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모님...”방한서는 입술을 핥았다.“아가씨는 증인으로 출석해야 합니다. 경찰이 요구한 것입니다.”“괜찮아요.”신석훈은 눈빛이 견고했다.“연희가 법정에 출두할 때는 제가 옆에 있을 거예요.”강서연과 최연준은 이 말을 듣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신석훈은 마른기침을 두 번 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저는... 좀 피곤해서 먼저 집에 가서 쉴게요ᩚ.”“네, 푹 쉬세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연희 씨는 석훈 씨와 함께 법정에 출두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신석훈은 그들을 보고 웃으며 돌아섰다.며칠 후 인지석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어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허약해 보였다. 흉악한 눈빛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막상 최연준을 보는 순간 다시 살아난 빈대처럼 목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봤다.하지만 빈대는 결국 빈대일 뿐이다.최연준은 눈빛이 싸늘하고 무표정하게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요 며칠간 당신이 받은 치료는 최상이야. 여기서 당신은 안전하고 아무도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아.”아무도 그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자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24시간 당직 의사의 교대 외에도 그의 자살을 방지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인지석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도련님께서 저를 살려둔 것은 결국 저를 죽게 하기 위한 거잖아요.”“맞아.”최연준이 그를 멸시했다.“당신을 죽게 하는 것은 내가 법을 대신해서 판단할 수 없어. 반드시 정당한 방식을 통해 너에게 사형을 선고할 거야.”인지석이 소름 끼치게 웃기 시작했다. 이전의 음흉함과 달리 오늘 그의 눈에는 약간의 슬픔과 절망이 비쳤고 비애가 더 많다.어쩌면 사람이 죽기 전에 감정을 위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인지석.”최연준이 담담하게 물었다.“그동안 최씨 가문에 잠복하면서 최지한과 삼촌을 이용하고 또 연희에게 접근했다가 구현수가 나타나면서 또 구현수를 이용하고... 네가 한 이 일들이 정말 마약을 판매하기
“신 선생님께서 말해준 거예요.”“네.”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상자를 들고 나갔다.뒤이어 간호사들이 속속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링거를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회복되는 상황을 기록하려고 했지만 예외 없이 모두 최연준에게 내쫓겼다.방 안에는 그와 인지석 두 사람만 있었고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최연준은 한가로이 앉아서 여유를 부리며 인지석을 끝까지 밀어붙일 기세였다.그러나 인지석의 상처는 더 이상 끌 수가 없었다.상처가 아플 뿐만 아니라 가렵기도 하고 거즈는 흘러나오는 피와 같이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인지석은 머리에 땀이 흥건하고 얼굴마저 일그러졌다.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회복하고 싶어도 회복이 잘 되지 않아서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최연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들어올 때부터 나는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했어!”최연준이 차갑게 말했다.“진실? 허... 당신같이 양심도 없는 사람이 진실을 알더라도 뭐가 달라지겠어요? 당신은 여전히 쾌락의 나날을 보낼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최연준은 너무 아리송하게 들려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소리하는 거야?”인지석이 천천히 눈꺼풀을 치켜들며 또박또박 물었다.“최연준, 추아름을 기억해요?”‘추아름?’최연준은 머릿속 기억을 뒤적여보니 어렴풋이 대학 다닐 때 추아름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던 것 같았다.그가 다니는 경영대의 3분의 2의 학생은 전부 명문 출신이다.일부분 가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노력과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끈기로 세계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5대 명문 학교에 합격한 소수의 학생이 있었는데 추아름이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그녀는 인지석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추아름은 경영대의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났고 인지석은 여기서 죽어라 일해서 생활비를 벌어 그녀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저금하며 추아름이 졸업하고 귀국하는 날 괜찮은 반지를 사서 그녀
최연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일의 경위를 대강 알았다. 인지석과 추아름은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고 인지석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추아름은 외국에 가자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 또 좋은 친구라는 네 글자로 두 사람의 감정을 함께 지워버렸다.나중에 그녀가 죽자 인지석은 비분이 가슴에 가득 차서 최씨 가문에 대한 복수를 전개하였다.그러나 최연준의 기억 속에서 추아름라는 이름을 파낼 수 없었다.알 수 없는 복수 하나 때문에 최씨 가문에서 소란을 피우다니!최연준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인지석, 나는 추아름이 누군지 전혀 몰라. 여기서 허튼소리 하지 마!”“당신 정말 뻔뻔하네요...”인지석은 격분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이것은 그저 네가 복수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야.”최연준은 위풍당당한 기세를 풍기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마 이 세상에는 추아름라는 사람이 없을 거야!”“당신...”인지석은 얼굴빛이 변하고 뭔가 흥분한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최연준은 눈빛이 어두워졌고 추아름이 가장 좋은 돌파구라고 생각해 이 점을 파고들어 반드시 그가 최씨 가문에 복수한 진짜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다!“내 말이 맞았지?”최연준이 냉소했다.“세상에 없는 존재를 꾸며내서 나랑 내 가족을 해치다니. 너는 망상증이 있는 거야? 아니면 편집증이 있는 거야?”“헛소리하지 마요.”인지석은 한 손으로 침대 옆 난간을 꼭 잡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뜻밖에도 노여움으로 인해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그는 최연준을 매섭게 노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 것 같았다.최연준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이 추아름이 실존 인물이라면 너에게 보낸 편지에는 분명히 나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언급했을 거야. 인지석,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해 봐.”인지석은 그를 반쯤 쳐다보고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만일 네가 말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 없어. 없는 사람이라고.”“아!
어쩐지 한동안 경영대에 최씨 가문 넷째 도련님이 또 여학생의 표적이 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이런 소문은 최연준이 어려서부터 무수히 들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는데 나중에 넷째가 어찌 된 영문인지 퇴학을 하고 급히 귀국하여 국내의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가문에는 누구도 최연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도 묻지 않았다.일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어째서 이런 표정을 짓는 거예요?”인지석이 콧방귀를 뀌었다.“생각이 났어요? 당신이 아름이를 죽였어요. 최씨 가문은 아름이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요!”최연준은 심호흡하고 한참 후 차갑게 말했다.“토론 대회에 참가한 것은 내가 아니야.”“뭐라고요?”인지석이 이를 악물었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변명을 할 거예요?”“그건 내가 아니라 내 동생 최연서야.”인지석은 귓가에 굉음을 내며 눈을 부릅뜨고 입술이 살짝 떨렸다.“나는 토론 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어.”최연준은 똑똑하게 말했다.“그 대회에 내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내가 가기 싫어서 내 동생이 대신 가겠다고 나섰어.”외국인은 최연준인지 최연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다만 그들의 성이 모두 최씨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단에는 최연준이었다.최연서는 극도로 유머러스한 말로 분위기를 완화하기도 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로 상대 허를 찌르기도 해서 훌륭한 변론가였다.게다가 반듯한 외모에 몸에 밴 젠틀함으로 여자들의 시선을 쉽게 사로잡는다.최연서는 작은 삼촌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보호를 받아 마음이 순수하고 좀 어리숙하기까지 했다. 여자가 접근해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여자에게 잘해주었다.생각해 보면 최연서와 추아름 사이는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최연서는 종종 친구들과 도서관에 가 공부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정상이었다.또 그는 야외 활동을 좋아해서 종종 친구들과 같이 놀러 나가곤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캠핑을 가는 것이 정상이었다.무도회는 경영
최연준이 병실 밖으로 걸어 나올 때 마음이 큰 바위에 눌린 것 같았다.추아름의 죽음은 그와는 상관이 없지만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그는 병원 입구에 한참 서서 담배를 피운 뒤 경찰 몇 명이 급히 입원실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인지석의 마약 밀매 수로 처벌하면 사형도 그를 우대하는 것이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운 후 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밤경치를 바라보았는데 이 지저분한 일들을 뒤로하고 아내에게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도련님.”방한서가 걸어왔는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최연준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최연서 일을 조사하러 갔었어?”방한서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셋째 도련님의 훌륭한 오른팔로서 당연히 일이 눈에 보여야 한다.조금 전에 병실 밖에서 최연서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수사에 착수했다.“잘했어.”최연준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드디어 눈치가 빨라졌네.”방한서는 자기가 도련님과 사모님의 좋은 일을 망친 것 말고는 또 언제 눈치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지 생각에 잠겼다.“뭐가 나왔는지 말해봐.”“박 집사님이 당시의 일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 물어봤어요. 넷째 도련님은 그 여자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날 밤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 사고였지만 당시 학교에 있던 최씨 가문과 원한이 있는 가문이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았어요. 그때 넷째 도련님은 겁이 많아서 스스로 도망쳐 돌아왔어요.”최연준은 답답한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이 빌어먹을 최연서가 온종일 여자에게 신사답게 굴더니 결국에는 인지석 이 미친놈을 건드렸다.그리고 그 영어 이름 마크도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최연서라고 소개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최연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추아름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보고 그 사람의 묘비 앞에 꽃다발을 놓아 줘.”“네, 알겠습니다.”“응.”말이 끝나자마자 최연준은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두 발짝 걷다가 다시 멈춰 몸에서 나는 냄새를 힘껏 맡았다.‘재킷에서 담배
조금 전까지도 졸음이 몰려왔던 강서연은 그의 말에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누굴 때리겠다고요?”최연준은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보았다.“여보, 그게...”“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 벌써 매를 들 생각부터 해요?”강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최연준은 밖에서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유독 강서연 앞에서는 기를 못 펴고 깨갱거렸다.“아니, 아니, 그 뜻이 아니라...”그가 멋쩍게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당신이 아까 임신하면 몸의 열을 아이에게 나눠줘야 해서 자꾸 추운 거라며?”“아무리 그래도 때려선 안 되죠.”“그래...”최연준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여보, 그럼 나중에 걔가 커서 잘못을 저지르면 때려도 돼?”“그것도 안 돼요.”강서연은 다시 한번 그를 째려보았다.“아이가 잘못하면 나무라고 가르쳐야지, 걸핏하면 손을 대서야 하겠어요? 연준 씨 경고하는데 나중에 우리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여자는 엄마가 되면 아무리 다정하고 얌전하던 토끼도 사나운 호랑이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남녀의 감정이 완전히 다르다. 여자는 10달 동안 아이를 품고 두 사람의 감정은 탯줄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최연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강서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몇 달 후면 집에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예쁨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여 이 기회에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 생각에 최연준은 온몸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은밀한 그곳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강서연은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밀당이 제대로 먹혔는지 곧바로 최연준의 탄탄한 가슴에 쏙 안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서연아.”최연준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3개월 됐지?”“네...”정말 3개월이 금방
오늘 밤 바깥 기온도 뚝 떨어져 이불을 꽁꽁 덮어야 한다. 그러면 이불 밑에서 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까......그동안 신석훈은 줄곧 최연희의 곁을 지켰다.여러 일을 겪고 난 후 신석훈도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최연희는 우울증이 걸렸었던 예전처럼 다시 웃지도 않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신석훈은 말주변이 없어 최연희를 즐겁게 할 방법을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는 것뿐이었다.그날 최연준과 강서연이 성수 별장에 도착했을 때 은미연이 최연희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발끝을 들고 문틈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통통한 그녀의 뒷모습에 옅은 처량함이 묻어있었는데 어머니로서의 근심과 걱정이 충분히 느껴졌다.강서연은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그녀도 예비맘이라 그런지 공감이 됐고 지금 은미연의 기분이 어떨지 누구보다 잘 이해되었다.“어머, 연준이와 서연이 왔어?”은미연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오늘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장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딸에게 일이 생긴 후로 은미연도 기운이 나질 않았다. 어쨌거나 세대 차이 때문에 딸의 세상에 들어갈 수 없어 옆에서 조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인지석이 그렇게 나쁜 놈인 줄은 정말 몰랐어.”은미연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연준아, 너도 알잖아. 난 집안이나 신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연희만 좋다면 무조건 허락했었는데... 이게 다 내 탓이야. 엄마라는 사람이 딸이 가스라이팅을 그렇게나 오래 당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대표님, 그런 말 말아요.”강서연은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대표님은 연희 아가씨를 감싸주고 존중해 주었고 건강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키웠어요. 그리고 공주병이 없는 진짜 공주로 자라게 했죠... 이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거예요.”“서연아...”은미연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강서연은 웃음을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하러 마당에 나갔다. 가끔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최연준이 어두운 얼굴로 거실에 앉아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 눈빛에는 마치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저녁에 딱 기다려!’강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심장 박동도 빨라져 그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방안의 최연희는 이미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고개를 들고 신석훈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른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최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신석훈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예전에 임우정을 좋아한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임우정의 마음속에 아직 육경섭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신석훈은 스스로 알아서 물러났고 두 사람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그런데 지금 최연희가 그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신석훈은 무조건 최선을 다해 그 남자와 경쟁할 것이다. 마치 중세기에 사랑을 위해 결투를 벌였던 기사처럼 말이다.맨날 수술칼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니 검을 들어도 아주 용맹해질 것이다.“선생님...”최연희가 그를 슬쩍 부르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래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신석훈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릇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깨끗하고 청순한 모습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다음 단계는 뭘 해야 할까?어떤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고백해야지!’신석훈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잡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진지한 얼굴로 셔츠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그 모습에 최연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또 수업하려는 건가? 또 시험지를 풀어야 해? 아이고, 나 좀 살려줘.’“연희야,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아니요. 하지 말아요.”최연희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고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수능이 코앞인 것도 알고 1년 휴학한 것도 알지만
“여기는 시장님의 연회 자리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죠.”정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곳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반드시 체포해야겠지요!”“아니에요, 저는 인신매매범이 아니에요!”영미가 격렬히 몸부림치며 외쳤다.“아이를 납치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건 정대명이 했어요, 모든 게 그의 짓이라고요! 제발 믿어주세요!”하지만 영미의 몸부림은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희미해지다 이내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정대명은 이 광경을 보며 무릎이 풀리고 말았다.지금 정대명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곧 자신도 영미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정대명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간절히 애원했다.“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몰랐어요, 그 여자가 이런 사람이었는지! 저는 그냥 돈 받고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런 일인지 몰랐다고요!”“그 말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죠.”정호가 손짓하자, 사람들이 정대명을 데리고 가려 했다.그 순간, 정대명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있던 정승우를 향했다.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승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그 눈빛에는 끝없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듯했다.그러나 정승우는 정대명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정대명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승우의 그 적대적인 눈빛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버렸다. 정대명은 자신이 정승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분통이 터졌다.몇 대 때리긴 했지만, 아버지한테 감히 원한을 품다니?정대명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뒤엉키며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 잡았다. 죽더라도 누군가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들이었다.정대명은 눈빛을 돌리며 표정을 바꾸더니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호텔 후문에서 촬영된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선명히 비쳤다. 화면 속에는 영미와 정대명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음향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왔다.“제가 이미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매수했어요. 당신은 그저 그 아이를 훔쳐내기만 하면 됩니다.”“영미 아가씨, 여자애를 훔쳐서 뭘 하려는 건데? 여자애는 값도 안 나가잖아!”“제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영미의 얼굴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진 영미는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니, 저 여자가 최씨 가문의 딸을 훔치려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매년 이상한 일이 생긴다지만, 올해는 더하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보배 같은 아이를 훔쳐려했다고?”“말도 안 돼...”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최 도련님,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음성이 이렇게 뚜렷한데,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강소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영미를 꿰뚫어 보며 입을 열었다.“설마 저 영상 속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영미 씨, 정말 어리석군요.”최군형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우리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그렇게 쉽게 매수될 거라고 믿었습니까?”“뭐라고요?”영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문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영미가 매수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경호원들이었다.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가운 눈빛에 영미는 몸이 떨렸다.“당신들... 날 배신한 거예요?”영미는 멍한 얼굴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영미야,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강소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분들은 최씨 가문의 경호원이야. 이분들이 한 행동은 단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뿐이야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