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우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심윤아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약혼자?”그가 자신의 약혼자라니? 친한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와 이렇게 친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심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붉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만약 그가 정말 자신의 약혼자라면 왜 그의 접촉이 이렇게 꺼려지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 믿어?”그 말에 심윤아는 고개를 들고 이선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만 믿는지 안 믿는지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윤아야,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리 싸워서 사이가 틀어졌는데, 넌 나한테 토라진 상태였어. 그런데 기억을 잃었는데도 계속 화내고 있는 건 아니지?”“싸웠다고?”그러면 그녀가 신체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이유가 그와 싸워서란 말인가?“그래, 그만 토라져. 너 지금 병세 안정이 필요하니까. 이후부터는 내가 돌봐줄게, 응?”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윤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내 약혼자라고? 진짜야?”말을 마친 그녀는 이선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 아쉽지만 이선우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고 평범해 보였다.“뭐야, 싸웠다고 약혼자도 인정하기 싫은 거야?”심윤아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이선우 역시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심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넌 내 약혼자가 아니야.”이 말에 이선우는 마음이 뜨끔했다. 기억을 잃었는데 어떻게 약혼자가 아닌 걸 알았을까?어떻게 입을 열어 물어볼지 망설이는 순간, 심윤아가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넌 전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실로 가벼운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가벼운 한마디는 이선우의 가슴을 꿰뚫어버리듯이 날카롭게 그의 마음에 꽂혔다.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어떤 말을 해야 그에게 상
심윤아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난...”그녀는 이선우를 이렇게 대하는 게 그에게는 확실히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선우가 다가올 때면 심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피했다. 이선우의 움직임도 그녀와 거의 가까워졌을 때 멈췄다. 그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네가 지금 기억을 잃어 나한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너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줄게.”이선우는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나에 대한 감정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널 건드리지 않을 테니, 더는 내 정체까지 부정하지 말아줘. 응?” 그는 자신과 협상하는 것 같았다. 심윤아는 분명 조금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고, 물론 알 수도 없었다.“조금 있다가 음식이 오면 먼저 밥부터 먹어, 응?”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심윤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아직 배가 많이 고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거부한다 해도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제일 좋기는 가족이 곁에 있어 주는 거였다.이런 생각을 하던 심윤아가 물었다.“그런데 내 휴대폰 어디 있어?”그 말을 들은 이선우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녀가 이 상황에 휴대폰을 찾을 정도로 똑똑할 줄은 몰랐다.“네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올 때 없어진 것 같은데 못 찾았어.”“뭐?”“그때는 너를 병원에 데려오는 것만 신경 쓰느라 휴대폰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아니면... 내가 다시 사줄까?”휴대폰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가 바로 주워갔다는 말일 텐데 다시 사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럼 우리 부모님 연락처 알려줄래?”“왜?”이선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혹시 아버님께 사고 난 걸 말하려고?”“아버지?”“그래, 너 어릴 때부터
“윤아야, 밥 먹어.”조금 전 이미 그에게 대답했던 터라 심윤아는 그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왔다. 이선우는 그녀를 대신해 밥을 떠서 그녀의 앞에 가져다주었다.“여기.”“고마워.”심윤아가 밥그릇을 받자 이선우는 젓가락도 건넸다. 눈앞에 넘쳐나는 음식을 바라보던 심윤아는 결국 젓가락으로 밥을 한입 떠서 입에 넣었다. 밥은 별다른 맛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 본인의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씹는 순간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옆에 있던 이선우는 그녀가 반찬 없이 밥만 먹는 것을 보고는 젓가락을 들고 그릇에 몇 가지 반찬을 짚어주었다. 심윤아가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다.“영양이 있는 걸 먹어. 맨 밥만 먹지 말고.”“고마워...”왠지 모르게 그녀는 그가 짚어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보자 속이 무척 더부룩했지만, 억지로 입에 넣었다.“우웩...”결국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심윤아의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구역질 소리가 튀어나왔다. 손에 들린 그릇과 젓가락도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재빨리 입을 가리고 일어나 화장실 방향으로 뛰어갔다.“윤아야.”이선우는 깜짝 놀라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쫓아갔다. 심윤아는 화장실 세면대에 대고 헛구역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녀는 몹시 불편한 듯 세면대에 엎드려 담즙까지 토해냈다. 위는 텅텅 비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 계속 헛구역질만 했다. 이선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지라 그저 손으로 심윤아의 등을 두드려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에야 심윤아는 진정됐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벽을 따라 거의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이선우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들고 화장실을 나왔다.“괜찮아?”그러나 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심윤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눈을 감은 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선우는 더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어 그녀를 침
“응, 아마도.”“그럼 나중에 단호박죽 가져오라고 할까?”단호박죽?단호박죽 맛을 생각하니 심윤아는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아 승낙했다. 이선우는 곧장 나가서 고민환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고민환은 따라서 미간을 구겼다.“혹시 심윤아 씨 몸이 불편해서 생선이나 고기 같은 기름진 음식을 못 드시는 건 아닐까요? 앞으로 며칠 동안은 가벼운 식단으로 준비하면 어떨까요?”“그래, 우선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해. 먼저 건강부터 챙기는 게 좋겠어.”하지만 단호박죽을 가져온 후에도 심윤아의 식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먹다가 토하지는 않았지만,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더는 먹기 싫었다.이선우는 심윤아가 너무 적게 먹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서 심윤아가 그릇을 내려놓자, 그는 그릇을 집어 들고 죽을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어서 식히고는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윤아야, 조금만 더 먹을래?”심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가에 가져다준 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눈가에는 혐오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먹기 싫어.”“방금 너무 적게 먹었잖아. 밤에 배고플 텐데 한 입만 더 먹으면 안 돼?”심윤아는 눈을 감고 이선우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윤아야?”심윤아는 아예 몸을 돌렸다. 이선우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달래보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심윤아는 더 먹지 않았다. 결국 이선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진우진에게 전화를 걸어 심윤아가 지난 이틀 동안 뭘 먹었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돌아온 대답은 심윤아가 근심 걱정이 가득해 이틀 동안 거의 먹지 않고, 비행기에서 억지로 조금 먹었다는 것과 출발하는 날 밤에 맥주 반 컵을 마셨다는 것뿐이었다. 많이 먹지도 않고 맥주 반 컵을 마셨다는 말을 들은 이선우는 머리가 아팠다. 한밤중에 차가운 맥주를 마셔서 위가 상한 건 아닌지, 그래서 지금 음식을 먹기 싫은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혹시 위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후 이선우는 심윤아게게
‘뭐 좀 먹으라고?’그의 관심에 윤아는 마지못해 웃으며 말했다.“난 다 괜찮아.”사실 입맛이 전혀 없었는데 윤아 자신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설마... 거식증?’‘아니면 요 며칠간 기억을 잃은 탓에 좀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요컨대 이때 윤아는 선우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그리고 무언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에 초조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그러나 기억을 잃은 윤아는 이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선우의 숙소로 돌아오자 하인들이 모두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모두 긴장해서 서 있었다. 일전에 집사가 그들에게 윤아에 대한 일을 언질을 주었다. 윤아가 사고를 당하며 머리를 부딪쳐 다쳤고 이때의 기억은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선우의 약혼녀라고 말이다. 그리고 모두 윤아의 앞에서 괜한 내색을 해서는 안되고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된다며 신신당부했다.기억상실증에 걸린 윤아를 함께 속이라는 격이었다.사람을 속이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 건 모두 알지만 그들은 단지 선우가 돈을 주고 고용한 한 무리의 일꾼일 뿐이고 사건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용주는 그 많은 돈을 썼고 그들은 고용주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그들 중 윤아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윤아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선우를 좋아하지 않는지, 얼마나 대단한 여자길래 그 대단한 선우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 비열하게 차지하려 할 정도인지 말이다.윤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외모는 최고의 관심거리였다.차 한 대가 정문에서 멈추었고 운전기사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선우가 잇따라 내렸고 그대로 한쪽으로 돌아서 반대편 문을 열었다. 그는 세심하게 손을 뻗어 지붕을 가린 채 차에서 내리는 한 여자를 태연하게 감쌌다.사람들은 그의 행적을 따라다녔고 마침내 그 여자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수수하게 차려입은
이러한 횡포에 윤아는 약간 불쾌감을 느껴 선우을 올려다보며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방식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손을 뺐다.이미 차에서 내린 뒤라 선우는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그녀를 부축하러 쫓아오지도 않았다.“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세요.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해 볼게요.”선우가 떠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윤아는 하인의 뒤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하인이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간 후에 공손히 몇 마디 하고는 다시 물러났다.방에는 혼자만 남아 있었고 윤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주위의 환경이 전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마치 이곳에 처음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윤아는 비록 예전의 기억은 없지만 잠재 의식적으로 만약 자신이 실제로 이곳에 살았었다면 방금 들어왔을 때 인상이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아주 조금이나마.하지만 전에 생각하던 고통이 윤아는 조금 무서워서 더 이상 곰곰이 생각하지 못하고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침대에 눕자마자 눈이 절로 감겼다.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피곤해서 시도 때도 없이 자고 싶어 한다.아마 머리를 다친 후유증이겠지, 하고 윤아는 생각했다.그렇게 윤아는 선우가 그녀를 찾아올 때까지 잠을 잤다.선우가 문을 밀었을 때 그녀는 자고 있었고 그가 문을 밀치는 동작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윤아야.”선우가 그녀를 여러 번 밀치고 나서야 그녀는 유유히 깨어났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왜 그래?”“밥 먹어. 까먹었어? 돌아올 때 우리 약속했잖아. 집에 있는 셰프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게.”그가 이렇게 일러 주자 윤아는 비로소 생각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밥도 먹어야지.”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선우은 곧바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눈앞이 캄캄할 뿐인 윤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괜찮아. 빈혈이 좀 있는 것 같아.”‘빈혈?’그녀를 부축
그녀가 떠나자 선우는 원래 온화한 모습은 사라지고 차가운 눈으로 그 무리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이 양송이수프 말고는 더 이상 올리지 마세요.”하인들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끄덕이며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몇 마디 대답만 하였다.그 후 선우가 떠나자 그들은 참지 못하고 토론을 벌였다.“이 아가씨는 너무 시중을 들기 힘든데? 우리가 애써서 이렇게 맛있는 밥상을 만들었는데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다음부터 이 메뉴들을 올리지 말라면 무슨 다른 음식을 만들라는 거야? 오늘 이 테이블에 있는 메뉴만 수십 가지인데.”“그러니까. 대표님이 왜 이렇게 시중들기 힘든 여자를 갑자기 데려왔지?”미래의 나날을 생각하면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다.방에 돌아온 윤아는 베란다에 가서 앉았다.그녀의 방은 베란다와 이어져 있어 활짝 열려 있는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여기까지 와서도 뭔가 중요한 것을 잊은 느낌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만 너무 아팠다.윤아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 그저 탁자 위에 엎드린 채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이선우라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걸 보니 배려심이 깊어 보여. 진짜 약혼자인 것 같아.’하지만 윤아는 그를 아무리 보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녀는 나중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남자가 자신에게 구애를 하면 승낙할 것인지 진지하게 추측해 보았다.답은 ‘아니오' 였다.그래서 윤아는 자신이 그와 약혼녀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약혼녀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은 보통 남녀 친구도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기억을 다 잃었고 곁에는 선우 말고 아무도 없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여기에 머무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사색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윤아는 들었지만 일어서지 않고 못 들은 체했다.잠시 후에야 선우는 그녀 곁에 다가와 앉
선우는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고 그 좋은 말솜씨로 말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결국 모든 건 윤아가 스스로 추측하기에 달렸다.역시 기억을 잃은 윤아는 그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새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한 뒤 말했다.“아빠 말고는 우리 사이에 다른 친구는 없어? 내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자매나 베프는?”선우는 입술을 오므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있지.”“누구?”“여기 없어. 잊었어?”선우는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말했다.“잊었지, 참. 너 다친 거 잠깐 잊었네.”“...”‘농담 치곤 썰렁한데.’윤아는 협조하는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연락처는? 알려줘.”“응. 네 핸드폰 이전 내용이 복구되면 줄게.”윤아는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선우가 떠난 뒤 윤아는 혼자 핸드폰 화면을 뒤적거리며 몇 명 안 되는 연락처만 들여다봤다.그녀가 방금 입력한 아빠의 연락처 외에는 선우밖에 없었다.윤아는 자신의 성격이 안 좋아서 친구가 많이 없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성격이 아무리 나빠도 친구가 이렇게까지 없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핸드폰은 받을 때 그녀의 연락처에는 선우밖에 없었고 심지어 가족 연락처도 그녀가 요구해서야 알게 된 것이다.모든 상황이 비정상적이다.‘너무 이상해. 나한테 문제가 있거나 선우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분명.’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방금 입력한 그 연락처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선우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일부러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스스로 오해를 한 것이든 간에 이 전화는 반드시 걸어야 한다.윤아는 선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뚜뚜--전화가 한참 울렸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받지 않았다.혹시 번호를 잘못 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마침내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온화한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 여자가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