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끝난 후 여준재와 고다정은 결과지를 들고 신경과로 돌아왔다.가는 길에 여준재는 산전 검사 결과지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이리저리 살펴봤다.고다정은 그의 행동을 보고 폭소를 금치 못했다.“뭘 그렇게 계속 봐요?”“얼마나 신기한 일인데요. 아무리 봐도 모자라죠.”여준재는 고개를 들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가 보기에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신성한 일이다.고다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 기쁘기는 했다.여준재의 이런 태도는 그녀와 아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신경과로 돌아오니 성시원이 고다정의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의사와 치료 방안을 의논하고 있었다.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성시원은 의사와의 대화를 멈추고 그들에게 물었다.“그쪽 검사 결과는 어때?”“아기는 아주 건강해요. 어르신, 이거 봐요. 이게 아기예요.”여준재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 그가 기분이 아주 좋다는 것을 안다.성시원은 고개를 숙여 검사 결과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문제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임산부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면 됐어. 그럼 이제 기억상실증에 대해 얘기해 보자.”그가 화제를 돌리자 여준재와 고다정도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내용을 기다렸다.성시원이 말을 이었다.“너희가 오기 전에 의사 선생님과 의논했어. 다정의 기억상실은 뒤통수 타박상으로 어혈이 생겨서인데,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고 어혈이 천천히 흡수되고 있기 때문에 개두술로 제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다정이 지금 임신 중이라 수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수술을 안 하면 어혈이 스스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요?”여준재의 질문과 함께 고다정도 궁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성시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스스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느려. 침술로 어혈이 빠지도록 유도할 생각이야.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 걸릴 건데, 어쨌든 스스로 없어지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빠를
빌라에 돌아온 고다정과 쌍둥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귓가에 처량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준재!”유라가 길가에 세워져 있던 차에서 내리며 그를 불렀다.그녀를 본 쌍둥이는 무의식중에 고다정 앞을 막아섰다.“엄마, 우리가 지켜줄게요. 저 나쁜 여자가 절대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쌍둥이가 잔뜩 경계하는 것을 보고, 고다정은 실눈을 뜬 채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여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예쁘고 세련된 분위기의 여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유라도 고다정을 살펴보고 있었다.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고다정의 눈빛을 보고, 대뜸 부하가 전한 소식이 사실임을 알아챘다.‘이년이 정말 기억을 잃었구나.”“고다정 씨,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그녀는 고다정을 걱정하는 척했다.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서 적대감이 느껴졌다.고다정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여준재를 보며 말했다.“당신을 찾아온 모양인데, 저는 준이, 윤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여준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쌍둥이 손을 잡고 떠나갔다.이 상황을 보고 쌍둥이는 조바심을 쳤다.엄마는 왜 아빠가 저 나쁜 여자와 같이 있게 두는 걸까?그들은 참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말했다.“엄마, 아빠가 저 나쁜 여자와 같이 있게 두면 어떡해요? 저 여자가 아빠를 빼앗으려 한단 말이에요.”“그러게. 엄마, 우리 빨리 돌아가요. 아빠가 저 여자와 단둘이 있으면 안 돼요.”쌍둥이는 고다정을 잡아끌었다.고다정은 조바심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쌍둥이는 그녀의 웃는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엄마,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저희와 같이 돌아가요.”“자, 조급해 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고다정은 손에 약간 힘을 주어 자기를 끌어당기는 쌍둥이를 붙잡았다.쌍둥이는 어쩔 수 없이 진정하고 답답해하며 물었다.“하실 말씀이 뭔데요?”“울적해 하지 말
똑똑! 고다정이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서재에서 여준재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들어와요.”고다정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준재와 아까 문 앞에서 봤던 여인이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저를 찾으셨어요? 이 집사님이 그러던데. 무슨 일이에요?”“이리 와요.”여준재는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고다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여인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여준재의 말에 따랐다.“왜 저를 부른 거예요?”“내 옆에 앉아서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들어요.”여준재가 말하면서 고다정을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여준재가 일이 있어 그녀를 찾은 줄 알았는데, 이것 때문이라니.하지만 여준재가 이렇게 하는 의도를 알기에 마음속은 달콤했다.“당신이 초대했으니 억지로라도 방청할게요. 시작하세요.”고다정은 말하면서 편안한 자세를 취한 후 옆에 놓여있던 잡지를 들고 보기 시작했다.여준재는 이를 지켜보면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유라는 이 훈훈한 화면을 보면서 속에서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조만간 고다정 이년을 여준재 옆에서 쫓아내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그녀의 악감정이 너무 티 나게 드러났는지, 고다정이 갑자기 잡지를 내려놓더니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가씨, 계속 그렇게 악의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유라는 흠칫 놀랐다. 고다정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즉시 표정이 음침해졌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라를 쏘아보더니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아직 덜 혼났나 보구나!”“여준재, 내가 누명을 쓰고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그렇게 많은 자금과 자산을 손해 보고 심지어 너와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이 모두 이 여자 때문인데, 좀 원한을 가지면 안 돼?”유라는 이때 부인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예 악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억울한 척했다.“내가 너를 저 여자보다 먼저
여준재는 고다정이 왜 동의하라고 하는지 몰랐지만 그녀의 말을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다정 씨가 그러라고 하니 한 가지 요구를 들어줄게. 도의적으로 용납되고 내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최대한 해보도록 할게.”이렇게 말하는 원인은, 유라가 이 기회를 빌려 그의 능력을 벗어난 요구를 제기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유라도 그의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일이 해결됐으니 이제 가줄래?”여준재는 직접 축객령을 내렸다.유라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지만 여준재의 무관심한 표정을 보고 계속 치근거리면 미움만 살 것 같아 차라리 깔끔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이만 가볼게.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정리한 후 명세서를 가지고 다시 올게.”여준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상철을 불러 배웅하게 했다.유라가 떠나간 후 서재에는 고다정과 여준재만 남았다.여준재는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다정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왜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는지 궁금한 거죠?”“네.”여준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다정은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뭐 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제 판단이 맞다면 제가 이번에 사고를 당한 것이 그 여자와 관련이 있는데, 증거가 없는 거죠.”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고다정의 계획을 대충 알 것 같아 걱정스레 말했다.“유라는 위험한 인물이에요. 보통 여자들과 달라요.”“그 말은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하다는 건가요?”고다정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그녀의 도발적인 말투에서 곧 화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여준재가 다급히 말했다.“그럴 리가요? 두 사람은 아예 비교가 안 돼요.”이 말에 대해 고다정은 아무 평가와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화제를 돌려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는 저에게 엄청난 적대심을 품고 있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제가 전에 사고를
유라는 언짢은 표정으로 차에 돌아왔다.디카프리도가 그녀의 음침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주인님, 협상이 잘 안됐나요?”“아니, 협상은 잘됐어. 나중에 그동안의 손실을 정리해서 여준재한테 보내줘.”유라의 지시에 디카프리도가 놀라며 물었다.“주인님께서 직접 가져가지 않을 건가요?”“아니, 여준재가 나를 보기 싫어 해. 이럴 때 자꾸 눈앞에 나타나면 더 싫어할 뿐이야.”유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했고, 눈빛이 어두웠다.할 말을 찾던 디카프리도는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그럼 고다정 쪽은 계속 손을 쓸 건가요?”“바보야? 여준재가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데 고다정에게 손을 쓸 거냐고? 너는 내가 아직 덜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심사가 뒤틀려 욕설을 퍼붓는 유라 앞에서 디카프리도는 입을 다물었다.그날 오후 고다정은 낮잠을 자고 나서 여준재와 함께 병원에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쌍둥이도 따라갔다.네 식구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병원을 떠나 여씨 저택에 갔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여진성 부부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는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아버지, 어머니, 왜 밖에 나와 계셔요?”차에서 내린 여준재는 의문스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고다정도 쌍둥이를 데리고 차에서 내린 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심해영이 인사를 받은 후 웃으며 설명했다.“너희가 도착했다고 해서 영접하러 나왔지. 다정이 앞으로 무탈할 수 있도록 액운도 날려버릴 겸.”그녀는 옆에 있는 사용인에게 화로를 가져오라는 사인을 보낸 후 고다정을 불렀다.“다정아, 어서 와서 이걸 건너뛰어. 그러면 모든 액운이 날아갈 거야.”고다정은 거절하지 않고 심해영이 시키는 대로 화로를 건너뛰었다.“잘했어. 이건 행운을 가져오는 돈이니 받아서 집에 돌아간 후 베개 밑에 두어라.”심해영은 또 고다정에게 두툼한 돈봉투를 건넸다.여준재는 옆에서 보면서 막지 않았다.이번 일로 어머니가 다정의 운세를 바꿔보려
고다정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말문이 막혔다.그는 한참 동안 눈앞의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당신의 결정을 존중할게요. 또한 이 일은 반드시 잘 처리할 겁니다.”“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저는 준이랑 윤이 보러 갈게요. 준재 씨는 마음대로 하세요.”여준재는 그녀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위층 서재로 갔다.정원에서 친할머니랑 놀고 있던 두 아이는 고다정이 돌아온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냉큼 달려왔다. “엄마.”그리고 각자 한 손씩 잡았다.고다정은 그들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게 되자 마음까지 몽글몽글해졌다.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뭐 하고 있었어?”“친할머니랑 숨바꼭질하고 있었어요. 엄마도 저희랑 같이 할래요?”“맞다, 아빠는요? 왜 엄마랑 같이 안 와요?”두 아이는 하나씩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기대에 찬 그들의 눈빛을 보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빠는 서재에 갔어. 아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엄마가 대신 놀아줄게.”그녀의 말을 듣던 두 아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철이 일찍 들어 더 떼쓰지 않고 엄마랑 같이 놀기 시작했다.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심해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직감적으로 두 사람이 대화가 잘 안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아 그저 잠시 두 아이와 놀게 내버려뒀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두 아이는 놀다가 지쳐 고다정은 그들을 데리고 가서 쉬려고 했다. 심해영은 두 아이가 씻는 것을 도와줬다.그리고 한 시간 넘게 뒤척이다가 드디어 두 아이가 잠에 들었다.심해영과 고다정은 살며시 그들의 방에서 나왔다.고다정도 자기 방에 가서 쉰다고 인사하려고 할 때 귓가에 심해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잠깐 내려가서 얘기할까?”그렇게 두 눈이 그녀와 마주쳤는데 고다정도 사실 심해영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다음 날 아침, 고다정은 웬 물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는데 알고 보니 욕실에서 나는 소리였다.그제야 여준재가 안에서 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그러다 고다정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침대 머리맡에 깨끗한 옷 한 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가지런히 개어진 옷을 보고 고다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몇 분 후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자 여준재도 욕실에서 나왔다.여준재는 이미 양복으로 갈아입었는데 훤칠한 몸매로 욕실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다.고다정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굿모닝.”“굿모닝.”여준재도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뒤늦게 두 사람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이미 여씨 부부 내외와 여범준이 나와 있었다.두 아이는 여범준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보기에도 화목해 보였다.“도련님,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집사는 고다정과 여준재를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이때 시끌벅적하던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지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다들 일어났네. 식사 준비해.”집사는 인사한 뒤 재빨리 가서 아침 식사 준비했다. 이때, 할아버지가 대뜸 입을 열었다.“다정이도 돌아왔고 결혼도 서두를 필요 없으니 나는 다시 산에 올라가야겠다. ”“벌써 돌아가시려고요?”여진성은 약간 섭섭하다는 듯이 물었다.여범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산에서 내려온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 산 아래의 공기는 위 산보다 좋지 못해 많이 불편하구나. 우리 준이, 윤이, 시간 있으면 이 증조할아버지한테 놀러 와.”“네, 방학하면 할아버지 만나러 갈게요.”두 아이는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였다.여범준은 그 모습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또 여준재에게도 당부했다.“하루빨리 너의 그 사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해. 만약 또 다정이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증손자를 괴롭힌다면 그때 가서 크게 혼날 줄 알아.”“알겠어요.”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대답했다.이 일은 할아버지께서 그
고다정은 남자의 다정한 눈빛에도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이 쪽은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가서 회사일 보세요. 제가 깨나면 우리 집 사람들더러 병원에 데려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준재 씨가 이미 소담 씨와 화영 씨를 제 옆에 배치해 주셨는데 무슨 걱정이에요?”“...”여준재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회사로 갔다.그가 떠난 후 두 아이는 쭈뼛거리며 고다정에게 다가오더니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고다정은 그들을 힐끔 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엄마, 혹시 아빠랑 싸웠어요?”두 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다정에게 물었다.그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진 고다정이 되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엄마는 어제 아빠와의 결혼도 거절했고 오늘 쫓아내기까지 했잖아요.”고하윤이 작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고하준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다정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걱정 하지 마. 아빠랑 엄마는 안 싸웠으니까. 단지 아빠가 계속 엄마를 에워싸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아빠도 자기 일을 해야 하잖아.”“근데 아빠가 엄마를 에워싸고 있는 것도 엄마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잖아요.”두 아이는 참지 못하고 아빠 편을 들면서 말했다.고다정은 여준재를 두둔해서 말하고 있는 두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됐어, 어른들의 일은 아이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너희 아빠는 싸운 게 아니니깐 걱정 하지 마. 가자, 엄마랑 같이 가서 좀 쉬자.”그녀의 말에 두 아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그들도 엄마가 이 대화의 주제를 자꾸 피하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래서 더 말하지 않는 모습을 눈치챘다.하지만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볼 것 같았다.한편, 여준재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구남준은 그동안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다.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여준재는 바쁜 일들이 마무리하고 고다정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 집에 전화하려 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