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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고현의 싸늘한 눈초리에 임지영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전생 8년의 고통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끝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몰래 임신하려고?”

임지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곁눈질로 류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약은 류하가 샀는데, 설마 아직도 고현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못 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류하는 고현의 냉랭한 빛 속에서 이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류하는 어르신보다 고현이 더 무서워하니 고현의 눈앞에서 손쓸 용기가 없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임지영은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방의 시선을 느꼈다.

이들 중 한 눈빛이 유난히 특이했는데 바로 송연아였다.

그녀의 입술은 웃는 듯 마는 듯하여 임지영은 좋지 않은 과거를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송연아는 여러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임지영의 손을 잡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영아, 미안해. 고현 씨와 할아버지를 속일 수 없어서 고백했어. 하지만 나를 이용해 여론을 무마하고 몰래 임신을 꾸밀 줄은 몰랐어. 내가 너를 위로하려고 갔다가 너의 계획을 듣지 않았더라면 너 오늘 성공했겠지? 만약 네가 정말 임신했다면 난 고현 씨랑 어떻게 해?”

말을 마친 송연아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사람들은 송연아를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분노했다.

“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아? 당연히 연아를 대체하고 싶은 거겠지! 지영이가 정말 임신하게 한다면 자식을 미끼로 고현이 결혼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 되면 우리 고씨 가문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질 거야.”

누군가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내 평생 이렇게 상스러운 수단을 본 적이 없어. 다행히 연아가 똑똑해서 속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지영이 때문에 헤어지지 않았을까?”

“고현아, 임지영을 남겨두면 안 돼.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사람들이 뱉은 말은 구구절절 날카롭게 임지영의 심장을 찔렀다.

전생에서처럼 모두가 송연아를 감싸며 그녀를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했지만 많이 들어서 이젠 익숙해졌다.

임지영가 고개를 들다가 송연아의 두 눈이 마주쳤다. 가냘픈 눈동자 속에 계산이 반짝였다.

그녀가 약간 멍한 채 손을 들어 눈물을 닦는 척하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도발하는 듯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약은 그녀가 바꾼 게 분명하다!

송연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고 간절한 마음조차 담겨 있었다.

“고현 씨, 제발 용서해 줘요. 지영이가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닐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제가 한 일이라고 쳐요. 고씨 가문과 고현 씨의 손실을 만회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저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무엇이든 할 거예요.”

만약 임지영이 그녀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만 들었다면 그녀가 정말 이렇게 착하고 가문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간 임지영은 자신이 이번에도 송연아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일의 흐름을 바꾸긴 했지만 상대의 지능까지 바꿀 리는 없었다.

송연아는 임지영의 긴장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게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인정하겠는가.

고현은 냉혈한 장사꾼이다. 어젯밤의 모든 것에 관해 어르신과 이해득실을 따졌을 것인데 그들이 사진 속의 여자가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그녀가 인정한다면 고현은 분명 그녀의 마음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르신도 그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깊은 속셈은 고현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어르신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임지영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현이 정말 그녀와 잤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그녀만 천한 년일 뿐이다!

임지영이 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과거의 임지영이 아니었다.

송연아의 의중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송연아마저 멍하니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얼굴에서 허점을 찾으려는 듯했다.

그러나 임지영은 송연아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고현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눈빛이 음산하고 비꼬는 듯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반지를 가지고 놀고 있는 그의 나른함 속에는 위험한 압박감이 배어 있어 마치 임지영이 그의 손안의 노리개가 된 것처럼 사람을 겁먹게 했다.

전생에 그녀와 이야기한 것처럼 영원히 차갑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이었는데

그녀는 꾀가 많은 여자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다.

해명도 변명에 불과하니 설명하기 귀찮았던 임지영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말했다.

“사진 속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연아도 모르니 삼촌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요. 연아야, 넌 삼촌이랑 약혼한 사이인데 두 사람이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당연한 거 아니야? 삼촌이 방금 반박도하지 않았는데 넌 왜 이렇게 급하게 해명하는 거야? 마치 네가 삼촌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구정물을 끼얹는 일은 그녀도 할 줄 안다.

전생에 송연아한테 많이 배웠으니 말이다.

송연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몸을 돌려 표정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고현 씨를 사랑해. 난 단지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거짓말하고 싶지 않은데 왜 날 모욕하는 거야? 더구나...”

임지영은 고현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게다가 이 세상에 남자가 삼촌뿐인가? 내가 임신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일 수는 없는 거야?”

‘고현, 이번 생에 나는 차라리 낯선 남자와 관계가 있을지언정 당신과 조금이라도 연루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들은 고현은 손가락뼈에 힘을 꽉 주더니 차가운 두 눈에 헤아릴 수 없는 한기가 피어 올랐다.

“뭐라고?”

임지영은 큰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 세상에 남자가 삼촌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요! 전 누구의 아이도 임신할 수 있지만 삼촌의 아이는 임신하지 않을 거라고요. 제 말이 틀렸나요?”

고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위험한 눈빛을 지었는데 그 눈빛에 임지영은 하마터면 제대로 서지 못 할 뻔했다.

그녀는 재빨리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어요? 없으면 전 지금 피곤해서 먼저 쉬러 갈게요.”

그녀는 몸을 돌려 곧 방으로 가려 했다.

“거기 서!”

고현은 냉기가 더해지며 무서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구야?”

많은 사람이 경악했다.

고현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임지영은 눈을 내리깔고 모든 감정을 숨겼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그가 누군지 모를 리 있겠는가?

하지만 고현이 어떤 결말을 원하는지 알고 있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한 번 훑어본 뒤 고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곧 끝날 거예요.”

고현은 흔적도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눈앞의 초조함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집사가 경비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임지영 씨를 찾아요.”

경비원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것을 보고 공경하게 말했다.

“임, 임지영 씨가 시킨 배달음식이 도착했는데 외부인 출입이 안 돼 가져왔어요.”

임지영은 다가가 불투명한 종이봉투를 건네받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경비원이 가자 임지영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탁자 앞으로 나와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피임약이었다.

방금, 그녀는 류하에게 부탁한 후 마음이 불안해서 다시 몰래 주문을 해서 빈틈없이 했는데 정말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임지영은 사람들 앞에서 약봉지를 뜯고 안에 든 은박지를 꺼내 일일이 훑어봤다.

특히 고현의 눈앞에서는 몇 초 동안 머물렀다.

“삼촌, 잘 보셨나요? 이번에는 피임약이 맞죠? 삼촌, 걱정하지 말아요. 저 임지영은 절대 낳지 말아야 할 아이를 갖지 않을 거예요. 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가요?”

임지영은 피식 웃으며 재빨리 약 열 알을 까고 재빨리 한 알을 입에 넣었다.

“한 알이면 충분해요? 부족하면 한 알 더 먹죠. 두 알! 세 알! 네 알...”

모두 아연한 표정으로 심지어는 약간 놀란 듯이 임지영을 바라보았다.

임지영이 다섯 번째 약을 입에 넣을 때 평소 어르신의 말을 잘 듣던 고성민이 튀어나와 약을 빼앗았다.

“고현아, 이게 무슨 짓이냐? 지영이가 아니라는데 왜 그렇게 난처하게 해? 이 소문이 퍼지면 듣기 거북하지 않겠어?”

류하는 임지영을 품에 안고 울먹였다.

“그만 해요! 지영이는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임지영은 식은땀이 날 정도의 복통을 겪었다.

그래도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현을 향해 손바닥을 펴서 안에 든 약을 들어냈다.

“삼촌, 이제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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