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까지도 졸음이 몰려왔던 강서연은 그의 말에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누굴 때리겠다고요?”최연준은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보았다.“여보, 그게...”“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 벌써 매를 들 생각부터 해요?”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최연준은 밖에서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유독 강서연 앞에서는 기를 못 펴고 깨갱거렸다.“아니, 아니, 그 뜻이 아니라...”그가 멋쩍게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당신이 아까 임신하면 몸의 열을 아이에게 나눠줘야 해서 자꾸 추운 거라며?”“아무리 그래도 때려선 안 되죠.”“그래...”최연준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여보, 그럼 나중에 걔가 커서 잘못을 저지르면 때려도 돼?”“그것도 안 돼요.”강서연은 다시 한번 그를 째려보았다.“아이가 잘못하면 나무라고 가르쳐야지, 걸핏하면 손을 대서야 하겠어요? 연준 씨 경고하는데 나중에 우리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여자는 엄마가 되면 아무리 다정하고 얌전하던 토끼도 사나운 호랑이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남녀의 감정이 완전히 다르다. 여자는 10달 동안 아이를 품고 두 사람의 감정은 탯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최연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강서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몇 달 후면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예쁨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여 이 기회에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 생각에 최연준은 온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은밀한 그곳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강서연은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밀당이 제대로 먹혔는지 곧바로 최연준의 탄탄한 가슴에 쏙 안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서연아.”최연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3개월 됐지?”“네...”정말 3개월이 금방
오늘 밤 바깥 기온도 뚝 떨어져 이불을 꽁꽁 덮어야 한다. 그러면 이불 밑에서 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까......그동안 신석훈은 줄곧 최연희의 곁을 지켰다.여러 일을 겪고 난 후 신석훈도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최연희는 우울증이 걸렸었던 예전처럼 다시 웃지도 않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신석훈은 말주변이 없어 최연희를 즐겁게 할 방법을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는 것뿐이었다.그날 최연준과 강서연이 성수 별장에 도착했을 때 은미연이 최연희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발끝을 들고 문틈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통통한 그녀의 뒷모습에 옅은 처량함이 묻어있었는데 어머니로서의 근심과 걱정이 충분히 느껴졌다.강서연은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그녀도 예비맘이라 그런지 공감이 됐고 지금 은미연의 기분이 어떨지 누구보다 잘 이해되었다.“어머, 연준이와 서연이 왔어?”은미연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오늘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장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딸에게 일이 생긴 후로 은미연도 기운이 나질 않았다. 어쨌거나 세대 차이 때문에 딸의 세상에 들어갈 수 없어 옆에서 조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인지석이 그렇게 나쁜 놈인 줄은 정말 몰랐어.”은미연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연준아, 너도 알잖아. 난 집안이나 신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연희만 좋다면 무조건 허락했었는데... 이게 다 내 탓이야. 엄마라는 사람이 딸이 가스라이팅을 그렇게나 오래 당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대표님, 그런 말 말아요.”강서연은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대표님은 연희 아가씨를 감싸주고 존중해 주었고 건강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키웠어요. 그리고 공주병이 없는 진짜 공주로 자라게 했죠... 이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예요.”“서연아...”은미연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강서연은 웃음을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하러 마당에 나갔다. 가끔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최연준이 어두운 얼굴로 거실에 앉아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 눈빛에는 마치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저녁에 딱 기다려!’강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져 그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방안의 최연희는 이미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고개를 들고 신석훈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른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최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신석훈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예전에 임우정을 좋아한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임우정의 마음속에 아직 육경섭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신석훈은 스스로 알아서 물러났고 두 사람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그런데 지금 최연희가 그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신석훈은 무조건 최선을 다해 그 남자와 경쟁할 것이다. 마치 중세기에 사랑을 위해 결투를 벌였던 기사처럼 말이다.맨날 수술칼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니 검을 들어도 아주 용맹해질 것이다.“선생님...”최연희가 그를 슬쩍 부르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래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신석훈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릇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깨끗하고 청순한 모습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다음 단계는 뭘 해야 할까?어떤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고백해야지!’신석훈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잡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진지한 얼굴로 셔츠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그 모습에 최연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또 수업하려는 건가? 또 시험지를 풀어야 해? 아이고, 나 좀 살려줘.’“연희야,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아니요. 하지 말아요.”최연희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고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수능이 코앞인 것도 알고 1년 휴학한 것도 알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5개월이 거의 됐고 강서연의 배도 조금씩 불러왔다.입덧이 끝나니 먹덧이 시작됐다. 뭐든 다 잘 먹은 덕에 아이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고 다른 임산부들보다도 배가 더 불러온 듯했다.배만 볼록하게 나온 것 말고는 팔다리는 여전히 가늘었고 혈색도 하루가 다르게 점점 좋아졌다.이젠 태동도 자주 느껴졌다. 아이가 뱃속에서 몸을 뒤집고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만 상상하면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얼굴에 행복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옆에서 그런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윤정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연합 병원의 의학 상황을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또 오성에 다녀갔다. 이번에 그는 직접 진맥하였는데 한의학과 서양 의학을 결합하여 강서연 배 속의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최씨 가문 전체가 떠들썩해졌다.최재원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소파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더라도 웃으면서 깨곤 했다. 그는 당장 사람을 보내 스위스 은행에 수년간 넣어뒀던 다섯 개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이 상자들은 최연준도 본 적이 없었는데 보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상자마다 빛이 번쩍거리는 금이 가득했다. 금 자물쇠와 금 팔지, 옥이 박힌 금목걸이가 셀 수 없이 많았고 가장 놀라운 건 가지런히 놓인 금괴들이었다.상자 하나만 해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다섯 개면 대체 얼마나 될까?“할아버지, 이건...”“뭘 봐?”최재원은 상자를 꼭 끌어안고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최연준을 쳐다보았다.“이건 다 내 증손자에게 주는 거니까 넌 꿈도 꾸지 마.”최연준이 잠깐 멈칫했다. 예전에도 이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그가 9살 되던 해에 생일 케이크에 수은이 발견된 바람에 겁을 먹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괜찮아졌다. 그때 할아버지가 침향목으로 만든 상자를 꺼냈는데 그
“내가 꿈에서 봤는데 아주 잘생긴 남자아이였어요.”강서연은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꿈에서 본 아이는 대략 서너 살쯤이었는데 하얗고 통통한 게 엄청 귀여웠어요.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면서 안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생김새는 당신과 많이 닮았어요.”강서연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정말 리틀 최연준이 따로 없었다니까요.”최연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혹시... 막 화도 내고 그랬어?”“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강서연이 더욱 활짝 웃었다.“꿈에서 당신에게 막 대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고 귀엽든지.”최연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그런 꿈꿨었어.’대든 것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대놓고 그의 여자를 끌어안고 도발하기도 했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점점 더 힘을 주었다. 강서연이 아프다고 말한 후에야 최연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안해, 미안해. 내가 아프게 했어...”“가까이 오지 말아요.”“응?”강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나 지금 더위를 쉽게 타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요.”최연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두 다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해 주었다.임신한 후로 강서연은 가끔 다리에 쥐가 났고 두 다리도 심하게 부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굴에 기미도 조금 생겼다.임신하면 호르몬 분비가 고르지 못하여 생기는 증상이라 미관에는 딱히 영향이 없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 관리만 잘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강서연이 거울 앞에서 한숨 쉬는 모습을 그는 종종 보았다.하긴, 어느 여자가 아름다움을 싫어하겠는가? 게다가 임신 전에는 그렇게 예뻤던 그녀였는데.그에게 아이를 낳아주기 위해 강서연은 너무도 많은 걸 바쳤다. 그 생각만 하면 최연준은 마음이 아파 다리를 마사지해 주는 것으로나마 고생을 덜어주려 했다.“여보.”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강서연
몇몇 남자들이 오랜만에 술집 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최근 경사스러운 일이 꽤 많았다. 배경원과 임수정이 약혼했고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결혼과 동시에 두 회사도 본격적으로 손을 잡기 시작할 것이다.앞으로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더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신석훈도 고백에 성공했고 최연희는 일곱 과목 전부 A를 받으면서 오성 의대에 파격적으로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학사와 석사 연계 과정 자격까지 얻었다.그녀는 신석훈과 함께 박사 공부까지 마친 후 같은 수술대에서 손을 잡기로 약속했다.육경섭은 그런 두 사람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원래 연애도 저렇게 하나? 박사 공부를 마치면 나이가 몇인데 두 사람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애를 낳아? 평생 인류 의학 사업에 공헌하겠다는 건가?’“경섭 형님처럼 배운 게 없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알 리가 없죠.”배경원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육경섭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겨보자 배경원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육경섭은 양을 덮치는 늑대처럼 배경원을 덮치더니 아주 신속하게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빼앗았다.방한서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털을 빗겨주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는 그가 데려다 키우는 길고양이였고 이름을 캡틴이라 지었다. 뚱냥이보다 적게 먹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훨씬 강했다.방한서가 티격태격하는 육경섭과 배경원을 보며 응원하자 캡틴도 옆에서 야옹 하며 흥분했다.최연준은 여유롭게 담배에 불을 붙였고 육경섭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장모님의 예쁨을 받는 사위는 역시 달랐다...그런데 함께 어울리는 그들과 달리 유찬혁은 딴 세상 사람처럼 여전히 혼자서 수심에 찬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곽보미와의 관계가 아직도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평소에는 말주변이 좋은 변호사지만 곽보미 앞에만 서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싸우다 지친 육경섭과 배경원이 유찬혁의 양쪽에 앉아 눈빛을 주고받자마자 유찬혁의 기분을
며칠 후 강서연은 최연준과 함께 맨체스터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행히 임신 반응도 없어서 이틀 동안 시차 적응을 마치니 활기를 되찾았다.이제부턴 이 도시의 이모저모를 구경할 계획이었다.이곳은 최연준이 자란 곳이다. 런던 날씨와 달리 안개도 자욱하지 않았고 매일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건물마다 역사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있었다.맨체스터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해가 질 때면 하얀 비둘기 떼들이 성당 위를 날아다니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남겼다.강서연은 이곳에 오자마자 바로 마음에 들었다.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올드 트래퍼드에 가서 축구 경기도 보았고 노던 쿼터에 가서 신기하고 희한한 물건을 사기도 했으며 앨버트 광장에서 비둘기 먹이도 주곤 했다.예전에 최연준은 기분이 우울할 때만 이곳에 왔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광장의 비둘기들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걸 보니 아무래도 꽤 살만한 모양이다.“여기 좋지?”최연준은 뒤에서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느다란 허리는 진작 사라졌다.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면 아마 안기도 버거울 것 같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좋았고 그의 품에 안겨있는 지금이 더 좋았다.사실 강서연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최연준이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최연준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녀 눈에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요 며칠 충분히 놀았으니까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가봐야겠죠?”“응.”강서연의 질문에 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맨체스터에 금방 도착했을 때 김자옥은 환영파티를 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신한 그녀가 그런 장소에 가기 불편한 점을 고려하여 파티를 간단한 가족 모임으로 바꾸었다.강서연은 이 기회에 김씨 가문의 가족들과 얼굴을 익혔다.외할아버지는 아주 다정하신 분이었다. 얼핏 보면 최재원처럼 위엄이 넘
“아무튼 난 당신과 함께 싸울 거예요.”그의 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강서연의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했다.“예전부터 늘 그랬던 거 아니었나요?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 해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로 약속했었잖아요.”최연준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었다.“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은데?”“아직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해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울렸다. 민망한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두 볼이 저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올랐다.최연준은 그런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크게 웃었다.“여보, 난 당신이 뭘 하면 좋을지 생각났어. 차라리 여기서 한식집을 열어서 먹으면서 돈을 버는 거야. 어때?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지?”강서연이 펄쩍 뛰며 그를 때리려 하자 최연준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이따가 더 많이 먹으니까.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시 중심의 호텔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 그중 한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아가씨, 저분이 바로 연준 도련님과 함께 오성에서 온 사모님이에요.”“응, 알아.”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아가씨, 그럼 앞으로는 어찌하실 건지...”“뭔 소리야 그게?”소녀가 도우미를 째려보았다.“연준 오빠가 데려온 새언니인데 당연히 사이좋게 잘 지내야지.”그러고는 또다시 히죽 웃어 보였다.소녀는 스타일리쉬한 모직 코트에 체크 원피스를 매치했고 옥스퍼드 슈즈까지 신어 완벽한 영국 스타일을 보여줬지만 얼굴은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온화해 보였으며 타고난 요염함이 돋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대학생이었지만 옆에 세워진 고급 자동차가 그녀의 남다른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아가씨, 연준 도련님이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하신답니다.”“그래...”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내일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