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영은 잠깐 강말숙과 얘기를 나눈 후 쌍둥이를 데리러 갔다.병실에는 고다정과 강말숙만 남았다.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외할머니를 보며 속상하고 서글펐다.“외할머니, 저한테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고다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외할머니의 성격으로 볼 때, 마지막에 확진되더라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사실상 그녀는 강말숙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맞혔다.강말숙은 정말 확진되면 숨기고 조용히 치료하려 했다.‘병세가 안정되면 외손녀 곁에서 좀 더 살고, 악화되면... 그건 그때 가서 보지 뭐.’그래서 강말숙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무슨 말? 할 말 없는데.”강말숙은 눈을 깜박거리며 TV만 보았고, 고다정에게 들킬까 봐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고다정은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무력감을 느꼈지만 몰아붙일 생각도 없었다.어쨌든 의사도 아직 확실한 진단을 내린 것이 아니니 확진되면 그때 가서 보자고 생각했다.병실에는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고다정과 강말숙은 사실 둘 다 마음이 무거웠다.다행히 잠시 후 휴대전화 벨소리가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주었다.여준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심해영이 병원을 떠난 후, 여준재에게 연락해 국내에서 발생한 일을 알려줬던 것이다.이때 다정이는 준재가 옆에 있어 주기를 가장 바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준재가 돌아오지 못하면 얘기를 나눠도 좋지 않을까.그리하여 방금의 광경이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고다정은 휴대전화를 이내 받지 않았다.그녀는 자기가 여준재의 목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을 알았다.그 말들을 외할머니가 들으면 안 된다.“외할머니, 저 나가서 전화 받을게요.”그러고 나서 고다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병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 있는 베란다로 갔다.큰 베란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다정은 석양을 보면서 전화를 받았고, 귓가에 미안해하는 여준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요.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미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간단히 씻은 후 고다정은 거울 속에서 울었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외할머니가 계시는 병실로 돌아갔다.언제 왔는지 준이, 윤이가 외할머니를 둘러싸고 살갑게 보살피고 있었다.심해영이 옆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고다정은 심해영 곁에 다가가 감사를 표시했다.“감사해요, 어머님.”“얘는 참, 가족끼리 무슨 그렇게 예의를 차리니?”심해영은 짐짓 불만스러운 듯 그녀를 노려보다가 다시 두 아이의 재롱에 즐거워하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어르신이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면 상황도 나쁘지 않을 거야. 의학계에 긍정 치료라는 말도 있잖아. 앞으로 틈만 나면 두 아이가 어르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줘. 기분이 좋아지면 병세도 호전될 수도 있잖아.”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한편, 고씨 저택에서 고경영과 심여진은 경찰서에서 돌아온 후 냉전이 시작됐다.한 사람은 뭐 하는지 서재에 박혀 있고, 한 사람은 침실에 돌아간 후 고다빈에게 전화해 울며불며 하소연했다.“다빈아, 네 아버지가 나에게 죄를 덮어씌워 감옥에 보내려 하고 있어. 너무 모질어.”“아버지는 모든 걸 알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모른 척했던 거예요?”고다빈은 고경영이 자기와 심여진이 강수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다고 들은 때부터 충격과 공포에 빠져 그 생각만 했다.심여진은 계속 하소연했다.“다빈아, 나 어떡하면 좋아? 이번에는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지만 고다정 그년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캐고 다닐 것 같아. 그년이 조그마한 증거라도 찾으면 나는 끝장이야.”“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엄마, 진정해요. 스스로 겁먹지 말고.”정신이 돌아온 고다빈은 엄마의 말투가 이미 멘붕 상태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고 급히 소리쳤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고다정이 이미 자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고씨 집안 사람들을 회유해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심여진에게 경고했다.“앞으로 집
하지만 진시목은 고다빈의 말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앉아있었다.고다빈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시목, 내 말 못 들었어요? 내려요!”그녀가 이렇게 단호히 진시목을 떼놓으려는 원인은, 진시목이 갔다가 부모님이 싸우면서 내뱉는 무슨 큰일날 말이라도 들을까 봐 걱정돼서였다.이 남자는 워낙 고씨 집안에 바라는 게 있는데, 집안 비밀까지 알게 된다면 역으로 이용해 고씨 집안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비한 인물이 그녀를 뒤에서 돕는다 해도 이 남자는 반드시 그녀를 버릴 것이다.그녀의 생각을 진시목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왜? 내가 가는 게 겁나?”“겁날 게 뭐가 있어요? 우리는 조만간 이혼할 것이고, 지금은 잠시 이익 때문에 같이 있는 것이니 고씨 집안일에 신경 꺼주세요.”고다빈은 이 남자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직설적으로 분명히 말했다.그래도 진시목은 여전히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더 편안한 자세로 바꾼 후 상반신을 등받이에 기대고 차분하게 말했다.“내 손에 너희 GS그룹 주식이 있다는 걸 잊었어. 장인, 장모가 이혼하는 건 고씨 가문의 집안일인 동시에 회사 일이기도 해. 나는 이사회 대표로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안 그래?”“...”고다빈은 철저히 할 말을 잃었고, 속으로 ‘될 대로 되라지’ 했다.‘시간을 끌자는 거 아닌가? 그럼 그렇게 하지 뭐.”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었는지 진시목이 천천히 말했다.“너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다가 장인, 장모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지 않아? 내가 아는 장인어른은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닌데.”“비열하고 치사한 놈!”고다빈은 참다못해 한마디 욕한 후 결국 엄마가 걱정돼서 차에 시동을 걸어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 반 뒤였다.집에 들어서니 난잡하게 어질러진 거실을 가정부들이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주변에서 가정부들의 소리만 들리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환한 병실에 심여진 모녀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고경영만이 남아 있다.심여진은 오늘따라 상심 가득한 딸을 보며 비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비통함보다 더한 것은 미안함이었다.“다 내가 진시목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탓이야. 그 정도로 위선자일 줄은 나도 몰랐다.”그녀는 악에 받쳐 욕을 퍼부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천한 고다정 그년을 시집보낼걸!”고다빈이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말을 뱉지 않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병실 문을 닫은 뒤, 다소 언짢은 말투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아빠는 이혼하시겠다는데, 어쩌시려고요?”“난 절대 이혼 안 해.”고다빈의 말이 끝나기에 바쁘게 심여진이 딱 잘라 말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고 빈털터리로 재산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면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고다빈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엄마가 이혼하지 않겠다 해도 아빠가 밀어붙이면요? 만약 강수지의 일로 협박하면요?”“...”딸의 끈질긴 질문에 심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동시에 악랄한 생각이 떠올랐다.고경영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그럼 이혼할 필요도 없고, 회사로 이윤을 얻지 못하더라도 회사를 팔아버리면 그녀가 한평생 풍족하게 먹고살 재산은 될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얼른 도리머리를 쳤다.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이미 심여진의 손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고다정 그 천한 것이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하필 이 타이밍에 고경영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꼬리를 잡힐 것이다.심여진은 어쩔 수 없이 잠깐 들었던 악독한 생각을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그녀는 딸을 응시하며 물었다.“그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고다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그녀는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담담히 말했다.“이미 생각이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의사는 자신이 초보적으로 세워놓았던 항암치료에 관한 계획을 하나하나 읊었다.“초기니까 화학요법 없이 우선 약으로 통제가 되는지 볼 거예요. 그리고 만약 여건이 된다면 사모님께서 직접 M 국 특효약을 구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쪽 약이 국내 약보다 억제 효과가 좋아요.”“특효약이요?”고다정이 눈을 내리깔며 낮게 중얼거렸다.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약인데 다행히도 우리 병원과 M 국이 협력관계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병원에서 마침 예약 인원을 통계 중이니, 사모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제가 몇 가지 약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그럼 세 가지 치료 과정의 약을 예약 부탁드릴게요.”고다정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비록 그녀도 특효약을 만들 수 있지만 지금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그러나 의사는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그는 고다정의 확답을 받은 후 서랍에서 신청서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예약 신청서예요. 여기 서명하면 됩니다. 매 치료 과정의 약값은 1억이고, 세 개 치료 과정이면 총 3억이에요. 우선 절반 금액을 지불하시면 됩니다.”“알겠어요. 그럼 이따 가서 낼게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신청서에 서명했다. 이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비용을 지불했다.그녀가 진료실을 떠난 뒤, 뜻밖에도 강말숙이 뒤이어 찾아왔다.복도 모퉁이에서 사라져가는 외손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말숙은 입가에 쓴 미소를 띠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형편없는 연기로는 총명한 손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그녀는 문을 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녀를 보고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할머니 어쩌다 오셨어요?”“검사 결과를 물으러 왔죠.”강말숙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그녀의 말에 의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조금 전 고다정이 진료실을 떠나면서 할머니껜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기회를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찾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할머니께서 뇌암에 관한 얘기를 할 것을 아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그녀가 옆자리에 앉자 할머니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이 며칠간 내 거짓말에 장단 맞춰주느라 고생했어.”“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고다정이 무의식적으로 할머니를 만류했다.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더니 말을 이었다.“널 탓하려는 것은 아니고. 네가 내 부담을 덜려고 그런 거 알아. 내가 의사를 찾아갔던 것을 알고 있지?”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고다정은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할머니를 타이르듯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도 뇌암이라고는 하지만 초기라 통제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화학요법도 아니라 약만 쓰면 된다고 했어요.”“알지. 알지.”할머니는 손녀의 손을 잡고 다정히 손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의사가 다 알려줬어. 내가 협조만 잘하면 10년은 더 산다고. 나는 10년은 바라지도 않아. 너랑 준재가 결혼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 그래야 나도 죽어서 네 엄마 볼 낯이 있지.”할머니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고다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할머니를 끌어안았다.“안 돼요. 할머니는 오래오래 저랑 살아야죠! 이제 가족이라곤 할머니밖에 없는데!”말끝에 고다정이 점점 울먹였다.할머니는 손녀를 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얘가, 참! 이렇게 컸는데 아직도 할머니 앞에서 훌쩍이네?”“얼마나 크든 할머니 앞에서 전 아기라고요!”고다정의 울적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손녀의 말에 할머니는 얼굴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그녀는 아직 품에 안겨있는 손녀를 바라보며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말투에 손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있었다.“그래. 그래. 넌 내 앞에서 영원히 아기야. 그러니까 울지 말고.”몇 분이 지나서야 고다정은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 품에서 나왔다. 그녀는 굳게 결심한 듯 할머니를 응시했다.“전 꼭 할머니가 오래오래 백 살까지 살게 할 거예요!”“백 살까지 사는 건 늙은 요괴 아니냐. 난 요괴는 싫다
처음 들어온 업자가 침을 퉤 뱉더니 고경영을 향해 걸어오며 흉악하게 말했다.“우리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지난번 6개월의 기간을 늘린 건 네가 오늘 반드시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 돈을 갚든지, 회사를 담보로 내놓든지, 그것도 싫다면 목숨을 내놓든지.”마지막 한마디는 고경영의 멱살을 잡고 하는 살기 가득한 말이었다.고경영은 겁에 질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업자가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을 것이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말, 말로 합시다. 돈은 꼭 갚을 겁니다.”남자가 고경영을 몇 초간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그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버리더니 그를 위아래로 비웃듯 훑어보며 말했다.“갚으면 돼. 계좌이체? 아니면 현금?”“...”앞으로 내민 그의 손을 보며 고경영은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업자는 결코 참을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경영이 한동안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말을 하라고. 설마 잡아떼려는 거 아니지?”“제,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고경영이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이에 남자가 호통쳤다.“그럼 빨리 돈이나 내. 나 바쁜 몸이야.”“그... 우선 급해하지 마시고. 일단 제가 형님께 전화 드려 볼게요.”고경영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동시에 남자의 표정을 관찰하며 눈치를 보았다.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해서 뭐 하려고?”“돈이 아직 많이 모자라서요... 형님께서 동의하시면 다른 물건이라도 담보로 내놓으려고요... 아!”아무런 준비도 없이 업자의 발에 배를 걷어차인 고경영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배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그리고 이 모습에 소파 뒤에 숨어있던 재무 책임자와 비서도 깜짝 놀라 비
업자와 다른 건달들을 떠나보낸 고경영은 허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이때 숨어있던 재무팀 책임자와 비서가 나왔다.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고경영을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경영도 예상했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가세요. 다 가.”이에 재무 책임자와 비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밀린 월급마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이미 고경영에게 돈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곧 넓은 면적의 사무실에 고경영 한 사람만 남았다.그는 허망하게 사무실 내부를 보았다. 눈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다.그는 자신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년까지도 회사는 분명 시끌벅적하고 번창했는데.그가 주저앉은 채로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 고심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심여진이 걸어온 전화였다.그는 화면을 힐끗 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 그는 심여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여진은 끊임없이 연락했다. 그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이 계속 전화할 태세였다.결국 짜증이 난 그가 휴대폰을 벽 쪽으로 던져버렸고 휴대폰은 부서져 버렸다.드디어 세상이 고요해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요함은 얼마 가지 못하고 깨져버렸다.20분도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나타난 심여진은 화난 모습으로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왔고 곧이어 주저앉아 있는 고경영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너무 화난 탓에 고경영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고경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화를 냈다.“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요? 우리 집에서 쫓겨난 거 알아요? 우리 짐들 다 밖에 버려졌다고요!”고경영은 대답이 없었다.심여진은 고개를 숙인 남자를 보며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지금 당신이랑 말하고 있잖아요. 들었어요? 우리 집이 사라졌...”사라졌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경영이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옆으로 엎어졌다.바닥에 쓰러진 고경영이 마침내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꼭 감은 두 눈에 얼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