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라...이 말에 윤아는 다소 역겨웠다. 어떻게 이걸 성의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었다.윤아는 욕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 담으며 전화를 아예 확 끊어버리고는 핸드폰을 우진에게 돌려줬다.“지금 바로 사진 보여줘요.”우진은 아무 표정 없이 핸드폰을 건네받더니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을 확인한 윤아의 표정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사진 속 수현은 핼쑥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이마를 다쳤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피가 빨갛게 새어 나와 있었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윤아는 앞으로 다가가 우진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선우가 이런 거예요? 생명에는 지장 없는거죠?”우진은 그녀의 손을 힐끔 쳐다보더니 무표정으로 밀쳐내며 뒤로 물러나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윤아 님, 지금 질문하신 사항은 저도 잘 모릅니다. 알고 싶다면 직접 대표님께 여쭤보세요.”“네, 그러죠.”우진은 핸드폰을 도로 가져가더니 다시 건네주지는 않았다.“직접 물어보라면서 핸드폰을 가져가면 전화는 어떻게 해요?”“윤아 님 대표님 말씀은 만나서 직접 알려드린다는 뜻이에요.”“...”윤아는 말문이 막혔다.우진은 이렇게 말하더니 잽싸게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이를 본 윤아도 얼른 뒤를 따랐다.“그럼 우리는 언제 출발하는 거죠?”“내일이요.”“내일?”윤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더니 말했다.“지금 장난해요? 왜 오늘 가지 않고?”하지만 우진은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오늘 출발하자고 졸라댔다. 수현이 그렇게 다쳤는데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진 비서님, 진 비서님!”우진의 걸음이 우뚝 멈추더니 방 하나를 열어주며 말했다.“윤아 님, 예전에 지내던 방을 깔끔하게 청소하라고 했으니 이제 안심하고 쉬셔도 됩니다. 밖에 있는 그 꼬리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으면 빨리 물러가라고 하세요. 안 그러면 저도 진 대표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윤
민재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주의하라고 할게요. 그럼 윤아 님은...”“일단은 여기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연락할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이를 들은 민재는 윤아가 그들과 함께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윤아 님, 갇힌 건가요? 아니면...”갇힌 건가?윤아는 바깥을 힐끔 바라봤다. 우진이 그녀가 도망갈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바로 몸을 돌렸던 게 생각났다.그녀를 가둬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녀를 가둔 건 수현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었다.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때부터 이미 이곳에 갇힌 것이었다.“나를 가둔 사람은 없어요. 여기서 꽤 자유로워요.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비서님도 잘 아실 테니 일단 오늘은 돌아가서 쉬면서 단서를 찾으세요.”민재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윤아 님, 걱정 마세요. 윤아 님 분부대로 진행하겠습니다.”뚜뚜.통화를 끝내고 윤아는 핸드폰을 세면대에 올려두고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씻고 나서야 욕실의 물을 껐다.윤아는 화장실에서 나와 우진을 찾았다.우진이 별장의 어느 방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나가서 조금 걸자 바로 찾을 수 있었다.그는 계단 입구에 보초를 서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돌아서 있었기에 윤아는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고 뒷모습만 보였다.윤아는 우진이 전보다 살이 빠졌음을 발견했다.지금은 그녀를 쌀쌀맞게 대해도 전에 그녀를 구하면서 우진이 큰 대가를 치른 건 사실이었다.윤아는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진의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쳤음에도 자기를 구한 일 하나로 윤아는 우진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아마 윤아가 알지 못하는 일이 생겼으니 이렇게 변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려는데 그 자리에 꼼짝달싹하지 않고 서 있던 우진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그가 무표정으로 물었다.“윤아 님, 어디 가시려고요?”“어디 안 가요.”윤아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지만 여전히 그와
그러다 결국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향했고 냉장고를 뒤적거리는데 우진이 따라왔다. 우진이 그런 그녀를 보고는 물었다.“윤아 님, 뭐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 부르시면 되는데.”윤아는 우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차갑게 얼려진 맥주를 두 캔 꺼냈다.윤아는 맥주를 들고 위로 올라갔다.우진의 이어폰에서 대뜸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술은 주지 마요.”“네.”선우가 이렇게 대답했다. 윤아와 만난 그 순간부터 선우는 계속 도청하고 있었고 선우도 그래서 윤아를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이다.선우의 지시를 들은 우진이 즉각 반응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윤아를 따라잡았다.“윤아 님.”윤아가 걸음을 멈추더니 우진처럼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이 술은 드릴 수 없습니다.”우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주세요.”이를 들은 윤아는 손에 든 맥주 두 캔을 보더니 입꼬리를 당겼다.“왜요? 이런 것도 구속받아야 하는 건가요?”우진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그런 우진의 모습에 윤아는 피식 웃더니 맥주를 돌려주기는커녕 가지고 위로 올라갔다.우진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윤아 님.”윤아는 우진이 따라오는 듯한 기척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우진은 고작 맥주 두 캔까지 관여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관여한다는 건 선우의 지시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선우의 감시하에 있다.맥주 두 캔도 못 마시게 한다고?“선우한테 말해요. 직접 전화하라고.”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우진은 윤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다 제가 못나서 윤아 님이...”그쪽에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우진이 멈칫하더니 이내 선우가 윤아에게 전화하러 갔음을 알아채고는 잠시 도청에서 벗어난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별장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윤아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맥주캔을 딴 순간
선우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알잖아. 네가 아픈 거 내가 보기 싫어하는 거.”“그래?”윤아가 코웃음을 쳤다.“맥주 그만 마셔? 응?”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윤아가 이렇게 쏘아붙였다.“그러면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할 수 있게 해줘.”그저 차가운 맥주로 짜증을 조금 덜어내려 했는데 이걸로 선우를 협박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기회를 준 건 선우니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윤아에게 달렸다.오늘 이곳에 온 것도 선우의 협박에 못 이겨 온 것이니 말이다.선우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말했다.“오늘은 안 돼.”“그래?”윤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안 된다니 내가 마셔도 뭐라 할 자격 없지.”“윤아야, 꼭 이렇게 나랑 팽팽하게 맞서야 해?”“내가 너랑 맞선다고?”윤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난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어. 내가 만약 언젠가 너랑 맞서게 된다면 그건 모두 네가 핍박해서일 거야.”수화기 너머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그래도 오늘은 안 돼.”이렇게 말한 윤아는 더 이상 선우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더니 다시 맥주캔을 들어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한참 후, 방문이 열렸고 우진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윤아의 손에 들린 맥주를 가져가려 했다.윤아는 이를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우진이 손을 내민 순간 살짝 피했다.우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윤아 님, 시간이 늦었어요. 이제 쉬실 시간이에요. 이 시간에 술 마시는 건 안 좋아요.”“아, 잠이 안 와서 술을 먹는 건데요?”우진이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가요. 마시고 나면 바로 쉴 거예요.”하지만 우진은 원하는 바가 따로 있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윤아가 그런 우진을 힐끔 쏘아봐서야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윤아 님, 그만 마셔요. 대표님께서 지금 바로 출발하시라고 합니다.”이를 들은 윤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우진을 바라봤다.이걸로 선우를 협박하려고 하긴 했지만 그
윤아는 아까 우진과 진행한 눈빛 교환에서 대략 알아낼 수 있었다.전에 별장에 있을 때 우진이 윤아를 그렇게 차갑게 대한 건 별장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소통은커녕 눈빛 교환도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공항에 왔으니 아직도 선우의 감시가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있다고 해도 별장에서처럼 그렇게 촘촘하지는 않을 것이다.공항에서 감시하려면 사람이 감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게으름을 피우기 마련이고 카메라를 그렇게 촘촘하게 설치할 수가 없다.하지만 선우가 아직 도청하고 있으니 우진과 교류할 방법은 아예 없었다.교류는 뒤에 방법을 더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한 윤아가 입을 열었다.“아까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배가 좀 불편하네요.”이를 들은 우진이 멈칫하더니 말했다.“윤아 님, 약 준비해 드릴까요?”윤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휴지가 필요한데 있나요?”윤아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말투나 태도도 약간 차가운 편이었다. 우진은 순간 윤아가 아까 자신이 보낸 눈빛 암시를 봤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있습니다.”우진은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윤아에게 건네주며 속으로 이따 다시 기회를 찾아 윤아에게 암시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윤아가 휴지를 받아 가며 그의 손바닥에 글자 몇 개를 빠르게 적었다.처음엔 부주의로 부딪힌 줄 알았는데 부딪히고 나서도 윤아는 손을 떼지 않았고 손바닥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우진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윤아가 다 쓰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쓴 글자가 무엇인지 눈치챘다.[기다려요.]우진이 다시 그녀를 힐끔 쳐다봤을 때 윤아는 이미 휴지를 들고 공항으로 들어갔다.공항에 들어가자 바로 누군가 그녀를 맞았다.윤아가 화장실에 간다는 걸 알고 몇 사람이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따라간다는 게 말이 돼요?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죠?”이 말에 그들이 순간 얼굴을 붉혔다.“윤아 님, 그런 건
여학생의 호의에 고마움을 전하고 윤아는 화장실에서 나와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윤아는 여학생도 윤아의 뒤를 따라 화장실에서 나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여학생은 윤아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금세 포위당하는 걸 지켜봤다.“윤아 님, 이제 오셨으니 출발하시죠.”임무를 받아서 걱정이 되는지 그들은 윤아를 둘러싸고는 목적지로 걸어갔다. 뒤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여학생은 이 모든 게 너무 기괴하다고 생각했다.움직이는 틈을 타 윤아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더니 기회를 잡아 휴지를 우진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우진은 이를 느끼고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여전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앞으로 걸어갔다.탑승 전이 되어서야 그는 핑계를 찾아 화장실로 향했고 윤아가 쓴 쪽지를 쭉 훑어봤다.윤아의 질문은 많지 않았다.첫 번째는 수현의 지금 상황을 묻고 있었다.두 번째는 우진의 상황은 어떤지, 선우의 손에 약점을 잡히고 있는지 물었다.윤아의 관심에 우진은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의 고충을 알아챈 윤아는 그가 쌀쌀맞게 대해도 그를 믿어주었다.내용을 확인한 우진은 종이를 변기에 넣어 내려버리고는 무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갔다....비행기에 오르고 보니 우진의 자리만 윤아 옆으로 되어있고 다른 사람은 앞, 뒤, 그리고 오른 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중간에 윤아가 우진을 두어 번 힐끔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스튜어디스가 간식을 나눠줄 때 윤아는 우진이 그 쪽지를 봤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쪽지를 넣을 때 몰래 넣다 보니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아니면 지금 다시 눈치를 줄까?스튜어디스가 카트를 밀고 나와 마침 둘의 좌석 옆에 멈췄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우진에게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다고 알려주려는데 우진이 좌석 손잡이에 쓴 글자를 보게 되었다.쓴 글자가 간단해서 윤아는 단번에 알아봤다.[안전]윤아는 고개를 들어 우진에게 입 모양을 지어 보였고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들은 윤아는 그
윤아가 해명하려는데 수현은 아예 수액을 빼버리더니 병실을 나섰다. 윤아가 다급하게 쫓아 병실에서 달려나가 보니 어느새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곳저곳 숨이 차오를 정도로 찾아 헤맸지만 끝내는 찾지 못했다.그 뒤로도 여러 곳을 찾다가 수현의 뒷모습과 꼭 닮은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리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수현의 뒤에 그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른 여자와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수현과 결혼한 그 여자는 하윤과 서훈을 모두 집에서 쫓아내며 이렇게 말했다.“어디서 굴러온 미천한 여자지? 밖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돌아오면 진씨 집안 사모님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나 봐요? 김칫국도 유분수지, 화내기 전에 얼른 멀리 떨어져요. 아니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두 아이는 윤아를 안고 엉엉 울며 아빠를 찾았고 이에 윤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해 가지 않았다.얼른 해결하려는데 손발이 누군가에게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 처지가 마치 뜨거운 가마 위에 올려진 개미와도 같았다.“윤아 님, 윤아 님.”멀리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가 조금 익숙했지만 순간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부름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윤아 님!”그렇게 윤아는 잠에서 깨 눈을 떴고 시야가 또렷해졌다.혼란스럽던 장면과 울음소리도 동시에 사라졌고 우진의 긴장과 걱정이 섞인 얼굴과 두 스튜어디스가 보였다.이런 윤아의 모습에 놀랐는지 윤아가 깨자마자 둘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깼어요, 깼어요. 괜찮으세요?”그중 한 스튜어디스는 걱정 어린 말투로 물으며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밝아진 시야와 주변을 에워싼 사람을 보고 있자니 윤아는 그제야 아까 그 장면들이 꿈임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지금은 꿈에서 깼다.꿈이란 걸 깨달은 윤아는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 하지만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윤아는 몸과 마음이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고 지금 그 긴장이 가시면
그는 목소리를 매우 낮게 깐 채 다른 쪽을 닦아줄 때 거의 들릴 듯 말 듯하게 이렇게 말했다.윤아는 원래도 마음이 불안했기에 이 말을 듣고도 그저 살며시 눈만 깜빡이고는 우진을 올려다보았다.우진은 윤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는 손을 거두었다.그러고는 둘 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실 아침에 우진이 윤아에게 수현은 무사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지금 낮은 소리로 상황을 전달해 줘도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그 사진이 윤아에게 준 충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그리고 아마 금방 꿈을 꾸고 나서 그런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고 꿈이라고는 하지만 꿈속의 일이 현실로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피곤한 듯 심호흡을 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비서님, 혹시 악몽 꾼 적 있어요?”그녀가 입을 열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우진도 윤아가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뒤로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진은 그런 윤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윤아 님, 꿈은 반대라고 했어요. 지금 윤아 님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니 꿈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때요? 곧 도착할 것 같은데.”옆에 앉은 사람들은 둘의 대화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윤아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다들 보았기에 내심 많이 놀랐을 것이다.우진이 윤아를 위로하는 걸 들은 선우 쪽 사람들은 반대하기는커녕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그래요, 윤아 님. 꿈은 반대니까 안 좋은 꿈을 꿨으면 현실에서는 좋은 일만 일어날 거예요.”“맞아요, 맞아요. 저도 어릴 때 자주 악몽을 꾸고는 했는데 그때는 학업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어서 그랬어요. 조금 쉬고 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악몽은 그냥 그때만 무서울 뿐이에요.”다들 우진과 합세해 윤아를 다독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우진은 쌔근쌔근 잠든 윤아를 보고 그제야 한시름 놓았고 다른 사람들도 걱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