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진은 고다정이 그동안 가둬놓은 것에 대해 보복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옆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훤칠한 남자를 보며 이기지 못해도 세게 나가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의 의지와 달랐다.“그냥 농담한 거예요. 여 대표님도 괜찮으시죠? 그래도 내가 약혼녀 구해드렸잖아요. 그때 내가 잠수해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심하게 다친 채로 바다에서 죽었을 거예요.”“압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여기 무사히 서 있는 거죠.”여준재는 짙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어쨌든 다정 씨와 내 아이를 구해줬으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드리죠. 제 능력이 닿는 대로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이 말을 들은 구영진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짓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정말입니까?”“네.”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말했다.그러자 구영진은 잔뜩 들떠서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걸 말했다.“좋아요. 그럼 내 조건은 우리가 다시 한번 레이싱하는 겁니다. 그동안 계속 연습했어요. 이번엔 반드시,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길 겁니다!”멀지 않은 곳에서 잔뜩 흥분한 남자를 바라보며 여준재와 고다정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저 멍청한 남자가 바라는 게 고작 저런 것일 줄이야.’옆에 있던 구남준과 장씨 아저씨도 할 말을 잃었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진심입니까, 그게 다예요?”“난 진심이에요.”구영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여준재는 더 말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시합 날짜는 저희 쪽 일이 끝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그 말에 구영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계속 바쁘다고 나와의 약속을 미루는 건 아니겠죠?”“전 한 번 뱉은 말은 지킵니다. 시간 날 때 연락드리죠.”여준재는 말을 마치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다정 씨 쉬어야 하니까 더 할 말 있으면 내일 다시 하세요.”구영진은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방에 들어선 여준재는 고다정을 조심
#남자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속으로 감동하며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했다.“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몸 상해요.”“알겠어요. 근데 지금은 다정 씨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랬어요.”여준재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고다정은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의 몸에 대한 걱정은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한편 고다정은 멍하니 넋을 잃고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바라보았다.비록 여준재는 지금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은 변함없었고, 오히려 퇴폐미까지 더해져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여준재도 당연히 고다정의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애정 가득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깨어났으니 일어날까요?”그렇게 말하며 그는 앞으로 다가가 고다정을 침대에서 일어나도록 도와주려 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다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상대가 자신의 약혼자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멍하니 보는 것도 당연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잘생기랬나.’여준재는 그런 고다정의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기억을 잃고 난 뒤 고다정의 성격이 활발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간단히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장씨 아저씨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구영진도 이미 일어난 뒤였다.사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었지만 여준재가 여기 있어 마음 놓고 잘 수 없었다.식탁 앞에서 알콩달콩한 두 사람을 보며 그는 속이 답답했다.‘이른 아침부터 꼭 솔로인 사람 괴롭게 해야 하나?’한 명은 기억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은 어제 막 찾아왔는데, 왜 하룻밤 사이에 둘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지?“그러고 보니 사람도 찾았는데 언제 갈 생각입니까?”구영진은 두 사람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었다. 괜히 이러다 부모님과 만나게 되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때가 되어 부모님이 고다정의 행방을 물으면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고다정과 여준재는 그런 그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저는 따지지 않겠지만 두 분께 아드님을 잘 단속하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또다시 이런 일을 벌였다가 막무가내인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구씨 가문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생길지도 모릅니다.”구영진을 놀려보니 고다정이 왜 재미있어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특히 구영진의 다양한 표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여준재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구민석 부부는 그의 말을 듣고 표정이 엄숙해졌다.특히 주혜원은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구영진을 덥석 잡아끌더니 사정없이 귀를 잡아당겼다.“이런 못된 놈을 봤나.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구나. 이런 일로 사람을 속이다니.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가 문제 삼지 않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아, 엄마 살살해요. 아파요.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도 계시는데 좀 체면을 살려주세요!”아파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구영진을 보며 고다정과 여준재는 폭소를 금치 못했다.이때 구민석도 옆에서 거들었다.“쌤통이야. 여 대표님과 고다정 씨가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 아니면 나도 네 엄마랑 같이 때렸을 거야. 사고만 치는 자식!”여준재가 문제 삼지 않는다고 그들이 아무 표시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혼나고 난 구영진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온순해진 구영진을 바라보며 고다정은 미소를 지었다.“시간 나면 아주머니를 모시고 운산에 놀러 와요.”“그래. 시간 나면 꼭 갈게.”주혜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어쩌다 아들을 후려잡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했더니 남의 약혼녀라니.‘짜증 나! 안 되겠어. 이 멍청한 자식을 더 패야지.’이를 모르는 고다정은 그날 오후 여준재를 따라 운산에 돌아갔다.헬기에서 내리니 이상철이 멀쩡한 고다정을 반갑게 맞았다.“작은 사모님, 끝내 돌아오셨네요.”“안녕하세요.”고다정이 방그레 웃으며 인사했다.당황한 이상철은 무심코 여준재를 쳐다보았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여준재는 숨기지 않고 고다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다정
쌍둥이가 눈물을 머금은 것을 본 고다정은 급히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왜 울어? 조금 전까지 멀쩡했잖아.”“저희는 괜찮아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쌍둥이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사실 그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엄마가 이전과 달리 멀게 느껴졌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아기가 생겨서 그런 걸까?쌍둥이는 속으로 허튼 생각을 했다.그들의 속마음은 여준재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에 여준재가 급히 설명했다.“엄마가 기억을 잃어서 지금 누구도 기억 못한단다.”여준재가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는지 의아했던 고다정은 붉어진 쌍둥이의 눈시울을 보고 나서야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미안해. 나는 과거의 기억이 없어. 그래서 이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몰라. 상처받았다면 엄마가 용서를 빌게.”그녀는 겸연쩍은 눈빛으로 쌍둥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사과했다.이 말에 쌍둥이와 강말숙, 심해영이 깜짝 놀랐다.“기억을 잃었다고?”“엄마가 기억을 잃었어요?”그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잠시 기억을 잃었습니다.”이때 여준재도 입을 열었다.“내일 다정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갈 거예요. 전면 검사를 받으려고 신경과 전문의를 예약했어요.”자기를 위한 일인 걸 아는 고다정은 반대하지 않았다.“엄마가 기억을 잃은 거였군요. 아기가 생겨서 우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앳된 얼굴로 고다정을 쳐다보았다.“엄마가 우리를 기억 못 하면 다시 자기소개 할게요. 엄마, 안녕하세요, 저는 엄마 딸 여하윤이에요. 원래 고하윤이었는데, 아빠를 찾은 후 개명했어요. 올해 6살이고요. 유치원 상급반을 다니고 있지만 독학으로 초등학교 4학년 과정까지 끝냈어요.”“초등학교 4학년?”고다정이 깜짝 놀라자, 하윤은 자랑스럽게 작은 가슴을 쫙 폈다.“이게 다 똑똑한 오빠 공로예요.”하준은 이 말을 듣고 동생을 힐끗 보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저는 하준이에
집에 돌아간 후 쌍둥이는 줄곧 고다정 옆에 붙어있었다.고다정이 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다.애들이 불안에 떠는 것을 눈치챈 고다정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저녁에 나하고 같이 자지 않을래?”그녀가 초대장을 내밀자 쌍둥이는 반가운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들이 활짝 웃는 것을 보고 고다정은 잘한 일임을 알았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니 여준재가 언제 왔는지 그들의 뒤에 서서 억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여준재의 눈빛을 읽고 무슨 뜻인지 이해한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왜요? 설마 제가 남지 말라고 하면 당신은 남지 않을 건가요?”그러고 보니 어제도 이 남자는 그녀가 잠들면 가겠다고 해놓고, 결국 온밤 그녀의 방에 머물렀다.“그건 달라요.”여준재는 고다정이 어젯밤 일을 얘기한다는 걸 안다.그가 스스로 남는 것과 초대되어 남는 것은 성질이 다르다.고다정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쌍둥이까지 그의 팔을 당기며 거들었다.“엄마, 아빠도 우리랑 같이 자게 해요. 우리 한 가족이 오랜만에 같이 자는 거잖아요.”“엄마가 없는 동안 아빠가 잘 쉬지 못해서 지병이 재발했어요. 스승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아빠는 앓아누웠을 거예요.”영리한 하준이 아빠 대신 감성팔이 했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꼬맹이의 말을 믿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신 아파요?”이 말을 들은 하준은 급히 아빠에게 연약한 척하라고 눈빛을 보냈다.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여준재는 꼬맹이 말에 따르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지병이 재발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나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이 말을 들은 하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아빠한테 약한 척하라고 힌트를 줬는데 아빠는 왜 모를까? 엄마가 지금 우리를 기억 못 하는데, 자꾸 애교를 부려서
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잠시 기억을 잃은 게 맞아.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임은미는 한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묘했다.이렇게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자기 절친에게 일어나다니.역시 드라마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이때 채성휘와 여준재가 다가오더니 급히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은미 씨, 임신한 몸으로 이렇게 뛰면 안 돼요. 이러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요?”“다정 씨, 방금 왜 피하지 않았어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부딪쳐서 당신과 아기가 다치면 어떡해요?”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다정과 임은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둘이 같이 임신하리라 생각지 못한 게 분명하다.뒤이어 고다정은 임은미의 성화에 못 이겨 기억상실 후 발생한 일들을 이야기했다.다 듣고 난 후 임은미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구영진이라는 사람 진짜 웃기네. 기회가 되면 이 대단한 인물을 만나보고 싶어. 여 대표님을 놀릴 생각을 하다니.”“확실히 재미있는 사람이야.”고다정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 사이는 고다정의 기억상실 때문에 소원해지지 않았다.오히려 기억상실 후 고다정의 성격이 활발해져 사이가 더 좋아졌다.두 여자가 다른 남자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자 여준재와 채성휘는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그쪽 여자를 좀 단속해요. 우리 다정 씨가 나쁜 영향을 받잖아요.”여준재가 인상을 쓰며 채성휘를 노려보자, 채성휘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그쪽 약혼녀가 내 여자친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고요?”두 남자의 불꽃 튀는 접전을 지켜보던 쌍둥이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웃고 떠든 후, 일행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임은미도 같이 갔다.절친이 검사받는 데 같이 가고 싶기도 했고, 또 가는 김에 외할머니를 뵈려는 것이었다.강말숙은 그들이 온 후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병실에는 강말숙 혼자가 아니라 성시원도 있었다.어제 다른 일 때문에 미처 돌아오지 못했던
여준재는 실망스러웠지만 아이의 건강을 생각해 결국 고집을 접었다. 마음속으로 이 일을 고다정에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생각에 잠긴 남자를 보며 성시원이 또 입을 열었다.“다정이 돌아왔는데, 결혼식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리고 유라는?”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지도 않았다.다만 그가 대답하기 전에 고다정이 CT실에서 나왔다.“검사결과는 30분 후에 나온대요.”고다정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성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여기서 결과를 기다릴 테니, 준재는 다정을 데리고 산부인과에 가서 태아 상태를 검사해 봐.”여준재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고다정을 데리고 산부인과로 갔다.가는 길에 고다정이 말했다.“사실 아기는 건강해요. 전에 구영진 씨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했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갑자기 좀 불쾌해졌다.‘아빠인 나도 아직 아이와 만나지 못했는데, 구영진이 먼저 만나다니.’하지만 그가 이런 속마음을 고다정에게 알려줄 리 없다.“여러 날 지났으니 다시 한 번 검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리고 임산부 등록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산전검사도 받아야 해요. 앞으로 정기 검진 때마다 제가 같이 올 거예요.”마지막 한마디는 말투가 더없이 부드러웠다.준이, 윤이가 태어날 때는 몰라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다.그래서 이번에 생긴 아기는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과정에 참여하려 한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남자의 다정한 표정을 보고 그냥 해 본 말이 아님을 알았다.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녀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따라다니는 걸 허락할게요.”잘난 척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하윤의 모습이 보였다. 여준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어이없지만 사랑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산부인과에 도착했다.줄을 서고 접수하는 등 모든 일을 여준재가 직접 했다.고다정은 아까보다 흥분된 남자의 표정을 보고 의문을 금치 못했다.“다음 검사가 많이 기대
검사가 끝난 후 여준재와 고다정은 결과지를 들고 신경과로 돌아왔다.가는 길에 여준재는 산전 검사 결과지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이리저리 살펴봤다.고다정은 그의 행동을 보고 폭소를 금치 못했다.“뭘 그렇게 계속 봐요?”“얼마나 신기한 일인데요. 아무리 봐도 모자라죠.”여준재는 고개를 들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가 보기에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신성한 일이다.고다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 기쁘기는 했다.여준재의 이런 태도는 그녀와 아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신경과로 돌아오니 성시원이 고다정의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의사와 치료 방안을 의논하고 있었다.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성시원은 의사와의 대화를 멈추고 그들에게 물었다.“그쪽 검사 결과는 어때?”“아기는 아주 건강해요. 어르신, 이거 봐요. 이게 아기예요.”여준재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 그가 기분이 아주 좋다는 것을 안다.성시원은 고개를 숙여 검사 결과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문제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임산부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면 됐어. 그럼 이제 기억상실증에 대해 얘기해 보자.”그가 화제를 돌리자 여준재와 고다정도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성시원이 말을 이었다.“너희가 오기 전에 의사 선생님과 의논했어. 다정의 기억상실은 뒤통수 타박상으로 어혈이 생겨서인데,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고 어혈이 천천히 흡수되고 있기 때문에 개두술로 제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다정이 지금 임신 중이라 수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수술을 안 하면 어혈이 스스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요?”여준재의 질문과 함께 고다정도 궁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성시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스스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느려. 침술로 어혈이 빠지도록 유도할 생각이야.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 걸릴 건데, 어쨌든 스스로 없어지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