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영은 잠깐 강말숙과 얘기를 나눈 후 쌍둥이를 데리러 갔다.병실에는 고다정과 강말숙만 남았다.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외할머니를 보며 속상하고 서글펐다.“외할머니, 저한테 하실 말씀이 없으세요?”고다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외할머니의 성격으로 볼 때, 마지막에 확진되더라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사실상 그녀는 강말숙의 생각을 정확히 알아맞혔다.강말숙은 정말 확진되면 숨기고 조용히 치료하려 했다.‘병세가 안정되면 외손녀 곁에서 좀 더 살고, 악화되면... 그건 그때 가서 보지 뭐.’그래서 강말숙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무슨 말? 할 말 없는데.”강말숙은 눈을 깜박거리며 TV만 보았고, 고다정에게 들킬까 봐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고다정은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무력감을 느꼈지만 몰아붙일 생각도 없었다.어쨌든 의사도 아직 확실한 진단을 내린 것이 아니니 확진되면 그때 가서 보자고 생각했다.병실에는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고다정과 강말숙은 사실 둘 다 마음이 무거웠다.다행히 잠시 후 휴대전화 벨소리가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주었다.여준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심해영이 병원을 떠난 후, 여준재에게 연락해 국내에서 발생한 일을 알려줬던 것이다.이때 다정이는 준재가 옆에 있어 주기를 가장 바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준재가 돌아오지 못하면 얘기를 나눠도 좋지 않을까.그리하여 방금의 광경이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고다정은 휴대전화를 이내 받지 않았다.그녀는 자기가 여준재의 목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을 알았다.그 말들을 외할머니가 들으면 안 된다.“외할머니, 저 나가서 전화 받을게요.”그러고 나서 고다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병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 있는 베란다로 갔다.큰 베란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다정은 석양을 보면서 전화를 받았고, 귓가에 미안해하는 여준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요.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미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간단히 씻은 후 고다정은 거울 속에서 울었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외할머니가 계시는 병실로 돌아갔다.언제 왔는지 준이, 윤이가 외할머니를 둘러싸고 살갑게 보살피고 있었다.심해영이 옆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고다정은 심해영 곁에 다가가 감사를 표시했다.“감사해요, 어머님.”“얘는 참, 가족끼리 무슨 그렇게 예의를 차리니?”심해영은 짐짓 불만스러운 듯 그녀를 노려보다가 다시 두 아이의 재롱에 즐거워하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어르신이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면 상황도 나쁘지 않을 거야. 의학계에 긍정 치료라는 말도 있잖아. 앞으로 틈만 나면 두 아이가 어르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줘. 기분이 좋아지면 병세도 호전될 수도 있잖아.”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한편, 고씨 저택에서 고경영과 심여진은 경찰서에서 돌아온 후 냉전이 시작됐다.한 사람은 뭐 하는지 서재에 박혀 있고, 한 사람은 침실에 돌아간 후 고다빈에게 전화해 울며불며 하소연했다.“다빈아, 네 아버지가 나에게 죄를 덮어씌워 감옥에 보내려 하고 있어. 너무 모질어.”“아버지는 모든 걸 알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모른 척했던 거예요?”고다빈은 고경영이 자기와 심여진이 강수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다고 들은 때부터 충격과 공포에 빠져 그 생각만 했다.심여진은 계속 하소연했다.“다빈아, 나 어떡하면 좋아? 이번에는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지만 고다정 그년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캐고 다닐 것 같아. 그년이 조그마한 증거라도 찾으면 나는 끝장이야.”“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엄마, 진정해요. 스스로 겁먹지 말고.”정신이 돌아온 고다빈은 엄마의 말투가 이미 멘붕 상태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고 급히 소리쳤다.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고다정이 이미 자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고씨 집안 사람들을 회유해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심여진에게 경고했다.“앞으로 집
하지만 진시목은 고다빈의 말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앉아있었다.고다빈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시목, 내 말 못 들었어요? 내려요!”그녀가 이렇게 단호히 진시목을 떼놓으려는 원인은, 진시목이 갔다가 부모님이 싸우면서 내뱉는 무슨 큰일날 말이라도 들을까 봐 걱정돼서였다.이 남자는 워낙 고씨 집안에 바라는 게 있는데, 집안 비밀까지 알게 된다면 역으로 이용해 고씨 집안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비한 인물이 그녀를 뒤에서 돕는다 해도 이 남자는 반드시 그녀를 버릴 것이다.그녀의 생각을 진시목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왜? 내가 가는 게 겁나?”“겁날 게 뭐가 있어요? 우리는 조만간 이혼할 것이고, 지금은 잠시 이익 때문에 같이 있는 것이니 고씨 집안일에 신경 꺼주세요.”고다빈은 이 남자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직설적으로 분명히 말했다.그래도 진시목은 여전히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더 편안한 자세로 바꾼 후 상반신을 등받이에 기대고 차분하게 말했다.“내 손에 너희 GS그룹 주식이 있다는 걸 잊었어. 장인, 장모가 이혼하는 건 고씨 가문의 집안일인 동시에 회사 일이기도 해. 나는 이사회 대표로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안 그래?”“...”고다빈은 철저히 할 말을 잃었고, 속으로 ‘될 대로 되라지’ 했다.‘시간을 끌자는 거 아닌가? 그럼 그렇게 하지 뭐.”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었는지 진시목이 천천히 말했다.“너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다가 장인, 장모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지 않아? 내가 아는 장인어른은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닌데.”“비열하고 치사한 놈!”고다빈은 참다못해 한마디 욕한 후 결국 엄마가 걱정돼서 차에 시동을 걸어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 반 뒤였다.집에 들어서니 난잡하게 어질러진 거실을 가정부들이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주변에서 가정부들의 소리만 들리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환한 병실에 심여진 모녀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고경영만이 남아 있다.심여진은 오늘따라 상심 가득한 딸을 보며 비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비통함보다 더한 것은 미안함이었다.“다 내가 진시목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탓이야. 그 정도로 위선자일 줄은 나도 몰랐다.”그녀는 악에 받쳐 욕을 퍼부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천한 고다정 그년을 시집보낼걸!”고다빈이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말을 뱉지 않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병실 문을 닫은 뒤, 다소 언짢은 말투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아빠는 이혼하시겠다는데, 어쩌시려고요?”“난 절대 이혼 안 해.”고다빈의 말이 끝나기에 바쁘게 심여진이 딱 잘라 말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고 빈털터리로 재산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면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고다빈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엄마가 이혼하지 않겠다 해도 아빠가 밀어붙이면요? 만약 강수지의 일로 협박하면요?”“...”딸의 끈질긴 질문에 심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동시에 악랄한 생각이 떠올랐다.고경영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그럼 이혼할 필요도 없고, 회사로 이윤을 얻지 못하더라도 회사를 팔아버리면 그녀가 한평생 풍족하게 먹고살 재산은 될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얼른 도리머리를 쳤다.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이미 심여진의 손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고다정 그 천한 것이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하필 이 타이밍에 고경영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꼬리를 잡힐 것이다.심여진은 어쩔 수 없이 잠깐 들었던 악독한 생각을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그녀는 딸을 응시하며 물었다.“그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고다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그녀는 얇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담담히 말했다.“이미 생각이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의사는 자신이 초보적으로 세워놓았던 항암치료에 관한 계획을 하나하나 읊었다.“초기니까 화학요법 없이 우선 약으로 통제가 되는지 볼 거예요. 그리고 만약 여건이 된다면 사모님께서 직접 M 국 특효약을 구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쪽 약이 국내 약보다 억제 효과가 좋아요.”“특효약이요?”고다정이 눈을 내리깔며 낮게 중얼거렸다.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약인데 다행히도 우리 병원과 M 국이 협력관계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병원에서 마침 예약 인원을 통계 중이니, 사모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제가 몇 가지 약을 예약해 드리겠습니다.”“그럼 세 가지 치료 과정의 약을 예약 부탁드릴게요.”고다정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비록 그녀도 특효약을 만들 수 있지만 지금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그러나 의사는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그는 고다정의 확답을 받은 후 서랍에서 신청서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예약 신청서예요. 여기 서명하면 됩니다. 매 치료 과정의 약값은 1억이고, 세 개 치료 과정이면 총 3억이에요. 우선 절반 금액을 지불하시면 됩니다.”“알겠어요. 그럼 이따 가서 낼게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신청서에 서명했다. 이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비용을 지불했다.그녀가 진료실을 떠난 뒤, 뜻밖에도 강말숙이 뒤이어 찾아왔다.복도 모퉁이에서 사라져가는 외손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말숙은 입가에 쓴 미소를 띠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형편없는 연기로는 총명한 손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그녀는 문을 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녀를 보고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할머니 어쩌다 오셨어요?”“검사 결과를 물으러 왔죠.”강말숙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그녀의 말에 의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조금 전 고다정이 진료실을 떠나면서 할머니껜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기회를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찾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할머니께서 뇌암에 관한 얘기를 할 것을 아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그녀가 옆자리에 앉자 할머니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이 며칠간 내 거짓말에 장단 맞춰주느라 고생했어.”“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고다정이 무의식적으로 할머니를 만류했다.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더니 말을 이었다.“널 탓하려는 것은 아니고. 네가 내 부담을 덜려고 그런 거 알아. 내가 의사를 찾아갔던 것을 알고 있지?”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고다정은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할머니를 타이르듯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도 뇌암이라고는 하지만 초기라 통제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화학요법도 아니라 약만 쓰면 된다고 했어요.”“알지. 알지.”할머니는 손녀의 손을 잡고 다정히 손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의사가 다 알려줬어. 내가 협조만 잘하면 10년은 더 산다고. 나는 10년은 바라지도 않아. 너랑 준재가 결혼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해. 그래야 나도 죽어서 네 엄마 볼 낯이 있지.”할머니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고다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할머니를 끌어안았다.“안 돼요. 할머니는 오래오래 저랑 살아야죠! 이제 가족이라곤 할머니밖에 없는데!”말끝에 고다정이 점점 울먹였다.할머니는 손녀를 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얘가, 참! 이렇게 컸는데 아직도 할머니 앞에서 훌쩍이네?”“얼마나 크든 할머니 앞에서 전 아기라고요!”고다정의 울적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손녀의 말에 할머니는 얼굴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그녀는 아직 품에 안겨있는 손녀를 바라보며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말투에 손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있었다.“그래. 그래. 넌 내 앞에서 영원히 아기야. 그러니까 울지 말고.”몇 분이 지나서야 고다정은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 품에서 나왔다. 그녀는 굳게 결심한 듯 할머니를 응시했다.“전 꼭 할머니가 오래오래 백 살까지 살게 할 거예요!”“백 살까지 사는 건 늙은 요괴 아니냐. 난 요괴는 싫다
처음 들어온 업자가 침을 퉤 뱉더니 고경영을 향해 걸어오며 흉악하게 말했다.“우리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지난번 6개월의 기간을 늘린 건 네가 오늘 반드시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어. 돈을 갚든지, 회사를 담보로 내놓든지, 그것도 싫다면 목숨을 내놓든지.”마지막 한마디는 고경영의 멱살을 잡고 하는 살기 가득한 말이었다.고경영은 겁에 질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업자가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을 것이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말, 말로 합시다. 돈은 꼭 갚을 겁니다.”남자가 고경영을 몇 초간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그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버리더니 그를 위아래로 비웃듯 훑어보며 말했다.“갚으면 돼. 계좌이체? 아니면 현금?”“...”앞으로 내민 그의 손을 보며 고경영은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업자는 결코 참을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경영이 한동안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말을 하라고. 설마 잡아떼려는 거 아니지?”“제,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고경영이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이에 남자가 호통쳤다.“그럼 빨리 돈이나 내. 나 바쁜 몸이야.”“그... 우선 급해하지 마시고. 일단 제가 형님께 전화 드려 볼게요.”고경영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동시에 남자의 표정을 관찰하며 눈치를 보았다.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해서 뭐 하려고?”“돈이 아직 많이 모자라서요... 형님께서 동의하시면 다른 물건이라도 담보로 내놓으려고요... 아!”아무런 준비도 없이 업자의 발에 배를 걷어차인 고경영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배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그리고 이 모습에 소파 뒤에 숨어있던 재무 책임자와 비서도 깜짝 놀라 비
업자와 다른 건달들을 떠나보낸 고경영은 허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이때 숨어있던 재무팀 책임자와 비서가 나왔다.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고경영을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경영도 예상했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가세요. 다 가.”이에 재무 책임자와 비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밀린 월급마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이미 고경영에게 돈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곧 넓은 면적의 사무실에 고경영 한 사람만 남았다.그는 허망하게 사무실 내부를 보았다. 눈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다.그는 자신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년까지도 회사는 분명 시끌벅적하고 번창했는데.그가 주저앉은 채로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 고심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심여진이 걸어온 전화였다.그는 화면을 힐끗 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 그는 심여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여진은 끊임없이 연락했다. 그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이 계속 전화할 태세였다.결국 짜증이 난 그가 휴대폰을 벽 쪽으로 던져버렸고 휴대폰은 부서져 버렸다.드디어 세상이 고요해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요함은 얼마 가지 못하고 깨져버렸다.20분도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나타난 심여진은 화난 모습으로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왔고 곧이어 주저앉아 있는 고경영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너무 화난 탓에 고경영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고경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화를 냈다.“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요? 우리 집에서 쫓겨난 거 알아요? 우리 짐들 다 밖에 버려졌다고요!”고경영은 대답이 없었다.심여진은 고개를 숙인 남자를 보며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지금 당신이랑 말하고 있잖아요. 들었어요? 우리 집이 사라졌...”사라졌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경영이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옆으로 엎어졌다.바닥에 쓰러진 고경영이 마침내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꼭 감은 두 눈에 얼굴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