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라는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참 동안 어리둥절했다.그녀는 강서연을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무슨... 소리에요?”강서연은 피식 웃었다.“제가 보기엔 세상에 공평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같은 집안의 사촌인데 왜 한 명은 친왕으로 뽑혀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고 다른 한 명은... 화장실에 서서 제 치마를 빨아줘야 할까요?”“뭐라고 하는 거예요?”홍유라는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강서연이 이간질을 하더라도 정곡을 찔렀다.홍유라는 송지아를 질투했다. 두 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고 공부도 같이했고 심지어 송지아의 성적은 그녀보다도 못했다.그런데 왜 송지아는 남양왕의 총애를 받아 황실의 유일한 여친왕이 될 수 있었을까.한때 자매였던 그녀는 이제 만나면 먼저 규칙을 준수하여 인사를 해야 하고, 게다가 그녀는 예전처럼 그녀의 이름을 곧이곧대로 부를 수도 없고 또 존칭을 붙여 전하라고 해야 한다.그리고 송지아는 친왕으로 책봉된 이후로 허세도 커졌고 이 친척들과 연락을 거의 하지 않으며 그녀에게도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했다.매번 그녀가 왕궁에 와서 송지아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콧대 높은 홍유라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한이 서리지만 지금 그녀는 조금도 티를 내면 안 되는데 특히 강서연 앞에서는 말이다.가식적인 말은 그래도 해야 한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가 불공평하다고요! 언니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남양왕은 언니의 삼촌이어서 저와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워요! 언니가 친왕으로 뽑히는 것도 모두의 바람이에요!”“그래요.”강서연이 끝음을 길게 늘렸다.“그러면 홍유라 씨는 이 세상에 공평한 것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홍유라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공평함은 어디에나 존재해요.”강서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도 공평하다는 거죠?”홍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서연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했는데 소름이 끼쳤다.“서연 씨, 당신... 도대
그런데 남자 목소리다!강서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귀에 익다고 생각했고 홍유라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오빠, 혁준 오빠 맞아요? 오빠, 도와주세요!”강서연은 순간 멈칫했다.‘문 앞에 송혁준이라고?’이때 문손잡이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강한 노크 소리가 동반됐다.“안에서 뭐 하는 거야? 안 나오면 경비를 부를 거야!”강서연은 피식 웃더니 홍유라를 풀어주었다.‘참 재미없네!’홍유라는 비틀거리며 도망쳤고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의문 가득한 얼굴의 송혁준이 서 있었다.“혁진 오빠!”홍유라는 울부짖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지만, 송혁준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고 팔짱을 낀 채 태연한 태연한 강서연만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서연의 몸에 묻은 와인 얼룩을 보더니 홍유라를 밀치고 그녀에게 직진했다.“괜찮아요?”그의 걱정하는 모습과 긴장한 기색은 정말 연기 같지 않아, 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송혁준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강서연의 어깨를 좌우로 한 바퀴 돌려보더니 그녀가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외상은 없는 것 같은데... 다친 곳 없어요?”강서연이 웃음을 터뜨리자 송혁준이 심각하게 말했다. “아니. 웃지 말고 제 말에 대답해 주세요!”강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입이 떡 벌어진 홍유라를 바라봤다.“전하.”그리고 그녀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서서 송혁준과 거리를 유지했다.“사촌 동생을 더 관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 홍유라 씨가 저때문에 크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방금은 제가 좀 흥분해서...”“혁준 오빠!”홍유라가 얼굴을 붉혔다.“오빠는 어떻게 나보다 이 계집애를 더 걱정할 수 있어요? 이년이 방금 내 머리를...”“입 다물어!”송혁준이 노발대발하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홍유라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고 강서연도 당황했다.역시 친왕은 분위기부터 보통 사람과 다르다.“홍유라, 네가 평소에 어떻게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송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연
강서연은 깜짝 놀라 연거푸 뒷걸음질 쳤다.“안 됩니다! 제 옷은 더러워졌고 술 냄새가 나서 이대로 왕후 앞에 나타나면 너무 실례입니다! 저는...”“진정하세요.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송혁준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손을 그녀의 한 쪽 어깨에 올렸다..강서연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그와 거리를 두려 했고 송혁준은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그녀가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재빨리 손을 치웠다.그리고 예의 바르게 그녀더러 앞에서 걸으라고 했고 강서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송혁준이 자신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맑고 순수했기 때문이다.그녀는 다른 속셈이 있는 남자들을 많이 봐왔다. 예전에 강주에 있을 때 그녀를 자주 괴롭혔던 상사, 그리고 오성에서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그 감독... 그들은 모두 더러운 욕망을 가감 없이 얼굴에 내비췄다.송혁준은 그들과는 달랐고 강서연은 그 순수한 눈동자에서 다정다감한 성격과 사람을 대하는 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그녀는 장차 그가 정말 이 나라의 군주가 된다면 나라를 잘 이끌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서연 씨, 왜 그래요?”강서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송혁준을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여기는 황실 전용 탈의실이에요.”송혁준은 어디선가 옷 한 벌을 꺼내 건넸다.“이것으로 갈아입으세요.”강서연은 약간 놀랐다.그가 손에 들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는 남양의 전통 복장으로 솜씨가 정교하고 금실과 진주로 장식하여 있었다.연분홍색 비단에 수 놓인 두 나비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이건...”송혁준은 신비롭게 웃었다.“먼저 갈아입으세요.”강서연은 탈의실로 들어가 잠시 후 밖으로 나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 옷은 그야말로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한 것이다!목둘레와 소매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으며 허리와 치마의 길이까지도 적당하다.강서연은 송혁준을 바라보며 그녀가 묻기도
“그게...”송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저는 본 적이 없지만 석진 씨의 말을 들어보니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선녀 같은데요!”강서연은 그의 말에 웃었다.나석진은 송지아를 좋아하지 않지만 온순한 송혁준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유치원 때부터 함께 놀다가 중학교에 가면서 떨어졌다.하지만 지리적 거리가 두 사람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상을 공유해왔다.이번에도 나석진이 그에게 서지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고 그녀의 임시거주증명서도 송혁준의 도움을 받았다.“제가 보니 석진 씨는 이번에 제대로 빠졌어요!”송혁준이 웃으며 말했다.“서지현 씨가 그 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석진 씨가 하루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서 주인아주머니는 정말 집을 허물러 온 줄 알아요!”“지현이는 요즘 잘 지내고 있나요?”강서연은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해서 몹시 그리워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석진 씨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강서연은 치마에 놓인 자수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저는 이 치마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송혁준이 시간을 보니 왕후에게 갈 간이어서 두 사람은 함께 궁전으로 걸어갔다.의례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가는 길 곳곳에서 내전으로 가는 황실 귀족들이 보인다.그런데 홍유라만 보이지 않는다.강서연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홍유라는 그녀에게 물벼락을 맞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좀 불쌍하기도 했지만, 먼저 괘씸하게 행동한 그녀였기에 막 차오르는 동정심을 뿌리쳤다. 강서연은 은근히 성격이 있어 쉽게 동정을 남발하지 않는다.그러던 중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그녀는 송혁준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늘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여자 아니에요? 전하께서 왜 여기에 있어요?”송혁준은 눈빛이 변하고 걸음을 멈췄다.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그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렸을 때는 여자아이처럼 생겼는데 때로는 지아 누나와 함께 외출하면 다른 사람들이
강서연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말을 하지 않았다.송혁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에는 한 가닥 의혹을 드러냈다.“누나가 어떻게...”“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마!”송지아는 잔을 들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냉소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이렇게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사람을 너희들이 감춰두다니, 너무 치사하잖아!”강서연은 심호흡을 했다. 송지아가 서지현을 은밀히 조사한 것이 분명하다.여친왕의 세력으로 한 사람을 조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송지아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틀림없이 모두 나석진 때문일 것이다.질투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한다.강서연이 서지현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지아가 먼저 말했다.“숙모께서도 서연 씨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마음에 들죠? 아까 처음 봤을 때 저는 어느 디자이너가 만든 줄 알았어요!”“그래?”왕후가 웃음을 자아냈다.“그렇다면 드레스를 만든 사람이 더 궁금해지는구나! 서연아, 윤씨 가문의 수녀니? 윤씨 가문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어?”“당연히 아니죠!”송지아는 왕후 옆에 앉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설명했다.“서지현이라고 겨우 열여덟 살 된 손재주가 뛰어난 처자에요. 보는 눈도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몰라요. 마음씨도 곱도 얼굴도 너무 예쁜데...”“왜?”송지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양복점에서 잡일을 하고 있대요. 정말 재능이 아까워 죽겠어요.”왕후는 선량하고 재능 있는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어서 송지아의 말을 듣고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괜찮은 처자가 어찌 양복점에서 일하고 있어!”“그러니까요! 숙모, 아니면...그녀를 궁전으로 불러와서 숙모를 위해 옷을 만들게 하는 건 어때요?”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테이블 아래서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졌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서지현을 황궁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서지현은 지금은 임시거류증명서만 있을 뿐, 그녀가 정식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이 황궁에 갇혀 있을 수는 없
“혁준아.”송지아가 그를 비꼬며 이상하게 말했다.“설마... 너에게 이런 취미가 있니?”송혁준이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고 그의 눈빛에 송지아는 깜짝 놀랐다. 누나인 그녀는 한 번도 온화하고 순진한 남동생에게 이런 흉악한 눈빛이 있었는지 몰랐다.송지아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친왕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했다.“너... 뭘 하려고?”“누나, 왜 그렇게 긴장해?”송혁준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방금 누나가 나를 협박했지. 나는 아무말도 안 했잖아!”송지아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송혁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누나에게 할말에 있는데... 누나가 홍유라를 시켜서 강서연을 괴롭힌 거지?”“무슨 헛소리야!”“됐어, 송지아가 인정하기 만무하지.”송혁준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누나 명심해. 세상에 바보는 없어. 홍유라가 누나한테 이용당하는 게 친해서가 아니라 누나한테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야. 그리고 강서연도...”그는 한숨을 쉬었다.“강서연이 만만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 사람 앞서 20년은 강주에 살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최씨 가문의 사모님이자 윤씨 가문의 아가씨야. 장차 윤씨의 뒤를 이을지도 몰라. 누나가 아직도 왕위를 물려받고 싶으면 강서연한테 함부로 하지 말고 윤씨 가문을 끌어들여야지! 누나가 계속 이렇게 행동할 거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송지아는 순간 얼굴빛이 변하더니 화가 나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송혁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심한 듯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하지만 자신의 속내가 그렇게 빨리 간파된 탓인지 이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사실 어릴 때 송지아는 이런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는 남자아이들과 놀지 않고 늘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주변에는 나석진 말고는 친구도 별로 없다.송지아는 처음에는 그가 바람둥이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송혁준은 몸을 뒤척이며 두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고개를 저었다.“얼른 들어가세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녀의 집 쪽을 바라보는 송혁준의 눈빛이 포착됐다.뭔가를 찾는 것 같은데...강서연의 마음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송혁준이 그녀에게 잘해주고 사사건건 감싸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의 직감으로는 그게 남녀의 정이 아닌 것 같았다.예전에 임우정도 그녀에게 이렇게 대했고, 곽보미도 그녀에게 이렇게 대했고, 최연희도 그녀에게 이렇게 대했고, 서지현도 그녀에게 이렇게 대했다...하지만 송혁준은 남자잖아!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송혁준을 슬쩍 쳐다보고는 억지로 웃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자 최연준이 부엌에서 저녁 밥을 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앞치마를 두르고서는 그녀에게 칭찬을 들으려는 웃음을 지었다.“아내가 집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빨리 손 씻고 밥 먹어.”강서연은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전부 당신이 만든 거예요?”고기찜, 두부말이, 새우튀김, 찹쌀떡...최연준은 또 밥 두 그릇을 가져와 직접 토마토 스크램블을 흰 쌀밥 위에 얹었는데 냄새가 고소하고 매우 먹음직스러웠다.강서연은 오후 내내 왕후 곁을 지켜 숙녀 행세를 하고 있어 예의범절을 지키느라 다과 한 입도 먹지 않았다.지금 이 식탁의 음식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당신 정말 대단해요.”그녀는 마치 주꾸미처럼 최연준의 몸에 붙어 그의 볼에 뽀뽀했다.이를 즐기던 최연준은 웃으면서 뒤에 있던 집사에게 집을 나설 때 부엌문 뒤에 숨겨둔 호텔 포장지를 버리는 것을 잊지 말라고 슬쩍 손짓을 했다.집사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들었다.사실 그는 오후 내내 집사에게서 요리를 배웠는데 토마토 스크램블만 배우고 주방을 전쟁터로 만들었다.그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아들은 잠들었어. 편하게 밥 먹으면 돼.”강서연이 애교를 부렸다.“당신도 같이 있어 줘요
강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내가 말한 건 우리예요! 우리뿐만 아니라 석진 오빠 심지어 지현이에게도 잘해주잖아요! 나는 그분을 알기 전에는 왕족들은 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혁진 씨가 확실히 내 생각을 바꿨어요. 좋은 분이에요. 여보, 왜 그런 것 같아요?”‘다른 이유가 있겠어? 한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까지 챙기는 거지.’송혁준은 강서연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녀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배려한 것이다.‘허, 사랑꾼인 줄은 몰랐네.’최연준은 심호흡하고 젓가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고 너무 오므렸던지 뼈마디가 하얗게 보였다.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다만 그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 아래에서 사색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뿐이다.“윤씨 가문을 포섭하려고 하는 행동일 수도 있지.”최연준은 미소를 지었다.“윤제 그룹은 남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나씨 가문과도 관계가 있어 두 가문을 포섭하면 왕위 계승에도 유리하지.”“그러면 송지아는 왜...”“그래서 송혁준이 똑똑하다는 거야.”최연준은 안색이 덤덤했다.“송지아는 거만하지만 송혁준은 성경이 좋아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쉽잖아. 생각해 보면 남양 사람들은 어떤 군주를 더 원할까? 그가 당신에게 잘해주는 것이 진심이 아닐지도 몰라, 그런 사람은 매사에 목적이 있을 거야. 왕위가 그의 목적이야.”그는 사랑스럽게 강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바보 같은 마누라, 당신은 총명하지만 너무 감성적이야.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다 마음에 새기고 보답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돼!”강서연은 입술을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까 앞으로는 남편 뒤에 있어.”최연준은 입꼬리를 올려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은 채 낮고 자성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남편이 지켜줄게. 사실 나는 송혁준 친왕을 좋게 보고 있어.“그는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했다.“왕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의 생존법이니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응.”강서연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