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난 당신과 함께 싸울 거예요.”그의 손을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강서연의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했다.“예전부터 늘 그랬던 거 아니었나요?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 해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기로 약속했었잖아요.”최연준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었다.“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은데?”“아직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해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울렸다. 민망한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두 볼이 저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올랐다.최연준은 그런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크게 웃었다.“여보, 난 당신이 뭘 하면 좋을지 생각났어. 차라리 여기서 한식집을 열어서 먹으면서 돈을 버는 거야. 어때?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지?”강서연이 펄쩍 뛰며 그를 때리려 하자 최연준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이따가 더 많이 먹으니까.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시 중심의 호텔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곳에서 몇몇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후 그중 한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아가씨, 저분이 바로 연준 도련님과 함께 오성에서 온 사모님이에요.”“응, 알아.”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아가씨, 그럼 앞으로는 어찌하실 건지...”“뭔 소리야 그게?”소녀가 도우미를 째려보았다.“연준 오빠가 데려온 새언니인데 당연히 사이좋게 잘 지내야지.”그러고는 또다시 히죽 웃어 보였다.소녀는 스타일리쉬한 모직 코트에 체크 원피스를 매치했고 옥스퍼드 슈즈까지 신어 완벽한 영국 스타일을 보여줬지만 얼굴은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온화해 보였으며 타고난 요염함이 돋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대학생이었지만 옆에 세워진 고급 자동차가 그녀의 남다른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아가씨, 연준 도련님이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하신답니다.”“그래...”소녀가 나지막이 말했다.“내일
강서연은 어리둥절한 나머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소녀는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새언니는 아직 절 만난 적이 없어요. 전 김유정이라고 하고 저희 아버지가 바로 김성주예요. 저희 아버지는 만난 적이 있죠?”“아, 네.”강서연은 그제야 누군지 알았다.“연준 씨 사촌 여동생 김유정 씨군요.”“맞아요.”김유정이 활짝 웃었다.지난번 가족 모임에서 강서연은 최연준의 삼촌인 김성주를 만났었다. 뭔가 괴상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는데 몸이 매우 뚱뚱했고 웃을 때는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상대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었다.그리고 김씨 가족 전체에서 김자옥과 최연준을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김성주였다. 평소 사적인 자리에서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한다.“김씨 가문의 일을 왜 성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건데?”하지만 김자옥과 최연준의 앞에서는 여러모로 애를 쓰는 척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그리고 김유정은 김성주의 친딸이 아니고 어릴 적 재혼한 엄마와 함께 김씨 가문에 들어왔다. 듣건대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비위를 잘 맞춰 김성주도 김유정을 무척이나 예뻐했고 공주 같은 삶을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하여 김씨 가문에서 감히 그녀를 데리고 들어온 딸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김유정은 열몇 살 때 스스로 먼저 성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씨 가문 어르신이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다가 그녀와 그녀 어머니가 수년간 조르고 비위를 맞춘 끝에 드디어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을 김씨로 바꾸었다.김씨 가문 사람들은 겉으로는 뭐라 하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자주 비웃었다.“왜 성을 바꿨겠어요? 나중에 이 집 재산을 물려받으려고 그러죠.”“물려받을 수 있을지 그건 아직 모르죠. 허, 지금은 큰딸이 관리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성이 다른 도련님이 관리할 거란 말이에요.”“그 도련님이 설마 자기 삼촌을 곤란하게 할까요?”“그건 모르죠. 더 지켜보는 수밖에.”...강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김유정에게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언니를 처음
김유정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최연준이 눈짓을 보내자 옆에 있던 도우미들이 재빨리 다가와 식탁 위의 음식을 전부 거둔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아까 문 앞에서 들었어. 처음 오는데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이 음식을 가져왔다고?”최연준은 김유정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김유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인사하러 오는데 이런 걸 가져왔어?”최연준이 코웃음을 쳤다.“삼촌과 외숙모는 너에게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의도 안 가르쳐줬어?”김유정이 흠칫했다.“오빠...”“비록 네가 삼촌의 친자식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김씨 가문에서 자랐어.”최연준은 그녀를 무뚝뚝하게 보며 말했다.“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아가서 어른들께 여쭤봐. 이번에 나와 네 새언니라서 다행이지, 다음번에 다른 집을 방문할 때도 이런 실례를 범하면 김씨 가문 전체가 너 때문에 피해를 보고 웃음거리가 될 거야.”김유정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집사님.”최연준이 차갑게 분부했다.“손님 좀 배웅해요.”고급 오피스룩 차림의 남자 집사와 여자 집사가 웃으며 다가와 김유정을 예의 바르게 배웅했다.김유정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돌아서려던 그때 최연준이 야채죽을 그릇에 담아서 강서연에게 조금씩 먹여주는 모습을 목격했다.강서연의 발그스름한 두 볼이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찼다.김유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장 대문을 뛰쳐나갔다.강서연이 배불리 아침을 먹고 나니 벌써 오전 아홉 시가 다 되었다.“아직도 안 가요?”그녀가 최연준을 보며 물었다.“오늘 회사에 일이 없어요?”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회사 일이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엄마가 이미 회사에 나가서 난 딱히 할 일이 없어.”“그래도 얼른 가봐요. 어머님이 힘드시겠어요.”강서연은 그의 넥타이를 꼼꼼하게 정리해 준 후 양복을 건넸다.
“지적 수준이 열 살 정도라서 다 알기는 아는데 많이 알지는 못해.”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말을 거칠게 하고 소통이 어려웠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그 일로 인하여 김자옥은 늘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여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나무라지 않은 것이다.“엄마뿐만이 아니라 외할아버지도 삼촌을 많이 감싸주셔.”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삼촌은 김유정의 엄마인 손미현과 결혼했어. 하지만 손미현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다 따르고 꼼짝도 못 해서 외할아버지가 엄청 골치 아파하셔. 엄마도 삼촌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글쎄 엄마에게 막 대드는 거야. 그 후로 삼촌과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게 됐어.”강서연은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어쩌면 김성주의 좋지 않은 행동과 명성이 본의가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지시했을 가능성이 컸다.“서연아.”최연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 얘기를 하는 건 당신도 경계심을 가지라고 그런 거야. 신경 쓸 일을 더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네, 알아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내 임무는 그저 여기서 태교나 열심히 하고 건강한 아들을 낳는 거잖아요.”...요 며칠 김유정은 강서연에게 자주 접근하며 친한 척했다.아침저녁으로 문자를 보내 인사를 하는 건 기본이고 평소에도 살뜰히 보살펴주었으며 자발적으로 나서서 강서연과 산부인과에 다녀오기도 했다.앞에서든 뒤에서든 순진하고 착한 모습을 유지했다.강서연은 휴대 전화를 최연준에게 보여주었다. 수십 개의 문자 중에 80% 이상이 김유정의 보낸 문자였고 심지어 거리에서 고양이를 만나도 사진을 찍어 보내곤 했다.“당신 이 사촌 여동생이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에요?”강서연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귀찮으면 차단해도 돼.”최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걔는 어릴 적부터 치근덕거리기 좋아했어.”“그러니까 연준 씨에게도 치근덕거렸단 말이네요?”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생각에 최연준은 순간 멈칫했다.“여보, 그... 그게 무슨 말이
한 시간 후 강서연은 맨체스터의 국제 항공편 출구에 도착했다.곽보미가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VIP 통로로 걸어 나왔고 강서연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뛰어왔다.강서연도 뛰고 싶었지만 몸이 무거운 바람에 빠른 걸음으로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곽보미는 그녀를 꽉 끌어안을 수가 없어 가볍게 포옹하고는 배를 어루만졌다.“배가 벌써 이렇게 불렀어요?”곽보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주 쑥쑥 잘 자라고 있나 봐요. 태어나면 통통한 게 엄청 귀엽겠어요. 어찌 됐든 양엄마 자리는 내 것이니까 가장 먼저 안을 거예요.”“네네, 그래요.”강서연도 입이 귀에 걸릴 지경으로 활짝 웃었다.“아, 양엄마는 아니죠. 외숙모면 모를까...”“서연 씨!”곽보미가 두 눈을 부릅떴고 볼이 발그스름해졌다.최연준은 부하에게 그녀의 캐리어를 받으라고 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곽보미는 강서연의 팔짱을 잡고 앞에서 걸어갔다.여자 한 명이 참새 300마리와도 같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600마리가 모여있으니 최연준은 아예 낄 자리가 없었고 어쩌면 오늘 밤에도 독수공방 신세가 될지 모르겠다...“그나저나 영국에는 어쩐 일로 왔어요?”강서연의 질문에 곽보미는 고개를 어깨에 기대며 일부러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서연 씨 산부인과 가는데 같이 가주려고 왔죠.”배배 꼬는 말투에 강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다.“하하, 장난 그만할게요.”곽보미가 진지하게 말했다.“연수하러 왔어요.”“연수요?”“네. 어진 엔터테인먼트 김 대표님이 훌륭하고 젊은 감독들을 영국의 본부에 연수하러 보냈어요. 물론 비용도 어진 엔터테인먼트에서 전액 부담하고요. 본부가 김중 그룹이고 연수 장소도 김중 그룹 건물이에요. 내일부터 수업 시작하니까 우리 또 매일 만날 수 있어요.”생각지도 못한 기쁨에 강서연은 흥분한 나머지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뒤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최연준의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사실은 강서연이 혼자
“그럼 오성에서 떠날 땐 누가 배웅해 줬어요?”강서연은 곽보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곽보미가 피식 웃었다.“가는 날에 두 사람 다 나오지 않았어요. 내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몰래 온 거거든요.”“네?”“이 일은 시간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곽보미가 낙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주아 씨 말대로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허... 지금은 그저 다음 작품 생각만 하고 싶어요. 여기서 연수하면서 영감이 떠오를 수도 있잖아요.”그녀가 아무리 애써 감추려고 해도 눈빛에 담긴 쓸쓸함은 감추지 못했다.강서연은 곽보미의 마음속에 아직 유찬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석진도 그녀에게 잘해주고 있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였다.하여 모든 걸 시간에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시간을 통하여 진리를 검증할 수 있고 진심도 확인할 수 있다.강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히죽 웃어 보였다....곽보미가 맨체스터에 오기 전에 회사에서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기어코 곽보미를 별장에 데려와 이틀 정도 지내게 했다.최연준은 아량이 넓은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누구보다 급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곽보미는 웃음을 더 참았다간 병이 다 생길 지경이었다. 얼른 그녀가 묵는 거처로 돌아가려는데 최연준이 마침 파리로 출장 가야 한다면서 이삼일 정도 강서연을 더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곽보미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이튿날 두 사람은 함께 김중 그룹 건물로 향했다.김중 그룹이 손을 뻗은 분야가 아주 많았는데 엔터테인먼트는 그중 하나였다. 김중 그룹 본부의 건물 몇 채가 구름 속으로 높이 솟아 있었고 기세도 웅장했으며 거의 거리 절반을 차지했다.엔터테인먼트 담당 부서는 그중 한 건물에 있었다.강서연도 이곳에 와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직원은 물론이고 회사의 중고층 임원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김씨 가문의 친척들 말고는 전부 다 낯선 얼굴들이었다.김중 그룹의 직원은 세계 각지
강서연이 쫓아가려는데 세 번째 사람이 또 나타나 앞길을 막았다.“회의실은 준비됐어?”강서연이 멈칫했다.“무슨 회의실요?”“자.”한 여자가 그녀에게 좌석 차례표를 건넸다.“여기 이 명단대로 회의실 테이블을 정리해. 그리고 커피 기계에 커피콩이 가득 찼는지도 확인하고 물도 한 통 가지고 올라와. 아 참, 디저트도 이사님들의 취향에 맞게 준비해야 해. 얼른 가봐!”“다들 정말 잘못 아셨다고요!”강서연은 우쭐거리는 세 직원을 쳐다보았다. 사원증에 이름이 있었는데 사라와 제니, 그리고 무슨 Lee라고 적혀있었다. 한국 이름으로 번역하면 이효연이었다.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행동과 표정이 똑같았고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오늘 그녀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을 기세로 말이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당신들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이 사람이 어딜 봐서 인턴이에요?”강서연이 고개를 돌려 웃어 보이자 곽보미는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며 자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이쪽은 내 친구지, 인턴이 아니라고요.”곽보미는 그들을 쏘아보듯 했다.“다들 비켜요.”세 사람은 그저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한국 여자 감독인 곽보미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곽보미와 맞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맡은 바 임무를 완성하기 전에는 임산부를 이대로 놓아줄 수 없었다.“왜요?”곽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부장님이라도 불러와야 보내줄래요? 당신들은 귀가 먹은 건가요,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요? 내 친구가 인턴이 아니라고 여러 번이나 설명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인턴이라고 해도 임산부를 배려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몸도 무거운 사람에게 왔다 갔다 뛰어다녀야 하는 일을 시키면 어떡해요?”그때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세 사람은 곽보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한걸음 물러섰다
김유정은 줄곧 연예인의 길을 걷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비록 비주얼도 괜찮고 연극과도 나오긴 했지만 오디션을 봐도 맡은 배역은 대사 몇 마디뿐인 작은 배역이었다.감독에게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되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이쁘거나 독특한 매력이 없어서 여자 주인공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말을 빙빙 돌리지 않는 어떤 감독은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유정 씨처럼 성형한 티가 나는 얼굴은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렸어요. 자신만의 매력이 없으면 절대 뜨지 못해요.”그 소리에 너무도 화가 난 김유정은 하마터면 그 감독과 대판 싸울 뻔하기도 했다.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유정은 집으로 돌아와 김성주에게 조르며 돈을 써서 좀 띄워달라고 했고 손미현도 옆에서 부추겼다.결국 김성주가 투자하여 영화 두 편을 찍었지만 흥행에 참패하면서 돈을 전부 다 날리고 말았다.김성주가 세 번째 작품을 준비하려던 그때 결국 김자옥이 나서서 말리며 다시는 투자하지 못하게 했다.김유정과 손미현은 겉으로는 조용해졌지만 속으로는 몰래 기억하며 나중에 꼭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곽보미가 연수하러 온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다.“유정아.”손미현이 웃으며 김칫국부터 마셨다.“곽 감독의 영화를 찍으면 너도 한국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음 여우주연상은 따 놓은 당상이야.”김유정이 잠깐 웃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데... 엄마, 곽 감독님이 저에게 역할을 주지 않으면 어떡해요?”“여자 주인공이 안 되면 서브 여자 주인공도 괜찮지.”손미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곽 감독은 우리 김중 그룹 사람이야. 예전에 네 고모를 도와 돈도 많이 벌어다 줬어. 네 고모의 체면을 세워줄 거야.”김자옥의 얘기에 손미현은 김자옥의 며느리를 자연스레 떠올렸다.“아 참, 요즘 네 새언니와는 잘 지내고 있어?”강서연의 말이 나오자 김유정의 낯빛이 확 변했다.“오늘 회사에 왔던데 널 찾으러 온 거야?”“뭐 하러 왔는지 누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