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가 정윤과 함께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아까 대표님은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거래요?”“원인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 비서님이 서재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들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대요. 처음엔 다들 물건이 떨어진 줄 알고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나가라고 호통치셔서 그제야 대표님이 화나 있음을 발견한 거래요.”“대표님처럼 온화한 분이 화를 내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그래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안 되나 봐요.”“근데 아까 윤아님에 관한 얘기를 들으시고는 바로 원래 모습대로 돌아오지 않았어요?”…잠에서 깬 윤아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음을 발견했다.하지만 윤아는 이제 꿈에서 뭘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윤아는 침대에 기대 멍해 있다가 수현이 안전하게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꼬리가 올라갔다.사람의 몸은 참 신기했다. 비록 머릿속에 예전 기억은 없지만 어떤 무의식과 감각은 이미 그녀의 뼈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그에게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 그녀는 긴장했고 그런 그를 걱정했다.그가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걸 알고 나서야 몸과 마음에 긴장이 풀렸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임무의 절반을 완성한 셈이다.하지만 그녀는 아직 다른 감정에 둘러싸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예를 들면 수현은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그녀는 아직 이곳에 갇혀 있다.신고할까도 생각해 봤다.하지만 자신을 챙겨주는 선우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그녀에게 선우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윤아는 이런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사색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선우가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잠에서 깬 그녀를 보고는 바로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윤아야, 깼어?”윤아는 선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응.”“나 왜 찾아? 무슨 용건 있어?”수현은 이미 무사히 떠났다. 비록 윤아가 여기에 남는 걸 선택했지만 윤아는 선우와 말을 섞기도,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앞으로
선우는 이렇게 말하며 점점 윤아와 거리를 좁혔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윤아를 덮쳤다. 조금만 더 가까이 하면 정말 키스라도 할 지경이었다.윤아는 심장이 벌렁거렸고 선우의 입술이 바짝 다가온 순간 힘껏 그를 밀쳐냈다.선우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다가 윤아가 갑자기 그를 밀쳐내자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는 침대 밑으로 나동그라졌다.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윤아는 화들짝 놀랐다. 선우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까 그가 보인 행동이 생각나 감히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원래는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려 했지만 선우가 또 어떤 미친 행보를 보일지 몰라 윤아는 아예 맨발 바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윤아가 그의 곁을 지나칠 때 그는 한발 빨리 윤아의 손목을 낚아채 다시 자신의 곁으로 끌어왔다.“어디 가려고!”“이거 놔!”윤아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선우를 밀쳐내려 했지만 선우가 윤아의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윤아는 선우가 계속 미쳐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오히려 진지하게 말했다.“윤아야, 미안해.”윤아는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봤다.선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아까는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었나 봐. 많이 놀랐어?”선우가 손을 내밀어 윤아의 볼을 만지려는데 윤아가 이를 피했다.선우는 어딘가 괴로워 보였다. 윤아가 계속 발버둥 치자 천천히 그녀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미안해. 나 용서해주면 안 될까?”윤아는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정서는 이미 차분해진 것 같았고 더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윤아는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침대 맞은편으로 걸어가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용건이 뭔데? 없으면 나가줘. 나 잘 거야.”이를 들은 선우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윤아야, 너 금방 깼어. 또 잔다고?”“잠을 잘 못 자서 더 자려고, 안 돼?”윤아는 선우가 여기에 남을 핑계를 찾는다고 생각해 아무렇게
윤아의 말이 맞았다.게다가 윤아가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선우는 절대 이런 희망을 품을 엄두를 못 냈었다.그런 일을 하고도 어찌 윤아가 그를 좋아하기를 바라겠는가?그녀가 그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고 그렇게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물들면 된다고 생각했다.선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아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아챘다.윤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아무튼 내 몸은 여기 남았으니까 약속을 어긴 건 아니잖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이 정도의 자유는 있는 거 아니야?”선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응, 그렇지.”“그럼 지금은 좀 나가줄래?”이 말을 들은 선우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결국 지는 쪽은 늘 선우였다.“그래, 나갈게. 하지만 안 먹는 건 안 돼. 아래로 내려오기 싫으면 방까지 가져다주라고 하면 되니까.”윤아가 거절할까 봐 그러는지 선우는 이 말을 뒤로 잽싸게 방에서 나갔다.선우가 나가고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기다려서야 윤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갔네.윤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 침대에 앉았다.선우가 아까 보여준 행동에 윤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선우가 진짜 그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전에는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모르고 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선우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앞으로 절대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다 어느날 선우가 미쳐버리면 어떡하지?이런 생각에 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윤이였다.“윤아님, 대표님께서 주방에 음식을 부탁하셨나봐요.”이를 들은 윤아가 다시 눈을 떴다.“들어와요.”정윤이 접시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접시에는 여러 요리가 담겨 있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하지만 윤아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님, 오늘 주방에서 여러 가지로 준비했어요. 어떤 종
결국 온몸에 힘이 풀려 윤아는 정윤의 부축을 받으며 욕실에 나와 소파에 널브러졌다.윤아는 지금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고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윤아는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정윤은 그런 윤아가 마음 아픈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윤아님…”윤아는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이내 들려오는 정윤의 울음소리에 윤아는 고개를 들었다. 정윤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왜 그래요?”정윤이 울 줄은 몰랐다.정윤도 자기가 눈물을 흘릴 줄은 생각도 못 한 듯 눈물을 닦아내며 사과했다.“아니에요. 아까 조금 놀라서 그래요. 윤아님, 괜찮으시죠?”“놀라게 해서 미안해요.”“윤아님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다 저의 불찰이에요.”정윤은 이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윤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어떡해요? 음식을 아예 안 드실 수는 없잖아요. 만약 집에서 한 음식이 별로라면 외식할까요?”윤아는 소파에 기댄 채 힘없이 웃었다.“괜찮아요. 안 나가도 돼요. 그냥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아마 며칠이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입맛이 별로 없다고?원래는 정윤도 그렇게 생각했다. 윤아가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라고, 입맛이 다시 돌아오면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입맛은 돌아오기는커녕 점점 안 좋아졌다.게다가 매일 약까지 먹는데도 이런 상황이면 언제 다 나을 수 있을까?“아니면 윤아님, 의사 선생님을 바꿔 볼까요? 아니면 직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던지. 위가 불편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나 진짜 괜찮아요. 걱정되면 단팥죽이나 가져다줘요.”윤아가 먼저 음식을 찾자 정윤은 바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단팥죽을 윤아 앞에 대령했다.“윤아님, 이건 어때요?”“고마워요.”윤아는 단팥죽을 받아와 몇 모금 먹었다.팥이 잘 익어서 으깨질 정도였고 죽도 온통 팥의 풍
정윤은 윤아의 그런 모습에 놀라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선우를 찾으러 갔다.선우는 이를 듣자마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윤아한테로 달려왔다.정윤은 선우의 뒤를 따라가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윤아님은 전에 그냥 입맛만 안 좋아서 조금 적게 드실 뿐이었는데 오늘 아침엔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해내셨어요.”정윤은 이렇게 말하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윤아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혹시… 다른 의사를 부르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윤아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보든지요. 윤아님 요새 계속 밥을 잘 못 드시고 계세요.”이를 들은 선우는 멈칫하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고 근처에 있는 도우미에게 손을 흔들었다.도우미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의사 불러오세요.”선우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하자 정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선우가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고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윤아의 이런 모습을 보고 끝내는 삼켰던 말을 다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정윤은 선우를 몰래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사실 대표님도 윤아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시네.’다른 제안을 하면 선우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한번 시도해 봐?윤아가 정윤을 많이 잘해줬던지라 정윤도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싫었다.이렇게 생각한 정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사실 미숙한 건의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선우는 윤아를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정윤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요새 윤아를 챙겨준 사람은 정윤이였다.그리고 윤아도 정윤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이런 원인으로 선우는 인내심을 조금 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했다.“말해 봐요.”“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윤아님 정신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여요… 윤아님을 저주하거나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제
“의사 선생님 왔는지 확인 좀 해봐요. 아직이면 전화해서 빨리 기어 오라고 하고요.”옆에서 듣고 있는 정윤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어 오라는 단어까지 쓴 걸 보면 선우의 기분이 매우 안 좋다는 뜻이었다.정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뛰어갔다.“네,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방에는 선우만 남았다. 그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윤아의 이마를 보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닦아줬다.이마를 닦아주는 선우의 안색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렇게 땀을 다 닦아주고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입술까지 하얘진 윤아를 조용히 바라봤다.그런 윤아의 모습에 선우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그녀를 억지로 옆에 남겨둔 게 정말 잘못된 짓은 아닐까?윤아는 분명 선우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다. 둘은 원래 친구로 남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둘 사이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왜 이렇게 된 걸까?그냥 그녀를 좋아한 것뿐인데 말이다.선우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선우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하지만 윤아가 그의 옆에 나타나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와 함께 하기는 싫다고 한다.이런 엔딩을 맞을 줄 알았으면 선우는 차라리 윤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이런 허황한 꿈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윤아의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더니 담요까지 덮어줬다.“잠깐만 기다려. 의사 선생님 곧 오실 거야.”말이 끝나기 바쁘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윤정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다.“대표님,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저번에 왔던 그 의사였다. 그는 마치 오늘의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이번엔 무슨 상황이죠?”가까이 다가온 의사는 쓰러진 윤아를 보고 표정이 삭 변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저번에 진찰을 왔을 때부터 앞으로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의사와 정윤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선우가 덤덤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먼저 약부터 처방해요.”의사는 선우의 개인 의사로 지낸 지 꽤 오래되었기에 서로 친하지는 않아도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선우의 말에 의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끼어드는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아까 제가 한 얘기 다 들으셨죠? 환자분은 아무 병이 없어요. 그런데 무슨 약을 처방하겠어요? 약을 잘못 먹으면 오히려 문제 될 수 있어요.”선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마음의 병이라면서요. 그럼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처방하세요.”“그게… 제가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어찌 알까요?”옆에 서 있던 정윤도 이 광경에 넋을 잃었다. 선우가 윤아를 많이 챙긴다고 생각하던 정윤이었다. 의사도 윤아는 마음의 병이기에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선우는 자꾸만 의사에게 약을 처방하라고 요구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대표님, 의사 선생님 말씀은 윤아님이…”“정윤 씨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거 같은데?”하지만 정윤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선우가 매몰차게 잘라버렸다.선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정윤을 쏘아봤다.“이제 정윤 씨가 도울 일은 없으니 나가주세요.”정윤은 윤아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마디 덧붙였다가 선우에게 쫓겨나고 말았다.정윤은 입을 앙다문 채 어딘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분명 의사가 윤아의 상황을 명확하게 얘기해줬는데 선우가 계속 이렇게 나온다는 건 윤아를 해치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윤아가 자신을 꽤 잘 챙겨줬던 게 생각나 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편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가 이때 입을 열었다.“그래요. 일단 약을 처방해 줄게요.”“선생님!”이를 들은 정윤이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아까 분명…”“대표님 말씀 못 들었어요? 약 처방하라잖아요.”“…”정윤은 할말을 잃었다.선우만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도 미친 것 같았다. 대표
“장, 장 선생님. 아까 한 말 진심은 아니었어요.”“됐어요. 마음은 착한데 급해서 그런 거 알아요. 다음엔 좀 스마트하게 움직입시다.”“그럼 장 선생님, 윤아님 어떡하면 좋을까요?”정윤은 의사의 손에 들린 그 비타민을 건네받더니 고민에 찬 표정이었다.“선생님 말씀처럼 마음의 병이라면 비타민을 먹어도 쓸데없잖아요.”“맞아요.”의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약은 그냥 임시방편이고 대표님을 설득해 빨리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해요. 그래야 마음의 병이 나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엔 환자님이 고민하고 있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심리 상담의를 찾아도 효과가 별로 없을 거예요. 환자분 상태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거든요.”정윤도 당연히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라고는 선우를 설득한 길밖에 없었다.“장 선생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의사는 정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저는 들어가서 수액 좀 놓아줄게요. 지금 많이 허약하거든요.”“제가 도울게요.”둘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윤아에게 수액을 놓아줬다.의사가 혈관을 찾는데 윤아가 예전보다 많이 야위었음을 발견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윤아에게 수액을 꽂았다.의사는 그렇게 한참을 분주히 돌아치더니 선우에게 말했다.“일단 쉬게 놔둬요. 조금 있다 깨어날 거예요. 큰 문제는 없어요.”선우는 무표정으로 대꾸했다.“고마워요.”의사는 그런 선우의 모습에 입을 뻐끔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삼켰다.…윤아는 오후에 깨어났다.깨어나 보니 선우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선우의 눈빛과 마주했다.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선우는 윤아가 깨어나자 너무 기뻤고 인사를 건네려 했는데 윤아가 그렇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선우는 말문이 막혔다.반감을 드러내는 윤아의 태도에 선우는 목구멍이 살짝 메어왔지만 그것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칼로 조금씩 에는 듯한 고통이었다.한꺼번에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