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웃음을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하러 마당에 나갔다. 가끔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최연준이 어두운 얼굴로 거실에 앉아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 눈빛에는 마치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저녁에 딱 기다려!’강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져 그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방안의 최연희는 이미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고개를 들고 신석훈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른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최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신석훈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예전에 임우정을 좋아한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임우정의 마음속에 아직 육경섭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신석훈은 스스로 알아서 물러났고 두 사람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그런데 지금 최연희가 그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신석훈은 무조건 최선을 다해 그 남자와 경쟁할 것이다. 마치 중세기에 사랑을 위해 결투를 벌였던 기사처럼 말이다.맨날 수술칼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니 검을 들어도 아주 용맹해질 것이다.“선생님...”최연희가 그를 슬쩍 부르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래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신석훈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릇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깨끗하고 청순한 모습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다음 단계는 뭘 해야 할까?어떤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고백해야지!’신석훈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잡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진지한 얼굴로 셔츠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그 모습에 최연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또 수업하려는 건가? 또 시험지를 풀어야 해? 아이고, 나 좀 살려줘.’“연희야,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아니요. 하지 말아요.”최연희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고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수능이 코앞인 것도 알고 1년 휴학한 것도 알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5개월이 거의 됐고 강서연의 배도 조금씩 불러왔다.입덧이 끝나니 먹덧이 시작됐다. 뭐든 다 잘 먹은 덕에 아이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고 다른 임산부들보다도 배가 더 불러온 듯했다.배만 볼록하게 나온 것 말고는 팔다리는 여전히 가늘었고 혈색도 하루가 다르게 점점 좋아졌다.이젠 태동도 자주 느껴졌다. 아이가 뱃속에서 몸을 뒤집고 기지개를 켜는 귀여운 모습만 상상하면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얼굴에 행복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옆에서 그런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윤정재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연합 병원의 의학 상황을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또 오성에 다녀갔다. 이번에 그는 직접 진맥하였는데 한의학과 서양 의학을 결합하여 강서연 배 속의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최씨 가문 전체가 떠들썩해졌다.최재원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소파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더라도 웃으면서 깨곤 했다. 그는 당장 사람을 보내 스위스 은행에 수년간 넣어뒀던 다섯 개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이 상자들은 최연준도 본 적이 없었는데 보자마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상자마다 빛이 번쩍거리는 금이 가득했다. 금 자물쇠와 금 팔지, 옥이 박힌 금목걸이가 셀 수 없이 많았고 가장 놀라운 건 가지런히 놓인 금괴들이었다.상자 하나만 해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다섯 개면 대체 얼마나 될까?“할아버지, 이건...”“뭘 봐?”최재원은 상자를 꼭 끌어안고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최연준을 쳐다보았다.“이건 다 내 증손자에게 주는 거니까 넌 꿈도 꾸지 마.”최연준이 잠깐 멈칫했다. 예전에도 이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그가 9살 되던 해에 생일 케이크에 수은이 발견된 바람에 겁을 먹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괜찮아졌다. 그때 할아버지가 침향목으로 만든 상자를 꺼냈는데 그
“내가 꿈에서 봤는데 아주 잘생긴 남자아이였어요.”강서연은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꿈에서 본 아이는 대략 서너 살쯤이었는데 하얗고 통통한 게 엄청 귀여웠어요.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면서 안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생김새는 당신과 많이 닮았어요.”강서연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정말 리틀 최연준이 따로 없었다니까요.”최연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혹시... 막 화도 내고 그랬어?”“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강서연이 더욱 활짝 웃었다.“꿈에서 당신에게 막 대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고 귀엽든지.”최연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그런 꿈꿨었어.’대든 것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대놓고 그의 여자를 끌어안고 도발하기도 했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점점 더 힘을 주었다. 강서연이 아프다고 말한 후에야 최연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미안해, 미안해. 내가 아프게 했어...”“가까이 오지 말아요.”“응?”강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나 지금 더위를 쉽게 타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요.”최연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두 다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해 주었다.임신한 후로 강서연은 가끔 다리에 쥐가 났고 두 다리도 심하게 부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굴에 기미도 조금 생겼다.임신하면 호르몬 분비가 고르지 못하여 생기는 증상이라 미관에는 딱히 영향이 없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 관리만 잘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강서연이 거울 앞에서 한숨 쉬는 모습을 그는 종종 보았다.하긴, 어느 여자가 아름다움을 싫어하겠는가? 게다가 임신 전에는 그렇게 예뻤던 그녀였는데.그에게 아이를 낳아주기 위해 강서연은 너무도 많은 걸 바쳤다. 그 생각만 하면 최연준은 마음이 아파 다리를 마사지해 주는 것으로나마 고생을 덜어주려 했다.“여보.”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강서연
몇몇 남자들이 오랜만에 술집 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최근 경사스러운 일이 꽤 많았다. 배경원과 임수정이 약혼했고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결혼과 동시에 두 회사도 본격적으로 손을 잡기 시작할 것이다.앞으로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더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신석훈도 고백에 성공했고 최연희는 일곱 과목 전부 A를 받으면서 오성 의대에 파격적으로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학사와 석사 연계 과정 자격까지 얻었다.그녀는 신석훈과 함께 박사 공부까지 마친 후 같은 수술대에서 손을 잡기로 약속했다.육경섭은 그런 두 사람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원래 연애도 저렇게 하나? 박사 공부를 마치면 나이가 몇인데 두 사람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애를 낳아? 평생 인류 의학 사업에 공헌하겠다는 건가?’“경섭 형님처럼 배운 게 없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알 리가 없죠.”배경원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육경섭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겨보자 배경원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육경섭은 양을 덮치는 늑대처럼 배경원을 덮치더니 아주 신속하게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빼앗았다.방한서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털을 빗겨주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는 그가 데려다 키우는 길고양이였고 이름을 캡틴이라 지었다. 뚱냥이보다 적게 먹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훨씬 강했다.방한서가 티격태격하는 육경섭과 배경원을 보며 응원하자 캡틴도 옆에서 야옹 하며 흥분했다.최연준은 여유롭게 담배에 불을 붙였고 육경섭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장모님의 예쁨을 받는 사위는 역시 달랐다...그런데 함께 어울리는 그들과 달리 유찬혁은 딴 세상 사람처럼 여전히 혼자서 수심에 찬 얼굴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곽보미와의 관계가 아직도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평소에는 말주변이 좋은 변호사지만 곽보미 앞에만 서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싸우다 지친 육경섭과 배경원이 유찬혁의 양쪽에 앉아 눈빛을 주고받자마자 유찬혁의 기분을
며칠 후 강서연은 최연준과 함께 맨체스터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행히 임신 반응도 없어서 이틀 동안 시차 적응을 마치니 활기를 되찾았다.이제부턴 이 도시의 이모저모를 구경할 계획이었다.이곳은 최연준이 자란 곳이다. 런던 날씨와 달리 안개도 자욱하지 않았고 매일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볕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건물마다 역사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있었다.맨체스터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해가 질 때면 하얀 비둘기 떼들이 성당 위를 날아다니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남겼다.강서연은 이곳에 오자마자 바로 마음에 들었다.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올드 트래퍼드에 가서 축구 경기도 보았고 노던 쿼터에 가서 신기하고 희한한 물건을 사기도 했으며 앨버트 광장에서 비둘기 먹이도 주곤 했다.예전에 최연준은 기분이 우울할 때만 이곳에 왔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광장의 비둘기들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걸 보니 아무래도 꽤 살만한 모양이다.“여기 좋지?”최연준은 뒤에서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느다란 허리는 진작 사라졌다.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면 아마 안기도 버거울 것 같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좋았고 그의 품에 안겨있는 지금이 더 좋았다.사실 강서연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최연준이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최연준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녀 눈에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요 며칠 충분히 놀았으니까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가봐야겠죠?”“응.”강서연의 질문에 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맨체스터에 금방 도착했을 때 김자옥은 환영파티를 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신한 그녀가 그런 장소에 가기 불편한 점을 고려하여 파티를 간단한 가족 모임으로 바꾸었다.강서연은 이 기회에 김씨 가문의 가족들과 얼굴을 익혔다.외할아버지는 아주 다정하신 분이었다. 얼핏 보면 최재원처럼 위엄이 넘
“아무튼 난 당신과 함께 싸울 거예요.”그의 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강서연의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했다.“예전부터 늘 그랬던 거 아니었나요?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 해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로 약속했었잖아요.”최연준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었다.“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은데?”“아직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해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울렸다. 민망한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두 볼이 저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올랐다.최연준은 그런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크게 웃었다.“여보, 난 당신이 뭘 하면 좋을지 생각났어. 차라리 여기서 한식집을 열어서 먹으면서 돈을 버는 거야. 어때?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지?”강서연이 펄쩍 뛰며 그를 때리려 하자 최연준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이따가 더 많이 먹으니까.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시 중심의 호텔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 그중 한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아가씨, 저분이 바로 연준 도련님과 함께 오성에서 온 사모님이에요.”“응, 알아.”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아가씨, 그럼 앞으로는 어찌하실 건지...”“뭔 소리야 그게?”소녀가 도우미를 째려보았다.“연준 오빠가 데려온 새언니인데 당연히 사이좋게 잘 지내야지.”그러고는 또다시 히죽 웃어 보였다.소녀는 스타일리쉬한 모직 코트에 체크 원피스를 매치했고 옥스퍼드 슈즈까지 신어 완벽한 영국 스타일을 보여줬지만 얼굴은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온화해 보였으며 타고난 요염함이 돋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대학생이었지만 옆에 세워진 고급 자동차가 그녀의 남다른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아가씨, 연준 도련님이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하신답니다.”“그래...”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내일
강서연은 어리둥절한 나머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소녀는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새언니는 아직 절 만난 적이 없어요. 전 김유정이라고 하고 저희 아버지가 바로 김성주예요. 저희 아버지는 만난 적이 있죠?”“아, 네.”강서연은 그제야 누군지 알았다.“연준 씨 사촌 여동생 김유정 씨군요.”“맞아요.”김유정이 활짝 웃었다.지난번 가족 모임에서 강서연은 최연준의 삼촌인 김성주를 만났었다. 뭔가 괴상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는데 몸이 매우 뚱뚱했고 웃을 때는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상대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그리고 김씨 가족 전체에서 김자옥과 최연준을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김성주였다. 평소 사적인 자리에서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한다.“김씨 가문의 일을 왜 성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건데?”하지만 김자옥과 최연준의 앞에서는 여러모로 애를 쓰는 척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그리고 김유정은 김성주의 친딸이 아니고 어릴 적 재혼한 엄마와 함께 김씨 가문에 들어왔다. 듣건대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비위를 잘 맞춰 김성주도 김유정을 무척이나 예뻐했고 공주 같은 삶을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하여 김씨 가문에서 감히 그녀를 데리고 들어온 딸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김유정은 열몇 살 때 스스로 먼저 성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씨 가문 어르신이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다가 그녀와 그녀 어머니가 수년간 조르고 비위를 맞춘 끝에 드디어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을 김씨로 바꾸었다.김씨 가문 사람들은 겉으로는 뭐라 하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자주 비웃었다.“왜 성을 바꿨겠어요? 나중에 이 집 재산을 물려받으려고 그러죠.”“물려받을 수 있을지 그건 아직 모르죠. 허, 지금은 큰딸이 관리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성이 다른 도련님이 관리할 거란 말이에요.”“그 도련님이 설마 자기 삼촌을 곤란하게 할까요?”“그건 모르죠. 더 지켜보는 수밖에.”...강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김유정에게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언니를 처음
김유정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최연준이 눈짓을 보내자 옆에 있던 도우미들이 재빨리 다가와 식탁 위의 음식을 전부 거둔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아까 문 앞에서 들었어. 처음 오는데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이 음식을 가져왔다고?”최연준은 김유정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김유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인사하러 오는데 이런 걸 가져왔어?”최연준이 코웃음을 쳤다.“삼촌과 외숙모는 너에게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의도 안 가르쳐줬어?”김유정이 흠칫했다.“오빠...”“비록 네가 삼촌의 친자식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김씨 가문에서 자랐어.”최연준은 그녀를 무뚝뚝하게 보며 말했다.“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아가서 어른들께 여쭤봐. 이번에 나와 네 새언니라서 다행이지, 다음번에 다른 집을 방문할 때도 이런 실례를 범하면 김씨 가문 전체가 너 때문에 피해를 보고 웃음거리가 될 거야.”김유정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집사님.”최연준이 차갑게 분부했다.“손님 좀 배웅해요.”고급 오피스룩 차림의 남자 집사와 여자 집사가 웃으며 다가와 김유정을 예의 바르게 배웅했다.김유정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돌아서려던 그때 최연준이 야채죽을 그릇에 담아서 강서연에게 조금씩 먹여주는 모습을 목격했다.강서연의 발그스름한 두 볼이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찼다.김유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장 대문을 뛰쳐나갔다.강서연이 배불리 아침을 먹고 나니 벌써 오전 아홉 시가 다 되었다.“아직도 안 가요?”그녀가 최연준을 보며 물었다.“오늘 회사에 일이 없어요?”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회사 일이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엄마가 이미 회사에 나가서 난 딱히 할 일이 없어.”“그래도 얼른 가봐요. 어머님이 힘드시겠어요.”강서연은 그의 넥타이를 꼼꼼하게 정리해 준 후 양복을 건넸다.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