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은 신석훈이 생애 처음으로 수술대 위에서 두 손을 떨며 서 있는 모습이었다.훌륭한 외과 의사의 손은 메스를 쥐고 있을 때는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의 신석훈은 그렇게 할 수 없다.왜냐하면 그의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이기 때문이다.최연준이 아직 인지석과 계산해야 할 빚이 있어 특별히 그의 목숨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였기 때문에 지금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신석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의 이상한 표정을 감지하고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아서 말했다.“선생님, 수술 시작해도 될까요?”신석훈은 고개를 돌려 인턴을 보며 지시했다.“여러분은 흰 가운도 한동안 입고 다녔는데 실습 기회가 없어 제대로 수술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몇몇 인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약간의 놀라움을 드러냈다.“이 환자는 어깨뼈에 총을 맞았습니다.”신석훈은 앞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열고 이 수술에 대한 모든 상세한 데이터와 자료를 보여주었다.“지금부터 여러분이 이 총알을 빼고 제가 옆에서 지도하겠습니다.”“신... 선생님?”인턴들은 뜻밖의 기회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의대생들의 실습 생활은 참혹하기 짝이 없는데 특히 이런 갓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단시간에 메스를 들 기회가 없다.학교에서 이미 수천 번의 연습을 했고 모든 혈관과 뼈와 근육의 위치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술실에서는 실험이 아니라 실전이다.경험이 있는 집도의는 이런 기회를 쉽사리 인턴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고 신석훈조차도 오랫동안 버텨왔다.하지만 지금 그들은 병원에 들어오자마자...“왜요?”신석훈이 웃었다.“할 수 없어요?”“아닙니다.”인턴은 그를 보며 물었다.“선생님이 왜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는지 궁금해서...”“여러분은 제가 가르쳤던 최고의 학생들입니다!”신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팔목을 움직였다.“저는 최근에 건초염이 생겨 메스를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부 인지석이 최연희에게 한 짓들을 되갚아 주는 것이다.신석훈은 심호흡하며 자신이 의사로서 어느 날 악마와 같은 짓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의 두 손은 자기도 모르게 떨렸는데 이건 악마가 되어서가 아니라 최연희가 받은 억울함 때문이다.“선생님, 봉합을 시작해도 됩니다.”“잘했습니다.”신석훈은 죽어가는 인지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그는 죽지 않을 것이고 며칠만 치료하면 상처도 다 나을 건데 그가 최연희에게 준 상처는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신석훈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런 사람은 정말 직접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수술실에서 전해오는 비명을 전부 들었다.최연준은 차가운 얼굴로 조각상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고 강서연은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 채 작은 손이 그의 손등을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손은 약간 차가웠는데 임신한 이후로 그녀는 항상 열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왜 매번 최연준이 그녀의 손을 잡을 때처럼 손바닥의 온기가 온몸으로 빠르게 전해지지 않는가에 대해 약간의 자책을 느꼈다.“여보.”강서연은 부드럽게 그를 불렀지만 위로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최연준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고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녀 앞에서만은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신석훈이 걸어 나오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해 물에서 건져 올린 듯했고 최연준을 보자 그는 억지웃음을 했다.“인지석은 죽지 않을 거지만 이틀 안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을 것이에요.”“알고 있어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수고했어요.”신석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사실 지금 그는 뒤늦게 깨달았지만 인지석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지석이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최연희에 대한 감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최연준이 구현수 신분으로 강서연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주의 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을 때 몇몇 동네 양아치들이 그
“하지만, 사모님...”방한서는 입술을 핥았다.“아가씨는 증인으로 출석해야 합니다. 경찰이 요구한 것입니다.”“괜찮아요.”신석훈은 눈빛이 견고했다.“연희가 법정에 출두할 때는 제가 옆에 있을 거예요.”강서연과 최연준은 이 말을 듣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신석훈은 마른기침을 두 번 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저는... 좀 피곤해서 먼저 집에 가서 쉴게요ᩚ.”“네, 푹 쉬세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연희 씨는 석훈 씨와 함께 법정에 출두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신석훈은 그들을 보고 웃으며 돌아섰다.며칠 후 인지석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어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허약해 보였다. 흉악한 눈빛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막상 최연준을 보는 순간 다시 살아난 빈대처럼 목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봤다.하지만 빈대는 결국 빈대일 뿐이다.최연준은 눈빛이 싸늘하고 무표정하게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요 며칠간 당신이 받은 치료는 최상이야. 여기서 당신은 안전하고 아무도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아.”아무도 그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자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24시간 당직 의사의 교대 외에도 그의 자살을 방지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인지석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도련님께서 저를 살려둔 것은 결국 저를 죽게 하기 위한 거잖아요.”“맞아.”최연준이 그를 멸시했다.“당신을 죽게 하는 것은 내가 법을 대신해서 판단할 수 없어. 반드시 정당한 방식을 통해 너에게 사형을 선고할 거야.”인지석이 소름 끼치게 웃기 시작했다. 이전의 음흉함과 달리 오늘 그의 눈에는 약간의 슬픔과 절망이 비쳤고 비애가 더 많다.어쩌면 사람이 죽기 전에 감정을 위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인지석.”최연준이 담담하게 물었다.“그동안 최씨 가문에 잠복하면서 최지한과 삼촌을 이용하고 또 연희에게 접근했다가 구현수가 나타나면서 또 구현수를 이용하고... 네가 한 이 일들이 정말 마약을 판매하기
“신 선생님께서 말해준 거예요.”“네.”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상자를 들고 나갔다.뒤이어 간호사들이 속속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링거를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회복되는 상황을 기록하려고 했지만 예외 없이 모두 최연준에게 내쫓겼다.방 안에는 그와 인지석 두 사람만 있었고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최연준은 한가로이 앉아서 여유를 부리며 인지석을 끝까지 밀어붙일 기세였다.그러나 인지석의 상처는 더 이상 끌 수가 없었다.상처가 아플 뿐만 아니라 가렵기도 하고 거즈는 흘러나오는 피와 같이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인지석은 머리에 땀이 흥건하고 얼굴마저 일그러졌다.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회복하고 싶어도 회복이 잘 되지 않아서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최연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들어올 때부터 나는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했어!”최연준이 차갑게 말했다.“진실? 허... 당신같이 양심도 없는 사람이 진실을 알더라도 뭐가 달라지겠어요? 당신은 여전히 쾌락의 나날을 보낼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최연준은 너무 아리송하게 들려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소리하는 거야?”인지석이 천천히 눈꺼풀을 치켜들며 또박또박 물었다.“최연준, 추아름을 기억해요?”‘추아름?’최연준은 머릿속 기억을 뒤적여보니 어렴풋이 대학 다닐 때 추아름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던 것 같았다.그가 다니는 경영대의 3분의 2의 학생은 전부 명문 출신이다.일부분 가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노력과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끈기로 세계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5대 명문 학교에 합격한 소수의 학생이 있었는데 추아름이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그녀는 인지석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추아름은 경영대의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났고 인지석은 여기서 죽어라 일해서 생활비를 벌어 그녀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저금하며 추아름이 졸업하고 귀국하는 날 괜찮은 반지를 사서 그녀
최연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일의 경위를 대강 알았다. 인지석과 추아름은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고 인지석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추아름은 외국에 가자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 또 좋은 친구라는 네 글자로 두 사람의 감정을 함께 지워버렸다.나중에 그녀가 죽자 인지석은 비분이 가슴에 가득 차서 최씨 가문에 대한 복수를 전개하였다.그러나 최연준의 기억 속에서 추아름라는 이름을 파낼 수 없었다.알 수 없는 복수 하나 때문에 최씨 가문에서 소란을 피우다니!최연준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인지석, 나는 추아름이 누군지 전혀 몰라. 여기서 허튼소리 하지 마!”“당신 정말 뻔뻔하네요...”인지석은 격분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것은 그저 네가 복수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야.”최연준은 위풍당당한 기세를 풍기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마 이 세상에는 추아름라는 사람이 없을 거야!”“당신...”인지석은 얼굴빛이 변하고 뭔가 흥분한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최연준은 눈빛이 어두워졌고 추아름이 가장 좋은 돌파구라고 생각해 이 점을 파고들어 반드시 그가 최씨 가문에 복수한 진짜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다!“내 말이 맞았지?”최연준이 냉소했다.“세상에 없는 존재를 꾸며내서 나랑 내 가족을 해치다니. 너는 망상증이 있는 거야? 아니면 편집증이 있는 거야?”“헛소리하지 마요.”인지석은 한 손으로 침대 옆 난간을 꼭 잡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뜻밖에도 노여움으로 인해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그는 최연준을 매섭게 노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 것 같았다.최연준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이 추아름이 실존 인물이라면 너에게 보낸 편지에는 분명히 나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언급했을 거야. 인지석,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해 봐.”인지석은 그를 반쯤 쳐다보고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만일 네가 말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 없어. 없는 사람이라고.”“아!
어쩐지 한동안 경영대에 최씨 가문 넷째 도련님이 또 여학생의 표적이 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이런 소문은 최연준이 어려서부터 무수히 들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는데 나중에 넷째가 어찌 된 영문인지 퇴학을 하고 급히 귀국하여 국내의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가문에는 누구도 최연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묻지 않았다.일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어째서 이런 표정을 짓는 거예요?”인지석이 콧방귀를 뀌었다.“생각이 났어요? 당신이 아름이를 죽였어요. 최씨 가문은 아름이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요!”최연준은 심호흡하고 한참 후 차갑게 말했다.“토론 대회에 참가한 것은 내가 아니야.”“뭐라고요?”인지석이 이를 악물었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변명을 할 거예요?”“그건 내가 아니라 내 동생 최연서야.”인지석은 귓가에 굉음을 내며 눈을 부릅뜨고 입술이 살짝 떨렸다.“나는 토론 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어.”최연준은 똑똑하게 말했다.“그 대회에 내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내가 가기 싫어서 내 동생이 대신 가겠다고 나섰어.”외국인은 최연준인지 최연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다만 그들의 성이 모두 최씨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단에는 최연준이었다.최연서는 극도로 유머러스한 말로 분위기를 완화하기도 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로 상대 허를 찌르기도 해서 훌륭한 변론가였다.게다가 반듯한 외모에 몸에 밴 젠틀함으로 여자들의 시선을 쉽게 사로잡는다.최연서는 작은 삼촌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보호를 받아 마음이 순수하고 좀 어리숙하기까지 했다. 여자가 접근해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여자에게 잘해주었다.생각해 보면 최연서와 추아름 사이는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최연서는 종종 친구들과 도서관에 가 공부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정상이었다.또 그는 야외 활동을 좋아해서 종종 친구들과 같이 놀러 나가곤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캠핑을 가는 것이 정상이었다.무도회는 경영
최연준이 병실 밖으로 걸어 나올 때 마음이 큰 바위에 눌린 것 같았다.추아름의 죽음은 그와는 상관이 없지만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그는 병원 입구에 한참 서서 담배를 피운 뒤 경찰 몇 명이 급히 입원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인지석의 마약 밀매 수로 처벌하면 사형도 그를 우대하는 것이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운 후 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밤경치를 바라보았는데 이 지저분한 일들을 뒤로하고 아내에게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도련님.”방한서가 걸어왔는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최연준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최연서 일을 조사하러 갔었어?”방한서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셋째 도련님의 훌륭한 오른팔로서 당연히 일이 눈에 보여야 한다.조금 전에 병실 밖에서 최연서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수사에 착수했다.“잘했어.”최연준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드디어 눈치가 빨라졌네.”방한서는 자기가 도련님과 사모님의 좋은 일을 망친 것 말고는 또 언제 눈치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에 잠겼다.“뭐가 나왔는지 말해봐.”“박 집사님이 당시의 일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 물어봤어요. 넷째 도련님은 그 여자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날 밤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 사고였지만 당시 학교에 있던 최씨 가문과 원한이 있는 가문이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았어요. 그때 넷째 도련님은 겁이 많아서 스스로 도망쳐 돌아왔어요.”최연준은 답답한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이 빌어먹을 최연서가 온종일 여자에게 신사답게 굴더니 결국에는 인지석 이 미친놈을 건드렸다.그리고 그 영어 이름 마크도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최연서라고 소개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최연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추아름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보고 그 사람의 묘비 앞에 꽃다발을 놓아 줘.”“네, 알겠습니다.”“응.”말이 끝나자마자 최연준은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두 발짝 걷다가 다시 멈춰 몸에서 나는 냄새를 힘껏 맡았다.‘재킷에서 담배
조금 전까지도 졸음이 몰려왔던 강서연은 그의 말에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누굴 때리겠다고요?”최연준은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보았다.“여보, 그게...”“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 벌써 매를 들 생각부터 해요?”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최연준은 밖에서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유독 강서연 앞에서는 기를 못 펴고 깨갱거렸다.“아니, 아니, 그 뜻이 아니라...”그가 멋쩍게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당신이 아까 임신하면 몸의 열을 아이에게 나눠줘야 해서 자꾸 추운 거라며?”“아무리 그래도 때려선 안 되죠.”“그래...”최연준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여보, 그럼 나중에 걔가 커서 잘못을 저지르면 때려도 돼?”“그것도 안 돼요.”강서연은 다시 한번 그를 째려보았다.“아이가 잘못하면 나무라고 가르쳐야지, 걸핏하면 손을 대서야 하겠어요? 연준 씨 경고하는데 나중에 우리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여자는 엄마가 되면 아무리 다정하고 얌전하던 토끼도 사나운 호랑이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남녀의 감정이 완전히 다르다. 여자는 10달 동안 아이를 품고 두 사람의 감정은 탯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최연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강서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몇 달 후면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예쁨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여 이 기회에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 생각에 최연준은 온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은밀한 그곳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강서연은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밀당이 제대로 먹혔는지 곧바로 최연준의 탄탄한 가슴에 쏙 안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서연아.”최연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3개월 됐지?”“네...”정말 3개월이 금방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