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고다정은 웬 물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는데 알고 보니 욕실에서 나는 소리였다.그제야 여준재가 안에서 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그러다 고다정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침대 머리맡에 깨끗한 옷 한 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가지런히 개어진 옷을 보고 고다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몇 분 후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자 여준재도 욕실에서 나왔다.여준재는 이미 양복으로 갈아입었는데 훤칠한 몸매로 욕실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다.고다정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굿모닝.”“굿모닝.”여준재도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뒤늦게 두 사람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이미 여씨 부부 내외와 여범준이 나와 있었다.두 아이는 여범준을 둘러싸고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보기에도 화목해 보였다.“도련님,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집사는 고다정과 여준재를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이때 시끌벅적하던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지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다들 일어났네. 식사 준비해.”집사는 인사한 뒤 재빨리 가서 아침 식사 준비했다. 이때, 할아버지가 대뜸 입을 열었다.“다정이도 돌아왔고 결혼도 서두를 필요 없으니 나는 다시 산에 올라가야겠다. ”“벌써 돌아가시려고요?”여진성은 약간 섭섭하다는 듯이 물었다.여범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산에서 내려온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 산 아래의 공기는 위 산보다 좋지 못해 많이 불편하구나. 우리 준이, 윤이, 시간 있으면 이 증조할아버지한테 놀러 와.”“네, 방학하면 할아버지 만나러 갈게요.”두 아이는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였다.여범준은 그 모습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또 여준재에게도 당부했다.“하루빨리 너의 그 사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해. 만약 또 다정이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증손자를 괴롭힌다면 그때 가서 크게 혼날 줄 알아.”“알겠어요.”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대답했다.이 일은 할아버지께서 그
고다정은 남자의 다정한 눈빛에도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이 쪽은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가서 회사일 보세요. 제가 깨나면 우리 집 사람들더러 병원에 데려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준재 씨가 이미 소담 씨와 화영 씨를 제 옆에 배치해 주셨는데 무슨 걱정이에요?”“...”여준재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결국 회사로 갔다.그가 떠난 후 두 아이는 쭈뼛거리며 고다정에게 다가오더니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고다정은 그들을 힐끔 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엄마, 혹시 아빠랑 싸웠어요?”두 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다정에게 물었다.그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진 고다정이 되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엄마는 어제 아빠와의 결혼도 거절했고 오늘 쫓아내기까지 했잖아요.”고하윤이 작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고하준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다정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걱정 하지 마. 아빠랑 엄마는 안 싸웠으니까. 단지 아빠가 계속 엄마를 에워싸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아빠도 자기 일을 해야 하잖아.”“근데 아빠가 엄마를 에워싸고 있는 것도 엄마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잖아요.”두 아이는 참지 못하고 아빠 편을 들면서 말했다.고다정은 여준재를 두둔해서 말하고 있는 두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됐어, 어른들의 일은 아이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너희 아빠는 싸운 게 아니니깐 걱정 하지 마. 가자, 엄마랑 같이 가서 좀 쉬자.”그녀의 말에 두 아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그들도 엄마가 이 대화의 주제를 자꾸 피하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래서 더 말하지 않는 모습을 눈치챘다.하지만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볼 것 같았다.한편, 여준재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구남준은 그동안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다.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여준재는 바쁜 일들이 마무리하고 고다정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 집에 전화하려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고다정은 단번에 이 말은 여준재가 시킨 것이라고 눈치챘다.그런 여준재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고다정은 눈앞의 이 어린 녀석을 놀리고 싶어졌다.“아빠가 배고픈 건 걱정되고 증조 외할머니가 배고픈 건 걱정이 안 돼?”“앗...”고하윤은 당황한 듯 작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그럼 아빠한테 밥만 가져다드리고 우리는 병원에 가서 증조 외할머니랑 같이 먹어요.”이 아이디어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고하윤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다정은 그런 순수한 모습에 결국에는 넘어가고 말았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좋아요. 그럼 저도 음식을 준비할래요.”고하윤은 신나서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와서 일손을 도왔다.30분 후, 세 모자는 소담과 화영과 같이 YS 그룹으로 출발했다.출발했을 때까지는 꽤 순조로웠다.하지만 YS 그룹에 도착하자 고다정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그러다가 고하윤에게 말했다.“아까 네가 아빠한테 밥을 배달하고 싶다 했으니 혼자 올라가 봐. 엄마랑 오빠는 아래서 기다릴게.”“네?”고하윤은 뜻밖의 말에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담에게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엄마...”고하윤이 애교를 부리며 고다정과 같이 가려고 했다.하지만 아쉽게도 고다정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빨리 갔다 와. 엄마랑 오빠는 차에서 기다릴게.”어쩔 수 없이 고하윤은 소담을 따라 YS 그룹으로 들어갔다.몇 분 후, 역시나 고다정은 여준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다정 씨.”전화 속에서 여준재는 응석을 부리는 듯했다. 고다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모르는 척 물었다.“우리 윤이 보고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요, 아직 도착 안 했나요?”“그런 뜻이 아닌 거 알
그날 밤, 여준재는 병원에 왔다. 그는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고다정 앞에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건넸다.“오면서 샀어요.”“와~”두 아이는 옆에서 소리쳤다.금세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고다정쪽에 집중되었다.고다정은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남자가 건네준 꽃다발을 받아 고개를 숙이고 살짝 냄새를 맡았다.“센스 있으시네요. 제가 한 말을 단번에 알아듣다니. 이만 집에 돌아갑시다.”말을 마친 뒤 그녀는 여준재에게 손을 뻗으며 부축하라고 했다.여준재는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 올라탔다.이때 두 아이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오빠, 아빠랑 엄마가 다시 예전에 사랑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요?”“돌아간 게 아니라 쭉 뜨겁게 사랑했었어.”고하준은 애어른처럼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네 식구가 빌라에 도착했다.저녁은 역시나 고다정이 준비했으나 도우미가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분위기는 매우 아늑했다.늦은 시각까지 저녁 식사를 마친 여준재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대뜸 고다정을 끌고 빔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는 방으로 갔다.두 아이도 그들의 뒤를 따라오다가 방안의 대형 스크린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소리쳤다.“아빠, 우리 여기서 영화 보는 거예요?”“엄마랑 같이 영화 본 지가 오래되어서.”그의 말에 고다정은 고개를 돌려 옆에 남자를 쳐다보면서 진짜 영화 보러 온 줄 알고 그녀도 물었다.“무슨 영화인데요?”여준재는 일부러 비밀인 척 답했다.“조금 있으면 알게 돼요.”말을 마치고 고다정더러 의자에 앉게 한 뒤 자신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두 아이도 그들의 옆에 앉게 되었다.이때 갑자기 스크린이 밝아지더니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얼마 안 가서 두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환호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엄마예요.”화면 속의 고다정은 차에서 내린 뒤 꽃밭을 걷고 있었다.가만히 보고 있던 고다정은 그제야 미간
그 뒤로부터 고다정은 비록 기억이 안 나지만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다.낮에는 병원에 가서 외할머니랑 같이 있다가 저녁이 되면 여준재가 그녀를 데리고 예전에 자주 갔던 곳에 데려가 기억을 찾는 데 힘썼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나갔다.고다정은 일부 기억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흐릿한 상태였다.이날 여준재는 특별히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30분 뒤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여 대표님, 사모님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습니다. 핏덩어리도 작아졌고 요 며칠 아마 돌아온 기억이 몇 개는 있었을 겁니다.”“있긴 있었어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요 며칠 동안 기억났던 장면들을 말했다.의사는 듣고 난 뒤 답했다.“아직 기억나는 장면이 흐릿한 건 정상입니다. 어쨌든 지금 사모님 머릿속에 핏덩어리가 아직 깨끗이 제거된 게 아니니까요.”병원에서 나온 뒤 여준재는 고다정을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고다정은 사윤영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다정 씨, 제가 쉬는 데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이때, 사윤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다정은 수화기 너머에서 구영진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 지금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면 된다니까.”“운산에 왔군요.”고다정은 약간 놀란 듯 입을 열었다.사윤영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네, 고다정 씨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데 혹시 저희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네, 제가 주소 알려 드릴게요.”고다정을 말을 마친 뒤 빌라 주소를 읊어줬다.대략 30분이 지났을 무렵 빌라 마당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고다정이 나가보니 사윤영과 구영진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고다정, 드디어 만났네. 너 때문에 내가 죽을뻔했잖아!”구영진은 고다정을 보자마자 씩씩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러다 고다정과 곧 닿으려고 할 때 화영이 그를 막아섰다.화영은 구영진을 노려보더니 그에게 경고했다.“말로 하세요.”왠지 건드리면
구영진의 말에 고다정은 어이가 막혔다.구영진이 행동파인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이렇게나 빨리 시합을 위해 찾아올 줄은 몰랐다.사윤영도 고다정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보고 눈치챈 뒤 다급히 해명했다.“이 자식이 마음이 급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만약 여 대표님이 시간이 없다면 상대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만약 성가시면 어디에 가둬도 된다고 했거든요. 물론 괜찮으시다면 여 대표님께서 그들을 대신해서 구영준을 가르쳐주면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때려도 되니까 죽이지만 않으면 된대요.”이 말은 여씨 부부 내외가 한 말이었다.하지만 구영진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사윤영에게 불같은 화를 냈다.“이 여자야, 넌 대체 누구 편이야?”“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아버님 어머님께서 나한테 직접 부탁한 일이야.”사윤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구영진은 또다시 말문이 막혀버렸다.고다정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입을 열었다.“이렇게 온 게 그 시합 때문이라면 그 사람 회사에 가보세요. 제가 두 분을 데려다 달라고 말씀드릴게요.”말을 마친 뒤 그는 이상철을 불러 구영진을 YS 그룹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구영진은 냉큼 그들을 따라나섰다.하지만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사윤영을 본 고다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같이 안 가요? 저 사람이 말썽을 부리면 어떡해요?”“괜찮아요. 여 대표님 앞에서는 어차피 꼼짝도 못 해요.”사윤영은 정말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그녀의 말이 맞다.여준재 앞에서의 구영진은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저랑 시합하러 왔다고 하던데요?”“네, 맞습니다!”구영진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근데 괜찮아요. 저는 지금 있는 게 시간이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구영진은 진작에 이 시합이 그리 순리롭지 못할 걸 예상했다.그러면서 소파에 앉더니 여준재를 지켜보았다.여준재도 이 사람이 오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빌라 안.사윤영의 털털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던 고다정은 그녀와 같이 점심을 하기로 했다.식사할 때도 두 사람은 점점 의기투합하며 우정을 쌓아갔다.그렇게 오랜 시간의 식사를 마치고 고다정이 적극적으로 먼저 요청했다.“점심도 다 먹었고, 제가 주변을 구경시켜 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너무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사윤영은 설레지만 고다정의 몸 상태가 신경이 쓰였다.고다정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웃으면서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어차피 윤영 씨가 오지 않았어도 밖에 나가려고 했어요. 그리고 제 친구도 소개해 드릴게요. 두 사람 성격도 비슷하고 아마 잘 맞을 겁니다.”“그래요. 그럼 잘 부탁해요.”사윤영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방긋 웃으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이날 오후 2시, 고다정과 사윤영의 점심시간이 끝났다.이때, 임은미도 마침 도착했다.아직 거실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문밖에서 그녀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정아, 내가 왔다!”“왔네요.”고다정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사윤영에게 웃으며 말했다.빠르게 임은미가 깡충깡충 뛰면서 들어왔다.그녀는 옆 소파에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고다정을 보자마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오늘 네가 나한테 전화했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오늘도 하루 종일 집에 갇혀있었을 거야. 전 세계 남자들이 다 이런 건지, 여자가 임신했다고 하면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이 이것도 하지 말라고 저것도 안된다하고, 심지어 이젠 불량식품도 못 먹게 해, 진짜 짜증 나!”말하다가 그녀는 고다정의 옆에 앉으면서 그녀의 팔을 잡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 대표님은 이렇게 많이 신경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우리집 사람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TV도 오래 못 보게 하고 운동하라고 잔소리하고. 하, 임신한 게 이렇게 성가시단 걸 알았다면 애초에...”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끝내는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지 몰라서 머뭇거렸다.고다정은 일부러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놀렸다.“애초에 뭐?”임은
세 사람은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근처 커피숍에서 쉬기로 했다.그러던 중 고다정이 사윤영에게 대뜸 물었다.“저번에 구영진한테서 두 사람이 약혼했다고 들었는데 왜 여태껏 아무 소식이 없었죠?”“아, 그저 두 집에서 식사하면서 임시 정한 겁니다.”사윤영은 말을 마친 뒤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정 씨도 아시다시피 이 약혼도 제가 고집을 피워서 겨우 얻어낸 결과입니다. 저희 엄마 아빠는 제가 구영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결혼 전까지는 미리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만약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때 저한테 피해가 덜하기 때문이죠. 그러다 결혼 날짜까지 잡히고 우리 두 사람이 여전히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때 공개하겠죠.”그녀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고다정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부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네요. 솔직히 저도 윤영 씨랑 구영진이 분명 다른 세계의 사람인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거든요.”임은미는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하니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이때 사윤영이 고다정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고다정도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사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마 저랑 구영진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동경하고 그의 천진함을 지켜주고 싶었나 봐요.”“음... 윤영 씨, 상황이 반대로 된 게 아닐까요?”임은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런 상황이면 보통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지 않나?하지만 사윤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해명했다.“은미 씨가 보기에는 저랑 구영진의 상황이 반대로 된 것 같죠. 근데 우리 두 사람은 자라왔던 환경도 서로 반대에요. 똑같이 집안에 자식이 하나뿐이면 보통 부모님들은 남편감을 찾아서 집안의 사업들을 맡기곤 하겠지만 저희 부모님은 아니었어요.”“그들은 항상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면서 제가 사업을 이어받기를 바랐습니다. 하여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키워주셨죠.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