 눈빛을 마주했다.이내 고개를 숙인 그녀는 한결같이 얌전한 모습을 보였지만 몸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주위에서 가볍게 키득거리는 소리와 수군수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어린 나이에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고현에게 약을 먹여 침대에 오르게 했다고 소문이 자자해. 분명 고현을 협박해서 책임지려고 한 것인데 이제 와서 감히 인정하지 않는다니 집안 어른들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어.”“우리 가문이랑 어떻게 비교하겠어. 우리 고씨 가문에서는 이렇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 나올 수 없어. 인터넷에서 저 여자가 고현이를 짝사랑하는 일기가 모두 공개됐는데 내용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래. 고씨 가문이 돈까지 주며 대학에 보냈더니 배은망덕하게 나오네.”“아무나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건 분명 늑대를 끌어들인 거야. 분명 고현에게 바가지를 뒤집어씌운 건데 배운 건지, 아니면... 유전인지 알 게 뭐야.”말하면서 사람들은 구석에 서 있는 임지영의 어머니 류하를 향해 곁눈질했다.류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임지영을 힐끗 보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터질 정도로 깨물었지만 감히 한마디 대꾸하지 못했는데 이는 임지영의 신분이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다.류하는 재가하면서 고씨 가문에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고현의 둘째 형에게 시집갔다.그래서 촌수로는 고현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왜냐하면 그녀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전생에 임지영도 이들의 비난에 허리 숙여 사과하며 고현에게 약을 먹이고 침대에 오르게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묵인했다.나중에 임신해서 고현이 그녀와 결혼하도록 강
송연아,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딸.3년 전 고현은 송연아와의 연인 관계를 예고 없이 공개했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식까지 열면서 송연아를 경성에서 가장 부러운 여자로 만들었다.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며 고귀하고 우아하다고 생각하지만 임지영만이 송연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디자이너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반드시 여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송연아의 계략을 임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고현의 혼기가 3년이나 늦어져서 고씨 가문에 시집가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다.아니나 다를까...송연아는 곧장 걸어 나와 임지영가 있던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어르신, 접니다! 제가 지영이와 몸매도 비슷하고 생긴 것도 비슷해서 오해를 받은 것 같아요.”말이 끝나자 옆에서 누군가 따져 물었다.“하지만 인터넷에 임지영의 짝사랑 일기가 올라왔는데, 어림잡아 5, 6년이 된 것 같았어. 너랑 고현이는 안 지 3년밖에 안 되잖아?”송연아는 진정성 있는 연기를 잘했다.“제가 먼저 고현 씨를 짝사랑했어요. 다 제가 쓴 일기인데 누가 들춰 냈는지 모르겠어요.”두 줄기의 맑은 눈물, 애틋한 눈빛, 볼의 홍조까지 지금 상황에 잘 맞았는데 누가 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전생에 참담하게 패배한 임지영은 담담하게 말했다.“삼촌이 연아 씨와 약혼한 지 오래됐으니 삼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연아 씨가 도와준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파파라치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일부러 이런 기사를 낸 것 같아요.”주변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임지영은 이제야 전생에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깨달았다. 조심하며 열심히 살려고 애쓴 것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이런 한가한 어느 날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이곳에서 그녀는 매 순간이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임지영은 한발 물러서며 씁쓸하게 말했다.“이미 일이 밝혀졌으니 고씨 가문이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게요. 어르신, 여러분, 전 먼저 물러
고현의 싸늘한 눈초리에 임지영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하지만 전생 8년의 고통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끝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몰래 임신하려고?”임지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곁눈질로 류하를 힐끗 바라보았다.약은 류하가 샀는데, 설마 아직도 고현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못 버렸단 말인가.그러나 류하는 고현의 냉랭한 빛 속에서 이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류하는 어르신보다 고현이 더 무서워하니 고현의 눈앞에서 손쓸 용기가 없을 것이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임지영은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방의 시선을 느꼈다.이들 중 한 눈빛이 유난히 특이했는데 바로 송연아였다.그녀의 입술은 웃는 듯 마는 듯하여 임지영은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렸다.아니나 다를까 곧 송연아는 여러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임지영의 손을 잡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지영아, 미안해. 고현 씨와 할아버지를 속일 수 없어서 고백했어. 하지만 나를 이용해 여론을 무마하고 몰래 임신을 꾸밀 줄은 몰랐어. 내가 너를 위로하려고 갔다가 너의 계획을 듣지 않았더라면 너 오늘 성공했겠지? 만약 네가 정말 임신했다면 난 고현 씨랑 어떻게 해?”말을 마친 송연아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사람들은 송연아를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분노했다.“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아? 당연히 연아를 대체하고 싶은 거겠지! 지영이가 정말 임신하게 한다면 자식을 미끼로 고현이 결혼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 되면 우리 고씨 가문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질 거야.”누군가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내 평생 이렇게 상스러운 수단을 본 적이 없어. 다행히 연아가 똑똑해서 속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지영이 때문에 헤어지지 않았을까?”“고현아, 임지영을 남겨두면 안 돼.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사람들이 뱉은 말은 구구절절 날카롭게 임지영의 심장을 찔렀다.전생에서처럼 모두가 송연아를 감싸며 그녀를 한 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