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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임지영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튀어나오려고 하던 찰나 고현이 고개를 돌려 나무 뒤에 있는 커플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싸늘한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고현임을 알아본 커플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저희는 바로 가겠습니다.”

이 커플이 빠른 걸음으로 떠나자 임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현을 밀쳤지만 오히려 손목이 잡혔다.

“짐을 챙겨 나와. 진성이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널 아파트까지 데려다줄 거야.”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의논할 여지 없는 명령 어조였다. 몸이 굳어진 임지영은 긴 속눈썹을 떨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삼촌의 마음속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말을 잘 듣는 인형만 원할 뿐인데 말을 잘 들을수록 마음대로 갖고 놀다가 함부로 버릴 뿐이야.’

임지영은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품속에서 벗어났다.

“그럴 필요 없어요. 만약 걱정 된다면 한 달 후에 병원에서 검사할 수 있어요.”

임지영이 반항할 줄 생각지도 못했던 고현은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눈 밑에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분위기가 얼음처럼 굳어질 무렵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마침 송연아가 걸어온 전화였다.

임지영은 이 틈을 타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차분하게 말했다.

“삼촌, 먼저 일 보세요. 저는 그만 갈게요”

미련 없이 돌아서는 임지영을 보고 고현의 그윽한 눈빛은 그녀의 뒷모습에 고정된 것처럼 변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한참을 울려서야 고현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고현 씨,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무서워요.”

송연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갈게.”

고현이 떠나는 낌새를 눈치챈 임지영은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황급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였다.

‘삼촌을 이렇게 조급하게 만드는 건 송연아뿐이야.’

임지영은 쌀쌀하게 웃으며 떠나갔다.

한편.

송연아는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앞에서 지나가는 커플의 대화를 들었다.

“대표님이 이렇게 마음이 급한 줄 몰랐어. 수림에서 막... 하지만 그 여자가 누구일까? 그렇게 지켜줄줄 생각지도 못했어.”

“누구긴 누구겠어? 당연히 송연아겠지.”

그들의 뒤에 선 송연아는 대뜸 고현과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임지영이 틀림없어. 하룻밤 사이에 임지영의 성격이 크게 변했고 어쩐지 고현 씨도 변한 것 같았어.’

송연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

기숙사.

졸업을 앞두고 건물 전체가 휑뎅그렁해 보였다.

임지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원고를 꺼냈다. 전생에 고현은 이 원고들을 모두 암암리에 송연아에게 선물했는데 그 덕분에 송연아는 유명세를 치르며 핫한 보석 디자이너로 떠올랐다,

8년 후 송연아가 귀국한 후 임지영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을 때야 그녀는 비로소 이 참혹한 진실을 알게 됐다.

“그때 나를 너무 사랑한 고현 씨는 너의 원고를 주며 나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어. 쌤통이야. 8년 동안 그와 함께 자며 아이도 가졌지만 그이는 여전히 널 싫어하지? 넌 참 비천해.”

그때 이 말을 들은 임지영은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고현은 송연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디자인 원고를 또 송연아에게 줬다.

덕분에 임지영의 꿈은 두 번이나 깨졌다.

‘이번엔... 누구도 내 것을 빼앗을 생각하지 마.’

“지영아, 너 뭐해?”

심유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곧 졸업하게 되니 캐비넷을 정리했을 뿐이야.”

임지영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다시 캐비넷을 잠갔다. 뒤돌아서 보니 심유나가 그녀의 캐비넷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임지영은 못 본 척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았어?”

심유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지난번 일로 사과할 겸 밥을 사고 싶었어.”

이 말을 들은 임지영은 그녀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인형 열쇠고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좋은 친구니까 이런 일로 신경 쓰지 마. 그럼 예전에 자주 갔던 식당 3층에 있는 떡볶이집으로 가.”

이 말을 들은 심유나는 기뻐하며 임지영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두 눈은 반달 모양으로 기뻐하듯 생글거렸으나 눈빛에는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아마 임지영을 속이기 쉽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임지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마침 류하가 걸려온 전화였다.

임지영은 심유나를 피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지영아, 좋은 소식을 알려줄게. 아저씨의 손님 중에 한 분이 아들이 있는데 방금 외국에서 돌아왔어. 잘 생기고 재능도 있는데 중요한 건 집안 형편도 좋아. 내일 그 사람이랑 밥을 먹으면서 만나봐.”

류하가 흥분해 하며 말했다.

“엄마, 저는 이제 갓 졸업해서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어요.”

“지영아, 엄마가 대신 사진을 봤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저씨와 협력하고 있어 집안 사정도 잘 아는 편이니 네가 시집가도 시름을 놓을 수 있어. 인터넷에 퍼진 일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내 마음은 하루도 편하지 않았어.”

류하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는데 임지영은 선을 꼭 봐야 한다는 기미를 알아챘다.

“알았어요.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니 부지런히 문자를 보내는 심유나가 보였는데 그녀의 표정이 좀 이상해 보였다.

“유나야, 너 아주 바빠?”

심유나는 곧 휴대전화를 넣으며 설명했다.

“인턴을 해야겠는데 난 너처럼 공모전에 참가할 능력이 안 되어 여러 군데에 이력서를 보냈어. 마침 HR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야.”

“알았어. 가자.”

임지영은 더는 묻지 않고 앞으로 걸었는데 마침 심유나가 다가와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공모전이 곧 시작인데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봤어?”

임지영은 심유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이미 디자인을 끝냈어. 꼭 잘 될 거야.”

“그래?”

심유나는 손가락을 꼬며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저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난 4년을 힘들게 공부했는데도 디자인에 대한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심유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불쌍한 척 말했다.

예전 같으면 임지영은 그녀를 위로했겠지만 지금은 말을 하는 것조차 낭비라고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앞으로 더 노력하면 돼.”

표정이 굳어진 심유나는 입술을 깨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고 난 후 임지영이 말했다.

“내일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하니 너와 함께 밥 먹을 수 없어.”

심유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알았어.”

...

다음 날 아침.

룸메이트는 일찍 면접하러 갔고 오직 임지영만 자고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류하가 아침을 들고 밖에 서 있었다.

“아직도 자? 시간이 언제인데 빨리 깨나서 치장해야지.”

“9시에요.”

어제 밤새 디자인 그림을 그린 임지영은 맥이 풀려 그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을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류하는 애꿎은 눈길로 임지영을 바라보며 그녀를 끌고 화장실에 가서 씻어주었는데 손바닥만 한 화장실을 보고는 몹시 꺼리였다.

“기숙사를 나와 밖에서 오피스텔을 잡으라고 했는데 기어코 손바닥만 한 기숙사에 있어.”

“엄마, 경성의 오피스텔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요? 내가 돈 많은 남자를 꼬셨다는 루머에 휩싸이게 할 예정이세요?”

임지영이 천천히 말했으나 그녀의 속셈을 꿰뚫어 본 류하가 반박했다.

“나와 시간을 끄는 거야?”

임지영은 입을 꾹 다물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류하는 임지영이 치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만족한 후에야 그녀를 데리고 교문을 나섰다.

“둘째 사모님, 이쪽입니다.”

시원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에 익숙하지 않은 임지영은 발을 헛디뎠지만 다행히 맞은 편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

임지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비아냥거리는 시선이 몸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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