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는 곧 올 거라고 했지만 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갔다.여준재가 도착했을 때쯤, 유라는 병실 침대에 앉은 채 링거를 꽂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한편 고다정은 그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의학책을 보고 있었다.그러다가 문 쪽의 인기척을 들은 그 둘은 바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준재 씨, 왔어요?”“준재야, 왔어?”여준재를 보자마자 그 둘은 똑같은 말을 내뱉었지만, 그는 가장 먼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다정의 말에 답했다.“수고 많았어요.”“아니에요. 밥 먹었어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끼니를 걱정했다.그녀는 여준재가 바쁜 업무처리로 2시가 다 되어서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을까 봐 물은 것이었고, 여준재 또한 2시가 다 되어서까지 확실히 점심을 먹지 못했다.이윽고 여준재가 살짝 멋쩍어하며 답했다.“회의 끝나고 바로 왔어요.”그 말에 고다정은 그를 흘겨보며 그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유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다정 씨, 준재 약혼녀라면서 여기서 멍하니 뭐해요? 아무것도 안 먹었다잖아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고다정이 어떤 표정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여준재를 향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예전에 우리가 했던 농담이 아마 사실로 받아질 것 같네? 앞으로 나 진짜 너에게 의지해야 할 것 같아.”유라는 불쌍한 표정으로 여준 재를 바라봤다.고다정은 갑자기 확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표정을 숨기며 표정 관리를 했다.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다정이 아무 말 없이 쿨하게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것 또한 여준재가 자신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는걸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편, 여준재는 유라에게 했었던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예전에 그 둘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위험한 상황에서 둘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늙어서까지 보살펴주겠다고 말이다.게다가 지금의 유라는 여준
자기 약혼녀의 목소리를 들은 여준재는 자연스레 고다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유라 맞은 켠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제야 조금 전에 그들이 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알려주었다.“보상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둘이서 얘기 잘됐어요?”고다정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여준재는 유라를 힐끗 보더니 조금 전 언급했던 조건을 다시 한번 말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 조건 어떤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그 자리에서 처음 들은 척 웃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좋은 것 같은데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유라 쪽을 한번 바라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준이와 하윤이는 모두 착한 아이들이고, 책임감도 있어요. 만약 유라 씨가 자기들 아빠 구한 거 알면 유라 씨를 엄청 존경할 거예요.”‘누가 그딴 아이들 존경 받고 싶대!’유라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그러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나 힘들어서 좀 쉬어야겠네.”“그럼 푹 쉬어. 만약 어디 불편하면 도우미더러 진현준 의사 선생님 부르라고 할게.”여준재는 유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보고 그녀에게 몇 마디 당부 후, 고다정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둘이 다정한 모습으로 병실 문을 나가는 모습을 본 유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마음속으로 억눌렀던 질투심이 이성을 지배하는듯한 느낌이었다.그녀는 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 놓인 베개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왜, 왜? 내가 이렇게나 많은 걸 했는데도, 왜 나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여준재, 넌 내꺼야. 내꺼라고! 난 절대로 너 포기 못 해!”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떠난 고다정과 여준재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한편, 그 둘은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식당으로 가는 길, 여준재는 고다정의 손을 잡은 채 미안해하며 말했다.“두 아이 일에 대해 제가 혼자 결정해서 기분 안
‘똑똑’——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유라는 자신의 용모를 다시 한번 체크 후 이번에는 머리와 옷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답했다.“들어오세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준재와 고다정이 문을 밀며 들어왔다.그리고 그들 뒤에는 심해영과 여진성 부부,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두 아이가 서 있었다.“유라야, 여기 우리 엄마와 아빠셔. 네가 날 구해준 거에 대해 엄청 고마워하면서 인사하러 왔어.”여준재는 자기의 부모님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심해영과 여진성은 침대에 앉아있는 외국 여성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은 밖에서 여준재와 호형호제할 수 있다고 하여 당연히 우람하게 생긴 남성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교하게 생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말이다.“유라 씨, 우리 준재 구해줘서 고마워요. 이건 저희의 작은 마음이니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준재를 구한 그 은혜는 이런 물질적인 거로 대체할 수 없다는 거 저희도 잘 알고 있고요.”심해영은 준비한 선물을 침대 옆에 올려놓으며 말했고, 두 아이도 고마운 듯 유라를 바라보며 귀엽게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희 아빠 구해줘서 고마워요. 만약 아줌마가 없었다면 저와 제 동생 모두 아빠를 잃을뻔했어요.”“앞으로 아줌마는 우리의 엄마와 양엄마 외에도 하윤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줌마일 거예요.”하윤이도 그 옆에서 귀여운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하지만 두 아이의 말은 유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미니 버전인 여준재와 고다정을 보며 유라의 입가 미소 또한 많이 옅어졌다.하지만 여준재와 그의 부모님 앞에서 두 아이를 싫어하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너희들 마음 아줌마도 충분히 느꼈어. 그리고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준재를 구하는 건 아줌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유라는 여준재가 두 아이의 아빠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 일부러 그와 관련된 호칭을 피해가며 이야기했다.거기에 대해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다정만 그 말에서 이상함을
고다정의 그 말에 심해영과 여진성도 둘 다 흐뭇해했다.“어쨌든 네가 고생이 많다. 우리도 시간을 내 아이들 돌봐줄게.”심해영이 고다정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녀는 여준재의 어머니로서 모든 책임을 미래의 며느리한테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났고, 유라가 회복하는 동안 고다정은 그녀의 의사와 요양사를 도맡아 하였다.심해영도 매일같이 찾아와 고다정을 도와주었고, 유라와 이야기도 나눴지만, 더 많은 날은 두 아이를 돌봐주는 데 쓰곤 했다.한편 여준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빴고, 회사의 잔업 업무와 해외에서 확보한 산업도 통합해야 했다.여기서 그래도 가장 한가한 사람은 강말숙이였다.심지어 성시원도 매일같이 병원에 가서 채성휘를 치료했고, 오후에는 연구소로 가서 일을 봐야 했다.어쨌든 고다정이 잠깐은 그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말이다.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다.유라의 상처도 많이 좋아졌고, 이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걸어 다닐 수 있게 된 후로 그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매일 아래로 내려가 모두와 함께 식사하곤 했다.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일 방에 있는 날들도 지쳤을 뿐만 아니라, 아래층에서의 웃음소리에 낄 수 없다는 사실이 짜증 났기 때문이다.특히 저녁쯤, 가끔 화원에서 들려오는 여준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녀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소리였다.매번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행여나 자신이 늦게 행동할까 봐 두려웠다.하여 그녀는 빠른 시일 내에 여기에 적응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받아줄 수 있기를 바랬다.물론 고다정은 그녀의 그런 속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거기에 대해 비록 불쾌하긴 했지만, 고다정도 정신을 차리고 그와 맞서려 했다.어쨌든 현재 여준재를 굳게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유라가 움직이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말이다.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심해영은 집으로 돌아갔다.고다정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라의 그 고민에 대해서 고다정은 안다고 해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이윽고 그녀는 여준재와 함께 화원을 산책하고 있었고,두 아이도 그들 옆에서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이런 조용하고 아늑한 화면은 고다정에게 있어 엄청 소중한 것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여준재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는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여준재 또한 그런 그녀의 눈빛을 즐기고 있었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웃어 보였다.“왜 그렇게 봐요?”“그냥 보고 싶어서요.”고다정은 달콤한 미소를 지은 채 눈썹을 치켜세우며 하윤이처럼 행동했다.“왜요? 보면 안 돼요?”여준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채 크게 웃어 보였다.“그럴 리가요. 보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봐요.”“으윽——”두 아이는 닭살 돋은 엄마와 아빠의 대화에 이상한 소리를 내어 보였다.그 소리에 고다정과 여준재가 아이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니, 두 아이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왜 그래?”그 둘은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손을 들어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자 두 아이는 각자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그 둘의 손에서 탈출한 채 그럴듯하게 말했다.“누가 엄마와 아빠더러 저희를 나쁘게 가르치래요? 사랑을 속삭이려면 우리 좀 피해서 하지. 휴, 이것 좀 봐요. 이렇게 어린 우리가 철까지 들었다는 건 쉽지 않은 건데.”고다정과 여준재는 그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면서 어이가 없어 웃어 보였다.그렇게 그들 한 가족은 화원에서 서로 쫓고 쫓기며 즐겁게 장난을 쳤다.한편, 3층 창문 옆에서 유라가 음울한 눈빛으로 뛰어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손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있는 힘껏 커튼을 꽉 잡았다.‘왜? 왜 고다정 저 여자는 여준재의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거야? 둘이서 몇 년이나 알고 지냈다고?!’유라는 분노가 점점 차올랐고, 그 눈꼴 사나운 장면을 눈앞에서 깨뜨리고 싶었다.그러다가 그녀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눈을
고다정은 얼마 남지 않은 이성으로 옆에 있는 사용인들에게 분부했다.사용인들은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복도에 서 있던 여준재는 나오는 사용인들을 보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다급히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야?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사모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저희에게 나가라고만 하셨습니다.”사용인은 사실대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여준재도 어리둥절했다.그러나 그는 고다정을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화제를 돌려 사용인들에게 분부했다.“다 내려가 봐. 부엌에 몸보신하는 음식 준비하라고 전해. 그리고 진현준이 도착하면 즉시 위층으로 올려보내.”“네.”사용인들은 여준재의 명령을 받고 떠났다.그러나 방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다정은 사용인들이 나간 후, 더는 참지 못하고 유라의 뺨을 내리쳤다.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내리칠 거라고 생각지 못한 유라는 아연실색했다.“고다정, 너 죽고 싶어?”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응이 온 그녀는 얼굴을 막고 음흉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죽여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고다정은 그녀의 시선에 약간 움찔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고다정은 이내 분노에 휩싸였다.“왜요? 나한테 맞으니까 기분이 나빠요? 살인이 불법행위만 아니었더라면 난 이미 당신을 죽였을 거야.”고다정의 이쁜 입술과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아주 악랄했다.그녀는 너무도 화가 났다.자신과 진현준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녀는 고작 남자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다니. 고다정이 보았을 때, 너무도 어리석은 행위였다.유라는 고다정의 말을 듣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볼 뿐 할 말을 잃었다.고다정은 그녀의 눈빛 변화를 발견하고 말을 이어갔다.“유라 마투린, 난 당신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군요. 상처가 덧나게 하면 준재 씨가 당신을 관심해 줄 것 같아요?”“맞잖아요.”정
아이를 보러 간 고다정은 감정을 잘 숨기느라 했지만 예민한 두 아이는 이상함을 눈치챘다.“엄마, 무슨 일이 있어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엄마, 혹시 아빠가 기분 나쁘게 했어요?”두 아이는 근심 걱정 가득한 눈으로 고다정을 지긋이 쳐다보았다.고다정은 이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빴던 기분도 많이 좋아진 듯했다.그녀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으며 말했다.“엄마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두 아이는 무슨 일인지 말하려 하지 않는 엄마를 보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그들은 이 일을 마음속에 기억해두고 저녁에 아빠에게 엄마와 잘 얘기해 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이어 방에서 고다정의 부드러운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노란 불빛 아래 이 목소리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잠들게 하는 마법이라도 깃들어있는 듯했다.두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다정의 책 읽는 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고다정은 침대에 걸터앉아 잠자고 있는 두 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모성애가 흘러넘쳤다.세 사람을 찾아온 여준재는 이 훈훈한 광경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차마 들어가서 방해하기 싫었다.그렇게 그는 문밖에 서서 부드럽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다정은 여준재가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자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유라에 관한 일을 고민했다.‘쉽지 않은 여자야.’사용하는 수단이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또 임초연보다 훨씬 나았다.적어도 뒤에서 음모를 계획하며 해코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고다정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표정도 따라 쉼 없이 변했다.밖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여준재는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다정은 시간을 확인하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이내 입을 막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힘들게 재운 애들이 또 깨어날 것
여준재는 있었던 일을 간단히 구남준에게 말해줬다.구남준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는 도무지 기뻐해야 할지 우울해야 할지 몰랐다.대표가 자신의 감정 문제를 분석해달라고 그에게 맡긴다는 건 비서인 그에 대한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그는 여준재에게 자신이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모솔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구남준이 속으로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해도 전문가같은 태도로 여준재를 위해 분석하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화를 내시는 게 유라 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모님도 유라 씨 주치의잖습니까. 환자가 자신이 힘들게 구해준 목숨을 아끼지 않는 걸 허용하는 의사는 없을 것입니다. 대표님이 유라 씨 친구라서 불똥이 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대표님께서 유라 씨를 치료해 달라고 사모님께 부탁하셨잖습니까.”“...”여준재는 현재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고다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였다면 그도 화냈을 것이다.여준재는 속으로 이미 해결방법을 생각해두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잘했어. 이번 달 보너스를 더블로 해줄게.”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은 후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물론 그의 행동은 고다정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그러나 고다정은 그를 개의치 않고 누워 자는 척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누군가가 침대 옆에 앉는 걸 느꼈다. 이어 그녀는 따뜻한 품에 안겼다. 머리 위에서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화내지 마요. 유라한테 이미 경고했어요. 몸을 아끼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낸다고.”“그럼... 상처를 찢은 이유는 알려줬어요?”여준재는 그녀를 보며 아까 했던 대화 내용을 말해주고 자신의 평가를 보태었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데 나도 탄복할 정도예요.”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그녀는 유라가 이런 핑계를 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여준재는 그 핑계를 믿은 모양이다.왠지 모르게 그녀는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