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나자 선우는 원래 온화한 모습은 사라지고 차가운 눈으로 그 무리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이 양송이수프 말고는 더 이상 올리지 마세요.”하인들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몇 마디 대답만 하였다.그 후 선우가 떠나자 그들은 참지 못하고 토론을 벌였다.“이 아가씨는 너무 시중을 들기 힘든데? 우리가 애써서 이렇게 맛있는 밥상을 만들었는데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다음부터 이 메뉴들을 올리지 말라면 무슨 다른 음식을 만들라는 거야? 오늘 이 테이블에 있는 메뉴만 수십 가지인데.”“그러니까. 대표님이 왜 이렇게 시중들기 힘든 여자를 갑자기 데려왔지?”미래의 나날을 생각하면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다.방에 돌아온 윤아는 베란다에 가서 앉았다.그녀의 방은 베란다와 이어져 있어 활짝 열려 있는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여기까지 와서도 뭔가 중요한 것을 잊은 느낌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만 너무 아팠다.윤아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 그저 탁자 위에 엎드린 채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이선우라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걸 보니 배려심이 깊어 보여. 진짜 약혼자인 것 같아.’하지만 윤아는 그를 아무리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녀는 나중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남자가 자신에게 구애를 하면 승낙할 것인지 진지하게 추측해 보았다.답은 ‘아니오' 였다.그래서 윤아는 자신이 그와 약혼녀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약혼녀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은 보통 남녀 친구도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기억을 다 잃었고 곁에는 선우 말고 아무도 없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여기에 머무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사색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윤아는 들었지만 일어서지 않고 못 들은 체했다.잠시 후에야 선우는 그녀 곁에 다가와 앉
선우는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고 그 좋은 말솜씨로 말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결국 모든 건 윤아가 스스로 추측하기에 달렸다.역시 기억을 잃은 윤아는 그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새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한 뒤 말했다.“아빠 말고는 우리 사이에 다른 친구는 없어? 내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자매나 베프는?”선우는 입술을 오므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있지.”“누구?”“여기 없어. 잊었어?”선우는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말했다.“잊었지, 참. 너 다친 거 잠깐 잊었네.”“...”‘농담 치곤 썰렁한데.’윤아는 협조하는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연락처는? 알려줘.”“응. 네 핸드폰 이전 내용이 복구되면 줄게.”윤아는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선우가 떠난 뒤 윤아는 혼자 핸드폰 화면을 뒤적거리며 몇 명 안 되는 연락처만 들여다봤다.그녀가 방금 입력한 아빠의 연락처 외에는 선우밖에 없었다.윤아는 자신의 성격이 안 좋아서 친구가 많이 없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성격이 아무리 나빠도 친구가 이렇게까지 없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핸드폰은 받을 때 그녀의 연락처에는 선우밖에 없었고 심지어 가족 연락처도 그녀가 요구해서야 알게 된 것이다.모든 상황이 비정상적이다.‘너무 이상해. 나한테 문제가 있거나 선우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분명.’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방금 입력한 그 연락처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선우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일부러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스스로 오해를 한 것이든 간에 이 전화는 반드시 걸어야 한다.윤아는 선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뚜뚜--전화가 한참 울렸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받지 않았다.혹시 번호를 잘못 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마침내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온화한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 여자가
윤아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얘기를 열심히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새엄마의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그런데 선우가 말해준 바로는 새엄마 때문에 둘 사이가 안 좋았었다고 하지 않았니?’‘아니었잖아...’생각 끝에 윤아는 조금 싸늘하게 말했다.“제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무뚝뚝한 말에 상대는 한참을 어리둥절해하다가 머쓱하게 웃었다.“윤아야? 오늘 기분이 안 좋아? 아니면 잘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보아하니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정말 거짓인 것 같다.그때, 밖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치는 걸 발견한 윤아는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네.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네요. 다음에 마저 얘기하고 이만 쉬어요.”윤아는 상대방의 반응은 살필 겨를도 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아무래도 약혼자라는 저 사람, 심상치 않은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일단은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윤아는 핸드폰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힘이 없어 비틀 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넘어지지 않고 걸었다.밖으로 나오자 민환이 마중 나왔다.“윤아 아가씨. 나가시려고요?”윤아는 시선을 돌려 그를 훑어보았다.윤아를 보던 민환은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고민환이라고 합니다. 윤아 아가씨를 따라다니라던 대표님의 지시가 있어 앞으로는 어디 나가실 일 있으면 안전을 위해 저도 동행하겠습니다.”“안전을 위해?”윤아는 어리둥절했다.“저는 보호 받을 필요가 없어요.”“아가씨, 전에 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었으니 밖에 나가셨다가 위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전 반드시 아가씨 곁에 붙어있어야겠습니다.”윤아는 시큰둥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감시였다.아까도 민환은 거침없이 걸어오다가도 막상 와서는 문밖으로 숨어버렸다.모든 것이 심상치 않다.윤아는 그를 한 번 곁눈질하고 더 이상 말
그 말에 선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어떻게 된 거죠?”“아무래도 윤아 님이 오시기 전에 공항에서 대학생 한 명을 만나 얘기를 나눴던 모양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학생이 윤아 님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선우는 어찌 된 영문인지 바로 알아차렸다.“경찰 쪽에서도 오해일 가능성이 있으니 윤아 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하는데 아시다시피 윤아 님 상태가...”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선우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윤아가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경찰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면...“그런데 만남을 거절하면 경찰 쪽에서 또...”“만나죠.”“네?”선우가 허락할 줄 몰랐던 그는 깜짝 놀라 벙쪘다.“하지만...”“하지만은 없어요. 애초에 윤아가 원해서 이곳에 온 거예요. 내가 억지로 데려온 게 아니라.”선우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힘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지 사랑하는 사람 갖고 협박했으면서.’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지. 그의 부하는 그저 알겠다고 한 뒤 그의 지시에 따라 일을 진행시켰다._윤아는 어느새 정원을 한바퀴 돌았다. 별달리 볼 것도 없거니와 이제 체력이 남지 않았는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서 그만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가니 선우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윤아를 반겼다.“배고프지 않아? 뭐 좀 먹을래?”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묻는 걸 보니 그녀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다.사실 윤아도 조금 배가 고픈 상태였다. 몸 곳곳의 기관이 그녀에게 음식을 섭취하라고 경고를 날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아 잘 먹을 수 없었다.“주스라도 가져오라고 할까?”생각 끝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안 가 달고 신 여러 종류의 주스가 눈앞에 진열되었다.딱 봐도 주방에서 직접 만드느라 꽤 애를 먹은 티가 났다.윤아는 그중 가장 무난해 보이는 거로 골라 마셨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마치 누가 본드로 붙여놓기라도
선우도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간 묻게 될 테니.“정말 내 약혼자 맞아?”의문을 품은 그녀의 눈빛이 선우의 눈에 정확히 꽂혔다.이 질문은 좀 의외였던지라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예상 못 할 질문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녀가 바보가 된 건 아니니 말이다.이미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 상태에선 맞다고 해도 쉽게 믿진 못할 거다. 오히려 그에 대한 거부감만 커질 뿐.윤아가 기억을 잃은 지금은 선우에게는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기회다.이런 기회를 쉽게 놓아줄 순 없지.“아니야.”선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약혼자라고 한 건 내 사심이었어.”역시나.윤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사심? 그러니까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사귀는 사이 맞아. 다만 아직 내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뿐. 넌 나와 헤어지고 싶어 했어. 그 이유가 뭔지 난 알 수 없지만.”눈을 내리까는 선우의 얼굴에 속상한 기색이 비치였다.그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슬펐으니까.게다가 선우는 사실 윤아와 함께 있었던 그 5년 동안 줄곧 그녀를 애인처럼 생각하고 대했었다.그러니 전부 거짓말인 셈은 아니었다.윤아는 그의 말을 듣고 믿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름의 생각에 빠졌다.그렇게 한참 후, 드디어 윤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경찰한테 뭐라고 하면 돼?”윤아는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겠다고 판단을 했다. 일단 선우가 그녀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건 믿을 수 있었다. 비록 사심이 넘쳐서 그녀를 옆에 잡아두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그리고 윤아는 줄곧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이곳에 와서부터 계속해야 할 일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그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 머물러야겠다는 생각만은 뚜렷이 들었다.일단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 경찰 쪽에도 협조하는 수밖에.“간단해. 뭐 특별히 할 말은 없고 그저 묻는 말에
그 말에 두 사람의 의문 가득한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윤아는 들어와서부터 조사과정까지 줄곧 협조적인 태도였다.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는 건 물론이고 태도도 좋았다.경찰도 윤아와 그 여대생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니 확실히 접점은 있지만 달리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그런데 그 모든 게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다.이제 막 철수하려 할 때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경찰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자 윤아가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저 그 사람이랑 친구예요. 협박 같은 것도 받은 적 없고요.”“그럼?”“전 지금 혼란스럽고 모르는 것투성이예요. 그러니 절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_한편, 선우는 몇 명 사람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생각보다 오래 이어지는 심문에 기다리다 못한 선우의 부하 중 한 명이 물었다.“대표님. 윤아 아가씨가 경찰과 이렇게 오래 함께 계시게 해도 됩니까?”선우는 대답이 없었고 그의 침묵은 옆 사람을 더더욱 안달 나게 했다.“대표님. 윤아 아가씨께서 혹시나...”“뭘 그리 조급해해요?”선우는 그를 힐긋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시다니.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건가? 하긴 이곳 사람 중 윤아 아가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대표님이실 테니. 별일 없겠지.’부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그가 아직 생각에 잠겨있는데 마침 문이 열리더니 경찰이 걸어 나왔다.그는 선우보다 한발 앞서 경찰을 맞이했다.“두 분 수고가 많으십니다. 조사는 잘 되었습니까? 제가 말했잖습니까. 그 여대생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일 거라고요. 윤아 아가씨가 저희 대표님과 몇 년 지기 친구인데 납치라뇨?”두 경찰은 잠깐 눈을 맞췄다.비록 윤아가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지만 선우와 오래된 친구라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그녀를 구해준 것도 선우이고 가장 좋은 병원 VIP 병실에서 치료를 받게 해주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납치 같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윤아는 선우와 마침 눈이 마주쳤다.윤아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느끼며 입을 뗐다.“경찰한텐 내가 아는 대로 다 말했어.”꼭 네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 같이 들리는 그녀의 말.선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잘했어.”그 말에 윤아가 되물었다.“칭찬 받은 건가?”“응. 맞아.”“그럼 상도 받아야겠지?”윤아가 다시 물었다.그러자 선우는 입술을 깨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뭘 원하는데?”“밖에 나가고 싶어.”선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윤아는 말을 보탰다.“혼자서.”그 말에 선우는 수락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윤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넌 지금 기억을 잃어서 혼자는 위험해.”“기억을 잃은 거지 지력을 잃은 건 아니잖아. 위험할 게 뭐가 있어?”“넌 여기 길도 모르잖아.”“요즘은 내비게이션 다 있어서 그거 쓰면 돼.”그러나 선우의 대답은 여전했다.“안 돼.”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내비게이션 쓴다 해도 밖은 위험해. 너 기억 잃은 뒤로 여기가 익숙하지도 않고 요즘 세상이 흉흉하니까.”“고민환 씨가 날 따라다니는 게 감시랑 뭐가 달라?”“그 사람이 싫으면 내가 같이 가줄게. 어딜 가보고 싶은데?”선우와 함께 가나, 고민환과 함께 가나 그게 그거지.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이선우라고 했지?”그녀는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저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다는 건데 왜 이리 겁을 먹어? 혹시 약혼자라는 것 말고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거야?”윤아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선우는 담담했다.“없어. 그것 말고 다른 건 모두 진짜야. 너 혼자 나가게 하지 않는 이유는 너도 알 거야. 난 네가 걱정돼. 그러니 고민환이 싫다면 나라도 함께 가게 해줘. 그것도 싫다면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을 골라 데리고 나가도 좋아. 어쨌든 네 곁에 누군가 한 명은 꼭 있어야 해.”그의 강경한 태도에 윤아는 혼자 밖에 나가는 건 힘들 것 같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다행히 그녀의 계
게다가 애인 사이라기엔 선우가 그녀를 대하는 게... 진짜 연인들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윤아는 그와의 작은 터치도 조금 불편하다고 느껴졌으니 말이다.“응. 알겠어.”윤아는 자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택했다. 그녀는 이 별장의 유일한 동양인인 데다가 키도 윤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고민환은 그 일을 알게 된 후 선우에게 곧장 이의를 제기했다.“대표님. 윤아 아가씨가 고른 저 여자는 이 별장에서 체구가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윤아 아가씨와 동행했다가 괜히...”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가 싸늘하게 그를 흘겨봤다.“내가 고르라고 했어. 문제 있나?”그의 눈빛에 민환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났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우가 부드럽게 온화한 선비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가 사람 목숨을 돌같이 보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못할 것이다.그 여자가 아마 선우가 인내심을 발휘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민환은 선우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의 냉담한 태도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이윽고 선우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현수아는 인정했나?”현수아란 말에 민환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아뇨. 윤아 아가씨를 민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허.”선우가 코웃음을 터뜨렸다.“아니다? 그래서 넌 그날 못 봤고?”그러자 민환의 안색이 변하더니 잠시 머뭇대다 말했다.“대표님. 수아 아가씨 잘못도 있다지만... 지금 이 상태도 나쁘지 않지 않습니까? 윤아 아가씨가 기억을 잃은 것이 어쩌면 대표님께는 더 유리한 상황이니까요.”그의 말이 끝나자 싸늘한 냉기가 그들 주위를 감돌았다.“기억을 잃은 게 나한테 유리하다? 그래서?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어디 잘못되기라도 했다면?”윤아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있을 때 선우가 그녀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누군들 가늠할 수나 있을까. 지금은 그저 기억을 잃은 것뿐이지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면 선우는 후회의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그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