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영이 기숙사로 돌아갈 때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진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임지영 씨, 도련님께서 차에서 기다리세요. 임지영 씨의 손은 재검사를 받아야 합니다.”임지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내 손을 다쳤으니 마침 잘 된 거 아닌가요? 삼촌이 이렇게 큰일을 하지 않아도 출전을 포기할 수 있을 텐데.”진성은 영문을 몰라 나지막이 말했다.“임지영 씨, 도련님은...”“삼촌은 시간이 남는 거면 여자친구와 좀 더 함께 있어 주라고 해요.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임지영은 진성을 비켜 지나갔지만 그는 재빨리 길을 막았다.“임지영 씨,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말은 많지 않지만 말투가 매우 의미심장했다.임지영은 자신이 가지 않으면 진성이 계속 그녀에게 주의를 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심호흡하며 대답했다.“가요.”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임지영은 그를 따라 차에 올랐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흥분해 걸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임지영을 보자 멈칫했다.송연아였다.그녀는 떠나는 차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며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병원.임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현은 손에 든 서류 처리에만 열중했다.마치 그녀의 디자인 원고를 송연아에게 준 사람은 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아니, 사실 이 일은 그의 눈에는 전혀 언급할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임지영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곁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손이 아파?”“아프지 않아요.”임지영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차를 세우자 임지영은 바로 차에서 내려 고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고현은 진성을 향해 눈짓했다.“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진성은 의아해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잠시 후, 임지영은 고현을 따라 병원으로 들어갔다.등을 돌리고 있던 의사는 목소리를 듣고
고현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더니 친구에게 담배를 던져주고 한 손으로 불꽃을 모아 불을 붙였다.친구는 담배를 거두며 피우지 않았다.담대 연기 속 고현의 침울한 얼굴을 보며 그는 어리둥절하게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도대체 누군데 네가 직접 데리고 거야? 송연아가 다쳤을 때도 하루도 같이 있지 않았잖아. 그날 아침 일찍 네가 다른 병실에서 나온 걸 보았는데 설마 그 여자인 건 아니겠지?”“맞아.”고현이 대꾸했다.친구는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빠른 걸음으로 고현 맞은편에 다가가다가 뜻밖에도 그의 옷깃에 뭔가 자국이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자세히 보고 믿을 수 가 없었다.‘고현이? 키스 마크? 그럴 리가!’고현과 송연아는 3년 동안 함께 있었는데 키스 마크는커녕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도 보지 못했다.고현과 고등학교 동창인 그는 금융을 배우기 싫어 의학을 공부했는데 의학을 배우는 것이 금융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지금은 병원에 출근하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고현의 개인 의사이기도 하니 고현의 건강 상태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그가 이렇게 놀란 것은 매년 고현의 신체 검사 중 그 방면에 관한 정보가 그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깨끗했기 때문이다.그는 한때 고현이 그쪽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약을 져야 할지 물었다.고현은 자신이 결벽증이 있다고 했다.지금 물린 자국이나 키스 마크를 몸에 지닌 채 다니는 그가 결벽증이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친구는 확신할 수 없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좀 격렬한데? 송연아는 애교가 넘치게 생겨서...”“송연아 아니야.”고현은 창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시큰둥하게 말했다.“너...”“내 얘기는 그만하고 임지영의 상황을 말해 봐.”고현은 친구의 놀라움에 찬 말을 가로챘다.의사는 근엄한 태도로 돌아선 뒤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손 부상은 작은 일이고 정신 상태가 큰 문제인 것 같아. 많이 긴장해 보이는데 요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송연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임지영을 바라봤다.“미안해, 지영아. 네가 먼저 해. 난 참으면 돼.”송연아는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눈빛은 고현의 몸에 내려앉았다.임지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앞으로 걸어갔는데 뒤에서 큰 손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붉은색 반지는 핏빛을 내며 위험하다는 신호를 내보내고 있었다.고현이 쌀쌀하게 말했다.“연아가 먼저 해.”임지영은 고개를 돌려 고현을 노려봤다. 이때 송연아도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고현 씨, 고마워요. 저, 저는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 도와줄 수 있어요?”고현은 송연아를 안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힐 무렵 송연아는 임지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영원히, 영원히 송연아가 우선이야.’임지영은 검사안내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섰다.그녀의 손은 이미 나았지만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는 건 심유나와 송연아를 현혹하기 위해서고 검사는 고현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젠 모든 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필요 없다.임지영이 병원을 나섰다. 어젯밤 폭우로 공기가 맑아졌는데 그녀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환생한 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임지영은 매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힘들었다.임지영은 권세도 돈도 없었고 류하와 고성민도 고씨 가문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어떻게 권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과 싸울 수 있을까?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확인해보니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룸메이트였다.수신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세 명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그제야 이윤지가 입을 열었다.“저기... 지영아, 우리 모두 인턴 회사를 찾았어. 앞으로 숙소에서 떠나야 할 것 같으니 같이 밥이라도 먹고 싶은데... 저기, 너... 바쁘면 안 와도 돼.”“너 말할 줄도 몰라? 이건 오지 말라는 뜻으로 들리잖아?”전영미의 목소리였다.“지영아, 그게 아니라 난 네가...”
“아니면 날 꼬집어 볼래?”임지영이 갈비를 뜯으며 말했다. 김지민이 손을 내밀자 이윤지가 그녀의 손을 때렸다.“지영아, 와줘서 고마워. 예전에 우리 기숙사는 늘 사람이 부족해서 다른 기숙사가 부러웠거든.”“그래. 왜인지 넌 항상 심유나와 함께 있었어. 그년은... 아이고.”“아무것도 아니야. 많이 먹어.”전영미가 환하게 웃으며 갈비를 집어주었다.그들을 보며 임지영이 피식 웃었다.“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오히려 난 너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왜? 왜 그래?”순진한 김지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오랫동안 사람을 잘못 믿었는데도 날 불러줘서 고마워.”‘그리고 전생에 도와줘서 고마워.’“지금이라도 잘 보면 돼. 심유나가 너의 열쇠를 맞추었고 네가 없을 때 자주 우리 기숙사에 왔어. 너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니 우리도 뭐라 말할 수 없었어.”“참, 항상 심유나는 너의 앞에서 불쌍한 척 가난한 척했어. 우리가 일깨워주었는데도 넌 우리가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고 했거든. 실은 심유나는 배후에서 네가 심부름을 시키고 가난하다고 놀려주었다고 소문내어 다들 너랑 접촉하는 걸 꺼려해. 우리는 같은 기숙사니 네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지켜봤잖아. 넌 집에서 가져온 좋은 물건을 거의 다 심유나에게 주다시피 했어.”김지민이 점점 더 흥분하는 전영미와 이윤지를 말렸다.“그만해.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화가 나서 배가 부를 것 같아.”김지민은 임지영에게 메뉴를 건넸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시켜.”“그래.”메뉴를 열어봐도 식욕이 없었던 임지영은 술을 마시자고 말했다.“좋아.”곧 한 사람이 맥주 두 캔씩 주문했는데 양이 많지도 적지도 않아 좋았다. 하지만 마시면서 술을 더 주문하게 되자 결국엔 모두 취할 듯 말듯 비몽사몽에 처해있었다.머리를 받쳐 들고 마음속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임지영은 전영미의 어깨에 기댔다.“넌 고향으로 돌아가지 마. 네가 이 도시에 남고 싶어 하는 걸 알아.”전영미가 흠칫 놀라 물었다.
임지영은 이윤지를 바라봤다.이윤지는 당황해하며 물었다.“나, 나도 안돼?”임지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너, 네 마음대로 해.”테이블에 머리를 떨군 채 취해버린 임지영을 보며 세 룸메이트는 피식 웃었다.“난 지영이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줄 몰랐어.”“심유나가 아니라면 우리 학교의 여신이 어떻게 송연아가 될 수 있겠어?”“어머, 거의 8시 반이야.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세 사람은 임지영을 부축하고 기분 좋게 기숙사로 돌아갔다. 완전히 취하지 않은 임지영은 룸메이트에게 기대며 의외로 편안함을 느꼈다.네 사람은 취했지만 오히려 웃고 떠들며 즐겁게 돌아갔다.가을바람마저도 따듯하게 느껴졌는데 이때 김지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와, 예쁜 하늘이야.”나머지 세 사람도 나란히 서서 하늘을 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맑아 달빛이 환하고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나뭇가지 사이로 달과 별을 바라보던 임지영은 전생의 딸 별이가 생각났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두 별은 눈과 같았고 그 밑에 있는 달은 입 같았는데 마치 별이가 하늘에서 방긋 웃는 것 같았다.“엄마, 엄마... 엄마, 다음 생이 있으면 꼭 자신의 꿈을 잃으면 안 돼요. 저를 위해서 꿈을 포기하는 것도 안 돼요. 저는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나뭇잎이 마침 임지영의 얼굴에 떨어져 그녀의 그리움에 젖은 눈물을 닦아주었다.그런 후 임지영은 웃었다. 그 웃음은 밤하늘의 별들이 무색할 정도로 예뻤다.‘별아, 엄마는 널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갑자기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임지영은 밤하늘의 경치를 보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세 룸메이트도 나란히 서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뭘 보지?”“몰라.”“난 목디스크가 올 것 같아.”“푸흡...”임지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네 명은 함께 웃었다.한 사람이 바보가 되면 함께 바보짓을 하는 이것이야말로 대학교 생활의 즐거움이었다.임지영은 마지막에야 이것을 깨달았지만 이렇게 좋은
임지영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당연히 널 용서해. 너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또 널 믿어.”얼굴에 술기운을 띠고 웃는 모습은 온화하고 거짓이 없어 보였다.심유나도 힘껏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쌀쌀하게 웃었다.‘바보, 작은 선심을 지금까지 기억하다니! 속아도 싸!’심유나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지영아, 너 공모전을 포기했다며? 괜찮아, 성실하게 일자리를 찾으면 돼. 승부욕은 쓸모없어.”“유나야, 나의 좋은 친구로서 날 격려해 줘야지 않아?”“나... 난 네가 부담스러울까 봐 말한 거야. 다른 뜻은 없었어.”심유나가 얼버무렸다.“응. 공모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디자인 원고를 누가 건드린 것 같아. 너는 내 숙소 열쇠를 갖고 있지?”임지영이 넌지시 물었다.심유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나를 의심하는 거야? 우린 오랜 친구이고 또 너의 룸메이트들이 널 겨냥할 때마다 항상 내가 곁에서 지켜주고 지켜줬어. 그들이 한 짓이 아닐까?”“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원래 열쇠를 함부로 복제하는 게 아니야. 그들을 말하지 마. 그러다가 화가 나서 널 고발하면 어떻게 해? 졸업이 코앞인데 안 좃은 기록을 남길래?”“난 그런 뜻이 아니야.”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깔보던 심유나는 임지영의 말을 듣자 말을 더듬거렸다.“그럼 열쇠를 돌려줘. 내가 애들 앞에서 폐기할게. 그러면 애들은 분명히 널 말할 수 없을 거야.”임지영이 손을 내밀자 심유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길까 봐 두려워 열쇠를 건네주었다.임지영은 열쇠를 받은 후 술에 취한 척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난 디자인 초안이 없어졌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난 망했어...”임지영을 부축한 심유나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졌는데 그녀를 기숙사로 돌려보낸 후 곧 돌아갔다. 심유나가 가자마자 임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열쇠를 룸메이트들에게 주어 폐기하게 했다.그런 후 임지영은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새벽 세 시가
임지영을 사랑하는 류하와 고성민이 이 소식을 알고 준비해줄까 봐 일부러 공모전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인데 바로 고우진이다.어제 고우진은 특별히 전화해서 응원했는데 오늘은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줬다.룸메이트들이 박스를 열어보니 안에는 자줏빛을 띤 실크 롱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가슴 부분에는 수제로 구슬을 박았는데 크기가 들쭉날쭉한 구슬들이 조명 아래에서 영롱하고 은은한 광택을 보였다.허리부터 아래까지는 두 겹의 엷은 실크로 만들어졌는데 옅은 색과 짙은 색을 오묘하게 결합해 몽환적인 색상을 표현했다.“와, 이 드레스는 기숙사의 조명에서도 이렇게 빛나는데 무대에 서면 얼마나... 반짝일까?”김지민이 개그맨처럼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웃을 시간이 없어. 빨리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해야 해.”“...”한 시간 후, 치장을 마친 임지영은 인형처럼 룸메이트들에게 보였다.“너무 예뻐. 지영아, 여자인 나도 너에게 반할 것 같아.”“지영아, 하이팅. 넌 우리 과에서 1등이야.”“지영아, 우린 널 믿어.”임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걸치고 출발했다.룸메이트들은 현장에 가고 싶었지만 갓 인턴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도저히 휴가를 낼 수 없었다.하지만 그들의 격려를 받은 임지영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40분 후에 공모회장에 도착했다.이번 신인 디자인 공모전에서 한 심사위원은 국내에서 이름난 디자이너인데 그녀의 스튜디오는 국내외에서 매우 유명했다.이번 공모전에서 1등 하면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은 햇병아리가 대선배에게 직접 배울 기회이니 일반 인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이번 공모전은 크게 열렸고 기자도 유달리 많았다이때 송연아와 고현이 인터뷰를 받고 있었다.송윤아는 큐빅이 박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고현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도도한 공주 같았다.늘씬한 고현은 여전히 검은색 양복을 입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준수했
규정에 따르면 화장장에서 가족은 화장 과정을 볼 수 없다.임지영은 돈을 들여 차가운 철침대를 짚고 화장터로 들어갔다.공기 중에는 뜨거운 기운이 맴돌았고 햇빛에 재가 날리는 것도 보였는데 어쩌면 유골일지도 모른다.곧 그녀의 아이도 이렇게 될 것이다.임지영은 블랙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초췌한 몸매를 감추지 못했다.빨갛게 부어오른 두 눈은 지금 이 순간 유난히 차분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흰 천 아래의 창백하고 뻣뻣한 작은 손을 만져보고 딸의 손에 분홍색 종이로 접은 별을 두 개 넣었다.“별아, 엄마 기다려.”시간이 되었다.화장장 직원이 다가가 임지영을 밀어내고 흰 천을 들치자 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여덟 살이 됐는데도 앙상하게 여위어 있었고 뚜렷한 갈비뼈 아랫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다.움푹 팬 곳을 노려보는 임지영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가 별이를 잘 지켜내지 못했다.화장장 직원들이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적어도 따님이 떠난 후 신장을 남겨 다른 아이를 구했잖아요. 그 아이가 따님을 대신해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임지영의 눈 밑에 냉기가 감돌더니 피식 비웃었다.“그럼요. 그 아이는 제 남편의 사생아이고 지금 세 식구가 그 아이를 위해 성대한 생일파티를 벌이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은 내 딸의 생일이기도 해요.”직원들은 멍해져서 눈앞의 이 절망적인 여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임지영은 별이를 바라보며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태워요. 좋은 시기를 그르치지 말고. 내 딸이 다음 생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어요.”직원들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고개를 저으며 시신을 소각로 앞에 내려보냈다.동정심 때문인지 직원은 그 과정을 가렸다.별이가 아픔에서 해탈되었다는 생각에 임지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더는 별이의 아버지에게 매일 미움을 받을 필요도 없다.“엄마, 아빠는 왜 날 안 좋아해요?”“엄마, 아빠는 왜 연아 이모의 아들을 좋아하죠?”“엄마, 아빠는 나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